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백발등. 멀리 신불산에서 용트림해 오는 신불산상벌 십리는 영축산 독수리 머리 아래에서 큰 분지를 이룬다. 1980년대 개설된 방화선(짙은 흰선)은 하늘을 지키는 단조성과 백발등을 무참히 뭉개 천하명산을 유린했다.
-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혼 피로 물들고 - 빨치산·군경 총소리 울려퍼지던 산 - 옛 화전촌 일대엔 흔적들만 덩그러니 - 고라니·억새 등 생명의 흔적 반가워
낮이면 군경, 밤이면 빨치산 해방구였던 1949년 배내골. 배내골에 주둔한 군경 식량을 져다 주고 돌아오던 짐꾼이 신불산에서 얼어 죽었다. 고등어 꼬랑지 하나면 꽁보리밥 한 공기를 비우던 시절이었지만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저항의 산, 신불산은 살아 있다
신불산은 살아 있다. 지난밤에 다녀간 생사의 흔적인 고라니 사체가 길바닥에 뒹굴었다.
억새꾼이 시신을 찾아 신불산을 올랐다. 산지기 눈을 피해 억새를 베러 다녔던 억새꾼은 인동골에서 짐꾼을 용케 찾아내었다. 40대 짐꾼은 지게 끈을 불끈 쥔 채 눈을 뜨고 얼어 죽어 있었다. 칡덩굴로 시신을 묶은 억새꾼은 관을 지듯이 지게에 졌다. 담력이 좋아 심장에 털 난 사람으로 소문이 난 억새꾼이었지만 짙은 산길은 두려웠다. 아무리 균형을 잡으려 해도 거적때기 없는 시신은 나뭇가지에 자주 부딪치곤 했다. 모퉁이에 박치기한 시신의 머리가 쿵 소리를 내면 끔찍이 가슴에 사무쳤다.
백발등에 올라서자 해는 서산에 그렁거렸다. 설핏하게 기운 황금 낙조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한 억새꾼은 입을 가리며 마른 억새를 헤집고 나갔다. 신불산 갈산고지에서 콩 볶는 총소리가 들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이었다.
더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억새꾼은 버려두면 늑대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땅을 팠다. 혹독한 추위에 산천초목이 얼어붙었던 시절이었다.
얼마 후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힌 배내골 70리는 소개령이 내려져 불길에 휩싸였고, 피난길에 오른 억새꾼은 "이놈들아, 실컷 싸질러라. 불이 난 마을은 잘 산단다"고 울분을 터트리며 산속으로 사라졌다.
■사람의 간섭은 백발등을 바꾸고
화전촌 '운구지' 마을에서 찾아낸 쇠 원석. 이곳에는 과거 토철을 녹였던 쇠부리터 흔적이 남아 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올해 동짓달, 떠돌이 시인은 하늘이 숨긴 땅 영축산 백발등을 찾아 나섰다. 백발등은 삼동 고을에서 보면 감춰진 땅이지만, 배내골 산발치에서 올려다보면 호호백발 산봉우리였다. 떠돌이 시인은 백련천 골짜기에서 높드리를 타고 잿길을 올라 '운구지' 화전촌에 들어섰다. 과거 신불산 일대에는 두 곳의 화전촌이 있었는데, 쇠를 녹이며 화전을 일구던 '운구지', 그리고 해발 1000m 고산분지에 모를 심고 살았다는 백발등 '못본디기' 가 있었다. 지금도 운구지에는 수천 평의 밭뙈기와 쇠를 굽던 흔적들이 너부러져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쇠를 굽던 쇠부리터를 돌아보던 중에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무심코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어쭙잖은 곳에 고라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 신불산은 살아 있구나, 놀라움보다는 탄성이 터졌다. 주변은 핏자국이 낭자했고 뽑힌 털은 여기저기 흩어져 지난밤에 다녀간 죽음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은 고라니를 뒤집었더니 창자는 산짐승에게 고스란히 먹혔고, 뜯겨나간 몸때기는 성치 않았다.
영축산 산정에서 서북쪽으로 난 돌무더기 벨트 아래에 있는 야트막한 민둥산이 바로 하늘이 숨긴 땅 백발등이었다. 백발등에 오른 떠돌이 시인은 사방 십리가 늪지인 신불산상벌(神佛山上伐) 주변을 갈마 보았다. 떠돌이 시인의 눈에 비친 삼형제봉(영축산, 신불산, 간월산)은 좌청룡 우백호 산경이었다. 신불산은 용머리, 영축산은 독수리 머리, 그 중간의 만경창파 신불산상벌은 날갯죽지를 때어낸 형상이었다. 영축산 산정에서 시작된 단조성은 백발등을 만나 주계덤이라는 능선을 타고 배내골로 흘러내렸다. 맑은 날이면 멀리 지리산까지 보여, 신라인이 가야국을 견제하기 위해 단조성을 쌓았다는 설을 뒷받침했다.
■임진왜란 당시 비밀통로였던 백발등
영축산 독수리 이마에서 흘러내린 백발등은 임진왜란 당시 죽기를 각오한 의용군들이 생솔가지를 태우며 의식을 올렸던 단조봉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비밀통로를 찾아낸 왜군은 영축산 뒷산 청수골, 주계덤, 선짐재, 신불재를 통해 물밀 듯이 진격해 왔었고, 시살등으로 퇴각하던 의병들은 활을 쏘며 최후의 응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백발등 단조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의병이 뿌린 피로 채워진 '피못'에 사는 비단개구리 배는 붉어졌고, 단조성 수로신인 매는 산더미로 쌓인 의병 시신을 너무 많이 파먹어 날지를 못했었다.
떠돌이 시인은 뒤로 돌아누운 황소 같은 백발등을 천천히 걸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붉은 땅과 마른 억새로 조화로운 백발등 서쪽에 무덤 한 기가 보였다. 전쟁이 끝난 후 포졸이 왜군에게 비상통로를 가르쳐준 화전민을 문초하자 "나는 왜군을 본 적이 없다. 못 보았다"고 발뺌을 했다고 하여 '못본디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에 무덤을 쓰다니…. 사람이 놀라면 하룻밤에 백발이 된다는 말마따나 놀란 떠돌이 시인의 머리에 무서리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떠돌이 시인은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 우적우적 걸어갔다. 큰물에 실려 온 모래로 사막화된 질펀한 습지는 억새, 진풀, 돌배나무, 싸리나무까지 무성해 가시덤불보다 더 걷기가 버거웠다. 무덤은 큰 소리로 우는 바람의 언덕 '우는등'을 등지고 있었다. 이름 없는 무덤은 멀리 재약산 사자평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돌과 흙으로 쌓은 봉분은 바람에 깎인 탓인지 민민한 편이었다. 황무지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묻힌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란 말인가? 짐꾼? 화전민? 보부상? 빨치산? 그러나 무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곳 주민 말로는 못본디기에 묘를 쓰면 좋다고 하여 눈을 피해 묘를 쓰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민이 올라와 파냈다고 한다.
■살기 위해 죽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억새
겨울에는 눈 세상이지만 봄이 되면 봄이 왔다고 먼저 알리는 곳이 백발등이었다. 백발등 단조늪 일대를 두고 '징풀구디' 라 부르는 이곳 주민은 봄이면 나물 세상인 백발등에 살다시피 했다.
백발등을 오르기 전에 윗방기마을에서 만난 학이댁(81)은 "징풀구디 은빛 반달비가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면, 햇빛 먹은 곤달비는 반질반질 물이 오른다. 피못에 쪼그려 앉아 반달비 따다가 나도 몰래 백발등까지 올라 가지더라. 나중에는 나물 보따리를 이고 오지 못해 굴려 내렸다"고 나물 타령을 했다. 한마을에 사는 깊으네는 "간장에 절인 징풀구디 나물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몰라" 자랑을 늘어놓고는 "징풀구디 나물 아니면 언양장이 안 열린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많던 나물들 다 어디로 갔을까?"고 되물어 영남알프스를 고자 처가 드나들 듯이 하는 떠돌이 시인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였다.
강한 바람에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백발등에 나물이 많았던 것은 잦은 불 때문이었다. 천화현(영남알프스)의 불은 억새를 솎아주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태화강 십리대밭 간벌은 대를 굵게 해주듯이, 백발등 불은 억새 생성을 튼튼하게 해주었다. 산을 움켜쥔 억새는 순과 눈만 타 거름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다시 싹을 틔웠다. 살기 위해 다 죽고 다시 시작하는 억새는 영남알프스의 의용군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