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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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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 합니다. 당신의 능력은 심히 크시고 당신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1권 처음 부분을 시편 145:3 말씀을 인용해서 시작하고 있다. 주님을 찾는자가 주님을 찬양하고 찾는자가 주를 만나고 만나는 자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리고 이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나 하늘과 땅이 포용하고 있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그러면 '하나님 당신은 누구입니까?'(시18:31)라고 묻는다.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선하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면서도 의로우시며 지극히 은밀히 계시면서도 가장 가까이 현존하시며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강하시며 항상 계시되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부족한 것이 없으시나 찾으시고 사랑을 하시되 흥분하지 않으시며 인간에게 빚진 것이 없으시나 마치 빚진 자 처럼 갚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기 어떻게 표현하랴? 당신을 찬양함에 있어서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실상 벙어리와 같다.' 5장은 어거스틴의 기도가 나온다. '나는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자비로서 말씀하여 주소서.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35:3) 당신의 얼굴을 나에게서 돌리지 마소서. 내가 당신의 얼굴을 봄으로 내 육신이 죽게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당신의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을 때 죽을 지언정 자기 자신의 지금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6장에서 어거스틴은 유아때의 죄를 기억해서 고백한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죽어가는 생명' 혹은 '살아가는 죽음'으로 표현했다. 어거스틴은 유아기때의 죄악을 기억 못하지만 지금 관찰하고 있는 아이들이 그에게 죄를 기억하게 해 준다고 한다. 어떤 죄를 지었을까? 땡깡 부린일들. 어거스틴은 어린아이가 순결하다 함은 그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몸의 지체가 약하기 때문이라 한다. 어린 시절 어거스틴은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했었고 가끔씩 학교에서 매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어거스틴은 학교에서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기 보다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하여 무서웠다고 한다. 얽매어서 답답하게 공부하는 것을 몹시도 싫어한 것 같다. 어거스틴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의 삶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희랍어와 희랍의 문학을 싫어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허구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대신 라틴어는 어려서 유모들이 해주는 말, 놀아준 사람들의 장난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자연습득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돌이켜 보면서 허망한 것 즉, 허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트로이의 왕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해 분해하고 슬퍼하는 여신 유노의 말을 웅변해보라는 것을 싫어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말은 우리의 몸이 멀리 떠나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나오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문법을 사용할 때 다르게 사용하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불쾌하거나 어색해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계명을 어기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 남을 미워할 때는 자신을 흥분케 하는 증오 자체가 미워하는 원수보다 자신을 더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거스틴은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그때의 죄는 나의 즐거움, 명예, 진리를 하나님 안에서 찾지 않고 피조물인 자신 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서 찾으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어거스틴을 만드신 것이 하나님이시기에 어거스틴은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2권 어거스틴이 열 여섯 살 되던 청년시절
3/17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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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여기서 청년기 때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과거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청년기로 들면서 어거스틴은 세상적인 것에 만족하려는 욕망으로 불탔고 허망한 사랑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순수한 사랑이고 무엇이 추잡한 정욕인지 분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기가 음탕한 생활을 했을 때 왜 하나님이 침묵만 지키고 계셨는지 하나님께 묻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누군가가 있어 주어서 쾌락을 추구하는 어거스틴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 하기도한다. 그때 어거스틴은 마다우라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고 돌아오게 되는데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그를 유학 보내기로마음을 먹는데 어거스틴은 그 아버지의 목적이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향해 잘 나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정결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관심보다 어거스틴이 웅변에만 능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불만을 말한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그때 어거스틴이 나쁜 길로 가는 것을 걱정했다. 음행을 하지 말라. 특히 다른 사람의 아내를 더럽히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인지 모르고 더욱 추행을 하면서 쾌감을 얻었고 친구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어거스틴은 또한 언젠가 배를 도둑질 한 것을 말한다. 친구들과 배를 따서는 먹지도 않고 돼지떼에게 던졌는데 그런것으로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즐겼던 것이다. 그것을 하도록 자극한 것은 악한 의지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어거스틴은 죄를 짓는데는 동기가 있다고 말한다. 범행이 왜 행해지느냐에 대해 사람이 하층에 속하는 어떤 것(가치)을 얻으려고 하는 욕망이라든가 혹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두려움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다시 배를 훔쳤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도둑질에서 그를 기쁘게 해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밖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고 할 때 외도를 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모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라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용서해 주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도둑질을 한 이유에 대해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한 것을 말한다. 혼자서는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누가 이 얽히고 헝클어진 매듭을 풀어 줄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자는 '네 주인의 즐거움(마 25:21)'에 들어가 두려움없이 가장 선하신 분 안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어거스틴은 청년 시절 그렇게 모범적으로 생활을 하지는 않았는 모양이다. 그의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 다른 사람의 아내를 더럽히지 말라 - 어거스틴은 욕망에 이끌리어 그런 행동들을 했는 모양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가 배를 훔쳤던 것에 대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그것을 통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죄를 저질렀던 그것 자체를 즐겼다고 말하면서 악한 의지를 인정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줌에 대해 감사함을 드린다. 어거스틴의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잡은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를 그렇게 잡아주었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해준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 청년시절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어릴적 죄를 고백하게 만들어 준다. 그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해 준다.
3권 카르타고의 학생 시절과 마니교
3/24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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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사랑하기를 사랑하고 깊이 숨겨진 욕구불만에서 내가 그 욕구불만을 더 강하게 느끼지 못함을 스스로 미워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로 가서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맸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쾌락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당시 연극관람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왜 슬프고 애닳은 일을 몸소 당하기는 싫어 하면서도 그런장면을 보고 슬퍼하기를 좋아할까? 그것은 관람자가 이런 연극에서 서러움을 실감하려고 하며 그 서러뭄에서 어떤 쾌감을 맛보려고 합니다. 관람자는 고통받는 연기자를 도와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기를 보고 슬퍼해 주려고 초대받아 와 있는 것 뿐입니다. 오늘날 해가 되는 쾌락을 얻지 못했거나 또는 괴로운 행복을 놓쳤다고 고민하는 자들보다 자기들의 사악을 즐기는 자를 더 불쌍히 여겨 동정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동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게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 당신에게는 순수한 자비기 있어 세상의 어떤 슬픔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슬픔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슬픔이 마음속에 상처를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비극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상의 연극의 소리를 듣고 봄으로써 내 감정의 표면을 가볍게 긁어 스쳐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당시 어거스틴은 웅변술에 관심이있었다. 키케로가 쓴 ' 호르텐시우스'란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었고 새 희망을 주었다. 그때 어거스틴 나이 19세. 키케로의 책을 좋아 했지만 석연치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속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서로 마음을 돌리기 시작을 했다. 처음에는 성서 문체가 키케로의 웅변의 위엄에 비길바 못된다고 생각을 했다. 교만하여짐. 성서에 대한 이해는 어린아이가 성장하듯 자라나야 되는 것이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주의자들을 따라다녔다. 마니주의자들의 질문에 설들을 당함.(악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나님은 어떤 몸의 형체를 가지고 있어 제한을 받고 있느냐? 그러면 하나님도 머리털이나 발톱이 있느냐? 아내를 동시에 여러명 데리고 사는자, 사람을 죽이는자, 혹은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린 자들도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느냐? 라고 하면 나는 곧잘 그들에게 설득되었던 것입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으로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이 다르다. 인간들 앞에서 비난을 받아야 할 행동도 당신의 증거로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는 저주를 받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겉으로 나타난 행동과 행동하는 자의 심정,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무화과를 딸 때 그 무화과가 운다든가 무화과 나무가 어머니처럼 흰 젖의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화과를 마니교 성인들이 먹으면 그것을 뱃속에서 소화시켜 숨을 내뱉을 때 천사를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무화과를 먹고 기도할 때 신음하고 한 숨 쉬는 동안 호흡을 통해 신의 어떤 부분들을 뱉어 낸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마니교의 성인들의 이와 배로 인해 그 신의 부분이 풀려나지 않으면 그 지고하시고 참되신 신의 부분은 그대로 무화과에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꿈을 소개한다. '어머니가 나무로 만들어진 자위에 서서 슬퍼하는데 한 젊은이가 어머니에게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아들의 멸망을 보고 운다고하자 그 젊은이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아들도 있다는 것을 알라고 말하면서 안심하게 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돌보아 주실 때 마치 한 사람뿐인 양 볼봐 주시고 또한 모든 사람을 돌보실때도 꼭 한 사람을 돌보시듯 한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어머니의 현재의 괴로움을 위로해주시고 미래의 즐거움을 예고해 주셨다.
4권 마니주의에 빠짐
3/31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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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19살부터 28살까지 욕정으로 인해 남을 유혹하고 유혹당하면서 살아왔다. 공직 생활에서는 학문이란 이름으로 그랬고 그래서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시 낭송 대회에 참여했고 개인생활에서는 거짓된 종교의 이름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성자, 혹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음식을 갖다 바쳤다. 그때쯤 어거스틴은 수사학을 가르쳤다. 당시 어거스틴에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와 사는 동안 자식을 낳을 목적으로 맺게 되는 결혼이라는 계약과 자식을 낳은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정욕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햇다. 어거스틴은 당시 시 낭송 대회에 나갈 때 어떤 점장이가 그에게 이기게 해 주면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을 때 어거스틴은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 위해 파리 한 마리 죽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점장이는 산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그 덕으로 마귀들을 불러 그를 돕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어서 거절했다. 어거스틴은 그러면서도 점성가와 의논을 자주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점을 치기 위해 제사드리지도 않고 귀신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성자들은 죄를 짓게 된 것은 하늘의 별이 결정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점성술을 쓴 저자들의 영향으로 점성술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당시 고향에 돌아와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친구 하나와 벗하게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이 어릴 때 함께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열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나서 어거스틴은 영혼에게 왜 낙망하여 자기를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그 영혼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했다해도 어거스틴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상상에서 그린 신이지만 친구는 신보다 더 실재적이요 좋았기 때문이라 한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잊고자 카르타고로 갔다. 그 장소의 변화의 시간의 경과로 슬픔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 슬픔이 그렇게 깊게 자리잡은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안 죽을 사람처럼 사랑함으로써 그 혼을 모래위에 쏟아 버린 탓이라는 것이다. 그런즉 서로 말하고 웃고 읽고 농담하고 의견을 달리하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고 친구가 없으면 무척 보고 싶어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반겨주는 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을 때는 양심은 죄책감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죽은자의 생명이 산자의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친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는 복을 얻는다. 왜냐하면 항상 계셔서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자만이 자기가 사랑한 것을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변화하므로 영혼의 쉴곳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불변하기에 우리가 안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올라가셨의되 세상을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그 이유는 그 분이 세상을 지으셨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당시 아름다움과 알맞음이라는 책을 썼다. 그 내용은 사물에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고 또 몸의 한 부분이 전체와 잘 맞는다든가 혹은 신발이 발에 잘 맞는것과 같이 서로 잘 들어 맞는데서 오는 아름다움도 있다. 우리가 찬양받은 자를 사랑하게 될 때는 그를 찬양한 사람이 거짓으로 하고 있지 않음을 믿을 수 있을 때 즉 그가 사랑하기 때문에 찬양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입니다. 어거스틴은 덕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사랑하고 사악으로부터 불화를 미워했기 때문에 전자에는 통일성이 있고 후자에는 분열성이 있다고 구별하여 보았다. 통일성에는 이성적 정신 및 진리의 본질과 지고선이 있고 분열성에는 확실히 모르지만 비이성적 본체 혹은 최고악의 본성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전자를 모나드라 불러 아무 성차별이 없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 후자를 다이아드(Dyad)라 불러 분노, 음탕할 때 나타나는 정욕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 당시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도움이 되지 않은 이유는 존재한 모든 것이 10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했고 이 방법으로 마치 물체를 이해한 것처럼 단순하고 불변하신 당신은 크고 아름다운 속성을 가진 실체인양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5권 로마와 밀라노에서
4/7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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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영혼을 격려시킨다. '오 주여, 나의 모든 뼈를 고쳐 주소서. 그 고침 받은 뼈들이 당신과 같은자 누구리요'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한다. 사악하고 불안한 자들이 하나님을 피해 달아난다 할지라도 결코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당신의 낯을 피해 도주 한다면 어디로 피해 가겠습니까? 당신이 찾을 수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들은 어디에든지 계시나 어떤 장소에도 깨이지는 않으시며 당신에게서 멀리 떠난 자들에게도 가까이 계시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버렸어도 당신은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나이 29세때 마니교도인 파우스트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철학자들의 이론을 비교해 보았지만 철학자들의 이론이 더 진리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 그들이 비록 세계의 주되시는 당신을 차짖는 못했어도 그들의 힘으로 세계를 바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참회하는 자에게만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깊고 묘한 지식으로 별과 모래알을 세고 성좌의 위치를 관창한다 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들은 미래에 있을 일식은 알면서도 현재에 있는 자기들의 일식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 재능이 어디서 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교만과 이기적 호기심과 육적인 방종을 당신에게 바치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 많은 지식들 보다는 하나님을 아는자가 더 지혜가 있는 자이고 하나님을 아느 것이 참행복이다. 지식 없어도 경건을 배울 수 있고 경건을 곧 지혜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당시 파우스투스를 몹시 만나고 싶어함.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질문을 파우스트가 풀어 줄 수 있다면 주위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나 본 결과 그는 단지 문법을 공부하고 몇권의 책을 읽은 것 외에는 없었다. 어거스틴이 여기서 사람이 말을 잘한다고 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말을 잘못한다고 허위를 말함이 아니며 큰 소리로 강력하게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말하는 것이 매끈하다 해서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니교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파우스투스에게서 겸손을 배운다. 그는 마니교에서 떠나는 것을 하나님의 손이 은밀한 섭리 가운데서 그의 영혼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한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하신 일이오니 주님이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그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로마로 간다. 로마고 가고 싶었던 이유를 말한다. 물론 친구가 약속한 좋은 보수와 높은 자리도 잇지만 가장 크고 유일한 동기는 그 곳 학생들이 더 조용히 공부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는 당신을 죽어가는 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였다. 한편은 미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게 헛된 희망을 약속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셨다. 어거스틴의 어머니의 기도는 물질적인, 변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어거스틴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다. 어거스틴은 죄를 지엇을때도 그것을 자기죄로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기 보다 자신을 변명하고 자신안에 있는 것에게로 죄를 돌렸다. 자기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죄였음을 고백한다. 그는 당시 하나님과 악 모든 것을 실체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신적 실체가 어떻게 악에 물들지 않은 채 육체와 결합할 수 있는지, 그렇게 되면 육체로 말미암아 더렵혀 졌다고 믿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밀라노에 와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난다. 이때부터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구약의 한두 구절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 되었지만 영적으로 풀어 설명해 줄 때 기독교 신앙의 합리적 근거가 옹호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마니교를 떠난다.
6권 어거스틴의 고민
4/14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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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이 로마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어거스틴을 찾아왔다. 그는 어머니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머니는 마음 속으로 (나인성의 과부처럼) 나를 관속에 넣어 당신 앞에 놓고 당신이 저 과부의 아들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다.' 거기서 어머니는 아프리카에서 하던 낡은 습관 즉, 죽과 떡과 술을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사당에 가서 바쳤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가 그것을 금하자 그녀는 그것을 중단하였다. 그대신 어머니는 순수한 기도를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암브로시우스를 행복한 사람이라 여긴다. 그는 항상 독서에 심취해 있곤 하였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은 어느 공간에 제한 받음이 없이 전체로 어디에든지 존재하신다.
어거스틴은 이제 구약성서의 율법과 예언서를 읽을 때 이전에 하듯이 하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읽게 되었다. 나는 암브로시우스가 교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성서 본문을 성서 해석의 규범으로 삼아 강력하게 추천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로부터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보지 않고도 믿게 되었다. 누군가가 '성서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줄 어떻게 아는가'할때도 그 물음보다 어거스틴은 먼저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서는 사색하는 사람에게 심각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때 어거스틴은 명예, 돈, 결혼을 열망했는데 어거스틴은 길거리를 가다가 거지를 발견하고는 그 자신과 거지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행복할까 고민했다. 자신이 결코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근심으로 속태울 때 거지는 즐거움에 넘쳐 흘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술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알리피우스라는 자를 알게 된다. 그는 나쁜 친구들에 이끌리어 투사들의 투기 경기장으로 인도되어서 거기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알리피우스는 법률을 공부해서 법률계에서 종사하는데 그는 그를 금하는 공평성이 자신의 직책이 부여하는 특권보다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지혜에 애정을 느껴 그것을 찾기만 하면 헛된 희망과 거짓된 욕심을 버리기로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주님게 전향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알리파우스는 어거스틴이 결혼하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결혼을 해도 지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기들의 친구들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논증을 반박했다. 어거스틴은 자신은 성적 경험이 이미 습관화되어서 끊기가 힘들다고 말해주었다. 그 영향으로 알리피우스 또한 결혼 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단지 호기심에 의한 것이다. 그당시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권유로 정혼 나이에 두 살 모자라는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된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속세를 떠나 한적한 생활을 해 보자고 의논을 해서 네것, 내것 없이 공동재산을 가지기로 했는데 인원 10명 정도로 생각을 했으나 그러나 부인들이 그것을 허락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이 나오자 모든 계획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저 버리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당시 살았던 동거인을 결혼에 방해가 된다해서 떠나게 했다. 그에게 아들을 남겨 두고 떠났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또 한명의 동거인을 맞아 들인다. 어거스틴은 그가 육체적 쾌락의 심연에 깊이 빠져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지한 것은 죽음과 장차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른것들은 시간과 함께 바뀌어졌으나 두려움은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심을 고백한다.
'달려오너라. 내가 너희를 붙잡아 목적지 까지 인도해 주마, 거기에 가서는 너희를 붙잡아 주마.'
모르겠다. 어거스틴이 고민했던 것만큼 나 자신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7권 신의 본성, 악의 본질, 기독론 문제에 대하여
4/21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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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공간 속에서 부피를 차지하는 실체로 이해를 했다. 그분은 불멸하시고 불변하시며 침해될 수 없는 존재로 믿는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공간이 없는 존재는 절대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바꾼다. 그것은 이 이론을 따르면 땅의 큰 부분 또는 큰 물질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차지하게 되고 땅의 작은 부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덜 차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존재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분적으로 세상에 임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와 악에 대한 문제로 고민을 한다. 자유의지는 무엇이고 악은 어디서 왔을까? 자유의지에 대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원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의지의 주체는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에 대해서는 선하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는데 누가 내안에 이 악을 넣었으며 만일 악마가 이 일을 해 놓았으면 그 악마는 어디서 왔을까? 이제 그는 하나님은 최고선이심을 고백을 한다. 그는 타락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가 타락할 수 있다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악이란 무엇일까? 어디서왔을까?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만일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악을 공연히 두려워 한다면 바로 두려움 자체가 우리 마음을 찌르고 괴롭히는 악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 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체가 악이든지 그 중의 하나이다.
어거스틴은 '나는 이러한 난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 죽지 않을까 심히 불안해 했다고 한다.'고 고백을 했다. 이것은 그의 삶에 대한 치열성이다. 성서와 플라톤 철학차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모든 존재는 다 선하다. 아주 좋은 것은 나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면 나빠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빠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존재에 해를 끼치는 것인데 해를 끼친다 함은 그 존재의 좋은 것을
감소시키는 것밖에 안된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위에 있는 존재가 아래에 있는 존재보다 더 좋으나 모든 피조
물이 함께 화합해서 존재한 것이 위층에 있는 존재가 홀로 있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
유한한 것들이 당신안에 존재해 있다함은 어떤 공간안에 존재해 있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진리의 손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실체가 아니고 인간의지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안에 깊이 놓여있는 보배를 버리고 뜻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잔뜩 부풀어 있음을 말한다.
육체-> 영혼-> 혼의 내적 지각 -> 이성 -> 지성의 원리 -> 존재자체
그는 예수를 참 인간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본 것은 그가 진리의 화신이라고 보기 보다는 지혜에 참여한 인간성의 탁월성과 완전성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 책에서 발견못한 것을 성서에서 발견했다. 경건의 표현, 고백의 눈물, 당신의 희생, 괴로워하는 마음등 이런 것 없었다.
문제제기)
악의 기운에 대한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한다. 그 악이 실체이든 아니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이물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했지만 이 악의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신정론에 대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전능개념을 수정해야 한다. 이 세계에 대해서 관여만 하시고 이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군주적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 뿐이다. 하나님은 이세상과 상호 관계 속에서 계신 분이시다. 우리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감정이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에는 초월적 유신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아닐까?
8권 어거스틴의 회심
4/28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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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았지만 확신은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불명의 실체요 다른 모든 실체의 근원이 되심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강한 확실성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견고회 서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갔다. 어거스틴은 다른 모든 명예와 돈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러라 여자의 사랑에서만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신앙의 아버지였다. 그는 찾아간 어거스틴은 그에게 빅토리누스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때 까지 우상을 숭배하였고 로마의 모든 귀족들이 열을 올렸던 그 신성모독의 종교의식에 적극 참여한 자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의 어린아이기 되었고 겸손의 멍에를 목에 매고 십자가의 수치 앞에 엎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빅토리누스는 가끔씩 심플리키아누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성서를 읽고 모든 기독교 문헌들을 철저히 조사한 후에 '나는 이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네는 알아야 해.' 그 말에 심플리키아누스는 '내가 자네를 기독교회 안에서 보지 않는 한 자네가 말한 것을 믿지도 않을 것이요, 또한 자네를 기독교 신자로 간주하지도 않겠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빅토리누스는 비웃으면서 '그러면 교회의 벽이 교인을 만드는 것인가?'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독서와 명상을 통해서 점점 용기를 얻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할 경우 그리스도도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되면서 심플리키아누스에게 '자, 교회에 같이 가세!' '나는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 아홉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뻐하신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보다 그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거나 다시 얻을 때 더 기쁜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을 한다. 인간은 어떤 아픔을 통해서 인생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로움을 먼저 경험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먹고 마시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큰 기쁨이란 어디서나 큰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 경험되는 것이다.
이 8권에서 어거스틴의 회심의 모습의 장면을 본다. 어거스틴은 정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오, 주여 어느때까지 입니까? 오, 주여, 어느때까지 입니까?' 그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때 어거스틴은 방으로 들어와서 성경책을 들고 읽었다. 그 말씀이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새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는 롬13:13-14말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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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변화시켜준 혹은 자신의 평생의 말씀으로 삼고 있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이 어거스틴에게서는 롬13:13-14절 말씀일 것이고 본인에게는 사43:1-3말씀이다. 그 말씀에 보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너가 물가운데 지날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고 불가운데 지날때에도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불렀으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해됨이 없고 상함이 없도록 지켜주신다는 말씀 아닐까?
한사람을 끝까지 책임 지시는 하나님, 잃어 버린 어린양 한 마리를 끝까지 책임 지시는 하나님, 그가 당하는 고통을 그보다 더욱더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렇지만 그를 찾을 때 그래서 그가 새로운 삶을 살 때 그보다 더욱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한 애절한 눈물겨운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그 사랑을 믿는다.
9권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5/12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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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이 9권에서 수사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세례를 받는 장면과 어머니 모니카의 생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어머니는 나를 육신으로는 시간의 빛에 태어나게 하셨고 마음으로는 영원한 빛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오라 어머니에게 주신 당신의 은혜입니다. "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아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누릴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어거스틴 네가 세상의 행복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느냐?"라고 죽음 직전에 말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오늘은 어거스틴이 어머니 모니카를 생각하면서 쓴 부분이기에 어머니에게 편지 쓴 것으로 대신 하고자 한다.
엄마!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내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엄마가 있어서 난 참 좋다. 자주 엄마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어서 난 그것이 너무 좋다. 곧 서른의 나이가 되는데 아직까지 어머니라고 불러드리지 못하고 엄마하고 부르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다 큰 놈이 아직 엄마라 한다고 나무라시지만 엄마, 그것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는거 아닌거 엄마도 알지?
엄마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그날이 오겠지만 바램이 있다면 그날이 될 수 있는 한 늦어지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는 날이 오면 그날부터 왠지 모르게 엄마와 멀어질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지.
엄마,
이번주는 우리 중등부에서 어버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어버이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번주 설교는 설교로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엄마에게 편지 쓴 것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냥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냥 그렇게 쓰고 그렇게 끝맺으려고 한다. 중등부 애들에게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이 편지를 읽는데 전도사가 되어서 어머니라 불러 드리지 못하고 엄마로 부르는 것이 저들이 생각하기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다소 쪽팔린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그게 좋은데 어떡해.
엄마, 이것을 읽고 끝내면 무슨 설교가 그렇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 살다보면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는법.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렇게 틀에 박혀서 살아가는 것 너무 갑갑하잖아? 그지 엄마. 이 말을 하는 것은 사전에 미리 말을 함으로써 설교가 끝나고 난뒤의 사태를 무마시키기 위함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중에 전반부 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라면 후반부 6계명은 인간과 인간 관계인데 그 중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5번째 즉, 첫 계명으로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우리 인륜에서는 가장 큰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답이지. 그냥 답인 것이다. 문제는 그 답을 답으로써 찾아가는 과정이 문제가 아닐까?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그냥 설교로 할까? '여러분, 부모님을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이번 어버이 주일 설교를 할텐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말이 그저 그렇게 전해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엄마,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사실 엄마에게 효도한번 제대로 한적 없지. 그 효도 개념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지만 그렇게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린 적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 있어서 엄마에게 용돈을 드린적도 없는 것 같고, 친구들은 벌써 장가도 가고 능력이 있어서 어떤 놈은 벌써 둘째 손주를 부모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그리고 직장에도 열심히 다니고 해서 내집 마련의 부푼 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아직까지 장가도 가지 않고 장가갈 마음은 있는지 없는지 항상 걱정하면서 엄마는 나를 지켜보지만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삶이 좋다.
장가, 그거 좀 늦게 갈 수도 있고 자식이야 한꺼번에 쌍둥이 낳으면 되지. 그런데 사실 두려운 것은 자식을 낳았는데, 엄마, 나 같은 놈이 나오면 난 어떻게 감당을 할까? 두렵잖아? 가끔씩 미친짓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지? 같이 미친짓을 할까? 그러면 우리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실까? 그런데 엄마, 올해 중등부 선생님들과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는데 연초부터 '나의 하와를 만나게 해달라고' 나의 기도부탁을 했는데 아직까지 응답이 없는걸 보니까 아무래도 선생님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봐. 엄마가 우리 선생님들이 기도좀 할 수 있도록 기도좀 해줬으면 한다.
그러나 엄마, 올해안에 기필코 한명을 데리고 갈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엄마, 내가 원래 어릴 때 부터 한 Tough하는 captain 박 아니유, 그래서 말인데 정 없으면 교수님이라도 데리고 갈테니까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돈, 사실 그것에는 원래부터 관심이 없는 것 엄마도 알잖아? 보통 친구들 처럼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고 그리고 내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이 세상 돈 때문에 아둥바둥 이리저리 치이면서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내가 왜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일까? 그런것에 대한 생각은 내 삶의 생각 속에는 없잖아. 또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냥 세끼 굶지 않고 먹고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엄마, 나는 살고 싶다. 정말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 생을 살아가고픈 마음이 있지. 내 마음을 표현 하면서 그 마음에 비추어서 나는 정말로 살고 싶은 것이지.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중요하고 그래서 무엇을 먼저 해야 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또 그렇게 살고 싶지. 그러나 그것이 계산된 삶을 의미한다면 그런 삶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지. 열정을 갖고 싶은 것이지. 내가 사는 삶에 나의 열정을 쏟아서 모든 일에 임하고 싶은 것이지. 狂氣있게 살고 싶은 것이지. 객기가 아닌 광기. 그것은 미친다는 것 아닐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미치면서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만이 삶의 희망이고 그것만이 삶의 기쁨이기에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 그 누가 뭐라 해도 정열적으로 헌신적으로 미친듯이 하는 것을 의미하지. 그러나 그것이 꼭 무엇을 이루어야만 된다고 생각지는 않지. 무슨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 다만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지.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삶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지. 태양빛 아래 뉘인 작은 내 그림자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어차피 쳐다볼 수 없는 태양빛이라면 내 작은 그림자 사랑해야지. 그 그림자 사라지기 전에.
엄마, 오늘 말씀에 보니까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그런 표현이 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드리기를 원하지. 우리의 잘난 것, 우리의 재능, 우리의 지식, 기술, 시간, 돈, 이런 것 보다도 가식적이지 않고 형식적이지 않는 그저 아무런 계산됨이 없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 한송이를 주면서 '이것은 내 마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 아닐까?
엄마 또한 이런 마음 아닐까?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 그래 난 내 마음을 엄마에게 드리고자 한다. 엄마는 내가 그 무엇을 드리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지. 내가 선물을 드리지 않아도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그리고 그 무엇을 드리지 않아도 엄마는 나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 나는 알지. 그러나 내가 엄마에게 내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면 엄마는 굉장히 섭섭해 하고 굉장히 괴로워 할거야 그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마음이지.
엄마, 정말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서 마음이 통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은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그런 삶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그 삶이 이 세상에서 가능할까? 엄마 가끔씩 그런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하면 나는 굉장히 괴롭다. 그러고 싶은데 정말로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자신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그런데 그것이 내 혼자만 괴로운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으로 인해 괴로워할까? 그런 것으로 고민을 할까?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을 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한다. 엄마, 내가 편지 자주 쓰는 것 엄마도 알잖아. 그 편지를 쓰는 이유도 마음을 주기 위한 것인데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해야만 되는 말이 있다면 주로 편지를 써서 말했지. 그것은 직접 만나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리된 마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편지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편지에서 나의 마음을 읽었으면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그 다음의 행동은 나의 몫이 아니고 그 사람의 몫인것이지.
또 그 다음 표현이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우리의 눈으로 엄마가 가고 계신 그 길을 즐거워하라는 말씀일 거다. 나는 엄마가 살아가는 삶이 좋다. 특별히 뚜렷한 것은 없으시지만 지금은 집에서 손주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활하시면서 살아가는 엄마의 삶이 좋다. 아니, 난 엄마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인생의 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그것보다 더 즐거운 즐거움은 나에게는 없다.
엄마,
오늘따라 많이 울고 싶어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울고 싶어진다. 엄마, 난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엄마 같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같은 분이기도 하지만 엄마같은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엄마, 옆에 계신 아버지가 섭섭해 하시겠지만 이해하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드렸기에 이해하실거다. 우리 자식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보다 더 관심을 써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는 분이 우리의 엄마 아닐까? 우리네 아버지는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속으로 혼자서 삭이시지만 엄마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기에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기에 하나님 또한 엄마 같은 성품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확신한다.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자신의 자녀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하나님,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지옥가는 마지막 한 생명까지도 천국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그 눈물은 하나님의 사랑일진데 그 하나님이 그 예수님이 이 어버이 주일에 엄마를 더욱 생각나게 만든다.
엄마, 두서 없이 많이 쓴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써야 할 것 같다. 오래 읽으면 우리 중등부 애들이 싫어하고 또 선생님들도 싫어한다. 애들은 애들이기에 이해가 가지만 선생님들이 싫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그리고 조금더 하면 간 크다고 할 것 같아서 또 잘못하면 맞을 것 같아서 이만 줄인다.
마지막 한마디. 엄마. 사랑해요.
1998년 5월 어버이 주일을 맞으며
아직까지 그래도 영원한 엄마의 마마보이가 되고 싶은 엄마의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
10권 기억의 신비
5/26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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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을 받고 있는데 우리가 매일 시련을 받고 있는 도가니는 인간의 혀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혀가 없으면 우리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인데 그 혀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기에 옛 어른들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일을 저지를 수 있기에 조심해서 사용을 하라는 말일 것이다. 날마다 말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그것도 정말로 해야할 말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타인과 화해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말보다는 자기를 내 세우는 말을 하는 우리, 그러기에 타인을 비판하거나 욕하는 우리의 혀.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어쩌면 일정정도의 평가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좋은 평가이든 나쁜 평가이든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면 누구든지 타인으로부터 꾸지람이나 질책이나 나무람 보다는 그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무엇인가 했을 때 그것을 잘했다고 칭찬하면 그 아이는 그것으로 인해 더 신바람이 나서 자기 안에 있는 엔돌핀이 생성이 되어서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앞으로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조금은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 더 잘 생활 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에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이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칭찬 보다는 진리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좋은 점 보고 칭찬했다고 해서 내 즐거움이 증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 내 즐거움이 증가되고 비난할 때 내 즐거움이 감소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에 의해 기분이 좌지우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기분좋은 말에 의해 하루를 신나게 활기차게 살아가다가도 누군가가 말하는 한 마디의 기분나쁜 말에 의해 우리는 의기소침해서 그를 미워하면서 살아갈 경우가 많다. 나의 생활의 모습과 태도와 삶의 자세가 누군가의 평가로 인해서 움직여 진다면 그 사람은 끊임 없이 누군가의 평을 들으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곤두 세우고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그런 삶 만큼 더 피곤한 것이 어디 있을까?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의 자세와 꿋꿋함 아닐까? 나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울려 퍼지는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음성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더 멋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기에 칭찬 보다는 진리를 더 좋아한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아마도 그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곳은 너무나도 많은 말이 있는 동네가 아닌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지 않나? 이렇게 말한 것이 저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나? 그 사람을 칭찬해준 말이 비판을 했다고 말을 하지 않나? 그것으로 인해 서로 싸우고 어색해 하고 그래서 교회가 시끄럽고 어지럽고 분열이 생기고 함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할 공동체가 분열되는 모습을 많이 보곤 한다. 그래서 끝내 서로 헤어지게 되는 이 경우는 말에 의해서 서로 상처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이럴때는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보고 침묵을 지켜야 할 때이다. 지금은 말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시기가 아니라 언어가 없어서 대화가 되지 않은 시기가 아니라 말이 너무 많기에 대화가 되지 않은 시대 아닐까? 그러기에 언어를 아껴야 할 것이다. 그 언어를 아끼는 것이 비겁한 침묵이 아닌 정당한 침묵이라면 수 만 마디의 값싼 말 보다는 한 순간의 침묵이 한 인간과 인간 영혼과 영혼의 대화를 더 깊이 있도록 해 주는 힘이 될 것이다.
11권 시간과 영원
6/2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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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을까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전에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채 쉬고 계셨다면 왜 그는 그러한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으셨느냐? 만일 하나님 안에 어떤 변동이 일어나 전에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어떤 것을 만드시려고 새로운 뜻을 세웠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참으로 영원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에 없었던 의지가 하나님 안에 새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의지는 피조물이 아니고 그 창조를 선행하고 있으므로 창조자의 의지가 창조를 앞서 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본체에 속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긴 시간이란 동시적으로 존재 할 수 없는 여러 사건의 계속적인 흐름이 긴 것이라는 것, 영원에는 아무 것도 지나가는 것이 없어 모든 전체가 동시적으로 현재적이라는 것, 그리고 시긴이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동시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붸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르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하시고 계셨는가? 라고 묻는자에게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만드시지 않으셨다고 선언하고 싶다고 한다. 시간 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기에 하나님이 만드시기 이전에는 아무 시간도 지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시간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이 묻기를 당신이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라고 묻습니까? 왜냥하면 시간이 없을때에 그때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확신한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 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하여 있게 되는 것이냐?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가 -시간이 되기 위해서 -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데 있다는 말이 아니냐? 그르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거스틴에게서 명확한 것은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일의 현재, 현재일의 현재, 미래일의 현재라는 세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즉 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이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또 한 고민에 빠진다. 하루란 태양의 운동 그 자체냐 혹은 그 운동이 완성된 시간의 길이냐 혹은 그 둘 다냐?라는 질문이다. 만일 태양이 궤도를 한바퀴 도는 그 운동이 하루를 이룬다면 태양이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그 운동을 끝마쳐도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시간의 길이를 하루로 여긴다해도 한시간에 한바퀴 돈다면 그것이 하루이냐? 또한 두가지 모두가 하루를 이룬다고 해도 하루가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천체의 운동이 시간이 아니다. 전투에서 태양은 멈추었어도 시간은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간을 어떤 종류의 길이라고 본다.
12권 무로부터의 창조, 질료와 형상
6/9 9632086 3학년 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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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해석한다. 어떤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를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과 함께 계시는 말씀 안에서 이 지적인 존재와 감각적인 존재, 즉 영적인 피조물과 육적인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어떤 사람은 이와는 다른 뜻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과 함께 계시는 말씀 안에서 -우리가 현저하게 보고 알 수 있는 모든 자연을 포함한 - 물질적인 세계를 이루는 보편적 질료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과 함께 계시는 말씀 안에서 물질적인 피조물을 이루게 될 무형의 질료를 만드셨는데 그 안에서는 하늘과 땅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혼돈 상태로 있었다.
2절 "땅은 보이지 않고 형상이 없었으며 어둠이 심연 위에 있으니라"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물질적인 세계는 아직 혼돈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후에 물질적인 세계를 이루게 될 질료로서 아직은 어떠한 질서와 형상과 빛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다. "하늘과 땅이라고 부르는 이 모든 것은 아직 아무 형상이나 빛을 받지 못한 질료의 상태에 있었다. 이 질료로부터 - 우리가 육체적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는 - 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것이다"라고
해석의 정신
오 주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면 당신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인간처럼 혈육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통찰력이 부족하여 당신이 이 말씀을 통하여 후세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시는 당신의 선하신 영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혹시 모세가 이 말씀을 쓸 때 다른 많은 뜻 중에서 다만 하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썼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당신의 영이 모를 리 없습니다. 만일 모세가 많은 뜻 중에서도 하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하나의 뜻은 다른 많은 뜻보다 더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주님 그러나 모세가 알고 있었던 그 뜻이든지 아니면 당신이 원하시는 다른 뜻이 있으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소서.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종 모세에게 보여주신 그 뜻을 보여 주시든지 혹은 이 말씀의 다른 뜻을 보여 주시든지 간에 당신이 우리를 먹이시는 것은 틀림없으니 그릇된 해석이 우리를 속이지 말게 하소서. 오 내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몇 마디의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정말 얼마나 많이 해석을 해왔는지 보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쓴다면 내가 당신의 책 전부에 대한 해석을 쓸 때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겠습니까? 원하오니 이제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대하여 짤막하게 고백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탓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당신의 영감으로 나로 하여금 참되고 확실하며 좋은 하나의 의미를 선택하게 하소서. 만일 내 해석이 당신의 종 모세가 의도한 것과 일치한다면 그것이 가장 옳고 좋은 것이므로 그것을 위해 노력하려는 것이 내 고백의 신앙입니다. 내가 혹시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진리가 모세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처럼 당신의 진리가 그의 말을 통해 나에게 말씀 하시려고 하신 뜻을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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