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대승경전 중 반야심경과 함께 반야部를 대표하는 경전이지요. 반야부 (반야 계통) 경전은 불교 경전 중 가장 분량이 많고 난해하여 읽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내용이 요약하면 사실 반야심경과 금강경 수준을 넘지 않아요. 그래서 방대한 반야경을 읽는 대신 예로부터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권합니다.
금강경은 흔히 공(空)을 설하는 경전으로 말을 하지요. 세상이 모두 아지랑이 물거품 번개불 꿈과 같으니 거기 집착하지 말고 올바른 실지 모습(實相)을 제대로 바로 보라고 합니다. 또 그러니 위해서는 나라는 집착에 얽매이면 안 된다며 집착의 대표적 사례로 4가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를 듭니다. 그리고 나 없는 자리에서 모든 일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금강경 해석은 이렇게 공을 설하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금강경의 핵심은 공이 아니라 중생 제도에 있어요. 중생을 제도하는 게 금강경의 목적이고, 중생 제도를 위해 우리가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하고 오로지 자비로 중생 제도를 해야한다는 게 제가 보는 금강경의 진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없는 자리에서 이웃을 돕고 이웃을 이익되게 하는 삶을 살면 깨달음이 저절로 온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금강경을 이렇게 말씀하는 분은 지극히 드뭅니다. 다들 공만 이야기하고 아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만 강조들 하시지요. 아마 친구 분도 그렇게 하실지 모르겠네요.
금강경은 대승불교, 한국불교에서 매우 중요 시 하는 경전입니다(조계종의 소의경전임). 지혜도 밝아지고 번뇌를 끊고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금강경을 읽으면 어려움이 타파된다고 해서 능단금강경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대장경은 경(경전), 율(계율에 관한 경전), 논(경전에 대한 논문), 이 세가지를 모두 합친 불교의 책들을 부르는 용어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그 양이 방대한 것을 '팔만'이란 말로 표현한 것으로, 그래서 팔만대장경이라 해서 책 수가 팔만은 아닙니다. 그냥 관습적으로 쓰는 용어지요.
팔만대장경에는 여러 종류의 경전이 있습니다. 크게 분류하면 소승경전(아함부) 대승경전이고요, 대승경전 중에는 반야부 보적부 화엄 열반 법화 유식 여래장 등등, 그 가르침의 종류에 따라 그렇게 있어요. 그런데 열반부 같은 경우는 40권 짜리 하나, 법화도 한 권, 화엄은 80권 짜리 등 3개 정도로 그렇게 양이 많지 않은데 반야부는 무려 600부나 됩니다. 그래서 반야부를 모두 읽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그 중 핵심을 말하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반야의 대표적 경전으로 중국이나 한국에 내려온 거지요. 특히 금강경은 선종의 중흥조인 육조 혜능선사를 깨달음으로 이끈 경전이라 선종(선불교)에서 중시하였고 우리나라는 과거 비구 비구승 투쟁이 비구 중심의 조계종으로 정리되면서 선종이 주류로 자리잡게 되고 따라서 금강경을 조계종의 교과서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라나는 원래 화엄불교의 나라였고, 우리나라 선불교의 효시인 신라 말의 구산선문의 선사들도 전부 화엄교학을 공부한 분들이라 하지요. 그리고 조선 시대 내내 화엄불교와 선불교가 같이 중시되었는데 해방 후 정화불사를 거치며 화엄경은 사라지고 금강경 중시의 풍토가 유지됩니다. 이것은 대처승인 태고종이 소의경전을 옛 전통 그대로 화엄경과 금강경으로 하고 있는데 대한 반발로 한 건데 세월이 흐르며 다 잊어지고 금강경 중심의 불교가 됩니다.
금강경 중심의 불교의 맹점은, 깨달음 위주의 불교가 되게 한 겁니다. 본래 불교는 깨달음이 궁극이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중생 제도를 하는게 궁극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 상황은 금강경의 본 뜻은 잊고 공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만 중시 여기고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 보고 아상(나에 대한 집착, 교만 등 나 잘난 마음)을 없애라고 할수록 그 말 하는 분들은 정작 본인이 더 아상에 사로잡혀 갑니다. 남 보고는 무아상을 요구하는데, 본인은 아상 속에 갇혀 있고 또 아상에 갇힌 줄도 몰라요.
친구 분이 어떻게 금강경을 소개할지 모르겠으나, 금강경의 핵심은 첫 3 chaptor(경전에는 分이라고 말합니다)에 다 나와 있어요. 특히 세번째 장(分)이 그러한데, 거기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부처님 제자 수보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을 항복(굴복) 받아야 하는가 묻자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라 & 그리고 일체중생을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을 내지 마라',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그 다음에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면 왜 안 되는지, 또 어떻게 하면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쭉 설해집니다.
그렇게 그 방법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혹시나 공, 무아상에 혹해 중생제도의 본뜻을 잊을까봐 중간에(17장) 또한번 수보리에게 중생제도를 잊지말라고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리고 또 이 세상의 실상에 대해 수보리와 문답식 가르침을 이어나가지요.
맞습니다. 불교를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 하는데, 불교는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제도의 가르침에요. 깨달음은 중생 제도의 한 방법으로 필요한 것이지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거나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불교의 끝으로 알고 있고 불자들도 그러하고 심지어 스님이나 학자도 그러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오해지요.
그런 이유로 중생제도의 부처님 가르침이 자비의 실천행이 되지 못하고 지금도 헛깨비같은 깨달음만 찾고 헤매는 가르침이 되어 버렸어요. 기독교가 실천행이 뛰어난 데 비해, 불교는 너무도 형이상학적 이상에만 구름잡듯 합니다. 중생의 현실적 고통은 외면한채, 내 깨달음만이 제일 중요한 게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불교 모습니다.
첫댓글 이 글은 페드넷에서 어느 샘이 금강경에 대해 문의하길래 제가 드린 댓글입니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금강경을 최고로 아는데, 그렇게 아시면 안 돼요.
금강경은 경전에 나오는 그대로 뗏목일 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 하듯
금강경을 질문하신 선생님 덕분에 함께 공부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선생님의 전법의지와 공덕에 찬탄드립니다.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