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 4. 온고을교회 주일설교 (황의찬 목사)
너는 내 아들이라
마3:8~17
침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이 침묵하셨던 400여년의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고, 그분께서 다시 인류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니 이때를 맞아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심판이 임박했음과 자기 뒤에 오실 분, 메시야에 대한 소개를 했는데, 그 분은 자기와 달리 대단히 고귀한 분으로써 성령과 불로써 침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예고했다. 요한은 이렇게 외치면서 그 분이 오셔서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실 지에 대한 나름의 기대를 했다. 요1:33~34에 따르면 요한은 아직 오실 그분, 메시야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모세에게 현현하셨던 모습,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빽빽한 구름 사이로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으로 오실까, 아니면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같이 자유자재로 시공을 뛰어넘는 분으로 오실까. 작금의 종교 타락과 인류문명의 퇴폐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실 분이시니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상상했다.
한 나라에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하물며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신다고 하니, 누구나 대단한 사람으로 오실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드디어 ‘위에 성령이 머무는 분(요1:33)’이 출연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 다가오더니, 자기에게도 침례를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요한은 일순간 혼란에 빠졌다. 슈퍼맨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셔야 할 분인데, 자기에게 와서 ‘회개의 침례’를 해 달라고 하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욱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죄를 자복하는 이른바 ‘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문했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나보고 침례를 해 달라니요?” 그러자 그분은 ‘그렇게 하여서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사코 침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3:14~15은 신학적으로 대단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대면에 따른 긴장이 있고, 사람의 소견과 하나님의 경륜이 맞부딪히는 충돌이 있고, 요한은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의’라고 표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경륜은 요한으로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대단한 지위와 권세, 권능을 가지고도 이스라엘의 제반 모순을 고치기가 쉽지 않을 터수에, 기껏 메시야께서 자기에게 와서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겠다고 하니 실망이 대단히 컸다. 요한이 보기에 지금 자기 눈앞에 나타나신 메시야는 분명 굴욕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용어를 빌자면, “그리스도의 굴욕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드라마는 이렇게 예수님의 철저하게 낮아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나중에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렇게 낮아짐으로 출발하여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낮아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가가 만들어 불리어졌다.
빌2:6~11의 내용이 일명 ‘케노시스의 본문’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 찬가’이다. 케노시스는 ‘비운다.’는 뜻이다. 본디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시지만, 이 땅에 낮아짐으로 오셔서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을 실현한 예수님을 찬양한 노래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한없이 낮아짐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다 하여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하셔, 모든 무릎을 그의 이름 아래 꿇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침례 요한은 그런 메시야의 행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분, 그리스도가 당신이 확실한가? 하고 묻게 된다.(마11:2~3)
예수님은 나중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에 명목상으로는 충실히 따르고 있다.
현대 국가들의 최고 권력자 선출은 국민투표로 하고 있다. 대통령이나 수상 등은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기도 하지만 선거로 뽑는 이유는 국민을 최고로 잘 섬기는 종을 뽑아야 한다는 취지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그야말로 후보들은 ‘낮은 곳 중에서도 낮은 곳’을 수소문하여 그들을 찾아가 포옹하고 악수하면서 한 표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렇게 뽑힌 당선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권력의 달콤함만을 향유하여 민중은 고통에 신음한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는 왜 이런 부조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죄악 가운데 태어나고 자라온 죄인이기 때문이다. 뽑히는 자도, 뽑는 자도 죄인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이것을 ‘오블레스 노블리주’라 하지 않는가? 최고의 권력자는 최고의 도덕성을 겸비하고 최고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현대 국가들 모두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불행을 벗을 줄 모른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류의 죄 값’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왕으로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 분은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하지 않고, 인생의 바닥에서 고통당하는 서민들 속으로 철저하게 낮아지셨다.
죄가 없으면서도 회개의 침례를 자청하고 물 속에서 나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왔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초현실적인 내용이 나오면 어찌 이런 현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만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의문이 생겼다면 과학이나 상식 등 자기네 지식의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비하하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 분이 어떻게 하셨기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결코 비둘기 같은 성령도, 하나님의 음성도 기대할 수 없다.
2009년 1월 4일 온고을교회 설교.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