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그리고 비구니, 그 인연에 감읍하다
하춘생
교계의 지인들은 나를 보고 “전생에 비구니스님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한다. ‘한국의 비구니’하면 나를 떠올리게 된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그때마다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부부의 연을 맺기 전부터 출가의 뜻을 품었던 아내가 저를 만나 꿈을 잠시 미루었다는 그 시절인연에 감읍해서 그런가봅니다”라고.
나를 만난바 없는 분들과 인사를 건네다 보면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 때문인지, “여성불자 또는 비구니스님인 줄 알았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 다수가 비구니들이었다.
그랬다. 내가 25년 전 교계기자 시절에 신문지상에서 ‘한국의 비구니’와 인연 맺고, 불교학계로 돌아온 이후에도 이를 학문영역으로 끌어들여 연구에 천착하게 된 배경은 분명 기연(機緣)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그러니까 한국불교를 빛낸 근대기 비구니고승들의 발자취를 발굴해 그분들의 삶을 정리한 깨달음의 꽃을 출간한 바 있다. 그것은 최초의 ‘한국의 비구니열전’이었다. 당시 비구니고승들을 취재하면서 싹트게 된 나름의 소명과 과제 앞에 나 스스로 약속한 내용이 있다. 교단 이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비구니문중의 내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비구니승가의 역동성을 추동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내가 교계기자의 삶을 접고 학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전기는 그러한 내 자신과의 약속을 가장 신빙성 있는 성과로 내놓기 위한 의지의 소산이었다.
나는 젊은 시절 동국대 불교학과 입학당시 나름의 다부진 뜻을 세운 바 있다. 불교학문을 통한 불교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해보겠다는 입지(立志)였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고 학부 4학년 때 뜻하지 않게 주어진 인연은 교계의 신문사였다. 입학당시 세웠던 대학원 진학의 꿈은 교계언론과의 인연 속에 얼마동안 묻어둬야 했다. 기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입사 4개월경부터 ‘당초의 입지를 실현하는 일이 불교언론을 통해서도 일정하게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기자생활 15년과 ‘한국의 비구니’와의 시절인연은 그렇게 주어졌다.
‘한국의 비구니’와의 인연은 열악한 불교언론환경의 고난한 삶을 지탱해준 한줄기 빛이었고, 나름의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킨 불꽃이었다. 그것은 여러모로 희유한 일이었다. 한국불교를 빛낸 근대기 비구니 선지식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문지상에 그분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렇게 서른두 분의 삶을 모아 엮은 것이 1998년과 2001년에 출간한 두 권의 책 깨달음의 꽃이다. 그분들이 바로 한국의 비구니문중을 탄생시킨 주역들이다.
깨달음의 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를 살다 가신 비구니고승들을 다시 뵙고 가르침을 듣게 해준다. 한국불교사상 그 법맥을 알 수 없었던 비구니 선맥의 중창조라고 할 수 있는 묘리법희(妙理法喜, 1887~1975) 스님을 비롯해 일생동안 일대사인연의 출가본분사를 오롯이 지켜온
상근(祥根,1872~1951)·긍탄(亘坦, 1885~1980)·금룡(金龍, 1892~1965)·성문(性文, 1893~1974)·월혜(月慧, 1895~1956)·일엽(一葉, 1896~1971)·자현(慈賢, 1896~1987)·만성(萬性, 1897~1975)·수인(守仁, 1899~1997)·도준(道準, 1900~1992)·혜옥(慧玉, 1901~1969)·수옥(守玉, 1902~1966)·정행(淨行, 1902~2000)·대영(大英, 1903~1985)·도원(道圓, 1904~1971)·법일(法一, 1904~1991)·진오(眞悟, 1904~1994)·선경(禪敬, 1904~1996)·만선(萬善, 1906~1989)·본공(本空, 1907~1965)·쾌유(快愈, 1907~1974)·윤호(輪浩, 1907~1996)·인홍(仁弘, 1908~1997)·은영(恩榮, 1910~1981)·천일(天日, 1912~1977)·광호(光毫, 1915~1989)·장일(長一, 1916~1997)·창법(昌法, 1918~1984)·혜춘(慧春, 1919~1998)·응민(應敏, 1923~1984)·
세등(世燈, 1926~1993)스님 등이 그 분들이다. 바로 이 비구니들을 중심으로 근·현대기 비구니승가의 독립적 세계(世系)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깨달음의 꽃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비구니 선지식들의 깊은 신심과 수행력, 가람수호와 전법도생의 생애를 생생하게 되살려 냄으로써 비구중심의 지난한 교단현실에서 비구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특히 비구니들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더욱 용맹정진하는 가운데 교단참정과 사회교화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비구니승가 스스로 비구니 연구를 활발발하게 전개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이후 비구니 선지식들의 후학들을 다시 찾아 비구니문중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학계로 돌아와 ‘한국의 비구니문중’을 학문영역으로 끌어들여 연구작업에 들어간 것이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학계에 돌아온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 그와 관련한 박사학위논문이었고, 최근에 한 권의 책―한국의 비구니문중―을 세간에 내놓았다. 한국의 비구니문중은 깨달음의 꽃에 이어서 다시 한 번 교단의 흐름사에 비구니승가의 면모를 당당하게 소개한 초유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오래전 나 자신과 약속했던, 그러니까 한국의 비구니문중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비구니승가의 역동성을 추동해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지 실로 20여 년만의 일이었다.
한국의 비구니문중은 초기 비구니승가의 성립과정과 삼국시대 불교수용 이후 근·현대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비구니승가의 전통과 계승의 대강을 정리해놓고 있다. 근대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비구니 세계(世系)의 보편적 전개방식인 △은상좌연과 문중형성 △강백출현과 강학전등 △수선전통과 선풍호지 △계율수학과 전계의식 등의 실제를 조망하고, 문중의 형성과정과 계보현황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특히 권말부록에 싣고 있는 「문중별 세계도(世系圖)」는 비구니문중의 세계와 계통-계열의 분파현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문중 형성이 지니는 의의와 한계 등을 고찰해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이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비구니의 현재 위상과 역할 등을 살펴 비구니승가의 재정립방안을 구명함으로써 연구의 가치와 의의 등을 거듭 천명했다.
하지만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다. 비구니승가 앞에 놓인 교단의 현실이 여전히 성차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사회 대표적인 시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4반세기 동안 자의든 타의든 나에게 주어진 ‘비구니’의 이미지가 여전히 버겁게 다가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비구니는 위상정립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의식개혁의 대상’이라는 자조 섞인 조언을 강조하고픈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도 그에 연유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퇴출된 지 이미 오래된 성차별현상이 여전히 만연해 있는 교단의 구조적인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구니 스스로의 정당하고도 당당한 목소리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와의 인연과 함께 비구니와의 시절인연에 감읍하도록 나를 이끌어주신 선지식은 어머니다. 40여 년 전 선친을 일찍 여의고 갖은 고생을 감내하면서도 나를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시켜 부처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분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구순(九旬)의 세납에도 염불(念佛)을 놓지 않고 있는 어머니보살님께 항하사(恒河沙) 가운데 한 톨의 정도라도 보은해야 한다는 마음이 그지없으나, 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불효막심한 망극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따름이다.
4반세기 넘도록 분에 넘치게 나를 아껴주시며 비구니와의 인연에 더욱 감읍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어머니 같은 노(老)스님 한 분도 잊을 수 없다. 전국비구니회장 재임 당시에 오늘날 한국 비구니승가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 전국비구니회관 건립의 주인공이신 서울 정각사 광우(光雨)스님이다. 광우스님께서는 일찍이 깨달음의 꽃 출간 때도 그리하셨거니와, 한국의 비구니문중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노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성한 기억력으로 기꺼이 추천의 글을 써주셨던 분이다. 그 은혜가 크고 깊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인도로 맺게 된 불교와의 인연은 더할 나위 없거니와, 그에 기반하여 비구니와 맺게 된 중연(衆緣)의 영향도 이제는 내 삶의 유형으 자리매김한 듯싶다. 나의 삶의 궤적과 모든 인연에 감읍할 따름이다.
하춘생(河春生) 1990년 졸업. 법명은 우성(宇晟). 현재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사찰경영과정 주임교수 및 불교학부 외래교수로 있으며, (사)한국불교학회 감사를 맡고 있다. 「한국 근·현대 비구니의 문중형성과 그 의의」, 「현대 정보화사회에서 팔경법의 적용문제 고찰」 등의 논문과, 깨달음의 꽃: 한국불교를 빛낸 근세비구니(전2권), 불교상식백과(전2권/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