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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6권(卷之 六) 소(疏)
利病二十六事條陳疏
이롭거나 병폐가 되는 26가지 사안을 아뢰는 상소문[1] 4/4
[1]이롭거나……상소문 : 이 소장(疏章) 전문(全文)은 《연산군일기》1년 5월 28일 기사에서 옮겨 실은 것이다. 이병사(利病事)란 이해(利害)가 걸린 일이란 뜻이다.
<3/4에 이어 계속>
其十九曰 革寺田 以充學田 革重臺 以阜殘邑
열아홉째, 사전(寺田)을 혁파하여 학전(學田)에 충당하고, 중대(重臺)를 없애서 피폐한 고을을 번영시켜야 합니다.
先王 欲興學校 嘗給學田 州府郡縣 皆有正數 而無田可充 徒爲虛文 太宗 頓革寺社田 後復滋蔓
선왕(成宗)께서 학교를 일으키고자 하여 일찍이 학전(學田)을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 주었는데, 다 정한 면적이 있으나 충당할 토지가 없다 보니 한갓 빈 문서가 될 뿐입니다. 태종께서 사사(寺社)의 토지를 대번에 없애 버렸지만 그 뒤에 다시 차차 불어났습니다.
臣願殿下 體先王之意 法太宗之斷 盡革寺田 充學田 且裨補之說 實祖道詵 誠爲荒唐 臣願所在禁材 非禦水患 一充學田 使佃之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뜻과 태종(太宗)의 과단성을 본받아 사전을 모두 혁파하여 학전으로 충당하소서.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도움을 받는다는 말(裨補說)은 사실 도선(道詵)에서 시작된 것으로 참으로 황당합니다. 신은 원컨대, 재목 벌채를 금하는 구역 안에 있거나, 수해를 막기 위한 곳이 아닌 사전은 일체 학전에 충당하여 경작하게 하소서.
古人稱奴之奴曰 重臺 今之公私賤 有訟奴婢 盡屬邑校之殘者 而一禁重臺 此議一出 怨謗必興 然元是天民 在殿下處分 豈係其高曾
옛날 사람들은 종의 종을 중대(重臺)라 불렀습니다. 지금 공사천(公私賤) 중에 소송에 걸린 노비들은 모두 쇠잔한 읍(邑)의 향교로 소속시키고, 중대를 일절 금해야 합니다. 이런 의견이 한번 나오면 원망과 비방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들도 원래는 하늘이 낸 백성인 만큼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고조(高祖)나 증조(曾祖)에 매인 것이겠습니까.
僧道 絶世出家 宜守淸淨 而校行則非 名爲住持者 坐收官租 假托祝上 而無益聖壽 他如妖僧猾衲 占奴婢營田産不一
승려의 도(道)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으면 마땅히 마음을 깨끗이 가져야 하는데, 행실을 따져 보면 바르지 않습니다. 주지 노릇 하는 자가 가만히 앉아서 관청의 조세를 받아먹기도 하고 임금의 성수(聖壽)를 축원한다고 핑겨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없으며, 여느 요망하고 교활한 중들은 노비를 차지하고 토지를 경작하는 등 비행이 한둘이 아닙니다.
當此國恤 民努吏悴 而若不聞焉 官籍其田歸公 而痛禁僧道之臧獲
나라에 큰 금심이 생겨 백성들은 피로하고 관리들은 녹초가 되어도 중들은 못들은 척하니, 마땅히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공유재산으로 귀속시키고 중들의 노비 소유를 금지하소서.
其二十曰 用文官 以鎭倭奴
스무째, 문관(文官)을 등용하여 왜적(倭敵)을 진압해야 합니다.
人皆憂北 我獨憂南 臣見倭奴之情 日驕月曼 旣爭魚箭 而又劫熊川 近過忠州 責辨宴享 以爲 汝國有喪 我主無恙 臣聞之 不勝痛憤
사람들은 다 북쪽의 오랑캐를 걱정하지만 신은 홀로 남쪽 왜적을 걱정합니다. 신이 왜적의 실상을 살펴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여 이미 어전(漁箭)을 쟁탈하고 또 웅천(熊川)을 위협한 바 있으며 근래에는 충주(忠州)를 지나면서 연향(宴享)을 마련하라고 재촉하며 “너희 나라는 국상이 났지만 우리 임금은 무사하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통분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其初 良由邊將失人 貪饕無狀 或受其賂 以屈邊威 而其通事 特無賴一船軍耳 心與虜通 沿途縱臾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애초에 변장(邊將)을 잘못 기용한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탐욕을 부리고 간혹 뇌물을 받아서 변방의 위엄이 꺾이었고, 통역하는 자는 특히 믿을 수 없는 일개 배꾼(船軍)으로서 오랑캐와 내통하고, 연도에서 왜노들을 꼬드깁니다.
倭奴一不滿意 必訴於禮祖 禮祖又信之 啓推州官 州官 供應之唯謹 而驕慢益甚
왜노가 불만이 있으면 꼭 예조(禮曹)에 호소하는데, 예조에서는 그 말을 믿고 주관(州官)을 추궁하도록 보고하니, 주관은 접대하는 데 더욱 애쓰게 되고, 왜노들의 교만은 더욱 심해집니다.
臣願自今 倭奴有訴 則禮官 和言應之 勿復啓推州官 重迅通事 斬其尤者 先是 屆內臣 諭治不恭之虜 而若不聞也 我何苦 獨信其訴 治我臣僚哉
신은 원컨대, 이제부터 왜노가 호소하는 일이 있으면 예관(禮官)은 좋은 말로 응대하여 다시는 주관을 추궁하도록 아뢰지 못하게 하고, 통역자를 엄중히 문초하여 심한 자는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이보다 먼저 내신(內臣)을 보내어 공손치 못한 오랑캐를 타이르게 해야 합니다. 만약 듣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거려 유독 그들의 호소만 믿고 우리의 신료들을 치죄한다는 말입니까.
薺浦釜山鹽浦蔚山東萊熊川此六鎭 最宜擇人 先王 選能射文官 名爲將來將帥者 無慮卄餘人 坐老少官 將安用之
제포. 부산. 염포. 울산. 동래. 웅천. 등 육진(六鎭)에는 가장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왕께서는 활 잘 쏘는 문관을 선택하여 장래 장수 재목이라고 지명하신 자가 무려 20여 인이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늙어 가는 젊은 관료들을 장차 어디에 쓸 것입니까.
臣願不拘資格 歷試此輩 能鎭虜心 則不次賞之 我光陵 賞以李克均爲滿浦僉使 卒大用 爲今之重臣 此祖宗 故事也
신은 원컨대, 품계에 구애받지 말고 이런 사람들을 두루 시험하여 능히 오랑캐의 마음을 눌러 놓는 사람에게는 서열을 가리지 말고 표창하소서. 우리 세조(世祖)께서는 이극균(李克均)을 기리어 만포 참사(滿浦僉使)로 삼았는데, 마침내 크게 써서 오늘의 중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조종(祖宗)의 고사입니다.
人之血氣 不能不衰 孔子亦有 吾衰之嘆 況弓馬之藝 盛年過 則不可用矣
사람의 혈기는 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공자도 “내가 쇠하였구나!” 하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더구나 궁마(弓馬)의 기예(技藝)는 한창때를 지나면 소용이 없습니다.
其卄一曰 汰虜候 而復評事
스물한째, 우후(虞侯)를 없애고 평사(評事)를 다시 두어야 합니다.
自古 處匪類於塞內者 未有不受其禍 令急之 則亂作 緩之 則日盛 未知所處之術
예로부터 비적(匪賊)을 변경 안에 두고서 화를 받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을 급하게 몰아붙이면 난을 일으킬 것이요, 너그럽게 대하면 날로 번성할 것이니, 처리할 방책을 모르겠습니다.
臣聞 倭中奴婢 舊得買賣 今許吾民 買入內地 列於編氓 亦消弱之 一策也 邊民 如或乘時殺戮 以滅其迹 勿復生擒 以受李烈之辱 亦可也
신이 들으니, 왜인들 가운데서 노비를 매매할 수 있었다 하는데, 이제 우리 백성에게 내지로 사들일 수 있도록 허락하여 백성들 축에 끼워 넣는다면 역시 약화시키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변방 백성들이 혹시 기회를 타서 살해하고 그 자취를 없애 버리면 다시 붙잡아서 이열(李烈)과 같은 욕을 보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臣謂 南虜漸大 規畫處置 將不得不 不可也 書記 古也 而文武交差 今法也 臣願 汰虜候 而復評事 爲便
신의 생각으로는, 남쪽 걱정이 점점 커지는데 처리할 계책을 세우려 해도 장수를 보좌할 자가 없으면 불가합니다. 서기(書記)를 두는 것은 옛 법이고,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파견하는 것은 지금 법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우후를 없애고 다시 평사를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其二十二曰 責留鄕 以礪風俗
스물두째, 유향소(留鄕所)[41]에 책임지워 풍속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41]유향소(留鄕所) : 조선 시대 지방 군현(郡縣)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로 구성하고 지방자치에 활용하였다.
國家於留鄕 建革不一 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令 所不及知之善惡 皆得以糾擧也 有古閭師族師之遺意焉
나라에서 유향소를 두었다 없앴다 한 것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분분하였는데, 선왕께서 기어이 두신 것은 궁벽한 촌이나 동떨어진 시골에서 감사나 수령이 미처 알지 못하는 잘잘못을 규찰하자는 것으로서, 옛날 여사(閭師), 족사(族師)[42]와 같은 취지를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42]여사(閭師), 족사(族師) : 둘 다 주대(周代)의 관직명인데 지방관에 예속되었다.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私 徵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飮養老等禮 所以別淑慝 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 慢不擧行
지금은 다만 향리(鄕吏)를 상대로 그들의 비위를 적발하여 속죄금이나 받아 내고 마는 한갓 놀음에 지나지 않고, 시골 풍속에 대해서는 전혀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향사례(鄕射禮). 향음례(鄕飮禮). 양로회(養老會) 같은 의식은, 착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가려내고 예의와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으로서 법에도 밝혀져 있으나 속리들이 태만하여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臣願 三年之後 以此等事 責留鄕 以時告守令 而行之
신은 원하옵건대, 3년 후에 이런 일을 유향소에 책임을 지워 수시로 수령에게 보고하고 시행하게 하소서.
凡一鄕之人 無問貴賤 孝友睦姻 一善可紀者 齒之 其惡者 不齒 善之大者 告守令報監司 以旌異之 惡之大者 亦報監司 用周制移遂移郊之法 如干名敎 但犯杖以上 皆充入居
무릇 한 고을 사람이면 귀천을 따지지 말고, 효성과 우애가 있고 인척들과 화목하는 데 한 가지라도 평가할 만한 좋은 점이 있으면 사람은 축에 넣어 주고 몹쓸 점이 있는 사람은 축에 넣지 말며, 크게 착한 사람은 수령에게 알리고 감사에게 보고하여 표창하고, 크게 나쁜 사람은 간사에게 보고하여 마을 밖으로 좇아내던 주(周)나라 법을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만일 인륜 도덕을 어길 경우 장형(杖刑)이상의 죄를 범한 자는 모두 북방에 이주시켜야 합니다.
勒令入居 只取富貴 元無一罪 何惜有罪者乎 憲府 督責京在所 交察鄕風 鄕員有不擧職者 則痛治 亦化民成俗之一端也
명령에 의거해 이주한 사람들은 단지 그 지방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어서 본디 한 가지 죄도 없었는데, 죄가 있는 자들이야 어찌 애석하게 여기겠습니까. 사헌부(司憲府)에서는 경재소(京在所)[43]에 독촉하여 향풍(鄕風)을 살피게 하고, 유향소의 향원(鄕員) 중에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43]경재소(京在所) : 조선 초기 지방 관청이 서울에다 설치하였던 출장소로, 중앙 관청과 관계되는 일을 처리하는 한편 지방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其二十三曰 置稅倉 納稅之所
스물셋째, 세창(稅倉)을 납세(納稅)하는 곳에 두어야 합니다.
民天國脈 所係匪輕 先朝 嘗欲置可興稅倉 瓦材已具 而中止 露積稅糧 架木結籬 遠民受害 近民射利 其弊 不可一二言
양식(糧食)은 백성들의 하늘이요. 나라는 명맥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선왕 때에 일찍이 가흥세창(可興稅倉)을 설치하고자 하여, 기와와 재목을 이미 갖추었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조세로 받은 양곡은 노적하여 나무로 얽어 울타리를 쳤습니다. 먼 곳의 백성들은 손해를 입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은 잇속을 노리니 그 폐단은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而今年著令 勿許私主稅吏 尤無所庇 負欠必多 以可興 而諸道亦可類推 臣願待有年 皆置倉繚垣 以防偷盜 以備雨潦
그런데 올해에는 법으로 그것마저 못 하게 하니 사주(私主)[44]와 조세 받는 아전이 더욱 보호를 받지 못해 축나는 것이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가흥(可興)의 예로 미루어 보아 다른 도의 경우도 또한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은 원컨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모두 창고를 짓고 담장을 둘러쳐서 도둑을 막고, 장마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44]사주(私主) : 납공자(納貢者)를 대신하여 공물(貢物)을 바치고, 납공자에게 배징(倍徵)하던 사주인을 가리킨다.
其二十四曰 革其人 業郵卒
스물넷째, 기인(其人)[45]을 없애고 역졸(驛卒)들의 생업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45]기인(其人) : 본래 고려 시대의 제도로 향리(鄕吏)의 자제를 뽑아 서울로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에 관한 고문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 후 여러 번 제도의 변경이 있다가 조선에서도 이 제도를 실시하였으나 나중에 땔나무와 숯을 상납하는 사람으로 변한 적이 있다.
舊俗相因 積弊亦多 鄕吏其人 自前朝有之 吏之傾家破産 莫不由此 吏亦民也 炭木之貢 宣別規畫 可也
옛 습속(習俗)이 답습되어 쌓인 폐단 또한 많습니다. 향리(鄕吏)의 기인 제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아전들의 집안이 기울어 파산하는 것은 모두 이 기인 제도 때문입니다. 아전도 백성인 만큼 숯과 땔나무를 공물(貢物)로 마치는 것도 마땅히 따로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郵卒之逐年入居 挈家負鼎 勞頓往來 咨怨盈路 因入居相輪之故 居者亦歲更一馬 今年盡賣田産 而明年復賣之 其役最苦 而其生可憐
역졸을 해마다 북쪽 변경으로 이주시키는 통에 가족을 이끌고 솥을 지고 수고스럽게 오가니 그 원망이 길에 넘치고 있습니다. 이주는 서로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그냥 있는 사람은 해마다 말 한 마리씩 바꾸어 들여 세우느라 전답의 금년 소출을 모두 팔고 이듬해에도 또 팔게 되니, 그 직무는 가장 고되고 그 생활은 불쌍합니다.
臣願 察三道各驛人物之多寡 而量入京畿住著 勿還立馬 亦勿逐歲紛更 以業郵卒可也
신은 원하옵건대, 삼도(三道)의 각 영착(驛站) 인원수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경기(京畿)에 적당한 수를 들여 정착시키고 돌려보내지 말 것이며, 말을 들여 세우는 것도 혼란스럽게 해마다 바꾸지 말게 하여 역졸들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겟습니다.
其二十五曰 復嫁良之法 以敷良民 立奴婢之限 以簡私訟
스물다섯째, 양민(良民)에게 출가하는 법을 회복하여 양민을 늘리고, 노비에 대한 소송 기한을 정하여 사사로운 송사를 간소화해야 합니다.
子之從父 天之經地之義 古今不可易也 高麗忠烈王 始令賤者隨母 然祖宗之朝 猶有嫁良之法 未盡從母也
자식이 아버지 쪽을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의 법칙이요 이치이니 예나 지금이나 바꾸지 못합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처음으로 천인을 어머니쪽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오히려 양민한테 출가하는 법이 있어 다 어머니 쪽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今賤女 嫁良夫之子 則從母也 良女 嫁賤夫之子 則不從母也 其法甚曲 其歸 不過多奴婢耳 議者以爲 從父則難明 而從母則易辨 是大不然
지금은 천인 여자가 양인 남자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은 어머니 쪽을 따르고, 양인 여자가 천인 남자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은 어머니 쪽을 따르지 않는데, 이 법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서 그 결과는 노비를 많이 만들어 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버지 쪽을 따르면 분간하기 어렵고 어머니 쪽을 따라야 쉽게 가려낸다.”하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豈有良女從賤夫 獨能辨夫 而賤女嫁良夫 獨不可辨 只在夫之定不定 不在良賤
어찌하여 양녀(良女)가 천인 남자에게 출가한 경우에만 유독 남편을 가려 낼수 있고 천녀(賤女)가 양인 남자에게 출가한 경우에는 남편을 가려낼 수 없단 말입니까? 그것은 남편이 정해져 있는가 없는가에 달린 것이지, 양인인가 천인인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臣嘗聞 中州勿問貴賤 皆從父 而唯行院 則從母 娼妓無定夫 如行院之無定主 故謂之行院
신이 이전에 들으니, 중국에서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아버지 쪽을 따르며 행원(行院 창기(娼妓))만은 어머니 쪽을 따른다고 하였는데, 창기는 임자 없는 객줏집처럼 정한 편이 없기 때문에 행원(行院)이라고 하였습니다.
今良女之出 良夫之生 皆爲奴婢 而良民日少 軍額不數 當三國分裂之時 各擁十餘萬兵 我國家統三 而見兵僅十萬 無也 奴婢多也 他不可爲也 臣願 復祖宗嫁良夫之法 以敷良民
지금은 양녀가 천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나 천녀가 양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나 다 노비로 만드니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들고 군병(軍兵)의 수효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삼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는 각기 10여 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삼국을 통일한 현재의 군사가 겨우 10만밖에 안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노비가 많기 때문이며 달리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신은 원컨대, 양인 남자에게 출가시키는 조종(祖宗)의 법을 회복하여 양민을 넓히게 하소서.
國家於田地 以立五年之限 而奴婢 則丁酉一限 不可通用 告狀後 五年之法 亦未盡該 先王亦厭詞訟 嘗立斷訟都監以斷之 而終不能斷 所以然者 法使之也
나라에서 토지에 대해서는 5년으로 기한을 정하고 노비에 대해서는 정유년(1417, 태종17)에 한번 제한한 바 있었으나 그 법이 통용되지 못했고, 소장을 낸 뒤 5년 동안으로 정한 법 또한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왕께서도 소송이 제기되는 것을 싫어하시어 일찍이 단송도감(斷訟都監)을 설치하여 송사를 단절토록 하였으나, 끝내 단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법 자체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陸象先曰 天下本無事 庸人擾之爲煩 夫王者之法 可通萬世 豈有今年可用白文 明年當 用官文乎 法欲纖悉 而益啓其奸
육상선(陸象先)이 “천하에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이 어지럽혀 번거롭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왕자(王者)의 법은 만세에 통하는 것인데, 어찌 금년에는 백문(白文 관인없는 문서)을 쓰고 명년에는 관문(官文)을 쓰겠습니까. 법은 세밀하게 하려 하면 협잡할 것을 더 열어 놓기 마련입니다.
或稱逋奴之子 或稱逃婢之生 占認良民 謀奪私賤 訴訟紛然 無有紀極 至於兄弟叔姪 反脣於一庭 至親爲讎 傷風敗俗 莫不由此
도망한 종의 자식이라 하고, 혹은 도망한 여종의 소생이라고 하면서, 양민을 점찍어 개인 노비로 빼앗는 등 소송이 분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형제, 숙질이 한뜰 안에서 반목하며, 가까운 친척 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여 풍속을 손상시키고 무너지게 하는 것은 무두 여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臣願 立奴婢之限 但合執外 十年時執者 十年良役者 勿復聽斷
신은 원컨대, 노비 소송의 기한을 정하되 단지 나누어 가질 노비를 독차지할 것 외에 1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것과 10년간 양역(良役)한 자는 다시 처결해 주지 말게 하소서.
其二十六曰 復昭陵
스물여섯째, 소릉(昭陵)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我國家 正如金甌 而猶有一缺以緬故 擧朝臣子 戴天履地 嬉嬉於綱常虧缺之中 而不自知也 何者
우리 국가는 마치 금주발(金甌)[46] 같이 반듯한데, 지난날의 연고로 하나의 결점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조정의 신하 된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서 강상(綱常)이 이지러진 가운데서도 태연히 지나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46] 금주발(金甌) : 나라의 영토와 주권이 완전하고 견고함을 금주발에 비유하였다.
自古帝王 廟無獨主 文廟則獨一 光陵蘊濟世之略 迫於群情 不得不受禪 爲宗社計也 其廢昭陵 恐非光陵本意也
예로부터 제왕의 사당에는 혼자 있는 신주(神主)가 없는데 문종(文宗)의 사당에만 혼자 있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세상을 구제할 책략을 품고 여러 사람의 인정에 떠밀리어 부득이 선위(禪位)를 받은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이었고, 소릉을 폐한 것은 세조의 본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臣聞文廟在東宮 昭陵已殂 其不預復魯山之謀 明矣 若以母故 則當時首謀諸人 誅其子 而原其女 以其女無外事也 足見光陵之仁
신이 듣건대, 문종이 세자로 계실 때에 소릉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키는 음모에 관계하지 않았음이 명백합니다. 만일 어머니 때문이라면, 당시 주모자 여러 사람들의 아들은 죽이되 딸은 바깥에 무관하다 하여 용서받은 예가 있습니다. 여기서 족히 세조의 어지신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況宋玹壽 親魯山之舅 而子居姪瑛 已蒙先王之宥 位諸朝矣 然則昭陵 復不可宥乎 縱殿下 明察其冤 而欲復之 議者必以爲 彰祖宗之過 而沮之 是大不然
더구나 송현수(宋玹壽)는 노산군의 장인인데도 그의 아들 송거(宋琚)와 조카 송영(宋瑛)은 이미 선왕의 용서의 은총을 입고 조정에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소릉을 다시 용서할 수 없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원통함을 밝게 살펴서 회복시키려고 해도 의견을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조종(祖宗)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일이라 하여 막아설 것이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殿下斷然復之 則將與世宗 此德 而無忝於文宗矣 何者 太祖廟 盡誅王氏 太宗 先誅鄭夢周 以私觀之 夢周謀害祖宗 乃子孫之大憝與 世宗錄用其後 以獎其節 而又列於古今忠臣之後
전하께서 단연히 회복시키신다면 장차 세종의 덕과 비교되고 문종에 대한 누를 없애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조조(太祖朝)에서 왕씨(王氏)를 다 죽이고 태종(太宗)께서는 정몽주(鄭夢周)를 먼저 죽였는데, 개인적으로 본다면 몽주가 조종을 모해한 만큼 자손들에게는 큰 원수인데도 세종께서는 그 후손들을 등용하여 그의 절개를 표창하였을 뿐더러 고금의 중신(忠臣) 후손의 대열에 세워 주셨습니다.
文宗特求王後 立崇義殿 以繼絶祀 兩宗之仁 與天地同大 後人 不曰世宗文宗 彰太祖太宗之過 而曰 聖子神孫 能補祖宗之過 豈不韙哉
그리고 문종께서는 특별히 왕씨의 후손을 찾아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워서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였습니다. 두 임금의 인덕은 천지와 같이 큽니다. 후세 사람들이 세종과 문종께서 태조와 태종의 잘못을 들추어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성(神聖)한 자손들이 능히 조종의 허물을 메웠다고 하였으니,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臣願殿下 復昭陵 禁樵牧 而喪畢祧遷 仍附其主 一國綱常 幸甚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소릉을 회복시키고, 나무하고 방목하는 것을 금지시키며, 거상(居喪) 기간이 끝나면 신주를 옮겨 문종의 사당에 함께 모신다면 온 나라의 윤리를 위하여 더없는 다행이 될 것입니다.
臣所陳二十六事 皆就時宜 無甚高論 乍看似冗 而細看有理 多是祖宗已試之故 少加損益 無不可行
신이 진술한 26가지 일은 모두 적당한 시기에 맞춰 추진할 일입니다. 심히 고상한 의논이 아니어서 얼핏 보면 쓸데없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이치가 있습니다. 대부분 선대 임금 때에 시도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빼고 보태면 시행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然在殿下 執端用中耳 其要 在於早御經筵 何者 學日進 則德目明 能自明德 則萬事 取次理會矣
그러나 이는 전하께서 양단(兩端)을 잡아 중간(中)을 쓰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 요체는 일찍이 경연(經筵)에 납시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학문이 날로 나아가면 덕이 날로 밝아지고, 스스로 덕을 밝히면 만사가 차차 이치에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禮曰 居喪 讀喪禮 旣葬 讀祭禮 又曰 旣葬 言王事 而不信國事 時異勢殊 旣不免言國事 則讀禮之餘 大學衍義 所當先講 近世 丘濬所補 亦當讀講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상중에 있으면 상례(喪禮)를 읽고, 이미 장사한 뒷면 제례(祭禮)를 읽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미 장사하였으면 왕사(王事)를 말하고 국사(國事)는 말하지 아니한다.”하였으나 시대도 다르고 형세도 다르니 기왕 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진대, 《예기》를 읽는 여가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먼저 강하고, 근세사람 구준(丘濬)이 엮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도 또한 마땅히 속강하여야 합니다.
其中 正心修身齊家治國之要 莫不備載 以心會之 以身體之 天下 無難事矣 但今經筵之制 有可議者
그 안에는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의 요령이 갖추어 실려 있으니,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체득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경연(經筵) 제도상 의논되어야 할 점도 있습니다.
夫經筵 所以接賢士大夫 從容講論 薰陶德性 非是切句讀解文義 而止耳 程伊川以立講爲勞 而欲坐講 蓋經筵之禮 有古賓師之道 不可尊君抑臣爲也
대체로 경연은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여 조용히 강론함으로써 덕성을 훈도(薰陶)[47]하자는 것이지 구두(句讀)나 찍고 문의(文義)나 해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이천(程伊川)은 서서 강의하는 것이 노고가 된다 하여 앉아서 강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경연의 체제가 옛날 스승을 빈객(賓客)으로 대우하는 법도가 있어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47] 훈도(薰陶) : 학문이나 덕행으로 영향을 끼침을 말한다.
今之經筵 俯伏不能仰視 氣窒於耳 語滯於口 殊不從容 耆老大臣 尤不能堪 殿下 當命從容坐講可也 先王 學至高明 一日三講 每講異書 而惟日不足 然非今日進學之要
지금의 경연을 보면 삼가서 하니 능히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운이 막히고, 알이 입에 맴돌아 특히 조용하지 못하고, 늙은 대신은 더욱 감당해 내지 못하오니, 전하께서는 명하여 조용히 앉아서 강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왕께서는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도달하셨지만 하루에 세 번씩 강하셨으며, 강마다 책을 달리하셨는데,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진학하는 요령은 아닙니다.
殿下 明睿所照 將無所不通 然精神有分 聰明有限 而一書有本末 必須融會可通 若襲舊規 胡亂進講 則眼力散主 心官分役 雖日破萬卷 終不免爲誇多鬪靡之學矣
전하의 명철(名哲)과 예지(叡智)로 비추어 보면 장차 통하지 못할 것이 없지만, 정신은 분수가 있고, 총명은 한도가 있으며, 한 가지 서적이라도 본말(本末)이 있으니, 반드시 깊이 이해하셔야 통달하게 됩니다. 만약 예전 규례만 답습하여 대충대충 진강하시면 안력은 흐트러지고 마음은 갈라져서, 하루에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해도 결국 많이 안다고 뽐내기 위한 학문이란 평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聖學 非欲涉獵 欲其開心明目 涵養通透 利於用耳 今當通一書卒業 然後更進他書 以專其功 唯夜對 講綱目 以卒東宮之業
성인의 학문은 대충 섭렵하려 해서는 안 되고 마음을 열고 안목을 밝혀서 함양하고 통달하여 응용에 이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책을 통달하여 졸업하셨다면 다시 다른 서적으로 나아가 공부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다만 야대(夜臺)에는《강목(綱目)》을 강하여 세자로서의 학업을 마치도록 하소서.
蓋治亂興亡 進退邪正之迹 不可不速鑑 願殿下 三留誠意焉 意不誠 則所見皆不實矣 蓋學必要問 不問則不明 臨經筵 而不恥審問 又其大者
대개 치란(治亂)과 흥망(興亡)과 진퇴(進退)와 사정(邪正)의 옛 자취를 속히 거울삼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성의를 쏟으소서. 뜻이 성실하지 못하면 보는 바가 다 부실할 것입니다. 대개 배움이란 묻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묻지 않으면 밝아지지 않습니다. 경연에 임하여 심문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臣 每思丹朱之不肖 大舜之至聖 雖愚人 亦不敢比論 禹以爲 無若丹朱傲 其言已迫 舜則心悅 而都兪也
신은 저 단주(丹朱)[48]의 불초(不肖)와 순(舜) 임금의 지성(至聖)을 생각할 때마다 비록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감히 비교하여 논하지 못할 것인데, 우(禹) 임금은 순 임금에게 “단주같이 오만함이 없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 말이 매우 박절하였지만 순 임금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탄하였습니다.
[48] 단주(丹朱) : 중국 상고 시대 요(堯) 임금의 아들인데, 요 임금은 이 아들이 불초(不肖)하여 천하를 물려주기에 부족함을 알고 순(舜)에게 정권(政權)을 물려주었다.
巍巍蕩蕩 舜不可名言 後世漢武 麤暴之主也 汲黯面斥以爲 內多欲 而外施仁義 武帝 非惟不恕 而敬汲黯 許以社稷之臣
높고 넓어서 순 임금은 무어라 이름할 수 없고, 후세의 한 무제(漢武帝)는 거칠고 횡포한 임금이었으나 급암(汲黯([49]이 면전에서 손가락질하며 말하기를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푸는 척한다.”라고 하였지만 무제는 노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급암을 공경하여 사직을 지탱하는 중신(社稷之臣)이라고 받들었습니다.
[49] 급암(汲黯) : 한 무제(漢武帝) 때 직간(直諫)하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급직(汲直)이란 별명을 얻어 후세에 쟁신(諍臣)의 모범으로 일컫는다.
帝王弘量 固當爾也 殿下臨經筵之際 理會此兩節 體之以誠 則群下之讜言 無不可容者矣
제왕의 넓은 도량이란 진실로 마땅히 이러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실 때에 이 두 가지 일을 이해하시어 정성으로써 체득하신다면 여러 신하들의 곧은 말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臣 內切哀誠 外感時事 語涉狂僭 冒不測之誅 伏紙摧咽 不勝隕越 謹拜手稽首以聞
신은 안으로 슬픈 정성이 간절하고, 밖으로 시사(時事)에 느껴서 말이 광망(狂妄)하고 참람(僭濫)하여 불측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소장 앞에 산가 흐느끼며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삼가 백배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니다.
<終>
출전 : 탁영선생문집 역주본
편집 : 2015. 1. 18.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