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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독일 낭만주의가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또는 질풍노도, 疾風怒濤, 1765-1785)의 과도기 운동을 거쳐 혁명의 물결을 타고 확장되고 전파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는 귀족생활의 로코코에 대한 반동일 수 있다. 루소의 두 책이 파리에서 불타는 억압, 그리고 그보다 인권 말살(영장없는 체포)과 부패의 권력에 대한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서, 즉 ‘자유, 평등, 동포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유의 나무를 심고, 자유의 모자(bonnet rouge)를 쓰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는 다른 유럽지역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칸트가 산보 시간을 잊고 산보를 나가지 않은 날 중의 하나라 한다. 그럼에도 혁명은 낭만이 아니라 사실이며, 실재이다. 낭만주의는 권력의 무자비한 억압과 좋은 의미에서 자기 억제라는 절제 속에서, 자아의 자주성을 내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표현이 상징적, 비유적, 신화적, 신비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실재성에 대한 주저와 방관일 수 있지만 그래도 지식층들이 시대 상황에서 현존과 이상을 향한 몸부림일 수 있다. (50TMB)
*낭만주의가 철학의 한 사조일까? 나로서는 철학사조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잘 할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란 정치경제학적으로 혁명을 실행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상층 지식인이 사고 실험하는 과정 중에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전제 국가 속에서 또는 혁명이 불가능한 체제 속에서, 그래도 낭만주의란 혁명 의식이 있어왔고 또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는 표시일 것이다. 비혁명국가들에서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서 19세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조와 같다. 이것은 사실주의 즉 실재의 사실에 대해 직시하기를 꺼리는 것일까? 상층 지식인들이 과도한 변혁이나 속도 있는 변화보다 낙수효과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 귀결로 영국에서 19세기말 불황(장기불황, Long Depression, 1873–1896, 또는 대불황, Great Depression)이 먼저, 그리고 세기말(종말) 사상이 찾아올 것이다. (50T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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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낭만주의 romanticism 273-285
18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및 철학 그리고 정치에 이르기까지 직접, 간접으로 낭만주의 사조라고 할 만한 감정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 .. // 낭만주의 사조는 처음부터 철학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나 불원간에 철학과 관련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조는 루소를 통하여 처음부터 정치와 관련되어 있었다. (273)
낭만주의 사조에서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사람은 루소이다. (273) [루소는 시대의 인물이며 시대를 앞선 인물이다. ‘시대’란 계몽주의 시대이며, ‘시대를 앞선’이란 혁명적이며 낭만적이다. 러셀은 루소의 계몽적이기도 하지만, 혁명적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일시적인 기분으로서 어느 시대에나 시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좋을 대로(As You Like It, 1623)에 나타난 추방된 공작은 이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공작의 자리에 되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단지 우울한 자끄(Jacques, 루소)만이 참으로 그 전원생활을 좋아하였다. 낭만주의 사조의 공적(公敵)의 대표이던 교황까지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행복하도다!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 몇 마지기 땅에 / 욕망과 걱정이 한정되어 있는 자는. / 고향 당에 머물러 살면서, 그 공기를 / 마시는 것으로 흡족하게 여기는 자는. (274) [‘우울한’이란 것도 왜곡이며 악의성이 포함되어 있다]
루소는 이미 존재하던 감수성에의 숭배심에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사상의 – 그가 아니었던들 소유하지 못했을 – 폭과 넓이를 확대시켰다. 그는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취미에 있어서도 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생애의 긴 세월을 자기보다 좀 덜 가난한 자들의 동정을 받으며 빈궁한 유랑 생활을 하였다. (275) [러셀은 귀족 출신이며 안락한 생활을 했다. 그의 루소 평가는 상층이 인민을 바라보는 관점에 닮았다.] [의상 대 원효처럼 대비된다. (50TMB)]
낭만주의자들은 루소에게서 인습의 구속을 멸시하는 것을 배웠다. 우선 의복과 생활양식에서, 춤(minuet)과 서사시에 있어서, 또는 예술과 사랑에 있어서, 종내는 전통적인 도덕의 전 영역에서 그 모든 구속에 대한 경멸을 배우게 되었다. (275) [러셀은 낭만주의의 성격들이 루소에서 확장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루소에서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루소의 경멸은 자연을 모르고 인습에 빠진 자들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행태를 잘 드러낸 사람은 파리에 와서 그 모습을 본 모차르트(Mozart, 1756-1791)이며, 그 작품으로는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1786)이다. 게다가 혁명의 원동력들 중의 하나는 보마르셰(Beaumarchais Beaumarchais, 1732-1799)의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1784)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혁명의 원동력은 자연주의와 약간의 낭만주의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의식을 지속하게 한 것은 스토아사상으로 인민의 주인의식이다. (50SMI)]
루소 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평안한 데 싫증을 느껴 흥분을 찾기 시작하였다[말하는 본새하고]. 프랑스 혁명[1789]과 나폴레옹[1804 황제즉위]은 그들의 이와 같은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1815년 정계가 평온을 되찾았을 때 그 평온은 너무나 죽은 듯한 정적이라, 활기찬 생활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오직 보수주의자들 이외에는 이를 참고 견딜 수 없었다. (276) [프랑스가 19세기 초반에 생물학 논쟁(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 1809))을 하는 시기를 러셀은 무시한 것이다.] [바로크시대를 거쳐 로코코 시대의 사치와 부패는 심하였다. 백성는 굶는데 말이다. - 오죽하면 앙트와네트의 소문 ‘빵이 없으면 브리오쉬를 먹지’라고 돌았겠나.]
19세기 신성동맹(神聖同盟)에의 반역[반동]으로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군주 및 귀족 정치에 대한 자본가들과 무산자들의 산업주의(industralism) 혁명이었다. / 이것은 낭만주의와 관계가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18세기의 후퇴였다. 이 운동은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인성자유주의자]과 자유무역운동(free-trade movement)[상품자유주의자]과 맑스주의 사회주의[인도주의자, humanitaire]로서 나타났던 것이다.(276)
[다른 하나] 이와는 달리 낭만주의의 반역[반동]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반동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이었다. [전자에서는, 특히 영국에서] 낭만주의가 원한 것은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활기 있고 정열적인 개인 생활이었다[개인주의]. ... [후자에서는, 특히 독일에서] 그들은 혁명 이후에 국가주의(Nationalism)를 통하여 점차로 정치에 끌려들어갔다. .. 19세기 후반에 와서 국가주의는 가장 활기찬 혁명적인 원리였으며, 대다수의 낭만주의자들은 이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276) [전자의 영국에서는 바이런, 카알라일 등이 있고, 후자의 독일에서 헤겔과 헤겔 우파가 그러하다. 헤겔 좌파는 국가주의의 권력을 프롤레타리아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 다르다. (50SMI)]
낭만주의 사조는 대체로 공리주의적 기준 대신 심미적 기준을 내세운 것이 그 특징이다. 지렁이는 유용하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호랑이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유용하지 못하다. (낭만주의자가 아닌) 다윈(Darwin 1809-1882)은 지렁이를 찬양하고 블레이크(Blake 1757-1827)는 호랑이를 찬미하였다. (277) [러셀의 비꼬는 수준이 이러하다] .
그들의 심미감을 그들의 조상의 그것과 다르게 만든 취미[취향]의 변천에 대해서도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들이 고딕(Gothic)건축을 좋아하였다는 것은 그 하나의 두드러진 보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기는 풍경에 대한 취미이다. 그리고 존슨 박사는 농촌의 풍경보다 런던의 플리트 스트리트(Fleet Street)를 더 좋아하였다. 그는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277) [17세기 말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다. 그것은 신학이 무너지고 인성에 대한 반성이다. 들뢰즈는 얼굴성과 풍경성을 같은 양면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볼 때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든다. 예술사는 감성 즉 예술에 대한 이론이 18세기 중엽부터 새로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50SMI)]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천국과 저넘어를 사고하는 자는 도시에, .. 죽은 후 신체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사유하는 자들은 시골로, ..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말이다.(50TMB)]
루소의 선인(先人)들이 시골에서 찬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목장이었고 암소가 평화롭게 우는 풍요로운 정경이다. 루소는 스위스 사람이라 자연히 알프스(Alps)를 찬양하였다. (277) [러셀의 오해: 루소가 말하는 산은 삶의 터전 주변에 숲이 있는 산이다. 그는 식물채집에 열중하였다. 착각하면 안 된다. 산악인들이 좋아하는 고산들이 아니다.]
낭만주의자들의 기질은 소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 / [이에 비해] 필딩(Fielding)이나 스몰렛(Smollet)은 흔히 볼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에 대하여 썼는데, 낭만주의에 반대되는 사실주의(realist)는 다 그러하다. (278)
낭만주의자들은 과거나 현재의 것을 막론하고 현실에서 떼어 내어 곧잘 유리시켰다. / 이런 점에서 옛 뱃사공(The Ancient Mariner, 1799)이 대표적인 것이며, 콜리지의 쿠불라칸(Kubla Khan)은 마르코 폴로의 역사적인 군주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의 지리도 흥미있는 것이다. 크나두(Xanadu)에서 쓸쓸한 코라스미안(Chorasmian)해안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자들의 관심을 가진 장소들은 모두가 먼 고장으로 동양이나 고대의 것들이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원은 루소에게서 큰 힘을 얻었지만, 처음에는 주로 독일에서 일어났다. .. /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영국의] 콜리지(Coleridge, 1772–1834)와 셸리(Shelley, 1792-1822)에게 영향을 주었다. .. 프랑스에서는 [구채적이고 실제적 혁명을 수행하느라] 훨씬 미약한 형태를 취하였으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 때 이르기까지 번성하였다. / 미국에서는 거의 순수한 것으로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브루크 팜(Brook Farm)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다. (278) [데이비드 로렌스(David Lawrence, 1885-1930)에 이르기까지]
영국 낭만주의의 시발은 풍자작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쉐리단(Sheridan, 1751–1816)의 사랑의 적수들(The Rivals, 1775) .. 제인 오스튼(Jane Austen, 1775–1817)는 노탕거 수도원(Northanger Abbey, 1818, posthumous)과 감각과 감수성(Sense and Sensibility, 1811) .. 노탕거 수도원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1794년에 출판된 래드클리프(Ann Radcliffe, 1764–1823)의 지치게 낭만적인 작품 우돌포의 비밀(The Mysteries of Udolpho, 1794)(4권)을 읽고 타락한다. .. 낭만주의 작품으로서 훌륭한 것은 콜리지의 옛 뱃사공으로 1799년에 간행되었다. 그는 블레이크(Blake) –스웨덴보르 운동에 참여자이지만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 와 다르다. 그는 이듬해 불행하게도 웨지우드의 재정 원조로 괴팅겐에 가서 칸트에 말려들었다. (279)
콜리지,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사우디(Robert Southey, 1774-1843) 이후에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 왔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는 영국 낭만주의를 한동안 저지시켰다. 그러나 바이런(Byron, 1788-1824), 셸리(Shelley, 1792-1822) 키츠(Keats, 1795-1821)에 이르러 다시 회복되었으며 빅토리아 왕조를 통하여 어느 정도 지배적인 사조가 되었다. (279)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의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은 알프스 산맥의 낭만적인 풍경 속에서 바이런과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낭만주의 발전에 있어서 비유, 예언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279)
그(괴물)는 몰래 숨어서 어떤 오두막에서 사는 착한 가정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 몰래 그들의 일을 도와준다. 그는 드디어 그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알리려고 한다. / “나는 그들을 보면 으레 그들에게 나를 옹호하려고 온정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토록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고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애정을 갖고 대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것은 나의 가장 큰 욕심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이 나를 멸시하며 두려운 마음에서 나를 외면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 [우렁각시는 아무나 하나 .. 약사여레를 아무나 하나... ]
그리고 프랑켄슈타인(괴물을 만든 박사)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그 괴물의 심정은 고상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나도 역시 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그가 학살되었기 때문에 나는 가장 무서운[무거운]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나의 비참한 성품도 이제 종말에 이르렀다. 오 프랑켄슈타인이여! 너그럽고도 헌신적인 인간이여! 내가 그대에게 지금 사죄해 주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멸망시켜 버렸기 때문에 불가불 그대까지도 멸망시켜 버리나, 아! 그대 모습은 싸늘하고 그대는 나에게 대답할 수 없구나. .. 이제 나의 놀라운 죄상을 돌이켜 볼 때 내가 한동안 아름다움과 자비[charité]로 가득 차 있던 그 피조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 그러나 타락한 천사는 고약한 악마가 된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의 원수조차 그의 광야에서 친구를 갖고 어울리는데 나는 외톨이가 되어 있다.” (280)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도 고독한 존재라는 것이다.]
불트 박사(Dr Burt)sms 소년 범죄에 대한 그의 저술에서 일곱 살 난 소년이 다른 소년을 리젠트 해협에 빠뜨려 죽인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유는 그 아이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자기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281) [불트 박사 찾을 수 없음]
철학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으로 유아론적으로 되어 갔다. 그리고 자기 전개가 윤리의 기본 원리라고 간주되었다. 심정에 관한 한, 고독의 추구가 정열 및 경제생활의 필연성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불쾌한 타협이 생겼다. 로렌스(Lawrence 1885–1930)의 소설 섬을 사랑하는 사람(The Man Who Loved Islands, 1927) 가운데 등장하는 한 주인공은 이와 같이 타협이 싫어서 나중에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 가면서 고독을 즐긴다[고독의 자각이 필요하다]. / 그런데 고독을 찬양하는 작가 자신은 이처럼 철저하게 고독을 따르지 않는다. [이는 로렌스의 섬을 사랑하는 사람을 빗댄 것이다.] ../ .. 그런데 정열적인 사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열띤 연애들이 사회적인 구속에 항거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안은 그들은 대접을 받는다. .. 그리하여 연애란 일종의 투쟁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 투쟁에서 각자가 상대방의 자아의 장벽을 뚫고 들어가 상대방을 파괴하려 든다. / 이와 같은 견해는 스트린버그(Strindberg, 1849-1912)의 소설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로렌스의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282-283) -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1980)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에서 얼굴성을 설명하면서 스트린버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제7장, 0년 얼굴성」에서는 로렌스를 예로 든다. 들뢰/가타는 제7장에서 낭만주의 작가들을 넘어서 영화에서 화면확대(클로즈업)의 예를 든다. 이는 몸짓을 넘어서(탈영토화하여) 얼굴성의 확대는 내재성의 표출이며, 풍경성과 닮았다는 점이다. (50SMI)]
프톨레미의 경우처럼 동족간의 혼인으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바이런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알고 있다. 바그너(Wagner, 1813-1883)는 지그문트와 지글린데의 사랑에 있어서 비슷한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성의 원리는 동일 “철학”의 한 연장(延長)이다. 바이런도 이와 같은 국민성의 한 창시자였다. .. 마치니(Mazzini 1805-1872)는 영국이 바이런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국민이란 신비적인 개성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낭만주의자들이 영웅적인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무정부주의적인 위대성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284) [19세기 상층형이상학으로써 국가주의의 주장은 귀족적 공화정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심층의 용수(湧水)는 표면으로 드러난 인민의 현상이었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토대로한 심층의 질료형이상학시대에 인성자유주의자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피[혈연]와 종족에 대한 신앙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관련된다. 또한 낭만주의적인 견해는 한편으로 귀족주의적이며, 또 한편으로 타산보다 정열을 더욱 존귀하게 여기므로 상업과 경제를 매우 멸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낭만주의자는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다. (284) [러셀은 정치경제학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도주의에 주목할 때이다. ]
이기주의(Egoism)는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에게서 어버이의 부드러운 태도를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도 자기들의 자아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부드러움에 대한 절망적인 욕구는 종교와 포악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낙수효과는 없고 맹목신앙(근본신앙)으로]. 인간은 고립된 동물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이 존속되는 한 자아실현(self-realisation)이 결코 윤리의 최고 원칙이 될 수는 없다. (285) [러셀은 자아실현이 개체의 완성으로 착각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로 개인은 “공화국” 속에서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개인이 혼자서(공화국 밖에서)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50TKA)]
[[러셀은 국가주의 또는 정통 크리스트교의 평등과 사랑[charité, agape]을 바탕으로 사유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실현을 위한 국가 그리고 민족을 이끌 건전한 지식인들의 공동체 같은 것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권력와 교회의 권위 상층에서 상보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인민의 자유와 평등은 인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는 혁명의 과정을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역시 귀족이다. - 신라시대에 의상이 귀족이듯이 말이다. 원효는 인민의 삶 속에서 사상을 세우려 했다.]
[앵글로색슨은 사고의 양식(패턴, 스타일)으로, 라틴계는 사유의 실마리(계열 불럭)으로??]
(6:33, 50TKA) (7:28, 50T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