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 신자라면 엔도 슈사쿠의 명작 [침묵]을 한번 쯤은 읽었거나 이름이라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일런스]도 2월에 개봉하였다. 나는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를 둘 다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침묵]의 뒷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소설과 영화를 통해 받은 감동을 기대하며 찾아보았다. 바로 [침묵의 소리]이다. 작가 엔도 슈사쿠가 세상을 떠나기 4년전인 1992년에 출판된 책이었지만 한국에는 작년에야 비로소 개신교계열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침묵'과 그와 반대되는 '소리'가 만나 '침묵의 소리'라니 뭔가 역설적으로 느껴지고 작가의 깊은 뜻이 숨어있는 듯 하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침묵'하시는 하느님과 우리에게 뭔가를 계속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소리'가 만나 뭔가 변증법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소설이 아니었다. 이 책은 소설 [침묵]이 발표된 1966년에서부터 30년이 지난 시기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스스로 언급한 책이다. [침묵]을 집필하기까지의 경위와 배경, 그 후의 반응에 대해 작가의 견해를 밝히고, [침묵]이 발표되었던 전후의 시기에 동일한 주제로 썼던 ([침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단편들을 싣고 있다. 중요한 것은 [침묵]의 마지막장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실려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마지막 장을 통해 '신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전 세계의 수많은 번역본들에서 그 마지막 장은 누락되었고, 그 마지막 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독자들은 '신은 그저 침묵하셨다.'고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들에서도 그 마지막 장은 빠져있고, 나 역시 [침묵]을 읽고 나서 하느님은 침묵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이어진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소설 [침묵]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자기의 소설이 올바로 이해되지 않았음에 답답했을 작가의 심정이 오죽했으면 30년이 지난 시점에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을까. [침묵의 소리]를 읽고 나니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가 다르게 다가왔다. 비극으로 보였지만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게 보였다. 하느님은 침묵을 통해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소설 [침묵]에서 죄를 고백하고서도 계속 죄에 떨어지는 기치지로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를 붙잡히도록 밀고한 기치지로는 옥중의 로드리고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청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했다는 자책감과 자기를 팔아넘겼다는 인간적인 원망으로 주춤하지만 결국 사죄경을 읊어준다. 이 부분에서 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느꼈고, 고해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같은 죄를 습관처럼 반복하게 될 나의 모습을 보았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는 부분에서는 우리를 위해 못박히시는 예수님을 상상 했다. [침묵의 소리]를 읽기 전에는 그 뿐이었다. 마지막 장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 그 뒷이야기가 실려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표면적으로 배교는 하였지만 오늘날 교도소와 같은 기리시탄 주거지 내에서 열심히 신앙을 전파한다. 나약한 기치지로 또한 추궁과정에서 로드리고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돌리는 강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고문받고 있던 다른 신자를 살리기 위해서 라지만 배교를 하지 않았던가.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역사는 표면적이고, 그 기록을 했던 누군가의 관점으로 전해진다. 겉으로만 배교했다고 해도 후미에를 밟았기에 역사에 배교자로 전해지게 될 처지와 지금까지의 노력이 일본이라는 진흙과 같은 나라에서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자괴감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화 [사일런스]에서는 마지막에 한가닥 여운을 남겨준다.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가 죽는 순간에 남들 몰래 손 안에 십자가를 쥐고 있는 것이다. 비록 배교는 하였지만 신앙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살리는 (설령 그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라도) 배교와 영광의 이름을 남기며 담대하게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중에 어느 것이 값진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이전에는 당연히 순교가 더 숭고하다고 했겠지만 [침묵의 소리]를 읽고 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극중 로드리고 신부는 순교자보다 더 값진 배교자의 삶을 살았다. 후미에를 밟은 그 순간부터 남들은 배교자라고 비난하지만 주님만은 알아주시는 고통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기의 명예까지도 버리고, 순교에의 열망도 버리고 남은 삶을 예수님과 함께 모욕당하고, 가시관쓰고, 못박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신듯 보였지만 로드리고 신부의 삶을 통해 계속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은 삶도 다른 차원에서의 순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머리말에 썼던 문구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은 이 시점에 정말 와닿는 말이다. 그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남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빗나간 감동을 가지고만 있었을 것이다. 나의 후미에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고단한 삶 안에서 시간을 내어 드리는 성체조배와 렉시오 디비나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의 영적 갈증도 해소해주고 영혼에 달콤함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막상 수도원에 들어와 살아보니 수도원 일과에 치여 말씀묵상을 할 시간도 없고 성체조배를 할 시간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듯이 느껴지기도 하고 감미로움이 없으니 기쁨도 없어지는 듯 하다. 수도원에 들어온지 한달이 지난 지금의 나는 성체조배와 렉시오 디비나라는 후미에를 밟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 순간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토비야. 괜찮아. 전처럼 성체조배를 못해도 렉시오 디비나를 못해도 괜찮으니 마음껏 밟으며 양성과정이나 잘 따라가거라. 앞으로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살아갈 너의 삶을 통해 나는 말 할 것이니까.”
- '후미에'란 '밟는 그림'이라는 뜻으로서, 기독교 신자를 배교시키기 위해서나 그러한 배교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후미에를 밟으면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으로 간주되어서 풀려났다. [침묵의 소리, 25p 주]
첫댓글 비록 [침묵]은 안 읽었지만, 이 글을 읽고나니 직접 읽지 않아도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시간이 지나자 일본인 신자들은 후미에를 실시하는 곳을 일부러 피해 돌아가거나 피할 수 없다면 전날
아침에 발을 씻고 성상의 얼굴을 피해서 밟고 지나간 후 발을 씻은 물을 마시고 묵상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다. 라고 하신 대목이 가장 와 닿았어요. 정말 좋은 내용이네요. 시간이 되면 저도 보고 싶네요.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정말 읽어 보고 싶네요. 그리고 로드리고(영화에선 로드리게스)신부는 마지막까지 신앙을 전파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감동적이고 솔직한 리뷰 감사합니다. 저의 후미에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베스트셀러였던『침묵』도 읽지 못했고, 영화 ‘사일런스’도 보지 못했습니다. 매일 제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들 속에서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어요. 물론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독후감을 읽고 있는데 <침묵의 소리>가 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책도 읽어보고, 영화도 봐야겠습니다.
신부님 논문이 술술 풀리고 빨리 끝나서 기회가 찾아오길 바랍니다.
오래전에 "침묵"을 읽고 힘들었던 마음이 다시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서도 좋은 것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에 창세기의 요셉 일화를 자주 떠올리지요.(창45,5-8) 주님을 따르는 일에 어려움이 생길 때도 있겠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앞으로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살아갈 너의 삶을 통해 나는 말 할 것이니까.") 을 잘 새기면서 좋은 수도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통중의 희망을 가지고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 다시한번 도전해보시는게 어떠신지요?
엔도슈사쿠 침묵 공연
7년간 200회 공연을 했습니다
소설의 감동을 연극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극단 단홍 010-8227-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