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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 앙띠-외디푸스(1972)에 관한 대담(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24-38(P.250)
대담자: 박케스-끌레망(Catherine Backès-Clément, 1939-) 여성철학자, 소설가, 문예비평가, 여성주의자.
*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사회는 연극 무대가 아니라 생산하는 공장이다. 무대에 상연하는 연극은 동일하게 무대[동일 표상]에 올릴 수 있는 동일반복[동어반복]할 수 있으나, 생산하는 공장은 이질적 생성들을 만드는 이질적 반복이다. 사고의 평면위에서 동일반복이 가능하며, 분류와 배열을 순서와 위계질서로 변형된다. 생산하는 공장은 이질적 다발들 중에서 어느 것이 현실적으로 먼저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군가 어떤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사건의 생성과 변역(變易)은 다발들의 한 가지라기보다 가지들 사이의 동맹 또는 연대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시대의 문제거리를 제기하는 것이리라. 전자의 무대에서 행위는 계산 가능하며 환원가능하다. 그러나 후자의 생성에서는 환원불가능하며 노력의 결실들이 있으며, 이는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라 다음의 예상참여에서 동맹과 연대를 통한 문제거리의 해소에 따라 기분 좋거나(gaie) 즐겁다(plaisir). 물론 해결 안되어 슬플 수도 있다. 공장은 해소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풀지 못하여 끙끙거리기도 하면서도 노력들을 통해 어느 가지가 돌출하기를 기대하면서 아날로그적 생산을 계속 한다. 비슷한 듯 하지만 서로가 다른 것들을 생산한다. 동일한 것이 없이 생산하는 기계 그 자체로서 생산하는 기계는 단일성이나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체이며 자연의 권능이다. 공장을 무대로서 삼아서 보이지 않은 지휘자 또는 연출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다. 분석가는 연출가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손님이 연출하기를 바라는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분석가는 손님들이 연출된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들 것이다. 이 무대가 합리적이고 이유(raison) 있는 무엇인가 먼저 있었다고 여기기에, 분석가는 손님이 그런 합리와 이유를 드러낼 수 없어서 문제거리가 생겨났다고 여기며, 손님의 문제를 무대위에 올리듯이 합리적(rationnel) 이유에 맞추려 한다. 이런 이유를 이성(la raison) 이라는 부른다면 이성은 독단이며, 서구 2천년의 병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들뢰즈이다. 적어도 근대 200년이 합리 또는 이성이라 부른 것이 일종의 광기로 본 철학자가 푸꼬이다.
“순수이성비판”(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Critique de la Raison pure)이란 용어는 어쩌면 순수한 이유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데 라고 물었을 것인데, 용어를 형상화하여 이성이 먼저 있다고 여기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 이유 또는 근본을 묻고서 비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 유물론 철학에서 아르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이유와 근본이 수학과 물리학(특히 뉴턴의 물리학)이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의 한계[경계] 속에 머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경계 구분의 선에서, 분석적 논리를 넘어서 경험적(물리학적) 논리로 확장하였다는 장점이 있다. 그 비판은 수학과 물리학의 한계가 인간의 삶의 한계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전개되면, 인간의 삶의 문제에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 실중주의가 있었다면 새로운 형이상학에 맞는 새로운 과학들(생물학, 생리학, 의학, 영혼학) 등을 기반(이유 또는 근본)으로 새롭게 정립했을 것인데, 칸트의 시대에는 한계의 선이 있다. 아직은 물리학이 원자 내부로, 생물학이 세포 내부로 들어가기에는 일렀다. 그것이 한계에 대한 비판주의 철학이다. 비판주의는 아페이론의 철학으로 들어가려는 문을, 논리와 수학에서 물리학과 경험학으로 문을, 연 장점은 있다. 그래서 도덕형이상학이라는 용어도 만든다. 도덕의 이유(이성)는 원리로부터 찾기에는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인간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은 도덕성을 믿고 싶었다. 그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칸트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잠재적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잘못과 악이 있는 것을 해명해 보고자, 수학-물리적 병치와 배열, 즉 범주와 판단을 빌려서 설명하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 여기서 생물학적으로 세포의 배치, 또는 여러 기관들(허파, 심장, 내장, 신장, 쓸개)의 배치, 그리고 유기체적 조직화 연관들을 생각하면, 생각 또는 사유가 두뇌만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언어(le langage)가 혀(la langue)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손으로도 몸으로도, 표정으로도, 몸의 색깔로도, 몸의 행동으로도 드러나는 것을 두뇌의 산물이라고 하는 충족 이유(raison)가 있을까? 이 이유를 수학-물리적 이성으로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강제적이고 폭압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유(raison)가 있을까? 이에 ‘이성(raison)’이 없을까라고 묻는 것은 말장난이다. 여기서 이유와 이성이 한 용어라고 하면, 하나는 두뇌 없는 결정체에서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두뇌 있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비판철학에 대한 신앙 또는 맹신이 아닐까? 이런 철학을 왜 일본으로부터 세뇌 당해야 하는지, 요즘 말로 뇌피셜(망상 démence)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에 본 미국영화에서, 변호사 아버지는 7곱살 짜리 아들이 제기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온갖 논리를 전개하다가 재판에서 결국을 아들에게 진다. 뇌피셜은 상상, 공상을 넘어서 망상이며, 이는 이성의 지배에 의한 광기이다. 천국의 묘사는 망상을 넘어서 광기이지 않을까? 그 뇌피셜이 현실에서 ‘파쇼정권’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다발에는 여러 가지들이 있다. 이 가지들이 각각의 소임을 행하는 것을 다른 가지들이 연대할망정, 아니라고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발들이 여러 가지로 현실 속에 등장하는 것이 스키조이다. 꼭 스키조가 아니더라도, 지구상에서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평생의 일들이 저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 속에 사는 이들의 평생 과업들과, 하나의 이유 또는 이성으로 통합되어야 하다는 것은 얼마나 뇌피셜 이겠는가. 그래도 8천만과 재외 8백만이 입말이 같다는 점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상상의 아날로그는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입말을 통해 다발의 연대와 동맹이라는 것이 실재하고 있다고 내부적으로 느끼고 산다. 우리는 입말이 통하지 않은 중국과 일본, 미국과 소련과 다르다. 이미지의 상상을 넘어서 같은 공상을 하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과 공상이 다른 입말과 다른 쓴글에 확장되지도 않겠지만, 확장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망상에 빠지지는 않는다. 왜 우리가 한때는 일어를 쓰고 지금은 영어를 쓰는 것이 확장인 것으로 착각 또는 망상에 빠지는가. 미국 안가보고 사는 이가 훨씬 더 많다. 천국 안 가본 이가 가본 이(?, 있을 라는가 몰라)보다 더 훨씬 많은데도 그 신앙과 망상에 주눅이 들어 살아가는 그 신앙자들에게, 들뢰즈/가타리가 삶의 터전은 무대가 아니라 생산하는 공장, 창조의 길이라 한 것이다.
한때는 중국과 유사한 무대에 사는 것으로 한때는 일본 제국이 강요하면서 만든 무대에서 그리고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요구한 무대에서, 무대 놀이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들뢰즈/가타리처럼, 말할 수 있다. 공장은 생성하는 자연이다. 자연은 이성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 내가 보기에 두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책으로 쓴 것이 앙띠-외디푸스이다. 자연은 생명체가 자주와 자치의 노력을 투여하지 않은 한, 자유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노력의 기원(이유, 근거, 아르케)은 자연의 권능이다.
<운명(destin, εἱμαρμένη, 헤이마르메네)의 이론은 우리가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보았던 전반적인 합리주의의 분명한 표현일 뿐이다. 운명은 처음에는 그리스 사유에서는 인간들에게 각자의 몫을 분배하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힘이었는데, [나중에는] 보편적 “이성”이 된다. “이 이성에 따르면, 과거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고, 현재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고, 미래 사건들은 일어날 것이다”. 보편적 이성은 제우스의 지성 또는 의지인데, 제우스는 우리가 자연에 반대라고 부르는 질병들 또는 절단들(상해들)이라 사실들도 명령하고, 또한 우리가 자연에 부합하는 건강과 같은 사실들도 명령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보편적[우주적] 자연에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일체로부터 분리된 개별적 한 존재에 대해 자연에 비추어 상대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이 운명을 우리의 과학적 결정론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브레이어: 제2권 2장 옛 스토아주의.
모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로마에서 개선장군에게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는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속삭임 -(54R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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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케스-끌레망(Catherine Backès-Clément, 1939-)의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해 들뢰즈/가타리가 대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티외디푸스”를 읽고, 두 철학자의 견해를 우리 식으로 대답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적어 보았다. - 아래 BC-m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답해본 6가지이다.)
BC1-m:
두 학문 영역이 알리앙스(동맹)[또는 연대] 한 것이다. 비판과 변증법으로 누가 먼저이고 누가 상위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무의식의 기계는 혼재되어 흐르고 퍼져 있어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솟아오르는 지를 잘 알 수 없지만, 현실적 체제와 제도 밖에서 문제거리를 제기하는 것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문제거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소 또는 해결해야할 문제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신분석가와 철학자는 같다. 관점은 인간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데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있다. - 예를 들어 불평등이 제기되면 불평등의 해소에 무엇이 제기되는지, 그 이유(raison)와 원인(cause)이라는 아르케를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쓰는 용어로(또는 윤석열과 최재형이 쓰는 방식으로) 이성과 법칙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답을 적용하는 것으로 정신분석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철학자는 무의식을 트라우마라는 일부분에 매이지 말고, 무의식의 진솔한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를 제시하려 한다.
BC2-m:
무의식의 한정적(페라스) 개념은 프로이트라면, 무의식의 무한정적(아페이론) 내용은 벩송의 것이다. 페라스는 휠레를 잴려고 하고 나가가 통제하고 명령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가는 새로운 카톨릭 신부와 같다. 이에 비해 아페이론에서는 제거나 세는 것이 아니라고, 벩송은 수없이 말했으며, 공간적 사고가 흐름의 사유를 재단(재고) 나열(셀)할 수 없다. / 프로이트는 정신병의 영역을 몰랐다기보다, 무의식의 실재성을 트라우마로부터 시작하여, 무의식의 추억들을 원자화하는 쪽으로 사고했다. 그래서 칸트와 신칸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흐름을 양화하여 수적으로 또는 공간화하여 페라스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가 휠레(물자체)를 버리듯이, 프로이트도 영혼 그자체 보다 신체의 증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관심은 의사로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라, 어떤 원인의 단위를 정해야, 환부를 수술하듯이,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병의 징후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재하는 여러 아픔과 고민을 깊이까지 파고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무한정한 추억들의 성질들(자료들, 무의식)을 탐구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으로 드러난 부분만을 보아도 무의식의 실재성을 증거할 수 있어서, 그 이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전에도 정신병들 중의 두 큰 영역 스키조와 파라노이아에 대한 구별이 있었으나 프로이트가 질병의 증상과 사회적 연관에서 징후를 잘 구별하는 데까지 가지 못했으며, 관심을 갖는 경우도 거의 말년에서 였다.
BC3-m:
들뢰즈는 이미 외디푸스이전에 크리스토스에 대한 전환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니체를 푸꼬와 더불어 다시 정리하면서, 도덕론은 상층의 선함과 전혀 관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상층(성직자)이 선하고 심층(인민)은 서툴다(mauvais)가 아니라, 생명적 유기체의 세계에서 또는 욕망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민은 착하고 성직자는 사악하다(méchant)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실은 그보다 더 일찍이 20대에 벩송이 구태의 먼지 취급을 받을 때, 이 먼지 취급하는 자들이 메샹(méchant)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이것은 참으로 미스테리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나로서는 박선생님이 누누이 이야기 했을 때도 우둔하여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 기존의 유물론이 원자론적 입장의 유물론으로 에피쿠로스 학파의 후예이며, 게다가 분석철학적 연구와 궤도를 같이 하기에 영미철학이 맑스주의의 발언권을 갖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현실태 또는 표상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진솔한 유물론은 탈레스 이래로 잘 정립된 것은 아니였지만 퀴니코스 학파에서 찾아야 된다. 벩송이 이런 문제거리에는 외적대상으로 읽지말고 심리(영혼)학적으로 읽어보라고 한다. 유물(휠레)론은 아페이론을 원인(아르케)로 탐구하는 영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박홍규 식으로 설명해 보면, 진솔한 유물론자에게서 아르케에서 표면의 물질적 대상 그리고 추상하여 관념(이데아)의 영역으로 전개하는 방향이 있고, 다른 한편 이데아가 먼저 있고 표면의 물질적 대상에 각인 또는 조작(포이융)하는 것이 있는데, 그 조작의 대상에서 끊임없이 저항하는 아페이론이 있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아르케를 찾는 학자들은 드물었는데, 박홍규 왈, 플라톤 다음으로 벩송이라는 것이다. / 철학사를 이해하면 유물론과 관념론에는 접속이라는 용어가 필요없다. 두 개의 방향이 있고, 삶이란 터전에서 그 사이 어디 선가 타협안(modus vivendi)이 있을 것이다. 상층의 관점에 제국주의관점으로 파쇼문제가 제기된다. 심층의 관점에서 탈식민지의 관점으로 이민의 자주와 자치, 자유와 평등을 주창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영토에서 탈영토화를 탈식민지로 읽어보시라.
BC4-m:
철학적으로 아르케에서 출발하는 관점은 실재성의 총체, 경험적 총체를 다루는 형이상학이다. 벩송은 여기에서 크게는 네 가지 학문들의 실증과학을 토대로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논리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이다. 이런 관점은 당연히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에도 응용된다. / 라이히는 사회변혁에서 성의 자유를 강조하였으나 인간 본성이 자유를 추구하는데 까지 나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자유는 아직도 난제이다. 해방이 아니라는 점만을 이야기하다. / 파시스즘에 관해서 인민의 동의를 받은 권력이, 권력 자체를 인민에게 다시 투여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루소의 견해를 생각해 보면, 인민은 양도하지(aliéner, 포기하다) 않았다. 파시즘은 자기의 권력과 지배를 위해 인민의 견해를 다시 포기하게(ré-aliéner) 하였다. 포기 또는 양도하지 인민의 저항이 없는 권력이 파시즘을 낳는다. 인민의 저항, 항거, 봉기 혁명은 도덕적 정치학적 미덕이다. 이 저항의 아르케는 아페이론의 긍정적 성격, 플라톤이 말한 방황하는 원인에 있다. 이 아페이론의 내용이 무의식(의식 실재성 총체), 기억, 그리고 생명이다. / 질문에서 인민이 그들의 현존을 확증하는 것은, 인민이 양도하고 더 이상 관여할 수 있는 방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홉스의 유물론이 통속적이라고 할 때, 양도받은 권력이 착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양도된 권력은 메샹할 수 있으며, 자본은 한번도 낙수효과를 실행해 본적이 없는 매샹한 상층이다. 인민의 양도하지 않는 권력이 진솔하고 착한 권력이다. 니체를 읽을 이유일 것이다. 인민이 실재성이고, 권력의 바깥에 있으며, 이 이민이 권력과 체제에 포획되었을 때 끊임없이 탈주하며, 체제에 균열을 내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BC5-m:
내가 보기에 두 저자는 영미 문학만(독일 문학도)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문학을 많이 인용했는데, 그 내용이 좀 난해하여 영미 문학이 더 대중적 이해도가 높다고 본 것 같다. 사례들에서도 정치 사회적으로 프랑스 사례들은 시대적 맥락이 길고 폭넓은데 비해, 영미는 집중적(범위가 좁고)이고 중요 사건과 결합이 분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프랑스 사회 변혁들은 혁명 여러 차례 겪으면서, 각 혁명들이 지닌 성격의 차이들이 있다. 이를 설명하기는 길지만, 한꺼번에 뭉쳐저 드러나는 것은 영미에서는 어째거나 20세기 이후이고, 소설과 단편 소설이 성행한 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 프랑스철학이 문명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것이 인류학보다 인종학으로 기울었고, 이런 방식에 주목한 것은 제국주의의 강압보다 탈식민지의 인민의 삶에 주목함에서 올 것이다. / 문화론에서 이론보다 창조적 작업이 우선할 뿐만 아니라 우월하다. 비판이든 옹호이든 이론은 기존의 틀을 통해서 분석 또는 해설하는 것이다. 새로운 작업 또는 새로운 예술 양식 새로운 발명이 한 세대를 지나 인민들 사이에 공통화 되기까지는 소수자로서 맥을 이어간다. 그 소수자가 인민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디지털에서 스마트 폰 시대에는 한 세대가 아니라 몇 년만에 공공화가 이루어지는 부분(장, 영역)이 있다. 그러나 지구적으로는 여전히 세대가 지나야 공공 또는 공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BC6-m:
탈분석이란 용어를 쓰는 것도 분석을 벗어나지 못한 것같다. 스키조라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고, 이 용어를 벩송처럼 이중화(double) 또는 양갈래(dedoublement) 가지치기(bifurcation) 등으로 표현했던 방식도 괜찮을 것이다. 분열, 그것은 알이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들뢰즈가 알을 책이라 하고 쪽들은 애벌레라고 했는데, 쪽들은 이미 가지치기해서 다른 설명과 현실에 대한 해명일 것이다. 이 책의 비유를 말라르메에서 가져 왔는데, 그 속에 주사위놀이가 있다. 생명의 유기체와 달리 설명한다면, 사회체에서 조직화는 주사위 놀이와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고 비유에 속지말라고 한 것도 qpfrthd이다. / 평가에 대해 별 신경쓸 것 없고, 인민은 사회체에서 인민의 양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조직화에서 동맹을 특이성에서 연대를 즐겁고 유쾌하게 하는 방식을 만들어 갈 것이다. 어쩌면 스마트 폰이 그런 실천에 기여할 수 있다. 아날로그가 유기체에 적합한 비유라면 디지털은 사회체에 적합한 비유일 것이다. (54RKH)
***목차
I. De l’Anti-Oedipe à Mille Plateaux 9.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11
2. Entretien sur L’anti-Oedipe (avec Félix Guattari)24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39
#I.2. 앙띠-외디푸스에 관한 대담(펠릭스/가타리와 함께) 2. Entretien sur L’anti-Oedipe (avec Félix Guattari) 24-38.
박케스-끌레망(Catherine Backès-Clément, 1939-) L'Arc, n° 49, 1972
GD 무의식-기계(l’inconscient-machine): 라깡과 다르다. 상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만드는 기계이다. 라깡과는 반대 방향이다. (24)
책 속에 쪽들은 알이고, 책안에는 무수한 애벌레들이 있다.
FG 네 가지 길(자리 Lieu)가 있다. 첫째로 공산주의의 길(68년 이전), 둘째로 장 우리(Jean Oury, 1924-2014)의 임상에 참여 하면서 또스켈(François Tosquelles, 1912-1994)의 실험을 이어가다. 셋째 라깡의 세미나 처음부터 참석하다. 마지막으로 한 분열증자(un schizo)와 더불어 정신치료를 실행하다. (25-26)
그래서 기관없는 신체, 다양체 개념들을 창안하였다. 가타리는 자기 저작의 논리적 조작(실험)들이 심리적 조작(실험)이라 한다.
FG: 프로이트에서는 정신병(psychose)으로 시작하는데, 불뢸러(Eugen Bleuler 1857-1939),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멜라니 클라인에서 라깡, 타우스키(Viktor Tausk, 1879-1919) [이들은 신경증보다 정신병에 관심이고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네니의 연결 또는 대립을 보았다. ]
맑스 대 아담스미스와 리카도 후자들은 재산의 표상으로 재양도(ré-aliéner, 즉 재 소외)의 길을 갔다.
G.D. 외디푸스와 햄릿은 공장이 아니라 극장이다. 무의식의 형성과정을 다루기보다 욕망하는 기계 위에 억압장치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정신분석학은 억압장치를 덮어씌우는 것인데 비해 이 유물정신의학은 욕망 속에서 생산작업을 도입한다.
투입/투자(un investissement)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이익이라는 전의식적 투자와 욕망이라는 무의식적 투입이 있다. (lu 54LLI)
# 2. Entretien sur L’anti-Oedipe (avec Félix Guattari) 24
2. 앙띠-외디푸스에 관한 대담(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박케스-끌레망(Catherine Backès-Clément, 1939-), L'Arc, n° 49, 1972
BC1: 당신들 중의 하나는 정신분석가이고 다른 이는 철학자이다. 당신들의 책은 정신분석학과 철학에 대한 재검토이며, 당신들은 다른 것, 즉 분열-분석(le schizo-analyse)를 도입한다. 이 책의 공통 터전이 어떤 것이다. 이런 기획은 어떻게 생각되었는가? 두 사람에게서 어떤 변형이 이루어졌는가? (24)
BC2: 당신들은 줄곧 욕망하는 기계로 된 분열 분석적 무의식을, 당신들이 모든 방면에서 비판한 정신분석적 무의식과 대립시켰다. 당신들은 모든 것을 분열증에 비추어 잰다. 그러나 당신들은 진실로 프로이트가 기계들의 영역 또는 적어도 장치들의 영역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프로이트가 정신병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했던가? (27)
BC3: 당신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들이 정신분석학에서 외디푸스와 더불어 “관념주의적 전환”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당신들이 정신의학에서 새로운 유물론과 관념론을 대립시키고자 시도할 때, 말입니다. 어떻게 정신분석학적 영역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에 접속이 이루어지는가? (28)
BC4: 당신의 책에는 정신분의학과 정신분석학의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의 측면이 있다. 어떻게 이 두 측면의 통일성을 당신들의 생각에서 있을 수 있는가? 당신들은 라이히(Reich 1897-1957)의 시도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다루는가? 당신들은 사회적 장의 수준에서 만큼이나 욕망의 수준에서 파시스트의 공격(l’investissement)에 대해 말한다. 거기에서 정치학과 동시에 정신분석에 과한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들이 파시스트의 공격들에 반대를 시도하는 것을 잘 못 본다. 무엇이 파시즘에게 방해하는가? 따라서 문제는 이 책의 통일성에 뿐만아니라 실천적 귀결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대중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아무것도 “파시스트 공격들”을 막지 못한다면 또한 어떠한 힘도 포함하지 못한다면, 만일 사람들이 이것들[공격들]의 현존을 단순히 확증할(constater) 수 있다면, 당신들의 정치적 반성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실재적인 것 속에 당신들의 개입은 어떤 것인가? (30-31)
BC5: 당신들의 책은 참조와 즐겁게 이용된 원문들로, 이것들이 의미있건 반대의미이건 간에, 가득 차있다. 그러나 이 책은 모든 경우에서 정확히 “문화”를 토양(sol)로서 삼은 책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당신들이 인종학에 많은 중요성을, 그리고 언어학에는 약간만 결합시켰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 소설가들에게 많은 중요성이 있는데, 그러나 쓴 글에 대한 현대 이론들에게는 중요성이 거의 없다. 왜 특히 기의의 용어에 반대하는 이런 공격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들이 그런 체계를 거절하는 이유들은 어떤 것인가? (34)
BC6: 당신들은 보다 무거운 비난에 처해있지 않는가? 당신들이 제안한 분열-분석학은 사실상 탈분석(une désanalyse)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당신들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이 정신분열증을 낭만적이고 책임질 수 없는 방식으로 좋게 평가하고 있다고. 그리고 심지어는 당신들이 혁명적인 것과 분열증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런 우발적 비평들에 연관해서 당신들의 태도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37) (54RKH)
*인명
1412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Sancta Ioanna Arcensis),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라고도 불린다. 1909년에 잔다르크는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네덜란드유대인 혈통의 철학자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1723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스코틀랜드의 정치경제학자, 윤리철학자.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2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영국 경제학자. 영국 고전파의 이론 체계를 완성, 애덤 스미스와 함께 그 대표자이다.
1818 칼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1842 다니엘 파울 슈레버 (Daniel Paul Schreber, 1842-1911) 독일 법관 – 프로이트의 사례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유대계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1857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 스위스 정신의학자이다. 조현증(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조현증은 4가지의 장애특징을 나타낸다고 설명, 그 앞글자를 따서 4A라고 명명했다. Association(사고연상), Affectivity(감정), Ambivalence(양가감정), Austism(자폐)
1875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 1875-1950) 미국 소설가, “타잔”을 주인공으로 만든 인물. 공상 과학과 추리소설을 작품으로 유명하다. Apache Devil (1933) Tarzan series(1912-1938)[이후도 계속]
1875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의 조수 였다.
1879 타우스크(Viktor Tausk, 1879-1919)[마흔] 유대계 체코출신 오스트리아 의사, 정신분석학 1세대, 자살했다. « De la genèse de l'appareil à influencer au cours de la schizophrénie »(1919), 타우스크의 자살이 프로이트에게 충격이었다고 한다. 루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와 연관이 있다.
1882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심리학자, 어린이 심리학, 정신분석학자.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1891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미국 소설가, 〈북회귀선(北回歸線 1934)〉. 〈남회귀선(南回歸線 1939)〉에서는 현대의 허망(虛妄)에서 탈출한 인간정신을 다루어, 성(性)을 신성시하지 않은 채 인간의 본질과 그것이 자유로이 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술 속에 재생시키려 했다.
1896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시인이자 연출가. 잔혹극« théâtre de la cruauté » 개념을 창안.
189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이주 정신의학자이며 정신분석가. 맑스주의자인 그는 정신분석학을 혁명적 방향으로 자리 잡기를 원했다. 그는 독일에서 섹스폴(Sexpol) 즉 프로레타리아 성적 정치를 위한 동맹을 만들었다.
1899 예름슬레프(Louis Hjelmslev, 1899-1965), 덴마크 언어학자. 소쉬를 이어받으려 했다.
1901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파리정신분석학회(Société Parisienne de Psychoanalyse)의 회장(1953년)에서 6개월만에 탈퇴, 프랑스정신분석학회(Société Française de Psychanalyse)를 조직.
1906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출생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1912 또스껠(François Tosquelles (né Francesc Tosquelles Llauradó, 1912-1994) 스페인출신 1948년 프랑스 국적,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제도적 정신치료 발명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1922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미국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
1924 장 우리(Jean Oury, 1924-2014), 프랑스 정신과 의사. 1953년에 라 보르드(clinique de La Borde) 진료소 창설.
1924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및 문학 이론가였다.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192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1927 레잉(Ronald David Laing, 1927-1989) 스코틀랜드 정신과의사 ‘반정신의학’의 선구자.
1930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정신과의사. 공산주의자 들뢰즈와 함께 안티외디푸스, 카프카, 리좀, 천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까지 같이 작업하였다.
1939 박케스-끌레망(Catherine Backès-Clément, 1939-) 여성철학자, 소설가, 문예비평가, 여성주의자. 카톨릭-유대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버지 카톨릭, 어머니 러시아 유대인. 어머니 약사인데 라마크리슈나 집단의 일원이었다. ENSJF 출신으로 철학으로 교수자격, 활(L'Arc)(1905-1986)지의 편집위원으로 있었다. 이 학술지는 철학자들로서는 프로이트(Freud), 바슐라르(Bachelard), 헤겔(Hegel), 들뢰즈(Deleuze), 라깡(Lacan), 장켈레비치(Jankélévitch), 데리다(Derrida) 등 철학자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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