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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安恭根)
1派30世-참판공파
독립운동가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안공근(安恭根)
안공근(安恭根) 1889 7. 11~1940년대 이명:서이로(西利潞)・삼재(三才)・신암(信奄)・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황해도 신천(信川)사람이다. 1909년 당시 평남 진남포보통학교(鎭南浦普通學校)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던 중, 그 해 10월 그는 친형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사직한 후 형 안정근(安正根)과 함께 여순(旅順)으로 갔다. 그 후 1919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 밀파 외교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다시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러시아의 후원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이동휘(李東輝)・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레닌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군자금 잔액 140만 루불을 교부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2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의정원(義政院) 황해도 의원, 1926년 2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의 뒤를 이어 중국 상해한인교민단장(上海韓人僑民團長)으로 임명되어 상해지역 한인들의 인권 보호와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 후 1926년 5월 상해에서 이유필(李裕弼)・최창식(崔昌植)・오영선(吳永善)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결성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휘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론은 1926년 10월 중국 북경지역의 대독립당조직촉성회(大獨立黨組織促成會), 1927년 4월 상해지역의 전민족독립당(全民族獨立黨)을 결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홍남표(洪南杓)・정백(鄭栢)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자파 중심으로 조직할 것을 선언하자, 참석을 거부하였음에도 전민족독립당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재상해(在上海) 대표격으로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한 것을 비롯하여 1935년까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937년까지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주로 친일분자의 암살・처단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박찬익(朴贊翊)・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친일행각을 벌이는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장(上海韓國人親友會委員長) 유인발(柳寅發)과 옥관빈(玉觀彬)의 처단을 주도하였고, 1935년 3월에는 흑색공포단원(黑色恐怖團員) 엄순봉(嚴舜奉) 등에게 상해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고문(顧問)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도록 지시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이와 함께 1934년 1월부터는 한인애국단원들과 함께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이청천(李靑天) 계열과 합동으로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분교에 한인군관학교(韓人軍官學校)를 설치하여 독립군 40여 명을 양성하였다. 또한 1937년 8월에는 한국국민당 당원들을 대동하고 중국 상해로 잠입하여 친일파 한국인・중국인의 암살을 기도하는 한편, 중국측 편의대(便衣隊) 본부와 함께 중국 각지에 산재한 항일신문사(抗日新聞社)를 방문하여 한중연합(韓中聯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2월 그는 장남 안우생(安偶生)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한국애국단(韓國愛國團) 대표로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 등 5개 단체, 중국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등 8개 단체와 연명(連名)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동월 17일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조직하여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상임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이래 1940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35~37.
안공근 [安恭根]
1889(고종 26)∼?. 독립운동가. 이명은 신암(信奄)·서리로(西利潞)·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안중근(安重根)의 동생으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이다. 1909년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사직하였다.
1919년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밀파외교원에 선정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선임,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議政院)의 황해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0년 12월에는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上海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으로 선임되고, 1926년 2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상해한인교민단장(上海韓人僑民團長)에 임명되어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조상섭(趙尙燮)·최창식(崔昌植)·이유필(李裕弼)·오영선(吳永善) 등과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을 달성하려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김구(金九)의 주도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후 한국독립당의 간부 겸 김구의 심복으로 상해에 근거를 두고 항주(杭州)와 남경(南京)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2월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의 별동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폭탄의거를 계획하였다. 1933년에는 친일분자 옥관빈(玉觀彬)의 처단에도 관여하였다.
1934년 낙양에 설립된 낙양중앙군관학교(洛陽中央軍官學校)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義烈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개 단체 대표가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계열과 김원봉(金元鳳) 계열이 갈등을 빚어 민족혁명당이 분열되자, 1936년 김구 등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해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안우생(安禹生) 등에게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도록 하였으며, 7월 임시정부를 중경(重京)·곤명(昆明)으로 옮기면서도 대일항전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청년단(韓國靑年團)·한국청년전위단·한국애국단(韓國愛國團)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한편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지·발전에 기여하여 1936년 상임국무위원(常任國務委員),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의정원(議政院) 황해도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안공근(安恭根)선생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 대련에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갔고,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브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1920년 1월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러시아 외교특사로 선정되었고 1921년 7월 임시정부 최초의 러시아대사가 되었으며 1921년 4월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어 1922년 초 모스크바에서 이동휘,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활동을 벌였다.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촉성회, 한국독립당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안창호가 주도한 민족통일운동인 유일당운동을 적극 지지하였고, 암살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팔인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백범 김구선생은 일제 요인과 시설에 대한 암살과 파괴를 주요 임무로 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에 선생은 한인애국단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프랑스 조계에 있는 선생 집을 본부로 하여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을 진행해 나갔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로 한인애국단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1934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을 거느렸고, 1934년 12월 한인특별반의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관리와 운영을 도맡아 처리하였으며 1936년 이후에도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특무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의 평생에 걸친 독립운동을 특징짓는 것은 특무공작이다. 선생은 20대 중반에 둘째형을 도와 일제밀정을 처단하였고 30세에 노령 우수리스크 일대의 결사대원들에게 제공할 무기를 구입하여 산속에 숨겨놓기도 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반에 김구선생과 함께 이봉창의거와 윤봉길의거를 엮어낸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1939년 5월 30일 중경에서 홀연히 실종되었다.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장렬히 생애를 마감한 것으로 판단된다. 선생의 항일투쟁을 기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공근(安恭根)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 공근 입력 2008.7.15. 조광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한국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혈족을 중심으로 해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는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李相龍)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안정근과 그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 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安定根, 시릴로)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시릴로, 1885-1949)은 안중근의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그들 사이에는 안원생(安原生) ‧ 안진생(安珍生) 두 아들과 안미생(安美生) 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 및 모친과 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독립신문>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2남 4녀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두 아들 안원생(安原生)은 샹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安珍生)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그의 차녀 안미생(安美生)은 중국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 자녀들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1940?)이다. 그는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샹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그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중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샹하이 침공과 유봉길의 의거로 인해 1932년 샹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와 처자식 및 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해방후 경교장에서. 오른쪽부터 김구의 비서였던 安偶生, 白凡 金九, 金九의 자부(金仁의 부인) 安美生, 張佑植 안공근에게는 안우생(安偶生)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이때 광뚱에서 발발했던 하룡(賀龍)과 섭정(葉挺)이 주도했던 공산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에는 님 웰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을 비롯해서 40여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한 바 있었다. 이 폭동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안우생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피해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후일 김구의 영문비서가 되어 해방 조국에서 봉사하다가 김구가 암살된 직후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과 함께 홍콩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안공근의 둘째 아들은 안낙생(安樂生)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결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안공근의 사위 가운데 하나가 한지성(韓志成)이었다. 한지성은 장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43년 쯍찡에서 사촌 매부인 안원생이 총간사로 있던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에 취임한 바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가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9‧28때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한편, 안중근의 일족 가운데는 북한에서 활동했던 경우도 확인된다. 즉, 안공근(安恭根)의 맏아들인 안우생(安偶生)은 김구가 암살된 이후 홍콩을 거쳐 북으로 들어가 살다가 1992년 평양에서 사망하여 평양의 통일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우생은 장녀 안기애와 기철, 기호, 기영의 세 아들을 두었다. 안우생의 장녀 안기애는 1965년경 북한 과학원 출판사 편집부에 수학전문가로 배치되어 일했다. 그의 장남 안기철은 제주도 유격대장이었던 김달삼의 딸과 결혼하여 장모와 함께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차남 기호는 전쟁 중 홀로 된 고모와 함께 부친을 모시고 평양 신원동 간부 사택에서 살았다. 셋째 동생 기영은 평양 정권의 부주석을 역임한 김병식의 사위가 되었다. 남은 말 안중근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우들은 안중근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신고의 길 위에서 땀과 피를 아끼지 않으며 해방의 그날을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신병을 얻었거나 암살의 비운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좌우로 대립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나가고자 했다. 그들의 염원은 좌나 우가 아닌 대한독립에 있었다. 안중근 가문이 없었다면 일제하 천주교도의 독립운동은 매우 미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훈도를 받은 그의 동생들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해방이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과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범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안중근 형제들의 독립운동은 우리 교회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08.7.15. 조광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이름 | 안공근 ( 安恭根 ) | ||||
민족구분 | 한국인 | ||||
이명 | 1) 西利潞, 安三才, 趙漢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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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 1889-07-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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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1) 黃海道 海州郡 錦山面 崔川洞(본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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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1) 上海 및 南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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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기타 | 1) 安重根(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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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및활동 | 1) 1908년 8월 진남포 보통학교훈도로 봉직하던 중 실형인 安重根사건이 발생하자 상해로 도주했다. 반일단체에 투신하고 임시정부 民團長및 南華한인청년연맹원으로서 동지와 함께 활동하던 중 1933년 4월 상해폭탄사건이 발생하자 검거될 것을 우려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후 정보에 따르면 남경및 상해에 잠복하여 김구 및 그 외 동지와 연락을 취하며 흉포한 계획을 세워 활동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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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용의조선인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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