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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 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의인의 대표로 욥과 노아, 그리고 다니엘을 꼽고 있다.
선정 기준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등, 그 많은 의인을 제치고 욥이 의인 '베스트3'에 들다니 대단한 영광이 아닐수 없다.
미국이나 영국등 기독교 국가에선 의로운 성경인물의 이름을 따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애브러햄, 아이작, 제이콥, 죠셉, 구약의 족장시대부터 매튜,마크.루카스, 존, 피터, 토마스, 폴 등등, 신약의 사도시대까지...
카인과 아벨, 삼손 유다 등, 악인이거나 불행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이름 또한 없지만, 욥은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아 물질의 복도 어마하게 받은 사람이다.
그래도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에게 욥의 이름을 빌려 경우가 없다.
그만큼 욥이 겪은 고난이 혹독하기 때문이고 아무도 그런 고난을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욥기의 줄거리를 보면 욥은 처음엔 정말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출발한다.
그의 부는 '우스'란 땅에서 제일 가는 갑부로 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쯤 되는 재벌이다.
자녀도 아들 일곱에 딸 셋으로 열명인데, 7과 3이 모두 하나님의 수로 완전수이며 이 합인 10도 완전수로 완전한 삶을 의미한다.
거기다 믿음도 좋아 자식들이 하나님께 마음으로 죄를 지을까봐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끝날때마다 자녀 수 대로 번제를 드렸다.
정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완전한 행복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사단의 개입으로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다 날아간 것이다.
그 계기는 어느 날 천국의 연합 회의에 참석한 사단으로 인한다.
지금은 사단이 완전히 쫒겨났지만, 이때는 천국 출입이 가능했던 때인거 같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을 의인이라 칭찬하니 반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셨으니 그렇지요. 그에게 준걸 다 뺏어 보십시요. 분명히 하나님을 욕하고 배반할것입니다. 제가 한번 해볼까요?"
이에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다 사단에게 맡긴다.
그러자 사단은 이때다 싶게 참으로 가혹하게 그의 가축, 종들, 그리고 자녀까지 다 죽여버린다.
그러자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을지어다." 란 유명한 말을 한다.
어찌보면 오기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듯 욥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자 사단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의 몸을 치면 이번엔 하나님을 욕할것이라 말하며 그의 몸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한다.
이에 하나님은 욥의 몸까지 사단에게 넘기며 그 생명은 해하지 말라 한다.
이에 말이 떨어지자 마자, 사단은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몸에 악창이 나게 한다.
거지가 되어 기왓장으로 자기몸을 벅벅 긁는 욥에게 보다 못한 욥의 처는 이제 그만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욥은 우리가 여호와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처의 복장을 터트린다.
그 와중에 친구들도 와서 괴롭히고 욥은 꿋꿋하게 견디고 고난을 이겨낸다.
그래서 결국은 사단은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지고 하나님은 그에게 두배의 복을 내린다는 게 욥의 줄거리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알고 있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보면 참으로 시험에 들만 한 이야기다.
나도 예전엔 욥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잘 읽지 않았고, 아들 또한 이러한 욥기의 스토리에 반발했다.
"아니, 재물이야 그렇다치고 자식까지 죽이다니, 나중에 자식 열명을 더 얻은 게 그 죽은 자식들이 아니잖아. 도대체 내기 때문에 자식과 종들을 죽이다니,
이거 하나님이 자존심 때문에 너무 하신거 아니야?'
아들이 염소과라 이런 의문이 든다기 보다 사고를 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런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처럼 매우 영적이고 심오한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신 이유는 사단과의 자존심 대결이 아니라, 이삭 번제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것 처럼 욥의 고난과 회복을 통해 인류의 구속사를 계시하시려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승리를 알고 계셨기에 그런 고난으로 인해 그가 더욱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길 원하셨다.
욥이 이전엔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라면 고난 후엔 하나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진정한 참된 신앙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단의 농간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가 죄를 짓자, 그 자녀들에서 부터 현재의 우리들까지, 그리고 애꿎은 동물들도 저주를 받은 것처럼, 욥 또한 사단의 개입으로 자녀들과 동물들 까지 재앙에 말려들게 되었다.
욥은 아담처럼 드러나게 죄를 짓진 않았지만 그에겐 '영적 교만'과 '자기의' 란 내밀한 죄가 있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의인이라 말은 했지만, 이러한 욥의 교만과 자기의는 하나님에게 미해결 과제였다.
교만과 자기의를 가진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만과 자기의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죄인것이다.
교만은 입냄새와 같아서 남은 맡아도 자기 자신은 맡을 수 없다고 하지 않나.
욥의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하나님도 해결 하고 싶으셨기에 사랑하는 욥을 마음 아프지만 사단의 손에 붙이신 것이다.
욥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받은 사단은 신이나서 한꺼번에 재앙을 쏟아 붓는다.
아들 딸 종들 가축들 까지, 강도에게 찔려죽고, 번개 맞아 죽고, 집이 무너져 깔려죽고,
죄란 손님은 은밀히 혼자 올때가 많지만 죄의 결과인 재앙은 왁자하게 단체손님으로 올때가 많다.
도무지 어떤 손님부터 응대해야 할지 모르게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뇌물비리로 온 세상이 다 알게 까발겨져 인생나락으로 곤두박칠치는 정치인, 연예인, 종교인등,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여러명이 떠오를 것이다.
명예도 깨지고, 가족도 떠나고, 건강도 잃고... 여기서 자살까지 하면, 그야말로 다 잃는 것이다.
욥을 그들과 비교하기엔 좀 억울한 감이 있지만 모두 죄인 줄 모르게 은밀히 행한 일이다.
그나마 하나님이 사단에게 그 생명은 해하지 말라 했기에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게 했지, 사단은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니, 악다구니를 퍼부울 빌런인 처와 욥을 은근히 시기했던 친구들은 지혜로이 남겨놓았다.
잘사는 친구의 몰락은 그동안 열등감에 시달렸던 친구들에게 안타까움을 가장한 은밀한 쾌감을 준다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다를바가 없다.
'깨끗한 척 했지만 남몰래 지은 죄가 있지 않냐. 사실대로 고해 봐라. 모든게 인과응보다. 원인없는 재앙은 없다.'
내가 어제 밤에 꿈을 꿨는데 어떤 영적인 존재가 "네가 하나님보다 깨끗하냐." 라고 했다며 신권까지 들먹이며 욥을 정죄한다.
욥은 이런 그들에게 난 죄없다며 나도 하나님이 나한테 왜이러는지 묻고 싶다며 끝끝내 결백을 주장하고 급기야 분개하여 너희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악담까지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한 말 싸움 끝에 하나님의 대변자인 듯한 엘리후가 나타나 이둘 모두를 비판한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이 욥에게 폭풍처럼 등장한다.
욥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를 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가운데 회개하나이다."
욥이 회개를 하자, 하나님은 욥을 재앙에서 건져 구원 해준다.
욥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듯 큰 그림으로 보면 인류의 구속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표이다.
욥은 우리 인류를 대표해 비극의 주인공이 된것이다.
아당과 하와가 사단으로 인해 세상을 지배 할 왕권과 모든 축복을 뺏긴 후,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바로 욥이 졸지에 당한 모습이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도 모른 채, 그 재앙을 우왕좌왕 겪어내는 인류의 모습이다.
욥은 부단히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항변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욥과 친구들의 모습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철학과 종교로 구원을 모색해보려하나 모두 해결책을 차지 못하고 실패하는 세상의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엘리후는 선지자들을 예표한다. 또한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례요한이다.
그후, 욥 앞에 현현하신 하나님은 직접 세상으로 내려와 구원의 길을 여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범죄할 당시 구원의 길을 여신것 처럼, 인류를 회복시키실 계획이 있었기에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 하신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본 후, 자신이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날 때 부터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서 자기 의와 교만이 꺾어진 것이다.
누구의 간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듣기로 어느 분이 입신을 해서 천국에 가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너무 속되고 누추해서 엎드려 고개도 못들고 있는데, 자신의 눈 앞의 떨리는 손에 난 솜털 조차도 너무 죄스럽게 느껴져 견딜수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선 아무리 깨끗하게 살았다 하는 사람도 죄되고 추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타서 좀더 깊은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때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물고기는 깊은 물에 안잡힌다는 걸 알았지만 순종한다.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 수고를 했지만 얻은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의지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별 기대없이 그물을 깊은 곳에 내리는데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힌다.
너무 많이 잡혀 다른배의 도움을 청해 두배에 가득 나눠 가득싣게 된다.
베드로는 '이게 왠 횡재냐' 하며 잡은 물고기만 보고 좋아하지 않고 난데없이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을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선생이여'에서 '주여로 바뀐것도 그렇고 왜 갑자기 뜬금없이 베드로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죄인이니 떠나라 했을까.'
예수님이 세례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말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직관이 발달한 베드로는 이 범상치 않은 사건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본 것이다.
그 거룩함앞에 자신의 추하고 죄된 모습이 견딜수 없이 초라했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니 떠나라 한 것이다.
또한 기세등등 기독교인들을 잡아죽이려 가던 바울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그렇게 증오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죄악된 실체를 깨달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욥도 여태 자신은 죄없다 하나님께 묻고 싶다. 주장을 하다 막상 하나님을 만나니 비로서 자신의 추악한 죄인임을 깨달아 저절로 회개가 되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고난은 끝이나고 하나님은 두배의 복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자녀만 두배가 아니지만 천국에 있는 자녀까지 합하면 꼭 두배이다.
두배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인류가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회복시켜 주실 복을 상징한다.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복보다 더 완전하고 큰 복이다.
또한 욥기엔 하나님이 정하신 고난과 정화의 법칙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류가 정화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듯, 육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영은 맑아진다.
23:10에 욥의 유명한 고백이 있다.
'내가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고난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정화의 법칙을 깨닫게 된것이다.
육이 죽으면 영이 기지개를 켠다.
욥은 고난을 통해 영이 맑아져 영계의 비밀까지 알게 된다.
욥 19:25,26
"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계시니 그가 훗날에 땅위에 서리라.
내가 육신이 썪은 후에 내가 죽어서 무덤에 있는 육신 밖에서 내영혼이 주님을 앙모할것이니라."
우리처럼 성경이 있어 공부한 것도 아니고 결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수천년 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자신의 부활을 깨달은 것이다.
영과 육은 시소와 같은 관계이다. 육이 승하면 영은 내려가고 영이 승하면 육은 내려간다.
그래서 왠만큼 영적훈련이 된 사람이 아니면 정신과 육신이 활발히 활동 할때에 영적인 체험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 깊은 기도중이나 비몽사몽간 반수면 상태에서 환상을 보거나 입신을 하는 등 영적인 체험을 한다.
그런데 육이 극한 고통속에 있어도 영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아는 인도의 요가 수행자나 불교의 참선승려들이 자신의 몸을 괴롭혀 영의 세계의 비밀을 알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한들 영의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구속엔 반드시 댓가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엔 생명,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
구약의 율법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이 되어 그리스도의 목숨값으로 우리가 잃었던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고난과 피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것처럼 만물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고난의 법칙이 숨겨져 있다.
솔개의 갱생 이야기는 유명하다. 솔개는 40년 정도의 나이가 되면 무거워진 깃털과 둔탁해진 부리, 발톱을 스스로 뽑고 새로운 깃털과 부리와 발톱이 나오면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30년 정도 더 산다고 한다.
또 나비는 어떤가.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낸 고치는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으로 탈피한 후, 화려하게 나비로 변태한다.
'노페인 노게인' 고통없이 얻는 것이 없다.
세상 만물에는 이렇듯, 하나님의 고난과 갱생의 법칙이 깃들어져 있다.
계시록 6장11절에 순교자의 수가 다 차기까지 란 말씀이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 이후 지금까지 순교자의 수가 700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여기서 얼마나 더 채워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원대하신 꿈, 온전한 피조물들의 구속의 계획이 실현되려면 하나님이 정하신 잔에 순교자의 피가 다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 듯, 우리도 그 남은 고난의 잔에 우리 피를 채워야 할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숱한 박해의 시대 때, 순교자의 수보다 배도자의 수가 월등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배도한 사람을 정죄 할수 만은 없다. 나부터도 고난이 싫고 고문은 생각도 하기 싫다.
마냥 이렇게 편하게 살다 자다가 죽어서 눈 떠보니 천국이고 싶다.
실제로 하나님은 내가 믿은 후, 참으로 살기 좋게 해주셨다. 그래서 지금 처럼 평안하게 특별한 시험없이 인생을 마무리 하고 싶다.
그러나 이세상이 한시적인 세상이고 영원한 세상에 들어기기 위한 시험장이며 또 고난만큼 영광이 있다는 것을 피상적이 아닌 전인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질까.
유명 배우들 중 출연할 영화나 드라마를 결정할때 개런티와 역활의 중요도를 따지지 극중 신분, 직업등의 귀천이나 편한 역할 인지를 보는 바보는 없다.
이 역할을 해서 상을 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고생도 감내하는 것이 배우이다. 배우가 연기중 다치 거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고생담은 영화가 상영될 땐 대중들의 찬사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각종 영화제에서 주연이나 조연상을 받게 되면 배우로서의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배우들처럼 우리가 고난후에 있을 상급과 영광을 안다면, 바울처럼 영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다면...
아마도 서로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으려고 할지 모를 일이다.
롬 8:18
"생각하건데 현재의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수 없도다."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