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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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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시대 스크랩 한민족의 역사(2)-배달국기(倍達國紀)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27 13.08.12 15: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민족의 역사(2)-배달국기(倍達國紀)

 

환인씨(桓仁氏)의 뒤에 환웅(桓雄)씨가 일어나 천신의 명을 받들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등,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백산(白山)과 흑수(黑水)(1) 사이에 내려와 천평(天坪)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다섯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을 이치로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고 천경(天經)(2)과 신고(神誥)(3)를 가르쳐서 백성들을 훈계하여 크게 깨우쳤다, 도읍을 신시(神市)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고 하고(4), 스무하루동안을 택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면서 외물을 꺼리고 조심하며 문을 닫고 스스로 마음을 닦으면서 공을 드려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뒷 사람들이 이를 받들어 땅 위의 가장 높은 신이라 하며, 신시씨(神市氏)라 하였다.

1 )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 1세 거발환(居發桓) 환웅은 환인의 환국이 있던 파나류산(波奈留山)의 후륜바얼(呼倫巴爾) 지구, 하이라얼(海拉爾)에서 출발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리하여 그가 나아간 곳에도 새로운 흑수(黑水), 백산(白山)을 정하여 이름을 붙였다.이후에 생겨난 흑수(黑水), 백산(白山)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하이라얼(海拉爾)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길림성 백성시(白城市)가 있고, 두번째로 길림시(吉林市)를 들 수 있으며, 세번째로는 내 몽고 자치구의 적봉시(赤峰市)가 가능하다.
2) 천경(天經) : 천부경(天符經)이라고 한다. 총 81자로 되어 있으며, 삼교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뜻이 너무 오묘하므로 다만 원문만 적는다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편에 적혀있다.
3) 신고(神誥) : 삼일신고(三一神誥)라고 하며 총 366자로 되어 있으며 다섯장으로 되어 있다.
4) <삼성기(三聖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웅(桓雄)은 흑수(黑水), 백산(白山)에 내려와서 천평(天坪)을 마련하고 청구(靑丘)라고 국호를 정했다. 신시 (神市)에 도읍을 세우고 배달국(倍達國)이라 불렀다."이 기록은 청구국 수도 천평(天坪) 시대와 배달국 수도 신시(神市) 시대가 혼돈되어 한꺼번에 기록되었다. 이는 환웅이 신화 속에서처럼 단 한 분이 아니라 여러분이었으며, 환웅 시대 도중에 천도하여 새로 나라 이름 을 개칭한 사실을 추정하게 한다.그 때에 종족의 이름이 한결같지 않아 풍속은 아직도 점점 갈라지기만 하였다. 본래부터 살던 자는 범족(虎族)이고 새로와서 사는자는 곰족(熊族)이었다. 범족의 성품은 탐하기를 좋아하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곰족은 성품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어 스스로 잘난체하며 화합과 협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 통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니 서로 한 길을 가는 일이 없었다.

여기에 이르러 웅족의 군(君)이 환웅(桓雄)에게 신령스러운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거늘이고 가서 말하기를 "원하옵기는 터전하나를 내려주시면 신계(神戒)의 맹세를 하겠나이다" 하였다. 환웅이 이를 허락하여 서로 접촉하게 하니 자식을 낳고 산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범은 끝내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사해(四海)로 내쫓으니 환족(桓族)이 일어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신시씨는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5)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5) 刀 劍 : '刀'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 '劍'은 양쪽에 모두 날이 있는 칼. 戟.槍 : '戟'은 끝이 좌우로 가닥진 창, '槍'은 끝이 한 가닥으로 곧은 창. 弩 : 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잇따라 쏠 수 있는 큰 활.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나기에,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였기에 제작의 능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 태고 문자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6)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6) 육진(六鎭) : 조선 세종때 북쪽의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세운 여섯 개의 군 주둔지. 즉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 등이다.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히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 夷)·우이( 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中土)(7)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8)

7) 중토(中土) : 곧 중국부족을 일컬은다.
8)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족원(族源)과 천사(遷徙) : 족원(族源)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라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 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 귀주민족출판사(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維吾er族) 596만, 이족( 族)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이 때에 구환(九桓)이 모두 삼신으로 한 뿌리의 조상을 삼았으며, 소도(蘇塗)(9)를 맡아 다스리고, 관경(管境)을 맡아 다스리고, 책화(責禍)를 맡아 다스렸다, 무리와 함께 의논하여 의견이 하나로 모아져 화백(和白)을 이루고 아울러 지(智)와 생(生)을 함께 닦아 고을을 이루었다.

9) 소도(蘇塗) : 천신에게 신단(神壇)을 베풀고 제사지내던 성역(聖域),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웠는 데 지금의 "솟대"는 여기에서 기원되었다고 한다.
환웅천왕(桓雄天王)으로부터 5대를 지나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이 있었는데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가만히 생각에 잠기므로 마음을 맑게 닦으며, 숨쉬는 것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보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곧 오래살며 늙지 않게하는 방술(方術)이다. 아들 열둘이 있었는데 맏 아들은 다의발환웅(多儀發桓雄)이며 막내가 태호(太 )이니 복희(伏羲)(10)라고도 한다.

10) 복희(伏犧) :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 제물에 쓰이는 동물)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규원사화
밀기(密記)에서 말하기를

" 복희(伏羲)는 신시(神市)에서 나와 우사(雨師)의 직책을 세워 세습하였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드디어 진(陳)으로 옮겨 수인(燧人)(11)· 유소(有巢)(12)와 함께 서토(西土)에 나라를 세웠다. 그 후손이 풍산(風山)에 나누어 살았으며 성을 풍(風)이라고 하였다.

11) 수인(燧人) : 상고시대의 제왕
12) 유소(有巢) : 상고시대의 제왕
갈고환웅(葛古桓雄)이 있어 염제신농(炎帝神農)(13)의 나라와 경계를 정하였다, 또 몇대를 이어오다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있었는데 신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만들어 일으키고 여러 방법의 야금술로써 공물을 뽑아내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하였다. 치우(蚩尤)는 천둥과 비를 크게 일으켜 산하(山河)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라 하였다.

13) 염제신농(炎帝神農) : 신농씨(神農氏)의 아버지는 소전(小典)인데 소전은 웅씨(고시씨의 방계이다.)에서 나누어졌다. 8세 안부연환웅이 소전에게 군병을 감시하라는 명을 내려 강수(姜水)에 갔다. 신농씨는 강수에서 온갖 풀의 맛을 보고 의약의 제도를 세우고 나중에 열산(列山)으로 이주하였다. 신농씨의 성(姓)은 강수에서 살아 강씨(姜氏)가 되었다.치우천왕(蚩尤天王)이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쇠해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큰 계획을 품고 자주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일으켰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 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14)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15)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楡罔)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에 유망이 소호(少昊)(16)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空桑)(17)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

14) 옹호창 : 옹호산(雍狐山)에서 캐낸 쇠로 만든 갈라진 창
15) 양수(洋水) : 양천(洋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향현(西鄕縣) 남쪽 경계에서 시작된다.
16) 소호(少昊) : 황제의 아들
17) 공상(空桑) :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이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의 첫번째 수도였던 공상(空桑)의 정확한 위치다.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어 유망은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치니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18)와 기연(冀 )(19)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18) 회대(淮岱) :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그리고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19) 기연(冀 ) : 기주(冀州)와 연주( 州)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 州)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그리고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치우천왕이 10년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0)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20) 指南車 :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게끔 되어 있다.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치우비(蚩尤飛)가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 하였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1)]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22)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다 하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23).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21)《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 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였으며 평정하여 복종시킨 자들은 곧 제거하여 버리니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적어도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22) 동평군 수장현 : 오늘날 산동성의 황하 남쪽 수장집(壽張集)이라는 고장이다. 황하 남쪽 운성( 城) 북쪽에 있다. 수장집은 광개토왕릉이 있는 집안현처럼 능을 지키는 수묘인을 모여 살게 한 고장으로 추정된다.
23)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壽良, 蚩尤祠在西北 上. 有 城.…(동군……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에 그 북서쪽 제( )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 [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 皇覽曰: [蚩尤 在縣 鄕城中, 高七丈.]]…(동평국……수장현은 춘추 시대에는 량(良)이라하였으며 한 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 [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 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24)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

24) 유청(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고,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다.

 

25) 소호(少昊) : 소호의 후손중 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중국(즉 熊國)의 천자가 되었다. 소호금천씨가 김씨의 시조임. 벼슬이름을 새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봉황이 총리격이었는바, 나중에 왕으로 상징화되어 봉황새는 임금을 가리키게 되었다.

26) 공상(空桑) :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이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의 첫번째 수도였던 공상(空桑)의 정확한 위치다.

27) 이때에 이르러 치우가 배달나라의 왕통을 이어 13대 사와라 환웅의 뒤를 이어 제 14대 환웅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신시시대의 뒤를 이어 청구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28) 단웅국(檀熊國) : 배달나라 말기에 단웅국의 비왕으로 섭정하던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요임금의 난을 피하여 동북의 아사달로 가서 서기전 2333년에 조선(朝鮮)을 건국하게 된다.

29) 회대(淮岱) :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그리고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30) 기연 : 기주(冀州)와 연주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그리고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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