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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9
창세기 32:1-12
마하나임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였으나 라반과 언약을 맺는 것을 통해 한시름 놓게 되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러하였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일을 통해 야곱에게 하나님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과 라반의 집을 완전히 분리시키신 과정을 31장에서 보여주셨다. 그러나 야곱의 입장에서는 에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절). “길”이라는 말의 ‘데레크’에는 ‘길, 도로, 여행, 여정, 태도, 방식’이라는 뜻이 있다. 야곱이 가는 길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언약의 땅을 향해 이끌어 가시는 믿음의 여정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끌어 가고 계셨기에 야곱이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신 것이다.
“만난지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파가’는 ‘만나다, 마주치다, 도달하다, 중재하다, 탄원하다’라는 뜻인데 여행 중에 어떤 장소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기 위해 야곱을 이끌어 벧엘에 이르게 하셨다는 그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곳으로 이끌어 오셨고 하나님께서 만나야 할 의도적인 자리에 도달하였다는 뜻이다. “사자”라는 말의 ‘말라크’는 ‘사자, 사신, 천사’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를 띠고 보내심을 받아 소식을 전하는 하늘의 존재나 선지자를 지칭한다.
11 한 곳에 이르러는(파가)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말라크)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1-12)
야곱 가나안 땅이 가까워질수록 형 에서가 어떤 자세를 취할지 심히 불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군대를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란을 향할 때 벧엘에서 만나신 것을 상기시키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그 대로 이끌어 가고 계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였는데 “군대”라는 말의 ‘마하네’는 ‘진영, 군대’라는 뜻이다. 군대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전쟁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마하나임”은 ‘마하네’의 쌍수로 ‘두 진영’인데 이는 단순히 수적으로 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 쌍으로 하나 같은 둘이라는 의미이다.
19 이스라엘 진(마하네)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말라크)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마하네) 이스라엘 진(마하네)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 14:19-20)
따라서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이루어 가실 언약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즉 야곱이 이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고향 땅으로 가게 하시는 차원이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야곱이라는 개인이 국가 이스라엘로 바뀔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명명될 것이기 때문이다(출 12:41). 그러기 위해서 먼저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야 한다.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3-5절). “세일”의 ‘세이르’는 ‘거칠은’이라는 뜻이고, “에돔”은 ‘붉다’라는 뜻이며, “들”은 ‘들, 밭, 전원, 토지, 땅’이라는 뜻이고, “에서”는 ‘털 많은, 거친’이라는 뜻이다. 에서를 이렇게 소개한 것은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언약과 상관없다는 것은 율법에 매여 있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겉사람으로 있다는 뜻이다.
“앞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얼굴’이라는 뜻을 지닌 ‘파님’이다. 즉 사자들을 보내어 에서의 얼굴을 대면하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야곱이 에서에게 사자를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야곱을 대면한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서가 율법에 매인 자로 있었다면 야곱 역시 아직 율법에 매인 자로 에서와 같은 상태임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곱이 에서에게 “내 주 에서에게 … 주의 종 야곱”(4절),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절)라고 표현한 것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주”라는 표현은 ‘아돈’인데 ‘주, 주인, 소유주’라는 뜻으로 ‘아도나이’와는 구분되어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대를 높이는 표현이다(18:12, 19:2, 24:9 등).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서 언약과 상관없는 자와 언약 안에 있는 자, 곧 겉사람과 속사람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야곱은 율법에 매인 에서를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통해 겉사람에 머물러 있고 그 겉사람의 상태에서는 언약의 땅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5절)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언약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나타낸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벧엘에서 하신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증거물이다. 그래서 28장에서 하신 언약을 계속 반복 강조하여 보여주셨던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창 31:3)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창 31:42)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절). “사백 명”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에서가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야곱의 소식과 거취를 모를 리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얼마든지 야곱을 찾아내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4’는 땅의 네 방향을 뜻하는 땅의 수이고 ‘100’은 완전함을 나타낸다면 측면에서 에서는 땅적 존재로 땅의 것에 완전히 매여 있다는 의미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7-8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하였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존재로 언약의 아들로서 온전한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온다는 말에 두렵고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언약의 아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시는 생명을 이루시는 언약이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4-17)
“두 떼로 나누고”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마하네’이다. 문자적으로 보자면 유목민들이 위험에 직면할 때 가축을 몇 떼로 분산시켜 희생을 최소 한도로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적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은 ‘마하네’라는 말로 하나님의 진영을 이루셨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영은 은혜의 증거물이다. 그래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라고 말씀하였는데 겉사람이 죽어 속사람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래서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9-10절)라고 고백한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간구이다.
“지팡이”란 ‘막켈’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31:39에서 “가지”(막켈)를 세워 양 떼를 얻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라는 표현은 한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죽음 안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두 떼”(히, ‘마하네’)를 강조한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절).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구별하고 분리하셔서 율법이 문자와 행위로 의를 이루는 겉사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였는데 “처자들”이(히, ‘엠 알 바님’)라고 번역한 말은 ‘엠’(어머니)은 단수로, ‘벤’(아들)은 복수로, 그리고 ‘알’(~위에, ~에 대해, ~의 곁에, ~에 관하여, 위쪽의)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직역하면 ‘아들들 위에 있는 어머니’라는 말이다. ‘엠’은 알파벳 ‘알렙’과 ‘멤’인데 ‘알렙’은 ‘하나님’, ‘멤’은 ‘진리’를 뜻한다. 즉 하나님의 진리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에서로 말미암아 율법적 행위가 위협하고 들어오면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아들들이 무너진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에 호소하는 간구를 야곱이 하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절).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야타브 야타브’라고 표현하였는데 ‘선하다, 좋다, 즐겁다, 잘하다’라는 뜻을 두 번 강조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이다. 그 이유는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셔야 되기 때문이다.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는 이미 앞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언약의 한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지만 그 안에 모래와 같은 많은 존재를 통해 고통이 주어지는데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온전히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님의 군대로 나타나셔서 전쟁을 하시겠다는 것은 에서와 야곱의 화목을 통해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야곱과 하나님이 두 진영으로 따로따로 있던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전쟁이다(202410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