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곳 제암리 3.1운동 학살사건 현장은
3·1운동 때 일제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대표적인 학살사건현장으로, 이곳에서의 3·1운동은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던 것을 시작으로 하였다.
4월 5일에는 발안의 장날이어서, 이날 향남면과 팔탄면의 주민 천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는데, 일제의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하므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투석전을 벌여 경찰부장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
일제는 수원에 주둔한 경찰과 헌병대를 동원하여 보복에 나섰는데, 4월 15일 오후에는 각처에서 보복행위를 하던 발길을 제암리로 돌리었다.
일본군 20사단 39여단 78연대소속 유전준부 중위가 이끄는 1개소대의 병력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는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하였다. 초가집으로 된 교회당에 주민이 모이자 일본군은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고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교회당 밖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으므로 누구의 시체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을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부락을 다니며 민가에 방화를 했는데 33동의 민가 가운데 외딴집 2채를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또 이웃한 고주리로 달려간 일군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은 안정옥 · 안정린 · 안종락 · 안종엽 · 안종환 · 안종후 · 안유순 · 안무순 · 안진순 · 안봉순 · 안경순 · 안필순 · 안명순 · 안관순 · 안상용 · 조경칠 · 조태성과 그의 부인 김씨 · 홍원식과 그의 부인 김씨 · 홍순진 · 김정헌 · 김덕용 등이었는데, 부인들은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다가 잔인한 일본군에게 총검으로 살해된 것이었다.
이웃 고주리에서도 김흥렬 · 김성렬 · 김세열 · 김주업 · 김주남 · 김흥복 등이 칼에 찔려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유해의 발굴이 도의리 산31-1번지에서 이루어져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또 1959년에 세워진 기념탑을 정비하고, 1983년에는 제암리사건의 전시시설을 만들어 국민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도록 하고 있다.
제암리 뒷동산의 만세소리
- 일제 만행에 항거하여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제암리 주민들의 만세 시위 모습
일제의 만행
- 잊혀지지 않는 생지옥의 그날
- 일본군 교회에서 한국인 23명 학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자유롭게 저! 하늘을
- 3.1 독립만세운동으로 무참히 학살된 순국선열 23명의 넋을 기리고, 자주 독립 의지를 계승하기 위하여 이곳에 추모의 뜻을 세우다.
-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은 순국 선열들의 혼을 담은 추모비이며, 높이 솟은 기둥은 무한한 반전과 자유를, 기둥의 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미래 세계를 상징한다.
23인의 합장묘
3.1운동 순국기념탑
제목 : 살육의 자리
- 제암리 학살 사건을 반 추상화한 작품으로 화염과 고통으로 가득찬 총검의 무자비한 살육 현장을 금속성에서 배어 나오는 강렬한 메세지를 통하여 냉정하고도 처참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제암리의 학살 - 박목월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은
이제와서 끌 수 없고
교회안에 모였던
스물 여덟명의 형제를
살려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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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정신상
고주리에서의 학살 현장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첫댓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