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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쪽이고요.
수많은 종류의 지식이 있더라고 구함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구함이 없는 것이 최상의 으뜸이다. 도인이란 곧 일 없는 사람이다. 일 없으니, 모두들 흩어져 돌아가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4)
그 어떤 지식보다 구함이 없는 것, 이것이 최고다. 아까 앞 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구하지를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그것은 아닌데, 구하지만 구하는 바 없이 구하는 것이고. 지금 이대로가 진실이라는 사실, 그 사실에 눈뜨는 것. 그게 불교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구함이 없는 것, 이거야말로 최상의 공부이지요. 그래서 구함이 없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으뜸이고요. ‘무사인’ 이래서 일 없는 사람. 도인을 일 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일이 다 있지만 일이 없는 것이지요. 또,
여래가 설하시는 것은 모두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 마치 누런 나뭇잎을 황금이라고 여기게 하여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일 뿐, 결단코 진실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진실한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우리 종문(宗門)의 선객(禪客)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본바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진실로 없음을 일컬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 한다.’ 만약에 이 뜻을 참으로 얻었다면, 비로소 불도(佛道)와 마도(魔道)가 모두 잘못된 것임을 알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5,226)
부처님이 설하시는 모든 가르침은 전부다 하나의 방편입니다. 분별 망상에 치우친 사람에게 그 분별 망상을 깨뜨려주기 위해서 임시가설로 설한 것을 방편이라고 하지요. 마치 여기서 얘기한 것처럼 마치 누런 잎을 황금이라고 여기게 해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다. 그친 다음에는 황금이 아니다,라고 얘기를 해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편으로 설한 모든 것을 가지고 그게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전부다 방편이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전부다 방편이니까 입만 열었다면 전부다 방편이기 때문에 진실한 뭔가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해탈, 열반, 반야, 지혜, 본래면목, 그런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은 다 드러나 있으나, 내가 스스로의 분별 망상으로 왜곡하고 집착하고 탐 진 치 삼독을 일으켜서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내니까 그 만들어낸 문제를 그냥 깨 부셔주는 자신의 분별 망상을 깨뜨리는 그것이 공부일 뿐입니다.
다만 그렇게만 얘기하면 당황스러워하니까 부처라는 것을 뭔가 내세워서 부처가 될 수 있다. 여러분 괴로움이 있지만 그 괴로움이 다 망상 때문에 일어나서 괴로움만 딱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게 공부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심히 할 사람도 있겠지만 ‘뭐 불교가 시시하구나’ 이렇게 생각할 텐데, 이 법문을 듣다 보면 몰록에 언하대오(言下大悟)를 해서 딱 부처가 된다. 부처가 되면 열반, 해탈을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아지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온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
손바닥 안에 온 우주를 집어삼키게 된다. 이런 식의 나뭇잎을 황금이라고 여기게 하는 거지요. 그런 방편을 쓰면 야 이게 뭔가가 더욱 발심을 하는 어떤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진실한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내가 부처를 얻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분에게 선배 스님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지요. 이렇게 질문한 거지요. “법을 얻었습니까?” 내지는 “견성을 했습니까?” 공부가 어떻게, 뭐 이런 얘기를 하다가 그런 얘기를 저는 가볍게 물어봤는데,
그때 그분의 얘기가 되게 뒤통수쳤는데. “야 성품을 확인했느냐, 견성을 했느냐, 도인이 됐느냐, 뭐 부처가 됐느냐 안 됐느냐, 뭐 심지어는 계합했느냐 말았느냐, 그런 질문 자체가 얼마나 스스로 부끄러운 질문이었는지를 알게 될 거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이 말이 보세요. 진실로 얻은 사람이라면 ‘진실로 얻었다’라는 생각이 없고 만약에 스스로 나는 ‘진실로 얻었다’ ‘나는 부처가 되었다’ ‘나는 견성성불 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의 선객이 아니다. 이 부처님 가르침에 참된 공부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실제 스님들이 ‘인가를 해주느니 어쩌느니’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참된 스승은 “그래 너 인가했으니 인가 게송을 주겠다.” 어쩌고 이렇게 하지 않고, 인가해준 게 어떤 게 인가해준 거냐면 “야 이 사람이 견성했다.” 하면서 막 자랑하고 소문내면서 “야, 견성했으니 이 사람 이제부터는 도인이야.” 이게 인가가 아니고요. ‘이게 인가해준 건가? 안 해준 건가?’
본인은 때로는 못 느낄 정도로. 자신의 공부를 이야기하면 “꾸준히 공부 계속하세요.” 뭐 이럴 정도로 얘기를 해준 다든지. 아니면 “자꾸 삿된 생각하지 말고 그걸 자꾸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법을 듣고 법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부터 공부 시작이니까 꾸준히 공부해라.” 그냥 이렇게 얘기하는 거지. “이제 조금 입문 정도 했네.” 뭐 이런 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정도도 얘기 잘 안 해주죠.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도 인정을 해준 게 되잖아요. 이 불법에서는 인정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넌 이만큼 됐다.” “야 너는 부처가 됐다.” “넌 합격이다.”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네가 얻었다.” “법을 얻었다,”라고 얘기하면 스스로 ‘나는 법을 얻었구나’라는 상에 빠지게 돼요. 그래서 ‘아 내가 법을 얻은 이 법만이 진짜구나’ ‘최고구나’ 그래서 법을, 얻은 이 법은 최고고, 출세간은 좋은 거고. 세간은 안 좋은 거고.
여기에 딱 똬리를 틀고 집착하고 앉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것도 거기 집착을 하게 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 자체가 삿된 법이니까. 좋은 것에 집착하든 나쁜 것에 집착하든 집착하는 그 마음이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그렇습니다. 예전에 뭐 선 어록이나 이런 것들 보더라도 스승이 제자를 시원스레 인가해주는 법이 없어요. 오히려 계속 질문을 던지고 계속 다그치고. 육조단경을 화요일 날 공부하고 있는데,
거기 보면 제자가 스승에게 가서 법거량(法擧揚)을 하는데. 오히려 스승이 약간, 약간 그만하면 뭐 봐줄 만하다는 듯한 어떤 뉘앙스로 살짝 인정 비슷하게 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나오는데. 오히려 그 제자가 그 스승의 그런 말을 듣고 아주 못마땅해서 ‘이러고도 스승인가’ 하는 어떤 못마땅함에 “여기 뭘 증명할 게 있고 뭘 인정할 게 있다고, 잘했다 못했다 얘기를 하고 뭘 인정한다 안 한다 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오히려 제자가 스승이 인정해주는 것처럼 얘기를 할 때 오히려 더 되받다 치고. 그러면 스승이 다시금 또 그걸 되받아치고. 이런 장면들도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이제 당황스러워요. 분명히 법이 있고 진리가 있어서 이 법과 진리를 깨달으라는 게 불교고, 불교는 다 그렇게 돼 있는데 “아 스님은 왜 혼자서 그게 아니라고 얘기하십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이런 책을 가지고 이런 텍스트를 가지고 얘기하는 거지요.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얘기를 여기서도 얘기를 하고 있지요.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진실로 없음을 일컬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금강경에 나오는 얘기지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뭐냐? 얻을 만한 작은 법이라도 진실로 없다,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무상전등전각이라고,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지. 뭔가 얻은 것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이거는 얻고 잃는 것이 아니다,라는 얘기지요. 이게 이제 말은 하여간 세웠다 하면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 얹는 것이다. 이제 이런 표현을 쓰듯이. 그래서 경전에 보면은 그런 얘기가 있지요. ‘내가 평생 법을 설했지만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내가 법을 설했다고 생각한다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법을 설해준 바가 한 법도 없다. 내가 법을 설했다고 생각해서 내가 설한 법을 쥐고 적어놓고 이거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모시고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은 진정한 제자가 아니다.
라고 해서 스스로 설한 가르침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도록 이끌기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금강경에 뿐 아니라 많은 경전들에서 이렇게 부처 뭐 보살, 원각, 깨달음, 진리, 해탈, 열반, 이런 걸 얘기하지만, 그것을 또다시 이렇게 깨뜨리는 스스로 또다시 깨는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불도를 얻는 것도 아니고 불도와 마도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지요.
‘마도, 마귀의 도는 삿된 건데 외도는 삿된 건데 불도만 좋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제 초보 수준입니다. ‘아 불도라는 것도 임시방편으로 내세운 것이구나’ 마도가 없으면 그냥 저절로 불도인 것이지. 따로 불도라는 뭔가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도와 불도를 모두 쓰러버려야 된다. 불법과 불법 아닌 것을 모두 한꺼번에 쓰러버려야지. 그 양극단을 다 쓰러버려야지. 나쁜 거는 버리고 불법은 쥐어라, 하는 건 불이법이 아니잖아요. 둘로 나누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두 가지가 다 넘어뜨려야 된다. 그다음은,
아난이 가섭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전한 것 외에 따로 무슨 물건을 전하셨습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7)
‘가섭존자에게 부처님께서 법을 전했다’라고 하는데, 이게 초기불교 경전에 나오는 얘기는 아닙니다. 초기불교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함경이나 니까야 같은 초기불교 경전에 부처님이 부처님의 법을 가섭에게 전했다. 그렇게 안 나와요. 그거는 선(禪)에서 만들어낸 방편입니다. 선(禪)에서 만들어낸 방편. 왜냐하면 아마 여러분 처음에 제가 하는 설법을 듣고서 기존에 법문만 듣다가 이 설법을 듣고 나면, 뭐 엊그제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야 처음에 스님이 오셔가지고 법문을 하는데 너무 충격적 이어가지고 너무 황당해가지고 혼내지는 않는데 엄청 혼나는 거 같았고. 내가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정말 다 잘못됐다,라고 혼나는 것 같아서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내가 좀 알아듣겠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던데, 마찬가지입니다. 선(禪)이 등장하기 전에 기존의 불교는 지금의 불교와 똑같았어요. 정토나 염불선이 엄청나게 유행해서 ‘염불해야 된다’
또는 막 ‘좌선해야 된다’ 뭐 ‘지관을 닦아야 한다’ 뭐 뭐를 해야 된다. 뭐를 해야 된다. 해서 막 기도 수행법이 많았지요. 그런데 선(禪)이 딱 등장을 해서 그런 기도수행법을 그야말로 모든 방편을 싹 쓸어버리고 그냥 자기 마음 하나를 딱 보도록 이끈단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불교 교리 자체가 우리들의 분별 망상, 삿된 상을 다 깨뜨리는 방향으로 법을 설하고 계세요, 초기불교 경전의 모든 교리가. 연기, 중도, 삼법인, 사성제,
이런 게 전부다 우리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실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다 깨뜨려주는 역할을 하는 법문이잖아요. 전부다 그런 법문이에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왜곡해서 보는 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도록 이끌어주고. 그래서 법을 자꾸 이렇게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삿된 분별 망상을 깨뜨려주는, 그런데 그 당시는 아트만이라는, 인도인들이 아트만이라고 해서 절대 불변의 진실, 참나, 이거를 딱 쥐고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그 참나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아다’ ‘그런 건 실체가 아니다’ ‘아트만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 이 아트만에 집착해있는 사람에게 ‘야 참나가 있다’ ‘본래면목이 있다’ ‘주인공이 있다’ 이렇게 했으면 그 사람들 전부다 ‘아 이 아트만을 얘기하는구나’ 그래가지고 아트만을 깨뜨리지 못할 거 아니에요. ‘저 얘기가 이 얘기네’ 이렇게 해서 깨지 못할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에게는 참나를 방편으로 내세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미 참나에 집착하는 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리고 그 참나를 깨뜨려주는 법문을 위주로 했지요,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데 그걸 깨뜨리는 어떤 참된 공부법 중에는 자기가 참나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뭔가 참나를 본래면목을 설해서 그걸 딱 드러내주는 것이 아주 좋은 공부 방편이 될 수 있지만, 초기불교에는 그걸 쓸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의 어떤 근기에 맞춰서 법을 설하다 보니까 무아를 무아법을 설했지요.
그래서 그런 아트만을 다 깨뜨리도록 얘기를 해주신 것이고. 그러니까 바른 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삿된 것을 깨뜨리면 저절로 바른 법이에요, 그죠. 그런데 삿된 것을 하나하나 번뇌 망상을 하나하나 깨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바른 법 하나를 그냥 딱 드러내줘서 법 하나를 깨닫게 해서 법 하나의 마음을 탁 두게 해서 그래서 발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거지요.
발심을 해서 이 법 하나에 마음을 강하게 두다 보면 그냥 어느 순간 몰록 깨달으면서 삿된 번뇌 망상이 다 없어지는. 다시 말해서 점수적인 방법, 하나하나 닦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번뇌 망상 하나하나 버리는 방법이 있다면, 그냥 몰록 하나를 깨달아서 탁 끝내버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서로 다른 방법이 있어요. 파사(破邪)의 방법이 있고 현정(顯正)의 방법이 있는 거지요. 삿된 걸 파하는 방법이 있고 바른 거를 그냥 딱 드러내주는 방법이 있다는 거지요.
그럼 바른 법을 하나 딱 보고 나면 저절로 수많은 번뇌 망상을 깨뜨릴 필요 없이 저절로 깨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찌 보면 위빠사나는 있는 그대로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하고 있는 그대로 번뇌 망상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 매 순간순간 번뇌 망상이 일어날 때마다 그걸 지켜보는 연습을 통해서 파사의 방법을 통해서 그 마음의 번뇌 망상을 자꾸 제거하고 제거해서 본래 성품이 드러나도록 이렇게 이끌어주는 방법이라면.
선(禪)의 방법은 그냥 본래면목 그거 하나에 딱 집중하도록 하는 거예요. ‘이것이 법이(죽비를 치며)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법이다’ 주장자를 들고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법이다’(죽비를 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부처 아닌 것이 없는데, 어디서 부처를 찾느냐’ 하면서 끊임없이 부처, 법, 진리, 그거 하나에만 마음을 두도록 발심을 하도록 이끄는 거지요. 번뇌 망상 하나하나와 싸우려면 너무 힘들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법 하나를 끊임없이 가리켜서 어느 순간 언하에 대오할 수 있도록 이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위빠사나는 쉬워 보여요. 왜냐하면 하나하나 번뇌 망상이 있을 때 그거 하나하나를 다룸으로써 당장 있는 번뇌 망상 요거 때문에 괴로우면 그거 하나 없애주고 저거 하나 없애주고 요렇게, 요렇게가니까 이게 진도가 다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뭔가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또 눈으로 확 드러나요.
내가 생각 때문에 괴로웠는데 그 생각을 지켜보면 생각이 고요해지니까. 그러니까 위빠사나는 쉽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데 단점은 위빠사나 해가지고 자기 성품을 확인하기가 그야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위빠사나가 너무 수행 위주의 위빠사나로 돼가지고 그냥 앉아서 닦고, 닦고 닦아야 되는 그런 것으로 너무 돼있다 보니까 너무 수행 위주가 돼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선이라는 것은 본래면목을 하나 턱 던져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 수 없다. 온 우주 전체가 이 우주가 있는 게 아니라, 법이 있다.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법이 있다. 네가 집에 갔다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법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차가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차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법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법이 지금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걸 법 하나로 돌려서 온 우주 삼라만상 전체 법 아닌 것이 없다.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단 그걸 머리로 헤아리면 안 된다. 머리로 분별하면 안 된다. 위빠사나든 선이든 핵심은 분별하지 말고 보라는 거잖아요. 위빠사나는 신수심법, 몸을 보고 호흡을 보고 느낌을 보고 감정을 보고 마음을 보고 하나하나를 다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선은 그렇게 겉에 드러난 하나하나를 보지 마라. 그 본성을 바라.
그런데 위빠사나에서는 하나하나 겉에 있는 지금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다 보면은 그 안에 있는 본성이 보이지 않겠냐, 이거고. 선은 그냥 언제나 본성 하나가 드러나 있다,라고 가르침으로써 하나하나 이렇게 겉에 드러나는 걸 신경 쓰지 말라 그래요. 무시하라 그러고. 그냥 삼라만상 전체 드러나 있는 법에 관심을 둬라. 발심만 해라. 단 중요한 점은 이 삼라만상 온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 아닌 게 없는데 머리로 헤아려서 알려고 하면 알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중생의 눈에는 이게 어떻게 부처냐, 부처가 아니다. 우리 눈에는 부처가 안 보인다. 지금 안 보이고 있다. 모를 뿐이다. 내가 부처를 알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법문을 들으면서도 알듯 말듯 머리로 헤아려서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은데 하면서 머리를 굴리지 마라. 모른다. 십 년을 아무리, 아무리 기가 막힌 설법을 해도 그냥 모른다. 가장 좋은 설법은 알게 해주는 설법이 아니라 가장 좋은 설법은 들으면 들어도 모르는 설법이다.
기가 막힌 설법은 완벽하게 모르게 해주는 설법입니다. 완벽하게 꽉 막히게 해주는 설법. 왜냐하면 겉에 드러나는 건 알 수 있지만 연기법, 인과법의 현실은 알 수 있지만 법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나는 걸 자꾸 다루려고 하면 어찌 보면 그건 위빠사나의 방법이고. 그냥 겉에 드러나는 것 이면에 나는 알 수 없는 ‘오직 모를 뿐’ ‘알 수 없는’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 ‘참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거기에 간절한 발심을 가지고
‘분명히 있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공부하는 자세가 굳이 수행이라고 표현한다면, 염불하면서도 ‘염불하는 이놈이 누구지’ 그게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이 뭐고’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가 그거지요. 숨을 쉬는데 ‘이 숨을 누가 쉬고 있는가’ 내가 숨 쉬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숨이 쉬어지고 있는데 ‘아니 이게 도대체 누구지’ 알 순 없어요. 답을 찾으려고 마음은 내지만 답을 찾으려고 애쓰면 안 돼요. 그건 모르니까.
그러니까 궁금할 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그런데 궁금하니까 찾으려고 막 애쓰는 거는 그건 진짜 화두가 아닙니다. 그걸 죽은 화두라 그러지요. 그래서 간화선에서 이 뭐고 이 뭐고 이 뭐고 해서 자꾸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이래요. 질문 한번 던졌으면 됐다. ‘이 뭐고 자꾸 되 뇌이면 그거는 죽은 화두가 된다’ 이러거든요. 머리가 굴러가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금강경 독송을 할 때 ‘이 독송하는 놈이 누구인지’
예불을 참석할 때 ‘예불하는 놈이 누구인지’ 길을 걸을 때 ‘이 길을 걷는 놈이 누구인지’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다 보면은요. 이게 이제 하나의 화두가 돼서 하루 종일 그게 떠나지 않는 거지요. 문득문득 자꾸 생각나고. 그렇다고 현실 생활을 안 사는 거 아니에요. 현실 생활은 현실 생활 대로 다 사는데.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다. 그럼 드라마를 보는데 보다 말고 남들은 그걸 몰입해서 보는데 보다 말고 ‘아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이게 뭐 이렇게 의미가 있겠나’ ‘이 보는 놈이 누구인지’ ‘아 이게 뭘까’ 또 일을 하다 말고 ‘아 이거 뭐지’ 하는 어떤 나도 모르는 ‘이걸’ 의도적으로 할 필요는 굳이 없어요. 의도적으로 안 해도 저절로 발심이 되면 그냥 저절로 나도 모르게 그냥 늘 마음 깊은 곳에서 ‘야 이거 뭔가’ 하는 어떤 발심이 되어 있는 거예요. 화두가 저절로 들려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선(禪)에서는 몰록 그렇게 그것이 내 안에서 모름이 꽉 들어차고 하다 보면 그것이 한번 확 뚫리는 때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모든 번뇌 망상을 일시에 깨뜨릴 수가 있지. 번뇌 망상 하나하나를 깨뜨리는 방법을 가지고 언제 그 번뇌 망상을 없애겠느냐. 그리고 점수적인 방법을 사람들이 쉬우니까 좋아하고 번뇌 망상 하나하나 깨뜨리려고 하니까 지금 명상법은 전부다 생각을 하나하나 깨뜨리도록 이끌어요. 생각이 없는 것이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명상하는 동안 생각 하나도 일어나지 않으면 성공한 명상가처럼.
그래서 생각은 아주 나쁜 놈인 것처럼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생각은 나쁜 놈이 아닙니다. 생각에 끌려가는 내 생각이 문제인 것이지. 생각은 누구나 일어나지요. 부처님도 생각은 일어난단 말이지요. 다만 부처님은 그 생각을, 생각의 본성을 아는 거지요. 생각은 그냥 일어났다가 가는 꿈과도 같이 구름 같은 거라는 걸 아는 것이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자기 성품을 확인한 스님들도 보면은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더 이상 그 생각에 꿔 달려가지 않을 뿐이지. 생각은 당연히 일어나는 겁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요, 또. 분별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잖아요. 분별 다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분별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닙니다. 분별을 따라가는 게 문제인 거지. 그 생각이 그 분별이 어디서 나오고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 당처를 확인하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 선(禪)에서의 방법이지요.
그래서 기존 얘기로는 가섭에게 부처님이 법을 전했다, 이럽니다. 그러니까 선에서는 법을 전하는 게 이 가사를 전하는 걸 법을 전한다, 그래요. 이 법의 상징이다 보니까. 그래서 이 가사를 전합니다, 제자에게. 그러니까 이제 금란가사를 전했을 것인데. “그럼 그거 외에 따로 다른 물건을 전하셨습니까?” “다른 법, 법을 전했느냐?” “뭔가를 또 전했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지요. 그랬더니 가섭이 아난에게 뭐라고 하느냐면,
가섭이 말했다.
‘아난아! 문 앞의 찰간(刹竿)을 넘어뜨려라.’
이것이 곧 조사가 내세우는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7)
그 말은 뭐냐 면요. 옛날에 많은 절에서는 절마다 염불하는 정토종이 있고 선종이 있고 또 선종도 뭐 다양한 줄기가 있고 가풍이 다른 거예요. 절 만의 가풍이 다른 겁니다. 종단이 다른 거지요, 쉽게 말해서. 가풍이 다르고 종단이 다르고 하다 보니까 이 절은 어떤 가풍인지. 이 절은 염불을 하는 정토종인지. 이 절은 뭐 선종인지. 이 절은 뭐 삼론종인지. 이 절은 뭐 법화종인지, 열반종인지, 화엄종인지, 선종인지, 그런 걸 이제 표시하는 표시로써
지금은 뭐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이렇게 써놓고 그러지만. 그때 당시는 절 앞에 깃발을 걸어놨습니다. 그래서 깃발을 가지고 아 이게 무슨 종인지를 알 수가 있었어요. 그것을 찰간(刹竿)이라고 그래요, 찰간(刹竿). 찰간을 세워놔서 그 찰간만 딱 보면 ‘아 여기는 선을 실천하는 도량이구나’ ‘아 여기는 염불을 실천하는 도량이구나’ 이런 걸 이제 알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찰간을 딱 세워서 이 절이 무엇을 선양하는 종파다.
이런 것들을 이제 내세웠다는 거지요. 그런데 가섭이 문 앞에 있는 그 찰간(刹竿), 이 절은 어떤 절이다. 어떤 법을 전하는 종교다. 우리 절에서 전파하는 법은 이런 거야. 우리 절이 가르치는 가르침은 이런 거야.라고 하는 그 법이라는 간판 그걸 무너뜨려라. 부처님이 나에게 뭔가를 줬다거나 이런 것이 없다. 무엇을 주어서 그 준 것을 딱 앞에다가 걸어놓고 이런 게 있을 줄 아느냐. 그런 거 없다. 그걸 무너뜨려야 된다. 그러니까 어떤 분이 그러시데요.
절마다 딱 선양하는 수행법이 있고 어떤 절은 염불수행을 하고 어떤 절은 또 아미타불 수행을 하고 어떤 절은 지장보살만하고 어떤 절은 뭐 지장 도량이라고 해서 막 지장보살만 찾고 또 어떤 절은 진언을 하고 또 어떤 절에서는 막 절 수행 도량이고 어떤 절은 참선 도량이고 어디서 뭘 하고 저기서 뭘 하고 이러는데. 왜 스님은 저희들한테 뭘 특별히 하라는 얘기를 안 하고 이거저거 두루두루 그냥 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뭔가 이렇게 딱 내세워서 뭔가 하나 하는 게 있어야 이게 응집력이 있고, 결집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딱 모여드는 힘이 된다. 그런데 뭔가 하나 딱 정하는 게 없느냐. 이게 장단점들이 있어요. 그렇게 정하는 것은 임시방편이기 때문에 중생들에겐 훨씬 편하죠, 쉽지요. 방편은 그래서 있는 거지요, 그거 때문에. 그런 방편도 필요하고. 그러나 그 모든 방편을 세울 때 세울 줄 알고 버릴 때 버릴 줄 알아야 되는 거거든요.
세워놓을 땐 세워놓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언제든 깨뜨릴 수 있고 언제든 버릴 수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진실은 그 무엇도 내세울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이것만 해라’ ‘반드시 저것만 해라’ 그렇게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 본래와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니까. 그렇게 내세울 이유가 뭔지를 알아야 되니까. 그래서 여기서도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문 앞에 찰간, 내가 법이라고 하는 무언가 딱 정해놓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따로 구할 필요가 없으니, 구함이 있다면 모두가 고통이다. 설사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겁 동안 육도만행을 수행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더라도 이 역시 구경(究竟)의 진실은 아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모두 인연으로 조작한 것에 속하기 때문이니, 그런 것은 모두 인연이 다하게 되면 무상하게 사라져 갈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8)
이제 이런 구절을 보면 우리가 되게 또 당황을 해요. 왜 그러느냐면, 육도만행이라는 건 육바라밀 수행을 비롯해서 만행을 다니면서 다양한 이 수행 저 수행 온갖 수행법 좋다는 수행법을 다 갈고닦은 그런 능숙한 수행자를 얘기합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이 어마어마하게 일 겁만 해도 엄청나게 많잖아요. 우리 서울시만 한 바윗덩어리를 천 년에 한번 선녀가 내려와서 이렇게 나풀거리는 옷으로 그 바윗덩어리를 한번 쓰윽 스치고 올라가서
그다음 천 년에 한번 또 내려와서 스치고 올라가는데 바윗덩어리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일 겁인데. 일 겁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갠지스강에 모래알 숫자만큼 많은 겁. 그 겁 동안 육도만행 수행을 닦아서 우리가 얘기하는 염불, 간경, 주력, 불사, 참선, 위빠사나 모든 수행을 수억 겁 동안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 동안 닦아서 결국에 부처가 됐어요.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것도 진실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목적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건데.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것도 구경의 진실이 아니라고 한 건 왜 그럴까요? 부처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방편으로 세우는 거죠, 그죠. 부처의 깨달음을 얻고 나면 부처의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으나 내가 이러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구경이 아닌 것이지요. 진정한 구경은 말 한마디 붙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방편 하나 티끌 하나 붙을 자리가 없어서 내가 부처라는 말도 오염이지요, 벌써. 깨달음이라는 말도 오염이지요. 불이법이 아니니까. 부처는 중생과 상대해서 말하는 말이잖아요. 방편의 말. 깨달음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무명 중생들에 빗대어서 방편으로 만든 게 깨달음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런 말로써 이 말은 부처의 깨달음이 구경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고, 아니고. 방편으로는 부처의 깨달음이 구경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로써도 이렇게 티끌 하나조차 사그리 쓰러버려야 된다. 하나의 티끌도 남아선 안 된다. 부처라는 티끌도 남아선 안 된단 말이지요. 얼마나 위험한 얘기입니까. 이걸 예를 들어 타 종교인들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 보면 “여 봐 여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부처의 깨달음도 진짜가 아니라잖아.” “너희들은 어리석게 불교에 와서 진짜가 아닌 걸 믿고 있냐.” “진짜는 이 분이야.” 이렇게 설명하는 분이 실제 있다니까요.
그래서 성철 스님을 비판할 때 선사 스님들의 이런 구절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논문을 쓴 걸 봤습니다, 제가. 타 종교에서. 그래서 그걸 읽으면서 야 구구절절 말 그대로 논리 가지고 이 법을 이렇게 얘기하는데 야 너무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러면 논문으로써는 틀린 말이 아니에요. 논문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논문은 말 가지고 논리만 따지는 거니까. 실제 이 얘기를 했으니까. 논문 쓰는 사람들이,
최고의 교수님들이 논문을 가지고 불교를 비판하면 비판할 게 너무 많습니다. 정말 너무 많지요. 다 가짜로 세우는 말인데. 그래서 가짜를 깨뜨리는 건데. 그걸 깨뜨리는 걸 ‘야 불교는 희한하네’ ‘이놈들은 쟤네가 최고라고 해도 부족할 판에 쟤네가 최고라고 해놓고 나서 쟤네가 또 그건 아니라고 그러네’ ‘야 이거 너무 편한데’ 너무 좋잖아요. 불교를 비난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스스로 다 깨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이렇게 부처, 이거 조작이잖아요. 만들어낸 거잖아요. 깨달음 이것도 조작해서 만들어낸, 방편은 전부다 조작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없다는 견해를 내지 말고, 법이 본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있다는 견해를 내지도 말라. 있다거나 없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분별의 견해일 뿐이니, 이는 마치 눈 속에 낀 헛된 꽃과 같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8)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부처의 깨달음, 그게 있느냐? 본래 있는 것이냐? 부처의 깨달음을 본래 있는 것이라고 해도 맞지 않아요. 없는 것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한 것처럼 ‘법’ 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이잖아요. ‘법’ 부처의 깨달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본래 있는 게 아니죠. 부처의 깨달음을 방편으로 만들어낸 거니까.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없다는 견해도 내지 마라’ 부처의 깨달음이 없다,
라고 생각하면 문득 또 어리석은 거예요. ‘부처의 깨달음이 없어’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런데 법이 또 본래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있지’ 해서 ‘있다’라는 견해도 내지 마라. 어떤 견해를 내더라고 그건 내 머릿속에서 만든 분별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건 진짜 부처가 아닙니다. 내 생각일 뿐이지요. ‘불법이 있다’라고 해도 그건 생각일 뿐이고 ‘없다’라고 해도 생각일 뿐이지. ‘부처가 있다’라고 생각한다고 내가 부처가 돼요?
‘없다’라고 생각한다고 내가 부처가 됩니까? 그건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견해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지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분별의 견해일 뿐이니. 마치 눈 속에 낀 허공 꽃과 같다.
조사의 문중에서는 다만 헤아림을 쉬고 견해를 잊음을 말할 뿐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8)
이 불법의 문중, 조사의 문중에서는 머리로 헤아리고 이런 걸 쉬고 모든 견해를 잊는 것을 말한다.
헤아림을 잊으면 불도가 크게 일어나고, 분별하면 마군(魔軍)이 세차게 일어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8, 229)
헤아림만 잊으면 저절로 불도가 일어난다는 거지요.
부처도 중생도 모두 그대가 만든 허망한 견해일 뿐이다.
모든 견해는 전부 버려야만 한다.
어떤 견해도 없다면 무변신(無邊身)이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9)
나, 너 하는 어떤 특정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변신’ 한도 끝도 없는 온 우주법계 그대로가 바로 내 몸이라는 거지요. 법신 부처라는 것이지요. 그걸 ‘무변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법신 부처님이 되려면 무변신이 되려면 어떤 견해도 없어야 한다.
만약 견해가 있다면 곧 외도(外道)라 일컫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9)
견해가 있다면 곧 외도입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불교적인 견해를 딱 세워놓더라도 그건 외도입니다. 불교를 체계화시키면 그건 딱 외도가 돼버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니까 예를 들어 지금 이런 얘기를 들으면 불교학과 교수님들은 참 억울하지요.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한 대 맞은 거 같은. 불교학과 교수님들이 불교를 견해를 세워서 체계화시키는 데만 능수능란하다면 그분의 개인적인 괴로움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머리로 세워놓은 거니까.
그걸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것이고. 내가 논문을 써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냥 자신의 학문을 하는 거지요, 학문을 하는 거. 그러니까 그 사람을 가지고 ‘마음공부한다’ 이렇게 얘기할 순 없어요. 학문을 하는 사람. 학문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동대 불교학과 교수님들 중에 학문을 하는 분도 일부 계시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동대 교수님들 중에 학문을 하지 않고, 물론 처음엔 학문으로 시작했던 분들이 많겠지요.
불교를 머리로 공부하셨겠지요. 그러다가 이걸 진짜 자기가 수행하고 공부하고 하신 그런 분들도 많이 계세요. 심지어는 그렇게 교수하다가 ‘야 이거 진짜 내가 헛것을 공부했구나’ 해서 다 버리고 뭐 어디 가서 수행하고 공부하러 다니고 떠돌아 만행 다니고 뭐 선원을 차리고 이런 분들도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스스로 바르게 공부를 하면 스스로 깨고 나오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은 학문은 하지만 학문을 하나의 방편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학문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선을 공부하는 스님들이고 교수님들이고 그냥 공부하는, 공부를 학문으로만 하면 핵심은 인생이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면 그 괴로움이 소멸되겠지요.
조작함이 없이 마음 나는 대로 지내되, 공연히 마음을 쓰지는 말라. 진실을 따로 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견해를 쉬기만 하면 될 뿐.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9)
아까 지난 시간 제가 얘기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오직 말없이 계합할 뿐이니, 이를 무위법문(無爲法門)이라 한다.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이 없음을 알아서 문득 깨닫기만 하면 된다. 만약 애써 배우고자 하면 더욱 멀어진다. 만약 둘로 분별하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이 된다면, 비로소 도를 배울 자격이 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9)
비유죠, 비유. ‘야 나는 돌이나 나무처럼 돼야지’ 뭐 이래 생각할 필요는 없고. 돌과 나무같이 분별하지 않게 된다면 비로소 도를 배울 기본 자질이 있다. 즉 이렇게 법문을 들어도, 법문을 들어도 법문을 취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취하고 싶은 걸 딱 쥐고 버릴 건 버리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그냥 생각 없이 들어야 된다는 거지요.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들어야 된다. 그다음 장에 보면요.
“허망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황벽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 허망한 생각이 일어남을 깨달을 때에 바로 그 깨닫는 것이 바로 부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1)
즉 허망한 한 생각이 일어났어요. 분별하는 한 생각이 일어났어요. 그때 부처는 어디 있을까요. 허망한 한 생각이 일어난 줄 아는 그놈이 바로 부처입니다. 허망한 한 생각이 바다가 있는데 바다가 부처예요. 그 위에 있는 파도가 중생의 분별심입니다. 그런데 파도는 바다와 다른 게 아니지요. 파도가 곧 바다잖아요. 파도를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그냥 그대로 바다니까. 그런데 만약에 파도 중에 하나의 파도가 ‘나는 파도는 싫어’
‘난 바다가 될 거야’ 하고 마음을 먹으면 스스로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고 ‘나는 바다가 될 거야’라고 마음먹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바다가 되리라고 발심을 하고 막 수행을 하고 염불하고 독경을 하고 절하기 시작하고 있어요, 파도가. 그걸 통해서 얘가 부처, 바다가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은 언제나 부처였는데. 그러니까 생각이 일어날 때 분별 망상이 일어날 때 그 생각 자체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날 때 ‘번뇌즉보리’라고 하잖아요. 번뇌, 일어나는 그 번뇌가 그대로 부처다. 번뇌는 나온 자리 없이 나왔다가 간 자리를 찾아갈 수 없이 또 가버립니다. 무수한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돌아가면 또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데. 분명히 어딘가에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어요. 그걸 불교에서는 당처에요, 당처. 목전, 눈앞이라 이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생각해보면 이미지가 그려져요.
그런데 그 이미지가 어디 그려졌어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려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야지만 보이잖아요. 도화지가 없는데 허공에다 그림 그리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잖아요. 즉 여러분이 생각을 했다,라는 건 어딘가에서 생각이 일어난 거예요. 엇다가 생각을 그려버렸어요. 그 생각, 이미지, 상이 만들어졌잖아요. 그게 또 없어졌잖아요. 그걸 어디서 그렸습니까.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 어딘가 같아요, 하여간. 어딘지 모르겠지만.
이게 옛날에 뇌라고도 생각했는데. 뇌가 아닙니다. 어딘지 몰라요. 그러니까 목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목전, 눈앞이다’ ‘당처다’ ‘지금 당장에 눈앞에 처한 바로 이 자리다’ ‘바로 지금 여기다’ 뭐 이렇게 표현하고. ‘이 자리다’라고도 표현을 하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거뿐이지. 어딘지 모르지만 분명하잖아요. 생생하게 분명히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잖아요. 그게 부처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생각은 왔다 가는 생멸법이니까.
그 생각의 내용물을 좇아갈 필요는 없어요. 생각의 내용이야 뭐 좋든 나쁘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졌다,라는 그 사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졌다,라는 그 사실이 이미 부처라는 이미 바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선악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게 머리로 30분 동안 나쁜 생각을 막 했어요. 좀 있다가 또 좋은 생각을 30분 했어요. 부처는 한 번도 훼손된 적이 없습니다.
별로 안 좋아 보이는 파도가 막 칠 때나 고요하게 파도가 칠 때나 그냥 걔네는 언제나 바다였어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바다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놈이 무슨 생각 하는지’ ‘무슨 행동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돈이 많은지’ ‘명예가 높은지’ ‘잘 생겼는지’ 뭐 이런 것만 관심 있는 거지요. 내용물,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 마치 생각과 같이 허망하게 왔다가 가는 것들, 거기에만 관심이 있는 거지요.
내가 비싼 집에 가서 하인이 해다 주는 밥을 인도에서는 하인이라고, 누가 해다 주는 밥을 가만히 앉아가지고 떠먹여주는 걸 가만히 먹고 몇 천 평 되는 몇 백 평 되는 아파트에서 누워 자고 그러는 것과 그냥 좁은 방에서 내가 그냥 밥 하나 김치 하나 해서 밥을 먹는 것과 내용물은 다르잖아요. 분별해서 내용을 따라가면 다 달라요. 그런데 ‘누가 잡고 누가 먹었냐’ ‘이렇게, 이렇게 씹어서 먹는 놈이 누구냐’ ‘누가 잠을 자는 놈이 누구냐’
그 자리에선 하나도 바뀌는 게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든 돈이 없는 사람이든 병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똑같다는 거지요. ‘아픈 줄 아는 놈 건강한 줄 아는 놈이 누구냐’ 그 자리에서는 한 치의 분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걸 대 평등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허망하게 생각이 일어날 줄 알 때 ‘허망한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깨닫는 ‘아 일어났네’ 하고 깨닫는 그것이 바로 부처다,라고 얘기한 거지요. 지금 바로 깨달을 때 여기서 깨달을 땐 ‘알아차렸다’ 이 소리에요.
“지금 바로 깨달을 때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2)
‘생각이 일어났다’라는 걸 깨달을 때 부처는 어디 있습니까.
황벽이 말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깨닫는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2)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라는 것을 깨닫는 건 어디서 나오느냐?” 도대체. “생각이 일어났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그놈은 누구냐?” “내가 생각이 일어난 걸 깨달을 때 부처는 어딨습니까?” 하는 그 질문은 어디서 나왔냐.
“말과 침묵, 움직이고 고요함, 그 모든 소리와 색깔이 전부 부처인데, 어디에서 다시 부처를 찾는가?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붙이지 말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2)
말할 때 말하는 것이 부처고.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이 부처고. 움직일 때 움직이는 것이 부처고. 고요할 때 고요한 그것이 바로 부처다. 모든 소리 들리는 소리 전부 다가 부처입니다. 부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분별을 따라가서 그 소리를 ‘이 소리 저 소리’ ‘좋은 소리 나쁜 소리’ 이렇게 해석하니까 그건 중생이 소리를 듣는 거지만 해석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할 때 ‘이 소리가 왜 부처지’ 하고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듣기만 할 때 그때 언젠간 ‘모든 소리가 하나하나 다 부처였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소리와 보이는 색깔 모양 그것이 전부 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을 때는 특정한 소리를 듣고 깨닫는 게 한 60∼ 80% 되고 어떤 모양의 움직임을 보고 깨닫는 게 보통 한 20∼ 30% 된다. 뭐 이런 식의 표현을 써요. 가만히 앉아있다 깨닫는 그런 사례는 없어요.
뭐 움직일 때 움직이는 걸 볼 때아니면 어떤 소리를 들을 때 그럴 때 깨닫는다 말이지요. 법문 소리를 듣고 깨닫거나 특정한 소리를 듣고 깨닫거나 뭔가 움직임을 보고 깨닫거나 그런단 말이지요. 언제 어떨 때 뭘 보고 깨달을지는 몰라요. 왜? 아들딸 둘이 막 싸우는 소리 듣고 깨달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아들딸 막 싸우는 소리 그게 부처니까 남들한테 계속 아들딸 싸우라고만 시켜야 되겠어요. 그게 부처인 줄 알고.
아들딸 싸우는 소리를 듣고 누나한테 동생이 욕을 했어요. 뭐 그게 좋은 소리라고 그걸 가지고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즉 이 소리를 왜 하냐면 ‘이 뭐고’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마 삼근’ 여긴 볼 일이 없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 이게 좋은 화두다. 나쁜 화두다. 이런 게 없어요. 모든 소리가 전부다 화두입니다. 전부다 ‘뜰 앞의 잣나무’에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를 그림으로 그리면 벌써 이거는 아니지요. 모든 소리와 모든 색깔이 전부 부처인데.
뜰 앞에 잣나무를 보면서 스승과 제자가 얘기하고 있었겠지요. 제자가 스승한테 “뭐가 부처입니까?” 제자가 잣나무를 보고 있으니 “뜰 앞에 잣나무가 부처다.” 보면 보는 게 부처고, 들으면 듣는 게 부처고, 하기 때문에.
산과 강과 대지와 해와 달과 별이 모두 그대 마음을 벗어나지 않고, 삼천대천세계 온 우주가 전부 그대 자신 하나인데, 어디에 여러 가지로 분별될 것이 있겠는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2)
되게 유명한 하나의 싯구에요. 이런 걸로 책 제목을 낸 책들도 있었고. 산하대지 일월성신이 모두 그대 본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산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본래이고. 자불, 나라는 부처가 저 산이 바로 나라는 부처와 다르지 않고 강이 바로 부처고. 대지와 해와 달이 바로 나 자신이고 나의 부처란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이 산하대지 온 우주 전체가 내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고 삼천대천세계 온 우주 전체가 그대 자신으로 하나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나라는 참 성품이 참 부처가 꾸는 꿈입니다. 산하대지 모든 것이, 온 우주법계 삼천대천세계 전부 다가 내가 꾸는 꿈일 뿐이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분별할 것이 있겠느냐. 그러니까 나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온 우주에는. 온 우주에는 저 하늘을 봐도 나고, 땅을 봐도 나고, 이게 육신의 나가 아니라, 진정한 나라는 거지요.
이 부처를 나라고 표현했을 때 부처를 자기에게서 찾아야 되니까, 삼천 대천세계가 나 아닌 게 없는 겁니다. 남들과 뭐 하러 싸워요, 그게 난데. 저기 저 설악산 봉정암이나 뭐 무슨 영험 있는 도량을 찾아갈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그게 바로 난데. 부처가 나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고, 절이 나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모든 게 다 구족 되어 있는데. 어딘가 특정한 곳을 찾아가서 거기에 부처가 있고 부처에 조금 더 가까운 지형이 있고 뭐 기운이 센 데가 있고 다 내 망상 분별 아닙니까.
온 우주가 다 내 마음 아닌 게 없는데. 어디 가서 그렇게 특별히 영험 있는 데를 찾겠어요. 여기에 영험 있는 걸 내가 그냥 언제나 끌고 다니고 있는데. 그것과 함께 살고 있고 함께 말하고 함께 잠들고 늘 함께 살고 있는데. 특정한 영험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거는 지금 여기 있는 부처를 버리고 또 다른 지지 부리 한 걸 좇아가는 거 아니겠어요? 진짜배기를 버리고 가짜를 좇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험 있는 절을 찾아가서 뭐 하겠어요.
영험 있는 절을 찾아간다,라는 마음 자체가 진짜배기는 버리겠다는 거 아니에요. 여기 없는 줄 아니까 저쪽에 진짜를 찾아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 있는 얘가 소외를 당하는 거지요. 그런다고 해서 영험 있는 절을 찾아가지 말라는 건 아니고요.(웃음) 거기 가는 건 가는 거지요, 그냥. 인생은 살아야 되는데. 밥도 먹고 맛있는 것도 때로는 먹고 좋은 데도 가고 좋은 것도 보고 눈에도 좋고, 모든 게 다 부처니까.
화장실 가서 똥을 바라봐도 부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봐도 부처인데. 기왕이면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는 것도 좋지요. 그리고 그렇게 찾아가는 게 좋은 이유는 순례를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일상에 있으면 일상에서 맨 날 하는 공통된 획일화된 패턴, 생각의 패턴이 있습니다. 패턴이 나를 묶고 있어요. 보살님들 아침 되면 ‘항상 점심 뭐 해 먹지’ ‘저녁 뭐 차려주지’
이 패턴을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여행을 딱 떠나면 ‘아이쿠 난 이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아무것도 필요 없구나’ ‘적어도 내가 여행지에서는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구나’ 맨 날 신경 쓰던 고민들을 탁 내려놓고 그냥 거기서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고 감동할 수 있게 되고 마음이 또 열린, 분별심이 탁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을 성취한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그러한 현실에서 중생들은 아주 우리 부처가, 제가 본질을 얘기할 때는 부처의 가르침을 얘기하는 거지. 우리 중생들은 아직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니까 현실은 현실대로 잘 사용하고 또 진실은 진실대로 가슴속에 새기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교만해지지 않게 됩니다.
어설프게 공부하면 교만해서 막 스님들도 무시하고 기도하는 스님들 무시하고 염불하는 스님들 무시하고 이건 정말 어리석은 거예요. 하심 하지 못하는 거지요. 겸손하지 못하고 이게 최고의 공부거든요. 참되게 공부된 사람은 나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내가 교만한 마음을 내겠어요. 내가 더 잘났다는 마음을 내겠어요. 실제 스님들 중에 깨달음을 얻고 원만히 보임을 성취하고 아주 원만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데,
그냥 기도 스님으로 보조 스님으로 그냥 어디 조만한 허름한 절에서 그냥 기도해주고 아침 예불 전담 기도 스님. 이렇게 사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고 왜냐면 저 우리 십우도에서 나오듯이 끝에 가면 원만하게 공부가 다 있고 나면 스스로 공부했다 안 했다 생각 자체가 없어요. 그냥 자기가 그냥 사는 거예요. 자기 주어진 삶을 사는 겁니다. 좋고 나쁜 차별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기도와 명상이 기도와 참선이 아무런 하등의 차이가 없어요.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놈이 누구예요. 그게 참선이고 그게 선이에요, 선. 그런데 기도할 때 막 염불하면서 ‘되게 해주세요’ 이거는 그냥 기복적인 기도고. 기도하면서 염불을 막 하면서 금강경 독송을 하면서 또는 진언을 막 외우면서 광명진언을 막 외우면서 ‘아 외우는 이놈이 누구지’ 하고 꽉 막혀있으면 그게 바로 선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하면 길을 걷는 것도 선이에요.
산에 가는 것도 선이고. 생각하는 것도 선이에요. ‘이 생각의 당처가 어디서 나왔나’ 생각도 선이지요. 청소하는 것도 선이고. 모든 게 선아님이 없어요. 여행하는 것도 선이고 심지어 나쁜 짓 하는 것도 선이에요. 나쁜 짓 하는 그놈이 누가 나쁜 짓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게 선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건 좋고 어떤 게 나쁘다. 이렇게 얘기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한동안 특히나 작년에는 주로 좀 많이 그랬는데.
조금 강하게 깬 이유는 하나에 너무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으면 그걸 깨주기가 약간 강력 처방이 필요하기 때문에 좀 센 약을 잠깐 드린 것이고. 올해 들어서 다시 조금 부드럽게 얘기하는 이유는 이제 그 센 약을 드렸으니까. 또 그 센 약에도 중독될까 봐. 그런 거에도 또 스스로 집착해서는 안 되니, 그렇게 두루두루 ‘대 평등심’을 일으켜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하는 얘기를 드리는 겁니다. 여기까지 오늘 하겠습니다. ~박수 (이어서 53분 28초 녹취)
첫댓글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따뜻한 스님법문 읽고 하루를 시작합니다.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