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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6권
8. 변지품②
8.5. 지(智)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1]
이와 같이 온갖 지(智)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1) 부처만의 공덕: 18불공덕(不共德)
① 총론
이제 마땅히 ‘지’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먼저 부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처음으로 부처를 성취[成佛]하는 진지(盡智)의 단계에서는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닦는데, 여기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35)
무엇을 열여덟 가지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여덟 가지의 불공법이란
부처의 10력(力) 등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念住)와 대비(大悲), 이와 같은 공덕을 모두 합하여 18불공법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이것들은 오로지 모든 부처가 진지를 일으킬 때 닦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성자는 닦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② 10력(力)
②-1 10력과 그 자성
먼저 부처의 10력(力, bala)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0력 중 처(處)ㆍ비처(非處)는 10지(智)이고
‘업’은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여덟 가지 ‘지’이다.
정려ㆍ근(根)ㆍ승해ㆍ계(界)는 아홉 가지 ‘지’이고
변취(遍趣)는 아홉 가지 혹은 10지이며
숙주(宿住)와 사생(死生)은 세속지이며
누진(漏盡)은 여섯 가지 혹은 10지이다.
숙주와 사생의 지력(智力)은 정려지에
그 밖의 지력은 모든 지(地)에 근거한 것으로
섬부주 남성의 불신(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경계에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에 [‘힘’이라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으로, 이것은 다 같이 여래의 10지(智)를 본질[性]로 한다. 즉 일체법의 자성과 공능은 이치상 결정코 존재한다고 아는 것을 일컬어 ‘처지(處智)’라고 하였으며, 일체법의 자성과 공능은 이치상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는 것을 ‘비처지(非處智)’라고 말하였다.36)
이러한 지는 유정과 비유정의 경계를 모두 반연하는 것으로 일체지(一切智, 즉 10지) 모두와 상위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같이] 간략히 설할 경우 [알게 하는] 공능이 적어 깨닫기 어려울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다시 이것을 다른 아홉 가지 지력으로 분석하여 제시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으로, 이것은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여덟 가지의 지(智)를 본질로 한다. 즉 [이것은]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은 이와 같은 종류의 온갖 이숙과를 초래한다”고
능히 잘 분별하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無罣礙智]이기에 ‘업이숙지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37)
혹은 [업이숙지력을] 설하여 자업지력(自業智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이것은]
“이와 같은 종류의 결과는 바로 자신이 지은 업력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처자(妻子) 등에 의해 주어지거나 그들이 능히 빼앗을 바가 아니며,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은 반드시 자신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팔고 사거나 바꿀 수 없다”고
능히 잘 분별하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이기에 ‘자업지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는 정려ㆍ해탈ㆍ등지ㆍ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이며,
넷째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며,
다섯째는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며,
여섯째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 힘은 모두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의 지(智)를 본질로 한다.
이를테면 온갖 정려 등의 자성과 명칭과 획득[得]과 방편과 섭지(攝持)와, 미(味)ㆍ정(淨)ㆍ무루(無漏)[의 등지]와, [정등지의] 순퇴분(順退分)과 순주분(順住分)과 순승진분(順勝進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 등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無罣礙智]이기에 ‘정려 등의 지력’이라고 이름한 것으로,38) 정려 등의 상에 대해서는 「정품(定品)」에서 응당 분별하게 될 것이다.39)
만약 온갖 유정류를 능히 수승한 공덕에 이르게 하는 근(根)의 품류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라면, 이를 ‘근상하지력’이라고 이름한다.40)
비록 중간의 근기[中根]가 존재할지라도 이는 승렬(즉 상하)에 근거한 것으로, 바로 저열한 근기나 수승한 근기에 포섭되기 때문에 별도로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41)
이러한 ‘중간의 근기’라는 말은 어떠한 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신(信) 등에 근거한 것으로, 선근을 끊은 자의 모든 상속 중에도 역시 과거ㆍ미래의 신 등의 선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혹은 의(意) 등에 근거한 것이다.
만약 온갖 유정류가 [향수하려는] 희(喜)ㆍ낙(樂)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라면, 이를 ‘종종승해지력’이라고 이름하니,42) 희락은 승해의 명칭 상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만약 온갖 유정류가 시작도 없는 전제(前際)로부터 수습(數習)하여 성취하게 된 의지[志]와 성품[性]과 수면(隨眠), 그리고 온갖 법성(法性)의 여러 가지 종종(種種)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라면, 이를 ‘종종계지력’이라고 이름한다.43)
즉 여기서의 ‘계’는 의지[志]와 성품[性]과 수면(隨眠), 그리고 법성(法性)의 명칭 상의 차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힘은 다 같이 유위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10지 가운데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만을 포섭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니,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의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다만 온갖 능취(能趣)의 도(道)를 반연한 것이라면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를 본질로 하며,44)
만약 [능취의] 도와 아울러 소취(所趣)의 과(果)도 반연한 것이라면 10지를 본질로 한다.45) [이는]
말하자면 생사의 인과를 참답게 알며, 아울러 진지의 도[盡道]를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이기에 ‘변취행지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덟째는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이며,
아홉 번째는 사생지력(死生智力)으로,
이와 같은 두 가지 힘은 다 세속지를 본질로 하니, 이러한 두 가지 힘은 상(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이의 과거 숙주(宿住)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이기에 ‘여덟 번째의 힘’이라 하였으며,
모든 유정류가 미래세에 온갖 존재[諸有]로 속생(續生)하는 것을 참답게 아는 거리낌이 없는 지혜이기에 ‘아홉 번째 힘’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의 힘을 널리 분별해 보면 여섯 신통[通] 중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46)
열 번째는 누진지력(漏盡智力)으로, [본송에서] ‘혹은’이라는 말을 설한 것 역시 그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다만 누진을 소연의 경계로 삼은 것이라면 도지와 고ㆍ집지와 타심지를 제외한 여섯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며,47)
만약 이와 아울러 누진의 방편도 반연한 것이라면 10지를 본질로 한다.
이치상으로도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하니, [이것의] 상(相)을 분별하면서 다함[盡]과 다함을 위한 것[爲盡, 즉 누진의 방편]에 대한 거리낌이 없는 지혜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두 종류를 다 같이 누진지력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뒤의 세 가지 힘은 바로 세 신통(천안ㆍ숙주ㆍ누진통)으로,
여섯 신통 가운데 이 세 가지가 특히 수승하기 때문에 무학위에 존재하는 그것을 3명(明)으로 설정하였으며, 여래의 소의신에 존재하는 것은 역시 또한 ‘힘[力]’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신경통(神境通)과 천이통(天耳通)의 경우, 설혹 불신(佛身) 중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크나큰 작용이 없기 때문에 ‘힘’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가령 천안통과 같은 신통은 유정의 선취와 악취 중에서의 이숙과의 차별을 능히 관찰하고, 이에 따라 능히 수승한 지(智)를 인기하여 낳을 뿐더러 역시 또한 그러한 업을 능히 초래하는 것(즉 번뇌)도 바로 아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천안통을] ‘사생지[력]’이라는 말로 설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경통과 천이통에는 이러한 크나큰 작용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두 가지 신통의 경우는 ‘힘’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10력 중에] 타심[지]력(他心智力)을 별도로 설하지 않았지만, 의미상 그것은 이미 근(根, 즉 根上下智力) 등의 힘 중에 포섭되었다고 해야 하니, 다른 이의 심ㆍ심소는 ‘근’ 등의 힘 중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고, 공론(工論) 등에 대해서도 역시 자재(自在)를 획득하였으며, 불사(佛事)로서 이것(타심지력)도 이미 성취하였지만, [10력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지 중에는 별도의 뛰어난 작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에게 타심지력이] 존재할지라도 역시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으로, 오로지 열 가지 종류의 알아야 할 것[所知]을 두루 깨달음으로써 부처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모두 원만하게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 종류의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제법 가운데 원인이 되고 원인이 되지 않는 것[因非因義],
대개 산지(散地, 욕계 散心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업과 과보의 차별,
정지(定地, 선정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공덕의 품류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48)
교화될 유정의 근(根)과 승해와 계(界)의 [다양한] 차이,49)
대치되는 것과 능히 대치하는 것의 인과차별,
전제(前際, 과거세)와 후제(後際, 미래세)에서의 경과과정[經歷]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50)
이염(離染)의 불상속과 [그것의] 방편 등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
[부처님께서는] 다만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불사(佛事)가 이미 성취되었으며, 그 밖의 지(智)의 경우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익도 손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열 가지 종류의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만 ‘힘’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교화할 유정을 관찰하여 근기에 맞게 [성]교(聖敎)를 시설하였는데, [그러기 위해] 오로지 열 가지의 지(智)만을 필요로 하였다. 이를테면
첫 번째 지(處非處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온갖 승(乘)을 감당할 수 있을지 감당할 수 없을지의 차이를 관찰하였고,
두 번째 지(業異熟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의 상속 중의 업장(業障)의 차별을 관찰하였으며,
세 번째 지(정려 등의 지)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정려 등에 대해 미착(味著)하는 일이 있을지 미착하는 일이 없을지, 번뇌가 가벼운 장애가 되는지 무거운 장애가 되는지의 차별을 관찰하였는데,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을 앎으로 말미암아 역시 이숙의 장애[異熟障]도 알게 된다.
네 번째 지(根上下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청정한 품류[淨品, 열반]로 나아가는 공능의 차별을 관찰하였으며,
다섯 번째 지(種種勝解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청정한 품류를 증득하려고 할 때 [필요한] 가행의 차별을 관찰하였으며,
여섯 번째 지(種種界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청정한 품류를 증득하려고 할 때의 성품과 의지[稟志性]의 차별을 관찰하였다.
일곱 번째 지(遍趣行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베푼 온갖 [행]에 이익이 있는지 이익이 없는지의 여러 차별과 [그들의] 정관(正觀)과 수지(修止)를 관찰하였으며,
여덟 번째 지(宿住隨念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이 과거세 중에 집적한 [업의] 차별을 관찰하였으며,
아홉 번째 지(死生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미래세에 [초래할] 결생(結生)의 차별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열 번째 지(漏盡智)에 의해 교화할 중생들이 증득한 해탈과 그것의 방편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였다.
즉 이러한 열 가지 지(智) 중에서 만약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할 경우, 유정을 교화하는 사업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게 되지만, 대개 그 이상은 소용이 없기 때문에 [‘열 가지 종류의 알아야 할 것’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다.
②-2 10력의 소의지와 소의신
[10력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의 차별은 [어떠한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힘(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그 밖의 여덟 가지 힘은 모두 열한 가지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열한 가지 지라고 함은 욕계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과, 그리고 4무색정을 말하는 것으로, 온갖 수승한 공덕의 경지를 모두 [언급하면] 그러한 정도[爾所]가 있는 것이다.
[10력의] 소의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신(所依身)의 차별은 [어떠한가]?
[10력은] 모두 남섬부주에서 태어난 남성의 불신(佛身)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오로지 이러한 몸만이 [10]력의 소의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②-3 10지를 ‘힘[力]’이라고 한 까닭
이와 같은 10지(智)는 2승(乘)에게도 역시 존재하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부처님에게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힘[力]’이라고 말하게 된 것인가?
대저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거리낌(장애) 없이 일어나는 것[無礙轉]이니, 부처님의 지혜[佛智]는 경계대상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힘’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성자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즉 2승의 온갖 성자는 온갖 유정의 상속과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선도 능히 관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시 그 밖의 심오하고 미세한 것을 능히 알 것인가?52)
예컨대 사리자(舍利子)는 득도하기를 희구하는 이를 져버렸으며,53) 매에게 쫓긴 비둘기의 전제와 후제의 많은 생을 능히 관찰하여 알지 못하고 적은 생만을 [관찰하였다는] 등의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54)
또한 대목건련(大目乾連)이 업풍(業風)에 이끌려 간 온갖 아귀의 차별을 능히 관찰하여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55)
그렇기 때문에 2승의 천안통 등은 계(界)의 원근(遠近)을 관찰함에 있어 부처와는 차이가 있으며, 장애(거리낌)가 없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힘’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2승과 부처의 누진(漏盡)이 이미 동일한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부처님의 그 같은 지(즉 누진지)만을 ‘힘’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오로지 세존만이 유정의 일체 누진(漏盡)의 차별상에 두루 통달하는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
즉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온갖 유정의 일체 누진의 품류의 차별에 대해 거리낌[罣礙]이 없이 알지만, 2승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소속되는 것이다.
또한 오로지 제불의 지혜[智]만이 맹리(猛利)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맹리하다는 것인가?
부처님의 지혜의 힘[智力]은 번뇌와 그 습기(習氣, 습관적 습성)를 신속하게 끊을 수 있기 때문으로,
마치 힘이 강한 보특가라와 약한 보특가라가 [각기] 예리한 칼과 무딘 칼을 쥐고서 풀 등을 자르는 것과도 같다.
모든 유정류의 온(蘊)에는 그 상에 차별이 없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여러 가지 종종의 계(界)가 존재한다고 관찰하는 것인가?
모든 유정류에 존재하는 온의 상이 비록 동일할지라도, 그 중에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들에게 존재하는 온갖 온 자체는 비록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품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하지 않다.56)
부처님께서는 [그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품류의 차별을] [존재하는] 양(量)대로 아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기 때문에 세존에게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모든 여래의 명칭(名稱)은 고원(高遠)하여 희유(稀有)한 지혜의 묘용(妙用)이 무변(無邊)이기에 [여러 가지 종종의 계는] 오로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이가 측량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그 밖의 다른 이가 요별한 온에 차별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어찌 여래께서 능히 그 같은 차별상을 안다는 사실에 대해 괴이하게 여길 것인가?
②-4 부처의 신력(身力)
제불(諸佛)이 지닌 심력(心力)의 일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역시 보살 시절에 성취한 신력(身力)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거나
혹은 마디마디가 모두 그러하니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가 열 배씩 증가한 힘으로
이는 촉처(觸處)를 본질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의 살아있는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다.57)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색신의 사지와 마디마디가 다 나라연의 힘을 갖추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치상으로도 실로 제불(諸佛)의 신력(身力)은 심력과 마찬가지로 무변(無邊)이니, 능히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의 대 공덕을 지녔기 때문이다.58)
즉 대각(大覺, 즉 불타)과 독각과 전륜왕의 사지와 마디가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은,
그 순서대로 마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려 얽혀 있는 것[蟠結]과 흡사하고,
서로 연이어 물고 있는 것과 흡사하며,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들의 힘에는 수승함과 저열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연의 힘은 그 양이 어느 정도인가?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의 힘을 각기 열 배씩 증가시킨 양으로, 이를테면 보통의 코끼리인 범상(凡象)과 향상(香象)과 마하낙건나(摩訶諾健那)와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와 벌랑가(伐浪伽)와 차노라(遮怒羅)와 나라연이 바로 그것인데, 뒤의 것일수록 그 힘은 앞의 것보다 열 배씩 증가하는 것이다.5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앞의 여섯 가지는 열 배씩 증가하지만, 그것은 나라연의 반신(半身)의 힘에 필적할 뿐이며, 이러한 힘의 천 배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을 성취한다”라고 하였다.
유여사는 말하기를,
“이것(나라연)의 힘의 양은 천(千) 마리의 애라벌나천상왕(藹羅伐拏天象王)의 힘과 같다”라고 하였다.60)
이러한 상왕의 힘은 그 양이 얼마나 되는가?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장차 놀이동산[戱苑]에서 놀고자 할 때, 상왕이 이를 알고 온갖 머리에 여러 가지 장엄을 화작(化作)하고서 천궁의 처소로 나아간다.
그러면 수천을 헤아리는 제천(諸天)과 권속들이 그것을 타고 공중을 날아올라
―이때 모양은 마치 벚나무 잎을 달고 있는 것과 같다―
신속하게 놀이동산에 이르러 마음 가는 대로 기뻐하며 오락한다.
즉 하늘의 대상왕의 힘의 세기는 이와 같은데, 이러한 힘의 천 배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설 중에서 오로지 그 양이 많다고 하는 쪽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색신의 힘은 촉처(觸處)를 본질[性]로 하니, 이는 마땅히 총체적으로 온갖 촉(즉 대종과 소조색)의 차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는 오로지 대종의 차별이다”라고 설하였으며,
어떤 이는
“이는 바로 소조촉(所造觸)으로, 일곱 가지를 떠나 그밖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강한] 힘은 무거움[重]을, 저열한(약한) 힘은 가벼움[輕]을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61)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부처님의 살아있는 색신의 힘이라고 한다.
③ 4무외(無畏)
부처님께서 지니신 네 가지 무외(無畏, vaiśāradya)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무외는 그 순서대로
첫 번째와 제10ㆍ제2ㆍ제7의 힘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4무외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62) 즉
첫째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로서, 10지(智)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첫 번째 힘(처비처지력)과 같다.63)
둘째는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로서, 여섯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열 번째 힘(누진지력)과 같다.64)
셋째는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로서, 여덟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두 번째 힘(업이숙지력)과 같다.65)
넷째는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로서, 아홉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일곱 번째 힘(변취행지력)과 같다.66)
어떠한 연유에서 제불의 무외에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는 것인가?
다만 이러한 수량(즉 네 가지)만으로도 불세존의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원덕(圓德)이 모두 구경(究竟)에 이르렀음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67)
즉 첫 번째 무외는 불세존 자신의 지원덕(智圓德)을 나타내며,
두 번째 무외는 불세존 자신의 단원덕(斷圓德)을 나타내니,
이러한 두 가지 무외는 부처님의 자리의 공덕이 원만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세존의 이타의 원덕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뒤의 두 가지 무외를 설한 것으로,
세 번째 무외는 삿된 도[邪道]를 행하는 것을 막고,
네 번째 무외는 올바른 도[正道]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은 곳곳에서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장애가 되는 법[障法]을 설하여 그것을 끊고 제거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단원덕을 닦게 하는 방편이 된다.
또한 곳곳에서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도[出道]를 설하여 올바로 행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지원덕을 닦게 하는 방편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무외는 부처님의 이타의 공덕이 원만함을 나타낸다.
다만 이러한 네 가지 무외만으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부처님의 자리와 이타의 지원덕과 단원덕이 모두 구경에 이르렀음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오로지 네 종류의 무외만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무외가 바로 지(智)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마땅히 무외가 바로 [‘지’는 아니며] ‘지’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치상으로도 실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즉 [이같이 말한 것은] 다만 무외는 ‘지’를 직접적인 원인[親近因]으로 삼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에 근거하여 무외를 도출하였던 것이다.
대저 무외라고 함은 말하자면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不怯懼]으로, 지혜[智]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비방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지혜의 획득은 무외의 원인[因性]이 된다.
그리고 오로지 부처님의 네 가지 미묘한 지혜[妙智]만이 바로 네 가지 무외의 원인이 된다.
이를테면 모든 여래가 갖는 ‘일체법의 일체의 상에 대한 미묘한 지혜’(즉 處非處智)는 바로 첫 번째 무외의 원인이 되고,
모든 여래가 갖는 ‘일체의 번뇌와 아울러 그것의 습기(習氣)를 끊었다고 [아는] 미묘한 지혜’(즉 漏盡智)는 바로 두 번째 무외의 원인이 되며,
모든 여래가 갖는 ‘[장애가 되는 염오법과 출리의 도는 각기] 제자들에게 손해되고 이익 됨을 아는 미묘한 지혜’(즉 業異熟智와 遍趣行智)는 바로 뒤의 [두 가지] 무외(說障法無畏와 說出道無畏)의 원인이 된다.
혹은 무외 자체가 바로 네 가지의 미묘한 지혜이다.
즉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怯懼]을 일컬어 ‘외(畏)’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공포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지혜[智]에는 이러한 두려움[畏]을 직접적으로 대치[近治]하는 공능이 있을 뿐더러 두려움과 상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외’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럴 경우] 무지(無智)가 바로 두려움[畏]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지혜 자체가 바로 무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지혜는 다수의 법을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으로,
“[지혜는] 바로 무의(無疑, 의심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지혜가 무지(無智)를 능히 직접적으로 대치하듯이, 공포나 두려움에 대해서도 역시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무외’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혜는 무지(無智)를 대치하듯이, 의심도 역시 능히 대치하기 때문에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결정(決定)’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대치되는 무지가 바로 의심은 아닐지라도 지혜에는 의심이 존재하지 않으니, 명칭 상으로는 두 가지(즉 ‘智’와 ‘無疑’)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즉 智)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지(無智)는 비록 두려움과 다를지라도 ‘무외’라고 하는 말은 바로 지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한 가지의 선법은 능히 다수의 악법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68)
나아가 어떤 이는
“무지도 역시 두려움을 포섭한다”라고 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해(다시 말해 무외를 ‘지’라고 한 것에 대해) 힐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힘[力]과 무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니, 다 같이 지(智)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 자체의 별도의 뜻에 근거하여 ‘힘’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다시 별도의 뜻에 근거하여 ‘무외’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이를테면 [‘지’로서] 굴하지 않음의 근거[不屈因]가 되는 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였으며,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음의 근거[怯懼因]가 되는 것을 설하여 ‘무외’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최초에 안립(安立)된 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였으며,
안립되고 나서 동요되지 않는 것[不動]을 설하여 ‘무외’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다른 이에게 조복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였으며,
능히 다른 이를 꺾어 조복시키는 것을 설하여 ‘무외’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비유하자면 뛰어난 의사가 의방(醫方)에 두루 통달한 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며,
온갖 병을 능히 잘 치료하는 것을 일컬어 ‘무외’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건장하고 굳센 것[驍健]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며,
용맹하고 날쌔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勇悍不怯]을 설하여 ‘무외’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종류(힘과 무외)는 의미상으로는 역시 차별이 있으니, ‘
일을 성취하여 마쳤다[成辦]’는 뜻이 바로 ‘힘’의 뜻이라면,
‘두려워하여 떨지 않는다[不怯憚]’는 뜻이 바로 ‘무외’의 뜻이다.
④ 3념주(念住)
부처가 지닌 3념주(念住, smṛtyupasthāna)의 상의 차별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념주의 [본질은] 염(念)과 혜(慧)로서
따르고 어기고 둘 모두를 반연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의 3념주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여러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受持)하여 행하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반연하여 기뻐[歡喜]하지 않으며, 사기(捨棄)하고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첫 번째 염주라고 한다.
여러 제자들이 오로지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반연하여 근심[憂慼]하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두 번째 염주라고 한다.
여러 제자들 중의 어떤 부류는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며, 어떤 부류는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반연하여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세 번째 염주라고 한다.
비록 교화될 유정 가운데 공경하거나 수지하여 행하지 않는 자가 있을지라도, 불세존께서는 그들에게도 역시 법우(法雨)를 뿌리시니, 이러한 방편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른 때라도 정법에 들게 되며, 혹은 그밖에 다른 유정들도 정법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본론 제30권)에서는 4념주(身ㆍ受ㆍ心ㆍ法念住)를 설하고, 지금 여기서 다시 3념주를 설하였다고 하여 염주에 모두 일곱 가지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지금 여기서 설한 3념주는 앞에서 설한 4념주 중에 포섭되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외법(外法)을 반연하는 염주(즉 신념주)에 포섭된다.
이러한 세 종류의 염주는 다 염(念)과 혜(慧)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함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경계대상에 대해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성문들도 세 가지 경계대상에 대해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으니,
이러한 세 종류의 염주는 부처님만이 갖는 불공법(不共法)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로지 부처님만이 이에 대한 습기(習氣)를 아울러 끊을 수 있기 때문이며,69) 유정의 종성의 차별에 대해 능히 잘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제자들은 여래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따르거나[順, 공경하고 수지하는 것] 어기거나[違, 공경하지도 않고 수지하지도 않는 것], 따르고 어길 경우[俱, 일부는 공경하고 일부는 공경하지 않는 것] 마땅히 심히 기뻐하거나 근심해야 할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능히 [그 같은 기쁨과 근심을] 일으키지 않으니, 참으로 희유하고도 기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위대한] 성문에 소속된 것이 아니므로 [따르거나 어기거나, 따르고 어길 때 기쁨과 근심을] 일으키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기특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의 그것에 대해서만 ‘불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⑤ 대비(大悲)
제불(諸佛)의 대비(大悲)에는 어떠한 상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비는 오로지 세속지로서
자량과 행상과 경계와
평등과 상품으로 [말미암아 ‘대’인데]
여덟 가지 이유로 인해 ‘비’와는 다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래의 대비(大悲)는 세속지를 본질[性]로 하니, 일체의 유정을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아 고고(苦苦) 등의 세 가지 행상을 짓기 때문으로, 무루지라면 이와 같은 이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70)
이러한 ‘대비’라고 하는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인가?
다섯 가지 뜻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것(悲)에 ‘대’라고 하는 말을 설정하였다.
첫째는 자량(資糧)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크나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의 힘은 능히 세 가지 괴로움의 경계(苦苦ㆍ行苦ㆍ壞苦)에 대해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연(所緣)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3계의 유정을 모두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넷째는 평등(平等)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일체의 유정에 대해 평등한 이익과 안락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품(上品)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최상품으로서, 다른 어떠한 비(悲)도 능히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크나큰 가행에 의해 증득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대사(大士)의 소의신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대공덕이라는 진귀한 보배의 수(數)에 들기 때문에, 유정의 크나큰 고뇌를 능히 제거하기 때문에 ‘대비’라고 하는 말로 설정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비(悲)’와 ‘대비(大悲)’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여덟 가지 이유로써 차별된다.
첫째는 자성에 의해 차별되니,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로서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71)
둘째는 소의신에 의해 차별되니, [부처를 제외한] 그 밖의 몸과 오로지 부처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72)
셋째는 행상에 의해 차별되니, 한 가지 고(苦)와 세 가지 고를 [반연하는] 것으로, 행상이 다르기 때문이다.73)
넷째는 소연에 의해 차별되니, 1계(界)와 3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74)
다섯째는 소의지에 의해 차별되니, 그 밖의 다른 경지와도 통하고 제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75)
여섯째는 증득에 의해 차별되니, 욕계와 유정지를 떠날 때 증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76) 또한 ‘비’가 선행하는 것으로, 염오를 떠날 때에도 증득되고 오로지 염오를 떠날 때에만 증득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구제(救濟)에 의해 차별되니, 희망(希望)과 사업의 성취[事成]로서 구제가 다르기 때문이다.77)
여덟째는 애민(哀愍)에 의해 차별되니, 평등과 불평등으로서 애민이 다르기 때문이다.78)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제불의 대비는 멀리 있거나 미세한 곳에도 두루 수반되어 그들을 널리 요익(饒益)되게 할 수 있다. 즉 성문 등의 부류가 일으킨 비심(悲心)은 색ㆍ무색계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수 없지만, 부처님은 상계에 대해서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니, 2승(乘)보다 뛰어나 무간지옥조차도 불쌍히 여긴다.”
⑥ 제불(諸佛) 공덕의 동이(同異)
부처님의 공덕이 그 밖의 다른 유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모든 부처님[諸佛]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들의 법은 모두 동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량과 법신과 이타의 경우에는
모든 부처님이 서로 유사하지만
수명ㆍ종성ㆍ족성ㆍ크기 등의 경우는
모든 부처님 사이에 차별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은 다 동등하니,
첫째로는 자량이 동등하게 원만하기 때문이며,79)
둘째로는 법신(法身)을 동등하게 성취하였기 때문이며,80)
셋째로는 이타(利他)가 동등하게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을 서로 비교해 보면, 수명[壽]과 종성[種]과 족성[性]과 크기[量] 등의 차이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수명의 차이란 부처님의 수명에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을 말하며,81)
종성의 차이란 부처님이 찰제리(刹帝利, 크샤트리야)와 바라문(婆羅門)의 종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족성의 차이란 부처님의 족성이 교답마(喬答摩, Gaut- ama)나 가섭파(迦葉波, Kāśyapa) 등인 것을 말하며,
크기의 차이란 부처님의 색신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오래되고 얼마 되지 않은 등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에게 이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출현할 때 교화될 유정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⑦ 제불(諸佛)의 세 가지 원덕(圓德)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여래의 세 종류의 원덕(圓德)을 사유하여 깊이 애호하고 공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세 가지 원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인원덕(因圓德)이며,
둘째는 과원덕(果圓德)이며,
셋째는 은원덕(恩圓德)이다.
처음의 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무여수(無餘修)이니, 복덕과 지혜 두 종류의 자량을 남김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시수(長時修)이니, 3대겁(大劫)의 아승기야(阿僧企耶, 혹은 3아승기겁)을 거치면서 게으름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간수(無間修)이니, 정근함이 용맹하여 찰나 찰나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존중수(尊重修)이니, 배워야 할 법을 공경하여 [신명을] 돌보거나 아끼는 일이 없었으며, 태만함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과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지원덕(智圓德)이며,
둘째는 단원덕(斷圓德)이며,
셋째는 위세원덕(威勢圓德)이며,
넷째는 색신원덕(色身圓德)이다.
지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무사지(無師智)이며,
둘째는 일체지(一切智)이며,
셋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며,
넷째는 무공용지(無功用智)이다.82)
단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번뇌단(一切煩惱斷)이며,
둘째는 일체정장단(一切定障斷)이며,
셋째는 필경단(畢竟斷)이며,
넷째는 병습단(幷習斷)이다.83)
위세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외적 경계를 화생(化生)시키고 변화시키며, 오래 머물게[住持] 하는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둘째는 수명의 양을 혹은 줄이고 혹은 늘이는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셋째는 허공이나 장애가 있는 곳 지극히 먼 곳을 신속히 가고, 적은 것과 큰 것이 서로에게 들어가게 하는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넷째는 세간의 여러 가지 사물의 본성으로 하여금 법이(法爾)로서 일어나게 하여 이전보다 뛰어나게 하는 희유하고도 기특한 위세이다.
위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화하기 어려운 이를 반드시 능히 교화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려운 질문에 답변하여 반드시 의심을 풀어주는 것이며,
셋째는 교[법]을 세워 반드시 출리(出離)하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악한 무리들을 반드시 능히 조복시키는 것이다.
색신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로는 온갖 상(相)을 갖춘 것이며,
둘째로는 수호(隨好)를 갖춘 것이며,
셋째로는 큰 힘[大力]을 갖춘 것이며,84)
넷째로는 안으로는 신체의 골격이 견고하여 금강석보다 뛰어나며, 밖으로는 신비한 광명을 발하니, 그 밝기가 백 천 개의 태양보다 더하다.
마지막으로 은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3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와 생사에서 영원히 해탈하게 하거나, 혹은 능히 선취(인ㆍ천취)와 3승(성문ㆍ독각ㆍ불)으로 안치(安置)하는 것을 말한다.
여래의 원덕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이상과 같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으로 분석할 경우 가없는 무변(無邊)의 원덕이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불세존만이 능히 알고, 능히 설할 수 있다.
요컨대 목숨[命行]을 연장하여 수많은 대겁의 아승기야를 거쳐야만 비로소 그것을 다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불세존의 색신이 수승하고도 기특한 무변의 인원덕(因圓德)과 과원덕(果圓德)과 은원덕(恩圓德)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마치 크나큰 보배의 산[大寶山]과 같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모든 범부들은 그 자신이 여러 공덕을 결여하였기에 비록 이와 같은 부처가 지닌 공덕의 산과 그가 설한 법을 들었을지라도 능히 믿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설한 것을 듣고서 믿고 존중하는 마음을 낳으며, 그것은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되니,
그는 이 같은 한 찰나의 믿고 존중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가없는[無邊] 부정(不定)의 악업을 전멸(轉滅)하고, 수승한 인(人)ㆍ천(天)의 열반을 섭수하게 된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래는 세간에 출현하자마자 모든 지자(智者)들의 무상(無上)의 복전(福田)이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의지하여서만 헛되지 않고, 참으로 애호할 만하며, 수승하고도 신속한 구경(究竟)의 과보를 인기하여 낳을 수 있기 때문으로,
박가범(薄伽梵)께서도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처라는 복전(福田)에
조그마한 선이라도 능히 심는다면
처음에는 뛰어난 선취를 획득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열반을 획득하게 되리라.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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