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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매일매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인생이 한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이지만 수많은 인생에서, 수많은 인생이라는 자체는 언제나 하루하루의 연장입니다. 하루가 반복되는 거에요.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될지, 또 어떻게 살아야 될지. 또 우리가 생각하는 생활 속의 수행이라는 것이 생활 속에서 명상하고 수행해 나간다. 삶속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루하루의 삶을 부처님 가르침대로 명상, 수행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오늘은 좀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법당에 이렇게 나오셨는데, 법당에 올 때, 이 절에 올 때, 차를 타고 왔든, 다 차를 타고 오셨겠네요. 법당에 차를 타고 올 때, 오는 풍경이 어땠습니까? 오늘 햇살이 다른 날과 비교해서 어땠나요? ‘아~ 오늘 아주, 오늘 날씨가 너무 좋죠?’ 아주 초가을에 들어서고 있으면서 햇살이 아주 반짝반짝 거리고, 엊그제 비가 온 다음에 더욱더 하늘이 청명해 졌어요. 그리고 아주 너무나도 감촉이, 감촉되었을 때 너무나도 좋은 느낌의 바람이 살랑살랑 붑니다.
제가 어제 그제, 이렇게 저쪽, 고성 위쪽으로 일이 있어 가는데, 가면서 ‘야~ 이것은 일하러 가는게 아니구나.’ 야~ 이건 무슨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과도 같고, 꼭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너무나 가슴이 막 이렇게 설렌단 말이죠. 뭔가 막 들뜨는 가슴이라기보다는 빛을 봤을 때, 그 바람이 부는 것을 봤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순간 그야말로 모두를 달리한다 그럴까? 그냥 삶을 살아가다가도 뭔가를 짠하게 느낄 때, 그럴 때 우리는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차원의 어떤 세상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 종일 그렇게 될 수도 있죠.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가 많이들 그렇게 못하고 있지만, 우리 하루 일과를 보잔 말이에요. 명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수행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루 중에 최대한 자주자주, 최대한 자주자주, 따라 해보실까요? “잠깐 멈춤.” 잠깐 멈추는 시간을 가지는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 달려가기 바쁘다보니까, 나아가기 바쁘다 보니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저녁때 눈을 감을 때까지 멈추지를 못하고 달려만 간단 말이에요. 멈추고 서 있는 적이 별로 없어요.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라도 머릿속은 끊임없이 무언가로 속삭이고 있고, 끊임없이 뭔가 일, 갈등, 수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단 말이에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 중에 자주자주 멈추는 시간을 가져야 된다. 잠깐 멈춘 뒤 바라보는, 잠깐 멈춰 서서 바라보는 시간. 이게 핵심입니다. 보통은 하루에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앉아서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앉아서 참선한다?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얼마만큼 자주자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루에 세 시간씩 앉아서 참선을 하는게 그 시간을 획득 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주자주, 한 시간에 한번씩, 삼십분에 한번씩. 십 분에 한번, 오 분에 한번씩, 잠깐이라도 괜찮단 말이에요. 잠깐이라도. 30초라도 괜찮고, 1분이라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그 잠깐 멈추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느냐? 이게 아주 핵심이에요. 그래서 이 생활수행이라는 것은 항상 잠깐 멈춰서 바라보는 시간을, 모든 순간에, 모든 일과 중에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에 알람이 울려요. 아침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순간에, 아침에 알람이 딱 울리고 일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이 뭐겠어요?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의 느낌. 그 느낌을 느껴봤습니까? 그 느낌을 느껴봐야 됩니다. 때로는 ‘아~ 오늘은 좀 가뿐하게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일 수도 있고, ‘오늘은 정말 일어나기 싫은데’ 일어나기 싫은데 어렵게 어렵게, 아~ 이 좀 더 자고 싶은 이 욕망, 욕구, 이 어떤 찌뿌드한 마음, 몸. 이것을 느끼면서 일어났었을 수도 있어요.
그 아침에 일어난, 일어나자마자 그 느낌을, 한 번 가만히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느낌으로 내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잠깐 멈춰서 바라보는 거에요. 알람을 다시 끄고 ‘좀더 잘까?’ 아니면 ‘빨리 일어날까?’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지?’ ‘아~ 오늘 하루 힘든 일 있지?’ 이런 걸 생각하기 전에, 일단 잠깐 멈추는 겁니다. 일어나자마자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알아야 되요. 스스로 알고 관찰한단 말이죠. 그리고 나서 일어나서 화장실 간단 말이에요. 화장실에 가서 씻습니다. 세수하고 손발을 씻는다. 이게 아주 중요한 공부에 한 가지, 한가지들이 뭐냐 하면, 하루에 자주자주 반복되는 어떤 한 가지 행위, 행동들에 대해서, 딱 찍어서, 그것을 한번, 그 느낌을 기억해 보는 작업.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난 순간의 느낌을 한 번 느껴보고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오늘 아침 여러분 전부다, 아마 여기 있는 분들 전부다 세수를 했을 텐데. 물이 얼굴에 와 닿는 느낌. 오늘 아침 물이 얼굴에 와 닿는 느낌이 어땠을까요? 지금부터는, 앞으로는 여러분의 삶에서, 물이 내 얼굴에 와 닿는 그 느낌을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물이 내 손에 요렇게 담겼다가 내 얼굴로 닿는 느낌, 그 느낌은 어떤가? 약간 차가운 물이라서 정신이 번쩍 드는가? 미지근한 물이었는가? 그 물기가 얼굴을 접촉하면서 어땠는가? 하는 그 느낌들을 한 번 가만히 관찰해 보는 겁니다. 왜냐? 우리는 평생 살면서 아침에 세수하면서 그 세수하는 느낌을 느껴 본적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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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없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멈추지를 못하죠. 세수하는 순간 멈추지를 못하는 거에요. 빨리 후딱 끝내고 다른 일 해야 되니까. 빨리 출근해야 되니까. 빨리 밥 먹고 일하러 가야 되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에 멈추지를 못해요. 중요한 순간입니다. 세수하는 순간, 세수하는 순간에 물의 감촉을 느껴보는. 이 얼마나, 여러분 가만히 한번 보세요. 정신없이 세수하고 나갈 때의 그 세수와 물의 느낌을 느껴보고, 잠시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잠시 손을 물에다 놓고, 잠시 눈을 감고, 물의 촉감을 느껴보고, 물의 온도를 한 번 감지해 보는 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내 피부에 와 닿을 때, 내 얼굴에, 살결에 와 닿을 때, 어떤 느낌인가를 한 번 분명히 알아보고 관찰해 보는 거에요.
이건 아주 단순해서 아무것도 아닌거 같지만, 단순해서 너무 단순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같지만,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깊은 고요로, 평화로, 이끌어주는 아주 중요한 수행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중요한 수행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세수할 때 마다, 손을 씻을 때 마다, 잠깐 멈춰서 그 손 씻는 느낌, 물이 나한테 와서 닿는 느낌을 한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해요.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기 직전에 기도합니까? 안합니까? 혼자서라도 잠깐이라도 기도를 하란 말이에요. 합장을 해서 한 1, 2분.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공양하기 직전에 잠깐 멈추는 거에요. 잠깐 멈춰서 허겁지겁 먹으려던 그 의식을 잠깐 늦춰보는 겁니다. 그리고 밥 먹기 직전에 ‘아~ 내가 밥을 먹는구나. 지금부터 밥을 먹구나.’ 확실하게 인식하는 거에요. 그리고 밥을 먹습니다. 음식을 씹을 때요, 최대한 오래 씹어보는 거에요. 급할 때는 빨리 씹어 넘겨도 좋습니다. 그러나 빨리 씹어 넘기면서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죠. 그런데 될 수 있으면 오래 씹어 보는 거에요. 입안에 씹는 느낌이 어떤지를 한번 직접 느껴보는. 이 씹었을 때, 이 콩알 하나가 입에 들어와서 씹히는 느낌. 그 혀와 입이 합작을 해서 아주 잘게잘게 잘~ 기가 막히게 씹어서, 큰 덩어리 하나 없이, 모두가 잘게잘게 씹어주고, 그게 침과 섞여서, 어떻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그걸 한 번 관찰해 보는 겁니다. 이건 놀라운 경험이 될 수 있어요.
매일 같이 하루 세 번, 혹은 다섯 번 열 번 일어나는, 뭔가를 먹는 시간. 그 먹는 시간이 아~ 놀라운 시간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먹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한 번 느껴보면서 먹는 거에요. 관찰해 보면서 먹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맛을 한번 느껴보는 겁니다. 여러분 맛을 알아요? 음식들이 가져다주는 맛들을 충분히 경험합니까? 우리는 음식이 주는 맛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고, 대충 씹어 넘겨요. 그러다보니까 수많은 맛들은 그냥 섞이고, 뭉뚱그려, 짠맛, 단맛, 맛있는 맛, 맛없는 맛. 이렇게 넘겨버리지. 사실은 그렇게 언어로, 단순한 언어로 그 맛 하나를 탁~ 표현 할 수 없어요. 모든 음식은.
오랫동안 씹어서, 오랫동안 그 맛을 음미 할수록, 그것 본연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자연 그대로의 음식일 경우, 야채, 밥, 땅콩. 그냥 자연그대로의 음식일 경우, 오래 씹으면 오래 씹을수록요, 그것 독자적인 맛과 향이 납니다. 그것이 가진.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독자적인 독특한 맛과 향이 진하게 우러납니다. 무슨 쌈밥을 먹을 때, 쌈들이 다 비슷비슷한 맛 같잖아요. 물론 쌈밥 집에서 파는 쌈이야, 다 똑같은 비료에, 똑같은 땅에, 그냥 주니까. 최대한 획일화 되다보니까, 비슷비슷한 맛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좀 다르고.
그러나 자연 그대로의, 여러분 숲에 들어가서 숲속에 있는 풀들 뜯어다가 드셔보셨습니까? 쌈밥집의 쌈과는 차원이 다르죠. 하나하나마다 독자적이고 독특한 맛과 향이 놀랍게 담겨 있습니다. ‘아~ 어떻게 같은 게 있지 않고 다 놀랍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오래 씹으면 오래 씹을수록 그것에 대한 깊은 향기와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뭐 이것도 분별일 수 있겠지만, 조금 가공된 음식일수록, 몸에 안 좋은 음식일수록, 오래 씹게 되면, 첫맛은 좋아요. 빨리 먹기가 좋은 겁니다. 가공된 식품들은 소스와 강력한 자극을 하는 소스들, 이런 것들로 잠깐 씹어 넘기기에는 그게 훨씬 맛있어요. 그런데 오래도록 느끼면서 씹기에는 왜 부족한지를 한번 직접 음미하며 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인스턴트식품들을 과자같은 거 한번 씹어서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먹어보세요.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그러나 그게 좋다고 나쁘다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햄버거를 씹어서 먹을 때, 처음에 그 느낌은 아주 자극적인 소스로 맛있죠. 그래서 그것도 다 씹기 싫으니까, 다 씹어서 음미하기 싫으니까, 콜라를 섞어가지고 후르륵 넘겨버리죠. 그렇게 먹기가 제일 좋은게 인스턴트식품이죠. 음미하지 않고 먹기 좋은 것.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전혀 다른, 아주 새로운 어떤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우리 어떤 자연 그대로의 것들이 많거든요. 그렇다면 안 좋은 음식은 먹으면 안 되고, 좋은 음식만 먹어야 되느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될 수 있으면 좋죠.
그러나 안 좋은 음식을 먹게 됐을 때, 어쩔 수 없이 먹게 되었을 때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이럴 수 있죠. 안 좋은 음식을 함께 먹고 있는데, ‘나는 이건 안 먹는다.’ ‘난 이거 몸에 안 좋으니까 안 먹을 거야.’ 그것도 좋습니다. 딴 사람이 불편할 테니까, 불편하지 않게 유들이 있게 하는게 좋겠죠. 부드럽게.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안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안 먹을 것이다.’ 딱 선을 긋는 거,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에요. 아름다운 결심입니다. 그러나 또, 또 다른 결정, ‘아~ 내 혼자, 내 혼자 스스로는 안 먹을 것이지만, 그래도 함께 이렇게 있을 때, 남들 불편함을 주면서까지 내가 먹지 않기보다는, 그럴 땐 그냥 맛있게 먹을 거야.’ 이렇게 결정하는 거. 이것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아주 좋아요.
어느게 더 옳고, 그르거나, 더 높고 낮은 것은 없습니다. 그랬을 때 그 안 좋은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먹게 됐다. 먹게 되는 상황에 먹고 있다. 보통 우리는 어떻게 먹느냐 하면요. 안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알 수 없는 미묘함, 죄책감, 죄의식 내지는, 안 좋을거 같은 느낌, ‘아~ 이거 안 좋은데 이걸 또 먹어야 되네.’ 하는 느낌. ‘아~ 이거 먹으면 안 좋아 질 텐데.’ 하는 이런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아요. 그 안 좋은 음식 먹는 것만으로도 몸에 좀 안 좋아지겠지만.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이 더 무서운 겁니다. ‘이 음식 먹으면, 내 몸이 더 안 좋아 질 거야, 병이 더 악화 될 거야.’ 이런 생각, 이런 개념. 그것이 나를 더 죽이는 것이죠.
사실은 조금 가공돼서 안 좋은 음식일지라도, 오래 씹어 먹으면 좋아집니다. 오래 씹으면서 음미하면서 먹으면, 그 나쁜 성분이 실제 사라져요. 첫째 기도하고 먹으면 사라지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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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이 좋아져요. 실제로. 기도하느냐 안하느냐 마음의 의식에 따라서, 동일한 음식을 먹어도 깨어있는 자가 먹었을 때, 그 성분과 그냥 무의식으로 먹었을 때 성분이 달라진다라는 과학적인 연구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먹느냐? 그냥 먹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또 하나. 오랫동안 씹을 때, 침과 섞이면서 그 침이 안 좋은 성분들을, 안 좋은 어떤 것들을 분해해준다 라는 그런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음미하고, 오래 씹어 먹게 되면, 안 좋은 성분이 사라져요. 그래서 소화가 되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뭔가를 먹을 때라도 분별하지 않고, 잠시 멈춰서, 그 맛을 관찰하고, 음미하고, 바라보면서 먹을 필요가 있다.
이제 밥을 먹고, 출근을 합니다. 출근을 할 때 버스를 타고 가든, 지하철을 타고 가든, 혹은 자기 차를 끌고 가든, 차를 끌고 간다. 그럴 때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고 노래를 틉니다. 그런데 누군가 함께 가면서 들을 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 더구나 아침에 그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서 출근할 때, 물론 영어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겠다. 이건 좋습니다.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살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끄는 연습을 한 번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 TV를 켜고 라디오를 켜면서 그걸 귓속으로 자꾸 듣고 있는 시간, 그걸 가지고 생각으로, 온갖 시비 걸고 판단하는 시간, 그걸 잠시 내려놓고. 그냥 가기만 하는 거에요.
그 순간에 존재하는 시간, 순수하게 운전에 집중하는 시간, 그 시간을 한 번 가져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창밖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놀라운 순간으로 바뀔 수 있어요. 자기 마음을 관찰하게 되지만, 아침저녁으로 낮에 어딘가를 갈 때, 이동할 때, 창밖에 바라보이는 그 풍경이, 너무나도 숨죽이면서, 숨 막히는, 그런 아주 아름다운 그런 모습들을 매 순간순간 체크하면서, 느끼면서, 누리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는 여행을 가서만 여행이 아니라, 이런 의식상태를 여행이라고 한다.
어디를 가든, 잠시 마음이 비워져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다가올 수 있는 순간. 그 순간이 여행이거든요. 우린 여행을 떠났을 때, 해 뜨는 걸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일출을 보면 너무나도 경이로워요.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해 뜨는 걸 보면 그렇게 경이롭지 않습니다. 그거는 여행을 떠나서, 떠나지 않아서가 아니죠. 내 의식의 문제이지. 그래서 항상 어떤 차를 운전하거나, 혹은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도,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죠. 제가 지난번에 서울에 가서 보니까. 지하철 안에 95%, 거의 전부가 신문을 보고 있거나, 대부분이 핸드폰을 보고 있습니다. 핸드폰을. 핸드폰 액정을 이렇게 보고 있죠.
심지어 지하철과 지하철이 지나가는 교차되는 역에서, 다른 지하철을 갈아타는 순간, 갈아타면서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 교차하는 순간, 그 올라가는 순간에 조차, 전부 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좋다. 나쁘지 않다. 나쁘다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이렇게 보면 어떨까 싶은 거에요. 핸드폰을 바라보는 순간은, 핸드폰을 열기 직전에 핸드폰을 열려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기 직전에. 핸드폰을 연다라는 행위에다가 뭘 연결 시키냐 하면 잠시 멈춤. 잠시 멈춰서 바라보는, 이것을 내 스스로에게 입력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핸드폰을 열기 직전에 잠시 마음을 관찰하고, 핸드폰을 여는 연습을 한 번 해본다. 그런 습관을 가져보는 겁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딱 들자마자 바로 열지 않는. 잠시 마음을 관찰하고 열고. 누구한테 전화가 왔어도, 전화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열기 보다는, 잠시 마음을 관찰하고, 한번 울릴 정도라도 잠시 마음을 관찰하고, 핸드폰을 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매 순간순간, 잠시 멈춰서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되요. 특히 우리가 한 번씩 화가 날 때. 혹은 일이 안 풀릴 때, 아니면 몸이 아플 때,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있어요. 뭔가 깝깝하거나, 답답하거나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일수록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좋은데,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어떤 하나의 팁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파요. 아플 때 몸이 실제 어딘가가 아픕니다. 아플 때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면 5분마다 한번씩, 아니면 3분마다 한번씩, 아니면 최대한 틈나는 데로, 1분마다 한 번씩이면 더 좋고. 아픈 그 순간순간 마다, 적는 겁니다. 작은 메모지를 하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적는 거에요. 5분마다 한번씩, 어떻게 적느냐? 강도를 적는 거에요. 아픈 강도를 적어보는 거에요. 지금 1부터 10까지 강도라고 생각했을 때 얼마큼 아픈지. 지금 강도를 한번, 5정도. 5적어 놓고. 5분 있다가 다시 한 번 가만히 관찰해 보고, 지금 어느 정도 아프지? 관찰하고 그 강도를 6, 적어보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계속해서 강도를 적어보는 거에요. 아픈 강도를.
지금 병원에서는 이 마인드플리스. 마음을 관찰하는 것을 치유의 획기적인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에게 자기 아픈 마음을, 아픈 것을 관찰하는, 그것을 실제 시킨단 말이에요. 또 화가 났다. 화가 날 때, 그 화는 아픈 거에 비해서 좀 더 빨리 끝날 수 있거든요. 화가 난 순간부터 강도를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화가 확~ 났을 때, 강도 10, 1분후에 지금 강도 8, 6, 5. 하고 강도를 적어보는 겁니다. 화가 없어질 때까지. 화가 났을 땐 될 수 있으면 짧게 짧게 재는게 좋겠죠? 1분에 한번씩, 30초에 한번씩, 화가 난, 어느 정도 크기로 화가 나있는가? 그걸 한 번 관찰해, 지켜보는 거에요.
직장상사가, 군대에서 선임병이 나를 괴롭히고 갈구고, 옆에서 계속해서 옆에서 나무라고 그냥 합니다. 잔소릴 해요. 이때가 좋을 때입니다. 이 잔소리 한 시간 듣는 동안 죽을 지경이거든요. 그런데 이 잔소리 한 시간 들을 시간을, 상대방의 입에 잔소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잔소리가 나에게 들어와서 내 마음을 어떻게 휘젓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했을 때, 내 마음의 강도가 어땠는지. 내 맘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얼마만큼 화가 났는지. 욱 하고 얼마만큼 올라왔는지를 한번 관찰해서 적어, 적지 못하면 관찰해서 강도를 한번 생각해 보는 거죠.
그러면 그 시간이 아주 놀라운 순간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누군가가 저는 일상 생활 속에서 관찰하고 싶은데, 마음을 관하고 깨어있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 좀 더 열심히 해봐라. 했더니 또 열심히 해 봤어요. 그 다음날 열 번, 스무 번, 백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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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열심히 해 봤어요. 백 번도 넘게 해 봤는데 도저히 안 됩니다하고 찾아 왔어요. 그 다음날 찾아왔더니 그 스승님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어떻게 했어요?’ 했더니 ‘백번도 넘게 해 봤는데 안 됩니다.’ ‘아이고 축하한다. 그 전에는 한번두번도 안했을 꺼 아니냐. 그런데 100번도 넘게 시도했는데 안 된다. 안되는게 아니라 시도한 그 자체가 벌써 관한 것이다. 관하려고 시도를 하는 그 자체가 관이지. 내가 내 마음을 한번 관찰해 보겠다, 시도한 그 자체가 관찰하는 겁니다. 명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명상이라는 것은 실패한다? 실패한다라고 얘기 할 수가 없어요.
잡념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잡념이 백가지고 넘게, 천 가지도 넘게 일어납니다? 잡념이 백가지 넘게 일어난 사람은 백번 넘게 그 잡념을 본 사람이죠. 저는 잡념이 백개 정도가 아니라, 천개 만개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도 놀라운 사람입니다. 천개 만개의 잡념을 관찰한 사람이에요. 하루에 6만개의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생각을 우리는 뭐 한 백 개도 못보고 관찰을 못할거에요. 그런데 나는 어제 잡념이 천개도 넘게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변화죠. 평소에는 백개도 못 보던 사람이 천개의 잡념을 관찰했다? 이거 엄청난 명상 수행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잠깐 보고 놓치다 보니까, 그게 수행이 아니라고 착각을 하는 거에요. 엄청난 수행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아플 때, 화가 났을 때, 뭔가 평상심을 벗어났을 때 일수록, 그 강도를 한번 관찰해 보는 것, 뭔가 떨릴 때, 뭔가 발표를 앞두고,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마음이 떨릴 때, 그 떨리는 마음을 한 번 수치로 재보는 겁니다. 십초마다 한 번씩도 좋고, 계속 해서 낱낱이 관찰하고 지켜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상에서는 하루 중에 내 마음이 얼마만큼 평화로운가.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마음상태 일 때, 우리 마음은 평화롭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특별한 일이 없이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일 때 우리 마음은 자연을 닮아 있어요. 그러니까 평화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 중에 평화의 강도를 한번 체크해 보시란 말이죠. 내 마음이 어떤가하고 체크해 보는 겁니다. 자주자주 체크해 보는 거에요. 지금은 내 마음이 평화롭다. 내 마음은 많이 평화롭구나. 10정도로 평화롭다. 이제 그 다음에 또 잡념이 일어나거나, 온갖 생각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평화의 강도가 깨졌습니다. 평화로움이 5밖에 안 남았어요. 혹은 정신없을 때, 너무 정신없을 땐, 평화의 강도가 거의 제로 수준에까지 가깝습니다. 하루 중에 이 고요함의 강도, 평화로움의 어떤 수준은 끊임없이 달라지거든요. 그걸 가만히 한 번 관찰해 보는 거에요. 강도를 체크해 보는 거에요. 점수를 매겨 보는 거에요.
하루 중에 얼마나 생각이 많이 오고가는지. 평화로움이 얼마나 많이 깨지고 있는지를 아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이걸 평화롭게 만드는 연습을 하는게 수행이 아니고, 내 마음이 얼마만큼 평화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게 바로 평화고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억지로 평화를 되찾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억지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얼마만큼 평화로움이 깨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면 된다. 분명히 보고 있으면 된다는 거죠. 컴퓨터를 보통 사람들이 많이 켜죠. 혹은 TV를 많이 켭니다. 컴퓨터를 켤 때, 별생각 없이 파워버튼을 누르지 말라는 거죠.
이걸 내가 정말 켜야 될 필요가 있느냐? 한번 되짚어 보고, 그래도 정말 필요할 때는 그땐 켜는 거에요. 컴퓨터 파워버튼을 누를 때부터 부팅될 때까지. 그 짧은 시간에 딴 거 하지 말고, 그 짧은 시간에 잠깐 마음을 관찰해 보는 겁니다. 컴퓨터를 하는 중간중간에 자주, 잠시 멈춤을 해 보는 거에요. 이 사이트 보다가 다음 사이트로 넘어 가지 직전에, 또 다른 사이트를 클릭하기 전에, 마음을 잠시 멈춤 해 보는 겁니다. TV를 켤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TV를 켜잖아요. 별 생각 없이 TV를 켠단 말이에요. 습관적으로. 왜 그렇게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이 의식을 가지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리모컨을 들 때, 마음을 관찰하고, 탓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켜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켜라. 그러나 잠시 멈춘 뒤 켜자. 켜고 나서 내가 꼭 원하는 프로그램이 지금 나오기 때문에 TV를 켜서 그걸 보고 있습니다. 그 TV프로가 끝났어요. 끝나면 다른 데로 습관적으로 돌리지 말고, 잠시 멈춰보자는 거죠. 그 리모컨 앞에 들고, 누르기 전에, 잠시 마음을 관찰해 보자. 지금 리모컨 왔다갔다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냐? 내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니냐? 뭐 탓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은 더 안 좋은 거죠. 그거 자체가 하나의 분별이기 때문에. 안 좋은 TV를 본다? 이건 안 좋은 거니까 이걸 하면서 되게 죄의식을 느끼고,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이것은 안 좋은 음식이니까 죄의식을 느끼고. 이럴 필요는 없다는 거죠. 자연스럽게 TV 볼 수도 있죠. TV에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죠. 아니면 이건 꼭 좋은 프로가 아니더라도, 그것도 그거 보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 그렇게만 얘기 할 수는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이 없기 때문에, 좋은 곳에서도 나쁜 곳에서도 좋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어요.
우리 인생에는 좋은 것만 필요한게 아니라, 나쁜 것도 아울러 필요합니다. 깨끗한 청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소 지저분한 것도 필요합니다. 몸에 수없이 많은, 현미경으로 보면은 몸에 안 좋은, 흉측한, 그거 보고 뭐라 그러죠? 벌레를? 뭐 보인다, 그러잖아요. 현미경으로 보면? (박테리아, 세균). 그런 것들이 아주 지저분해보이고, 안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거라 그러죠.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삶을 전혀 시비 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삶에 시비 걸고, 짜증내고, 좋다 나쁘다 자기 자신을 자꾸 판단하고, 이럴 필요가 없다. 다만 관찰하는 시간만 늘리면 된다. 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된다. 알고 관찰하고 있으면 된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상대방이 아주 기분 나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상대방이 아주 좀 껄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 하는 짓이 참 보기 싫고, 욕해주고 싶고, 기분 나쁘고, 아~ 저사람 정말 꼴 보기 싫다. 이럴 때가 있습니다. 혹은 너무 이기적인 짓을 해가지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평화의 강도가 깨지죠.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은요. 그 상대방 입장에선 그것이 최선인겁니다. 그 상대방의, 그 사람의 그 순간의 의식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걸 인정해 줄 수 있어야 된다. 우린 누구나 남들이 봤을 때 저 손가락질 할 만한 짓을 한 번도 안하고 산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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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받을만할 짓을 우리도 많이 하고 살았어요. 우리 어릴 때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살았잖아요. 나도 어릴 땐 그랬단 말이죠. 내가 저 의식일 때 나도 그랬단 말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난 지금 수행해서 난 거룩하다? 전생, 그 전생, 수억겁 전생에는 그런 어리석은, 동일한 일을 벌였을 수도 있고, 여러분이 지금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다섯 생전, 십생 전에는 살인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나쁜 짓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희대의 살인마들을 볼 때라도, 그 자체를 나쁜 놈이라고 분별해서 볼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관찰할 뿐이지. 거기에 더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 사람입장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얼마나 측은합니까? 올바른 부모를 만났으면 그렇게 크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의 의식 수준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에요.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쌍한, 측은한, 자비심이 절로 우러나는 그런 상황입니까? 그래서 상대방을 판단할 필요는 사실 없어요. 상대방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게 내가 판단했을 때는 나쁘게 보일 뿐이죠. 그러나 상대방의 그 수준을 존중해 줘야 되요. 저 사람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 이기적일 수 있는 그 상황을 존중해 줘야 됩니다. 사람이 이기적인게 왜 나쁘다고 할 수 있어요? 누구나 이기적이지요. 이기적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걸 탓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그렇게 ‘아~ 저런 행동을 했구나.’ 하는 것이지. 그걸 이기적이다. 나쁜 놈이다. 온갖 내 생각으로, 내 마음을 더 더럽힐 필요는 없다. 그렇게 바라보면, 분별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 누구를 봐도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아무리 이기적인 행동을 했어도, 껄끄럽게 행동을 했어도, 밉게 보이지가 않아요. 그냥 받아들여집니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진다는 거죠.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자비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고.
우리가 막 사랑해서 애끓는 감정으로 아껴주는 것,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 그걸 사랑이라고 우린 착각하고 있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 그것도 뭐 사랑이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의 사랑은 요. 분별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봐 주는 시선.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어떤 짓을 해도, 뭔 짓을 해도 사랑할 수 있어요. 바라봐 줄 수 있는 겁니다. 인정해 줄 수 있는 거에요. 허용.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그냥 인정하고, 허용하고, 바라볼 수 있는 거에요. 그랬을 때 무한한 자비심, 무한한 사랑이 내 안에 샘솟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들뜨는 어떤, 우리가 알고 있던 편견. 이것이 사랑의 진짜가 아니라, 분별없이 바라봐 주는 것. 그러므로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것. 너 나쁜 놈이다. 넌 착한 사람이다. 이렇게 나누지 않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의 자비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또 하루 중에 대화를 나눌 때가 있어요. 사람들과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보통은 저도 그런데, 보통 대화를 나눌 때 보면, 분명히 대화는 나누고 있는데, 혼자 떠드는 경우가 많죠. 독백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내 말을 하는데, 내 말을 안 받아 줄 때는 혼자 떠드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혼자 떠들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좋은 말만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은 그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나는 내가 좋은 말만 하고 싶으니까 내 좋은 말을 그냥 하는 겁니다. 그게 독백이지. 남들은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으론 듣고 있는 척 해도, 사실은 끄덕이는 걸 보면은 핀트가 안 맞게 끄덕이죠. 타이밍이 좀 안 맞아. 제가 한 참 얘기할 때 바로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래 끄덕끄덕 졸다가 갑자기 한 번씩 끄덕이다가 자요.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이 조는 사람도 졸다말고 한 번씩 이렇게 끄덕이는 척을 해 주고 좁니다. 학교 다닐 때 아주 능숙하게 배워가지고.
또 대화를 할 때, 내가 내 말을 하지 않아요. 내 말을 할 때, 그야말로 내 자랑, 내 자랑을 하거나, 남들 욕을 하거나, 이러는 순간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되요. 우리는 항상 말을 할 때 내 자랑하거나 남욕하거나. 둘 중에 하나로 끄달리기 쉬운 것이 아상이 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그 아상을 잘 볼 수 있어야 되요. ‘아~ 내가 또 내 자랑하고 싶구나.’ ‘남 욕하고 싶구나.’ 분명한 것은 내 자랑을 할 때,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방은 나를 욕하게 돼 있어요. 별로 기분 나쁘게 본단 말이에요. 물론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연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해도 그것도 다 좋아 보여요.
자식이 자기자랑 많이 해도, 엄마아빠가 그래그래 아이 예쁘다 하듯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열리면, 자기자랑을 아무리 해도, 다 좋아 보입니다. 다 받아들여져요. 그런데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랑하면 듣기 싫단 말이죠. 재수가 없죠. 남이 지가 지 자랑할 때, 듣는 사람은 재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또 그걸 알아야 됩니다. 남이 자기 자랑할 때, 내 마음에 재수가 없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를 볼 줄 알아야 되요. 남이 지 자랑할 때, 내 마음속에 ‘아이 재수 없다.’ 하는 마음이 들 때, 이것은 ‘아~ 내가 이 사람한테 마음이 닫혀 있구나.’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구나. 있는 그대로, 이 사람의 자기 자랑을 들어줄 만한, 내 마음의 여유가 없구나. 내 마음이 닫혀있구나. 이걸 깨달을 수 있어야 되요.
자기 자랑할 때 그걸 들어주면,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재밌습니까? 얼마나 재밌겠어요. 그죠? 그러니 그걸 들어주는 것 자체가 상대방에게는 엄청나게 큰 행복이죠. 그것도 하나의 보시죠. 그걸 들어주는 것.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주는 것.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들어줄 수가 없으니까. 남들 욕을 하게 될 때, 남들 욕을 하는 내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고 관찰할 수 있어야 되요. 남들 욕을 한다는 자체는 그 욕하는 상대방에 대해서 내 마음이 확 닫혀 있다는 소리입니다.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소리에요. 내 마음이 분별하고 있다라는 소리죠. 시비 분별에 확 틀어 막혀 있다는 소리입니다. 내 마음이 열리지 못하니까 그 상대방을 허용하고 수용하고 자비롭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시선이 확 닫힌 상태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말을 할 때도 자기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잠깐 멈춰서 관찰할 필요가 있어요. 말을 하면서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가? 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남들과 대화 나눌 때, 얘기를 들어줄 때도, 내가 얼마나 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이걸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를 바꾸고 싶다? 가장 좋은 방법은 들어주는 방법이에요. 제가 우리 장병들, 상담을 해 줄 때 보면, 때로는 얘기를, 뭔가 좋은 얘기를 해 주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들어주는 게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자식을 키울 때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자식을 제대로 키울까? 부모님은 주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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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합니다. 자식은 주로 부모님 말을 들어야 되는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바꿔버리면 된다. 부모님이 옳고 그른 분별이 딱 있어서, 자식한테 이말 저말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듣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식의 말을 들어주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아이 정신 속에, 의식 속에 무슨 즐거움이 있고, 무슨 재미가 있고, 지금 뭐를 하고 있는지. 이 아이는. 그걸 들어주는 거에요. 그런데 어른이 봤을 때 애들 하는 말은 다 재미가 없죠. ‘야~ 니나 재밌지 아빠도 재밌냐? 엄마도 재밌냐? 그런데 가만히 들어주는 겁니다. 분별하지 않고. 아이들 말을 가만히 들어주다 보면, 그래서 그 아이의 어떤 마음과 하나가 되어서 들어주다 보면, 그 아이가요 놀랍게 마음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놀랍게 마음이 열어요. 사람이 마음이 닫히면 안 되잖아요.
부부가, 두 사람이, 마음이 닫혀 버리면, 서로에게 마음이 닫히면, 그 어지간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보통 상담할 때 보면요, 아내가 남편한테 마음이 닫힌 사람은 어떤 한 가지 특정 사건을 기억합니다. 옛날에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옛날에 ‘내가 임신했을 때 당신이 이렇게 했지.’ 아니면 ‘내가 옛날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했지.’ 하고, 어떤 특정한 사건에 마음이 확 닫힌단 말이에요. 마음이 닫히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음이 열려있을 때는 남편이 뭔 짓을 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마음이 닫히면 남편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기분 나빠요. 나한테 자꾸 사다줘도 그것도 기분 나쁘고.
뭐 지난 번, 상담 수업 들으러 갔었을 때에 이게 사다줘도 기분이 나쁘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 선생님이 우스개로 ‘아이~ 아니라고. 가방 사다주면 그냥 좋다고.’ 그 우스개로 하면서, 목사님들이 가방 뭐, 농담을 하시면서 무슨 메이커가 있더라고요. 가방이 천만 원 하는 메이커가 있답니다. 그러면서 우스개로 ‘그거 하나씩 다 없나? 하나씩 안사다 줬나?’ 이러면서 농담을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닫히면 어떤 것을 해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린다 라는 것이 분별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상황이란 소리에요. 허용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소립니다.
남편이 하는 모든 짓을 수용해 줄 수 있고 허용해 줄 수 있는 거에요. 마음이 열리면, 그러면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남편이 하는 짓, 아내가 하는 것, 자식이 하는 것이 그냥 수용해지고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런데 부모님이 마음이 닫혀있으니까, 그 자식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지 못하죠.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거, 이건 분명 아니다 싶은 것까지, 무조건 나무라지 말란 소리가 아니죠. 허용하고 받아들여주는 오롯한 깨어있는 정신으로 화를 내야 된다는 거죠. 화를 내도 똑바로 깨어있는 정신으로 화를 냈을 때는 화가 담기지 않습니다. 화를 담기지 않게 화를 낼 수가 있어요. 그게 깨어있는 화입니다.
화를 낼 때, 자기가 화에 휘둘려 있을 때는 절대 화를 내야 될 타임이 아닙니다. 잠시 멈춰야 될 타임이에요. 잠시 멈췄다가 내 화의 지수가, 화의 강도가 처음에 10이었다가, 8이었다가, 5이었다가, 3이었다가, 2 이하로 떨어졌을 때, 그때 화를 낼 수 있는 타임입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고 화를 낼 수가 있어요. 아이들은 더욱더 분명히 압니다. 엄마아빠가 감정을 섞어서 지금 화를 낸 것인지. 감정을 섞지 않고 화를 낸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에게 화를 냈을 때 이게 감정이 섞인 화인지, 그것이 아닌지. 이거 분명히 압니다. 어떤 의식의, 영혼의 수준에서는 알 수밖에 없는 거에요.
집안일을 할 때, 아주 사소한 일을 할 때,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할 때, 이건 하루도 안 빠지고 보살님들 같은 경우, 매일 해야 되는 과제에요.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까 진보하죠, 새롭지가 않고, 싫죠. 하기 싫고, 짜증스럽고, 동일한 청소하고 빨래하는 시간이 잠시 멈춰서, 그거 하기 직전에 잠시 멈춰보는 겁니다. 청소하기 직전에, 설거지하기 직전에 잠시 멈추는 거에요. 잠시 멈추고 관찰하는 거에요. ‘아~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청소하는 잠깐 10분 20분 30분 되는 이 시간, 이 시간을 내가 온전히 관찰하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리라.’ 하고 다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청소기를 돌려보는 거에요. 그리고 나서 방을 닦고, 설거지를 해 본단 말이에요. 그 설거지를 할 때, 이 물이 내 손에 닿는 느낌, 촉감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겁니다. 밥그릇을 닦고, 밥그릇이 왔다갔다하는 그 순간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거에요. 그 순간은요, 여러분이 108배 할 때, 108배하고 나면 뿌듯한 성취감이 느껴지잖아요. 한 시간 청소를 하고 나면 ‘했다’ 하는 상이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설거지하면서 수행하면 그 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많이 벗어날 수 있죠. ‘야~ 내가 이만큼 오래 앉아 있었다. 이만큼 내가 108배 오늘 했다.’ 이런 생각 없이 청소하면서, 설거지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명상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매일 같이 산책을 한다. 그게 매일 같이 똑같은 산책이 되어선 안 되죠. 산책을 하는 시간에는 놀라운,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의 놀라움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길가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거미줄에, 거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 주변을 좀 돌아보면서, 걸을 수 있어야 되요. 아~ 저는 여기 이렇게 산책을 하면서 너무너무나 놀라워서 그냥 길을 걷는데, 그냥 산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냥 바다가 하나 있을 뿐인데, 하루하루가 너무 놀랐습니다.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어쩔 수 없을 때, 이걸 참 감당이 안 될 때, 사진을 찍어서 좀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한 번씩 찍지만. 이제는 사진을 찍는 것 두, 괴로워할 정도로, 그것에 잠시잠시 푹푹 빠지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잠시 멈춰서, 그것에 집중을 기울이는, 관찰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 된단 말이에요. 서울에 있을 때는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없으니까 안 되잖아요. 아니라니까요. 서울에 있을 때 그 삭막한 서울에서요, 길가에 나무 한그루 있습니다. 특히나 겨울에는 나무에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나무가 그냥 서 있어요.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하나 달랑 서 있어요. 그 나무에 가까이 가 보십시오. 한겨울에 생명이 없는 거 같은 나무에 가까이 가 있어 보세요. 가까이 가서 그 나무를 한번 관찰해 보세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 나무한그루가요, 그 겨울에 생명력 없는 것 같은 나무한그루가 나에게, 여러분 빌딩을 바라보면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 전혀 다른 어떤 고요함, 평화함, 이런 것을 나에게 선물해 줍니다.
그냥 이 도시에 빌딩숲속에 단하나 나무 한그루 있을 뿐인데. 내가 그곳에 잠시 가까이 다가갔을 뿐인데, 그래서 바라볼 뿐인데. 그것이 내 내면에 깊은 평화와 하나가 된단 말이에요. 혹은 잠시 창문을 열고, 저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주 상쾌해지는, 그런 잠시 멈춤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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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순간, 평범하던 모든 것들이 쨍하고 반짝 빛나는 순간으로 바뀝니다. 매일같이 걷던 그 길이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쨍그랑 하고, 쨍하고 빛난단 말이에요. 만화영화 같은데 보면, 어디 물 한 방울 또르륵 떨어져서, 나뭇잎에서 똑 떨어질 때, 햇볕에 비춰서 반짝 빛나잖아요. 그게 우리 삶에 정말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에요. 내가 바라보는 시선 끝에, 저 풀한 포기에서도, 나무한그루에서도, 우리가 촉감을, 온몸을 활짝 열어놓고, 몸을 바람에 내 맡길 때,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이 내 살결을 스치는 그 잠깐의 느낌. 그 느낌에 온 존재를 열어놓고 관찰하게 될 때.
아까 법회에 시작하면서 청법가 부르기 직전에, 바람이 확 불어서, 제 등과 뺨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여러분에게도 스쳤죠? 기억하십니까? 그런 적이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닫혀있기 때문에 저 밖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가기가 좀 어려워서, 여기 서있으면 바람을 잘 못 느낍니다. 많이는. 선풍기 켜놓지 않고서는. 그런데 아까 설법직전에 바람이 싹~ 스쳐지나가서, 확~ 스쳐지나갔어요. 그때 그걸 느끼면서 ‘어우~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잠깐 창을 열고 햇살만 주시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순간 쨍하고 의식이 깨어지는, 의식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제가 지금 말한 이 표현을 이 표현에 얽매일 필요 없습니다. 이거는 엄청난 변화의 순간이 아니라, 아주 여리지만, 작고 여리지만, 그냥 평온한 감각일 수도 있어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걸 엄청난 뭔가로 실체에 있는 어떤 감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이 순간을 하루일과중에 자주자주 가지란 말이죠. 그래서 일과 수행, 일상수행의 핵심은 하루 중에 최대한 많이 잠시 멈춰서 바라보는 순간을 갖는 겁니다. 그걸 저는 2분명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잠시 2분, 2분 긴 시간 아닌데, 2분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20초라도 괜찮습니다. 20초라도 괜찮아요.
아니면 호흡한번 들어오고 나가는 그 짧은 순간이라도 괜찮습니다. 2분이라는 거는 그냥 상징이에요. 어떤 사람은 ‘에이~ 왜 2분이라고 하셨어요? 차라리 5분으로 하시지. 2분 너무 짧은데요.’ 이럴 수도 있는데. 또 어떤 경우에는 2분도 길 수도 있어요. 잠깐 3초라도 괜찮습니다. 2초 명상도 괜찮아요. 일과 중에, 바쁜 일과 중에,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다가, 잠깐 호흡을 관찰하는 거에요. 컴퓨터 한참하고 있다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주시하는 거에요. 이거는 한 번 직접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직접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우리 삶이 이 작은 것속에, 우리 삶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스스로 체득해 보고, 스스로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이거는 전혀 형이상학적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심리상담 하는 곳에서 보니까, 무슨 뭘 했더라? 다이어렉터컬 행동치료(DBT), 이렇게 얘기를 하던데. 심리상담에 심리치료에 DBT라는게 엄청나게 선풍적인 인기라는 거에요. 야~ DBT라는게 뭐냐? 난 저런 것도 모르는데. 저 과정을 한번 들어와서 체험해 봐라,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저런 재미난 과정이 있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맛배기로 DBT를 가르쳐주는데, 요즘 심리상담학회에서 기가막힌, 어마어마한 치유기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치유법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실제 정신병이 있는 사람, 몸이 안 좋은 사람, 별의별 사람, 다 DBT를 하면 엄청난 변화와 효과가 있다는 거에요. DBT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야~ 그렇습니까? 뭔데요? 하고 공부를 해 봤더니. 이 DBT가 관찰하는 거에요. 마음 관찰하는 것. 그냥 평범한 사람들에게, 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관찰하도록 해 줍니다. 마음을 관찰하도록. 자주자주 마음을 관찰하도록 해 주니까, 놀라운 실질적인 변화가 있더라. 과학적인 논문이 변화에 대한 논문이 엄청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마음을 관찰하는 지관의 수행이, 구체적인 어떤 현대적인 논문으로 많이 안나오다보니까, 덜 효과적인 거 같고 이렇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자는 하루 일과를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하신 말씀을 잠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새벽에는 기도하며 정진하고, 낮에는 부지런히 맡은바 일에 집중하고 밤에는 지혜의 경전을 읽어 스스로 통달해야 한다. 진정한 수행자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 새벽에는 기도하며 정진해라. 새벽에 일어나서 어영부영 놀지 말고, 기도하며 정진해라. 잠시잠시 정진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는 거에요. 도저히 못 갖겠다. 하는 사람에게 아까 제가 드린 말씀처럼, 일어나서 움직이는 순간순간을 관찰하고, 세수하는 순간순간을 관찰하고, 밥 먹는 순간을 관찰하고, 출근하는 순간을 관찰하므로서 기도하고 수행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침시간에 될 수 있으면 조금 더 늦게 일어날 거, 조금 더 빨리 자고,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서, 10분 20분이라도 좋으니까, 10분 20분이라도 좋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거나, 아니면 잠시 앉아 좌선을 하거나, 그렇게 한번 해보라는 거죠. 그래서 아침이든 저녁이든 동일한 시간을 정해서, 집중 수행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리고 낮에는 부지런히 맡은바 일에 집중합니다. 자신이 맡은 바 그 일을 집중해서 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일을 할 때,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대화를 나눌 때, 매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거에요. 끊임없이 하루종이 바깥만 보고 사는게 아니라, 자주자주 잠시 멈춰서 바깥만 보고 살던 내 의식을 잠시 멈춰서,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바꿔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서 잠에 들기 전에 지혜의 경전을 읽어 스스로 통달해야 한다. 밤에 잠들기 전에요, 기도하고 수행합니다. 그런데 잠들기 전일수록 오히려 아침에는 기도하고 수행하는게 더 좋아요. 경전 읽은거 보다도. 그런데 밤에 잠들기 전에는 경전을 읽고 자면 좋습니다. 경전이나 부처님 말씀이 담긴 가르침을 읽고, 누워서 잠시 명상을 하다가 자는 거에요. 불면증? 아마 수행자들은, 스님들은요, 불면증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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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린 사람들을 제일 부러워 할 겁니다. 스님들은 일주일, 특히 정진할 때는 한숨도 못자고 수행만 하는데, 잠와 죽겠는데 수행을 하는 상황에, 야~ 잠이 안와 준다는 그 어마어마한 혜택을 어거지로 누워가지고 기를 쓸 필요 없다는 거죠. 누워서 잠들기 직전에, 반드시 TV끄고, 잠들기 직전에 명상을 하며 잠든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잠들기 직전에, 잠시 불을 켜놓고, TV를 끄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앉아서 한 챕터 한 챕터, 좋은 말씀을 읽어요. 읽고 잠이 들어보시란 말이죠. 부처님 말씀을 읽고 감동받고 누워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잠에 들거나, 아니면 읽었던 그 가르침을 잠시 사유하면서 잠에 들지 않습니까? 그 의식이 그대도 꿈까지 갑니다. 밤새도록 이어져요. 그 가르침에 관련된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밤에 잠자는 시간을 중하게 여깁니다. 또 꿈이라는 것을 스승님에게 항상 체크를 하고 점검을 받기도 합니다. 꿈이라는 것은 하나의 깊은 무의식이기도 하고, 그 속에서 어던 놀라운 일들이 또 사실은 벌어집니다. 살아있는 생생한 순간들 못지않게 꿈이라는 순간도 생생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불교공부를 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잠들잖아요? 그러면 그 경전 내용이 약간 아삼모사 했던 내용도, 꿈을 꾸고 꿈속에서 더 어떤 영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어요. 가만히 꿈을 관찰해 보면, 꿈속에서 나에게 가져다주는 놀라운 지혜, 깨달음, 이런 것들을 또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꿈에는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어요. 꿈이라는 자체도 하나의 말 그대로 꿈일 뿐이죠. 그러나 현실도 사실은 꿈이죠. 여러분도 지금 꿈꾸는 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꿈이라고 해서, 공하다고 해서, 세상이 공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느냐? 불교는 공한 거니까, 꿈이라고 하니까, 일도 열심히 할 필요도 없고, 세상에 그렇게 중요한 것도 없고, 대충대충 살아도 되는 거냐? 그야말로 무기공에 빠진 겁니다. 공하지만 적극적으로 일을 한다. 공하지만 적극적으로 수행을 한다. 공한가운데 최선을 다해 내가 할 것을 하는 겁니다.
꿈인 줄 알면서 그 꿈속에서 돈도 벌고, 꿈속에서 사랑도 하고, 꿈속에서 행위를 하는 거에요. 하고 싶은 행위를 하는 거에요. 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귀의라고 하는 아주 큰 깨달음의 방향으로 우리는 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겉으로 봐서는 아무리 나쁜 일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여러분이 과거에 안 좋은 일을 겪었다 할지라도, 나쁜 일을 내 스스로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깨우침으로서, 가르침으로서 여러분에게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내가 누군가를, 이럴 수도 있어요. 이번 생에 내가 누군가를 죽였어요. 그러므로서 그 다음 생이 되면, 그 상대방에게 내가 그대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서 그 두 사람이 생명이라는 것, 내가 죽고 죽이는 이 상황에 대한, 너무나도 큰 어떤 영감을 얻을 수도 있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본질적인 얘기를 하기는 항상 조심스러운데. ‘아 죽여도 되나?’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여러분이 과거에 그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고, 두려움에 떨고, 지옥가면 어쩌지? 하고 걱정 근심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내가 깨달을게 무엇인가? 그걸 통해서 내가 삶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것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깨달음이 있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통해 깨달아 나갈지언정, 결정코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참 저는 이 게송이 하루하루, 시간이 나면 시간이 날수록, 더욱더 가슴깊이 와 닿아서 자주 인용을 하는데. <비록 100년을 살지라도, 단 하루를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그렇지 못한 100년 사는 것보다 훨씬 낫죠. 비록 100년을 살지라도, 단 하루 지혜롭게 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고 복을 짓고 사는 것이, 어리석게 사는 100년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여기고, 진정으로 축복받았다고 깨닫는 겁니다. 왜? 시한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더 이상 없구나 하고 아니까, 모든 걸 내려놓고, 남은 인생을 너무나도 찐하게 살아요. 작은 행복을 더 큰 행복으로 경험하고 살고, 병원으로 들어오는 중환자 병동에, 햇볕에 들어오는, 그 햇살 하나만 보고도, 깊이 감격하면서 놀랍다 라고 느끼고. 자식이 떠들고 장난치는걸 보고서도 죽을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버지는 전혀 인상 찡그리지 않고, 너무 놀랍게, 너무 행복하게, 너문 찐하게 경험하고 느끼는 겁니다.
그 사람은 이 게송을 몸소 체험하는 거에요. 이제 남은 시간이 한 달, 두 달밖에 없지만, 나는 시한부 인생을 살지 않았다면, 내가 100년을 살아도 이것을 못 깨닫고 죽었을 거 아니냐. 난 이것을 깨닫고 한 달, 두 달 산 것이 너무나도 축복이다. 어떤 아내가 남편과 평생 싸우고, 지지고 볶고 살다가, 남편이 시한부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지난 두 달이 내 인생의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편이 더없이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을 나눈 적이 이 근래 두 달, 이때가 최고로 남편을 사랑했었고, 남편도 나를 진하게 아끼고 사랑했었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깊이 사랑해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은 곧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너무나도 축복을 받은 사람인거 같다.
이거를 왜 죽기 직전에나 깨달을 거냔 말이죠. 왜 누군가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지만 그걸 깨닫겠습니까? 지금,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그 놀라운 것을 스스로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 삶에, 여러분의 하루에,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하루에 열 번도 좋고, 스무 번도 좋고, 백번도 좋습니다.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자. 그것이 바로 놀라운, 너무나도 놀라운 삶의 근원적인 변혁이 되는 그런 시간이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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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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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법우님.
잘 읽었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노고에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많은 법우님들이 읽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감꽃님...
감사합니다...^^*
인본 법우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법신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
고맙습니다. 미소바위님...~
법우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행복가득 법열이 느껴집니다. _()_
법열~...^^*
감사합니다. 담마님...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시간을 .....
감사합니다.사랑합니다.
곡암(谷岩)님 감사합니다...
인본 법우님!!
너무 감사합니다. 장시간 컴퓨터에서 듣지 못하는 저로서는 법우님의 노고가 한없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인정님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린님...
인본 법우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고의 수행법인것 같습니다.^^
최고의 수행법...
감사합니다. 상정화 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쑨^^....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청송님^^
마음에 담으면서 천천히 읽어서 그런지 읽는데도 시간이 꽤 많이 걸리더군요.
그런데 이 긴 글을 녹취하시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법우님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법문내용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합니다. ㅋ~
저도 정진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연정님.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우아님...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본님의 지극한 맘 감사합니다
희명/김연준(戊 .丁) 님....지극한 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송정님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해운님...저도...해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