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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지명의 유래
●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의 유래
- 고려 충신 김양남이 은거한 곳-
김양남金楊南은 1382년(고려 우왕 8) 어려서부터 함께 동문수학하던 이방원(태종)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교우가 두터웠던 인물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가 사헌부 지평으로 여러 번 등용하려 했으나 고려의 신하로서 절의를 품고 충절을 지켜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일로정 김양남 신도비
김양남은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피해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隱垈里의 반곡盤谷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반곡의 반盤'이란 여기 저기 돌아다닌다는 뜻이며, 움터로도 알려진 은대리隱垈里의 의미 역시 김양남이 숨어 살았던 것에서 연유하였다. 은대리는 본래 양주군 영근면 지역으로서 고려 멸망 후 김양남이 불사이군의 절개로 음터에 은거했다는 고사에 의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천리와 전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은대리라 하고 연천군에 편입된 이후 오늘에 이른다.
송산 조견 신도비
양촌 원선 묘
주초 이중인 묘
김양남은 반곡에서 은거하면서, 남쪽 한탄강 건너에 있는 산에 매일 올라 고려의 도읍이었던 송악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산의 이름이 국사봉國思峰이 되었으며 또한 집 근처 풍광이 빼어난 장진천 절벽 위에 초정草亭인 학소대鶴巢臺를 짓고 의분에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김양남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고고히 날아드는 백학白鶴을 벗 삼아 함께 놀며 스스로 숨어살다가 일생을 마치겠다는 뜻의 일로逸老라고 호를 하여 그 고상高尙한 뜻을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김양남의 호는 일로정逸老亭,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추金錘, 어머니는 순흥順興안安씨로 정당 문학 안원숭安元崇의 딸이다. 그의 생몰년은 확실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우암 김주 신도비 / 송은 유천 신도비 / 송산사 문화재 지정 기념비, 경기도 의정부
김양남은 고려 말 절의를 버리지 않은 충성을 바친 인물로 널리 알려진 송산松山조견, 양촌陽村원선元宣, 주초奏楚이중인李中仁, 우암寓菴김주金澍, 송은松隱유천 등과 함께 의정부시의 송산사에 배향되어 있다.
김양남의 묘는 연천군 전곡읍 고릉리 능골에 있으며 11세손 경기 감사 상성尙星이 지은 묘비가 있다. 이후 김양남의 후손은 조선 후기 강릉 김씨 여덟 판서 와 열부 기계杞溪유兪씨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연천군 전곡읍의 고르리高陵里에 있는 국사봉國思峰은 넘 점 고개 북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로서, 김양남이 송도를 향하여 매일 망궐례望闕禮를 올린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봉우리 정상에는 두 그루의 큰 소나무와 말을 타고 군장을 갖춘 여러 무관武官소상塑像의 위位를 모신 조그만 당집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고릉리의 국사봉
국사봉은 미녀가 마주 대하고 앉아 치장할 때 보는 거울과 같다 하여 면경산面鏡山으로도 불리며, 주변에서 묏자리를 잡을 때 이 산을 안산案山으로 많이 잡는다 하여 안산으로도 많이 불린다.
- 강릉 김씨의 권세가 드높았던 팔판서 마을 -
팔판서 마을은 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통현리通峴里 통재 동쪽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동현리는 본래 연천현 현내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해 현내면을 군내 면으로 개칭하면서 통현리라 하여 군내면에 속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 지구 임시 행정 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다.
팔판서 마을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강릉 김씨 25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까지 8명의 판서가 배출되는 등 강릉 김씨의 권세가 하늘까지 닿을 정도였다고 해서 건쟁이(건정동乾貞洞)라고 불리었다. 지금은 군 부대가 들어서 있고 민간인은 살지 않는다.
- 김홍주 신도비神道碑번역문 -
서울의 동리東里에는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후덕장자厚德長者로 추중推重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는 반드시 김봉사金奉事를 들고 모두 이르기를
"그 마음과 행실이 인후하니, 반드시 뒤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좀 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말하기를
“바깥양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부인도 참으로 숙녀이다. 집안을 유지함에 한결같이 화순和順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가장家長의 복록을 이루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그 후 30년 동안에 그 자손이 크게 창성하였으니 큰 아들 시환始煥은 예조판서에 판의금부사요, 그의아들 상규尙奎는 성균관 대사성이며, 낭익尙翼은 홍문관교리요, 상성尙星은 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 응교이며, 다음 시현始炫은 별제別製에는 장원하였으나 사제賜第(급제와 같은 자격을 줌)를 받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아들 상중尙重은 사헌부 지평이며, 다음 시혁始爀은 사간원 대사간이요, 그의 아들 상철尙喆은 진사이다. 시형始烱은 사헌부 대사헌이고 그의 세 아들은 상우尙遇, 상적尙迪, 상진尙進인데 상적은 승문원 정자이며 시회始熺는 호조정랑이고 네 딸도 모두 명가로 출가하여 생육이 있으나 오직 넷째 아들 통덕랑通德郞시욱始煜과 그의 아들 진사 상원尙遠과 판서判書(시환)의 차자次子 상벽만이 일찍 죽었고, 8문과가 모두 조정에 있으므로 성한 복이 지금도 다하지 않았음이다. 아! 천도天道는 거짓이 없다고 하겠다.
예조판서 김사환 묘비·경기도 연천군
김홍주와 배위 남궁씨의 묘비. 경기도 연천군
명주군왕 김주원 묘소(좌)와 묘비(우). 강원도 강릉시
내가 판서 의 형제들한테 들으니 공의 선계先系는 강릉인으로 시조 주원周元은 신라 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고려의 태부太傅상기上琦와 시중侍中 인존仁存평장사平章事영석永錫과 아조我朝(조선)의 공조판서 추錘가 가장 저명하였고 거기에서 몇 대를 전하여 예조판서 휘 첨경添慶에 이르니 이가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예조 좌랑에 증 이조참판 휘 선여善餘요, 아버지는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휘 득원得元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인데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적의 따님이다.
한결같이 효우孝友와 인선人選으로 처신하면서 본인이 그 복을 받지 않고 후대에 물려주었다. 평소에 화후和厚중신하여 일신은 오직 천진 그대로였고 털끝만큼이라도 가식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김에는 오로지 그 뜻에 맞도록 받들기에 힘썼고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봉양하였으나 한번도 살림살이의 있고 없고로 부모가 마음을 쓰게 하지 않았다.
장지를 물색 중이었는데 꿈에 노인 하나가 나타나 조부의 묘소 곁의 산록을 가리키 면서 거기에다 쓰라고 하여 그곳에 썼는데 지사地師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하였다.
아우 하나가 일찍 죽으니 몹시 슬퍼하여 자기의 신후지身後地로 잡아 놓은 땅에 장사지냈고 막내 동생이 이미 늙으니 크게 애련하여 보호하기를 마치 어린이 돌보듯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일찍이 의탁할 곳이 없는 종인宗人한 사람을 매우 후하게 거둔 일이 있었는데 공의 상喪을 당하자 그 사람이 밥을 가까이 하지 않고 죽었으니 공의 덕이 이토록 사람을 감명시켰음을 볼 수 있겠다.
공은 명경明經(경서를 분명하게 이해함)을 공부하여 일찍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경서經書는 이치를 밝히는 근본이니 선비는 마땅히 잠심潛心하여 연구하고 적공積工을 들여 이해하기에 힘쓸 일이지 한갓 기송記誦에만 힘써서는 안 된다."
고 하였는데, 갑자년(1684, 숙종 10)의 과거에 명경과 대책對策에서 모두 권내圈內에 들었으나 시소試所를 주관하던 사람이 짐짓 빼버렸다. 이에 공은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으나 시론時論이 원통하게 여겼다. 선원전璿源殿참봉參奉에 제수되어 헌릉 참봉과 제용감 봉사에 옮겼다.
부인 남궁씨南宮氏의 본적은 함열咸悅인데 성균관 학유 배培의 따님으로 홍문관 부제학 찬璨의 후예이다. 한번은 큰 구렁이가 들보 사이로 들어와 입을 벌리고 제비 새끼에게로 달려들고 있는데 어미 제비는 들보를 돌면서 다급히 울고 있었다. 부인은 마음에 측연한 생각이 들어 급히 나무를 찍는 낫으로 쌓아놓은 물건 더미에 올라가 구렁이의 머리를 낫으로 찍어 구렁이가 뒤뚱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지니 그제서야 숙부를 불렀다. 숙부가 크게 놀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집안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너를 여자로태어나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 12)의 대기근에 걸인의 모녀가 먹을 것을 다투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사람의 천성이 없어져 버렸다."
하고 머물러 있게 하여 사흘을 잘 먹이고 나니 그제서야 먹을 것을 서로 양보하였다. 부인이 마음에 흐뭇하게 여기고 보냈는데 며칠 뒤에 그 여인이 들에 있는 과실을 따 가지고 와서 감사해 하였다. 한번은 묘소의 여막에서 고총古塚하나가 바라다 보였는데 어느 때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었다. 부인이 탄식하기를,
"저 무덤 만이 자손이 없어 찾아와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는구나! 가상하다."
하고 주과酒果를 덜어서 늙은 종으로 하여금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한번은 집 뒤 동산에 꾀꼬리가 새끼를 쳤는데 갑자기 어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새끼들만이 슬피 울어댔다. 부인이 마음속으로 딱하게 여겨 둥지를 뜯어다가 집의 처마에 안치해 놓고 쉴 사이 없이 거두어 털과 깃이 난 뒤에 날려 보내 주었는데 그 뒤 꿈에 꾀꼬리 한 떼가 부인의 몸을 쪼아서 모두 '福복복'자를 만들었다.
아! 이 세 가지 일이 부인의 모든 면을 다 말해 줄 수는 없으나 어진 마음씨가 가히 측단하여 미치지 않은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겠다. 부인은 큰 아들의 영화로운 봉양을 받고 영유현永柔縣(평안남도 평원군에 속한 지명)의 공해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날 저녁에 흰 새 수백 마리가 정원에 모여들었고 무지개가 청사廳事에서 일어나니 외인들이 보고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공의 휘는 홍주弘柱요, 자는 석보石甫이다. 연천의 건정리乾貞里곤좌원坤坐原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갑신년(1704, 숙종 30) 8월 9일에 돌아가 이듬해 2월 공의 묘소 우측에 합폄하였다. 판서공이 귀하게 되자 여러 차례 공에게 증직이 내려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고 부인은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장차 묘도墓道에 비를 세우려 하면서 나 광좌光佐에게 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매양 공이 착한 일을 하고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것은 더욱 조물자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더군다나 둘의 아름다움이 서로 어울려 이와 같은 순수한 복을 만들어냄에 있어서랴? 아! 참으로 기록할 만하도다.
명銘하기를
나는 공의 세대를 알지 못하고,
오직 대종백大宗伯의 형제만 보았는데,
순후淳厚근량謹良하여,
극히 귀하게 되고도 형적이 들어나지 않았네.
이것이 바로 공이 끼친 바 큰 것이요,
이것이 복록이 시들지 않는 까닭이로다.
세재 경신(1740, 영조 16) 월 일에 광좌光佐는 삼가 추기追記한다.
숭정崇禎기원 후 재임술(1742, 영조 18) 월 일 세움
김홍주 신도비는 경기도 연천읍 동현1리에 있으며 이광좌李光佐가 찬하고 서명균徐命均이 썼으며, 조현명趙顯命이 전하였다.
* 강릉 김씨 김양남의 후손들
김시환金始煥은 1661년(현종 2)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숙晦叔, 호는 낙파駱坡이며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김홍주金弘柱와 주서注書남궁 배南宮培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00년(숙종 26)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각 조의 참판, 대사헌, 공조·형조·예조판서, 좌우참찬, 도총관을 역임하였고 1730년(영조 6) 기로소에 들어갔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39년(영조 15) 세상을 떠난 그의 묘는 건정동, 현재의 경기도 연천읍 통현1리에 있다.
김시혁金始爀은 김홍주의 셋째 아들로 1676년(숙종2) 태어났다. 1708년(숙종 34)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710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지냈으며 이후 영광靈光군수로 나가서 큰 치적을 올렸다. 특히, 삼남 지방 양전量田의 전부田賦를 배로 올려 국가에 이익이 되게 하였다. 1722년(경종 2) 호서 지방의 안찰사로 나가 사정을 살피고 난 뒤 양역良役의 변통을 주장하면서 당시 시행 중이던 군포감반지법軍布減半之法은 각 읍의 잡역 미雜役米로써 충당하도록 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상주하였다. 그 뒤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24년(경종 4)에 수원 부사로 나갔다. 영조 즉위 후 물러났으나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이후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김시혁과 정경부인 전주 이씨 묘비, 경기도 연천군
김시혁은 1741년(영조 17)에는 강화 유수에 부임하여 청나라에서 본 바 있는 번벽법을 도입하여 강화외성江華外城을 쌓아올리는 데 공을 세웠다 1744년 대사헌이 되었고, 1745년(영조 21)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그 뒤에도 공조판서, 대사헌, 의정부 좌참찬, 지중추부사 겸 빙고제조氷庫提調등과 숭정崇政에 승계하여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까지 제수되었다. 1750년(영조 26)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회이晦而, 호는 매곡梅谷, 시호는 경헌景
憲이다.
김시형金始炯은 김홍주의 다섯째 아들로 1681년(숙종7) 태어났다. 1713년(숙종 39) 성균관생으로서 김장생金長生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위해 권당捲堂을 주동하였다 하여 정거停擧당하였다.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728년(영조 4) 호서·호남 지방의 안무사 겸 순찰어사가 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무신란戊申亂)으로 소란해진 이 지역의 민심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732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특히 교학敎學의 진흥을 위하여 힘썼으며 1736년 호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그해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형조판서, 좌참찬을 역임한 뒤 이어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1744년(영조20)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그 뒤 판돈녕부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50년(영조 26) 세상을 떠난 그의 자는 계장季章,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김상규金尚奎의 자는 사창士昌으로서, 아버지는 김시환이며 어머니는 유정기兪鼎基의 딸이다, 1682년(숙종8) 태어나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1712년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이래 홍문관과 사헌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고부告訃겸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에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광주廣州부윤으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승지, 대사간 등 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학식과 덕망이 있어 다섯 차례에 걸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736년(영조 12) 승지로 재직 중 죽었다.
김상익金尙翼의 자는 사필士弼이며 김시환의 셋째 아들로 1699년(숙종 25) 태어났다.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9년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732년(영조 8) 충청도 어사를 거쳐 홍문관 수찬, 교리, 사간원 헌납 등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735년 이조 좌랑, 이듬해 세자시 강원필선世子講院弼善을 거쳐 대사간에 오르고, 1738년에 승지, 1750년(영조 26)에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757년에는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9년(영조 35) 도승지, 1763년 지경연사知經筵, 1765년(영조 41) 강화 유수를 거치 1767년 기로소에 들어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는데, 형제와 숙질 가운데 기사耆社에 들어간 사람이 6명이나 되어 세상에서 복문福門이라 일컬었다 1771년(영조47) 세상을 떠났다.
김상성金尙星은 김시환의 넷째 아들로 1703년(숙종29)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13세 때 영평永平의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지어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1723년(경종 3)에 진사가 되고, 그해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사서가 되었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1752년(영조 28) 병조판서 가 되었으며 예조판서, 좌빈객, 판의금부사를 거쳐 1755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장疏章을 잘 지어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1755년(영조 31)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사정士精, 호는 도계陶溪와 손곡損谷,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김상중金尙重은 김시현金始炫의 아들로 1700년(숙종26) 태어났다. 1732년(영조 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치던 중 1737년(영조 13)에 재상을모욕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745년 사간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1747년 동래부사를 거쳐, 1749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757년 정성貞聖왕후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가서 부음을 전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양주 목사로서 민폐의 유무를 아뢰었으며 일자-資를 올려 받았다. 대사성, 도승지, 한성부 부윤 등을 거쳐 1768년(영조 44)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의 사망한 해는 확실하지 않다.
김상철金尙喆의 자는 사보士保, 호는 화서華西이며, 김시혁의 아들로 1712년(숙종 38) 태어났다 1733년(영조9) 사마시를 거쳐, 173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과 교리를 지냈다 1757년(영조 33)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간,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766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과 영의정에 올랐으며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우의정 때 우리나라의 문물이나 제도를 부문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하여 찬집청纂集廳을 두어 1770년『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게 했다. 한편 1771년(영조 47)에는『명사明史』 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纂」에 조선 왕실의 계보가 잘못 올라 있다는 대간의 상소가 있자, 자진해서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북경에 가서 그 책의 개인소장을 금하겠다는 청나라의 약속을 받고 돌아와『신묘중광록辛卯重光錄』을 편집, 간행하였다. 1781년(정조 5) 기로소에 들어간 뒤 형중추부사가 되었다, 1786년(정조 10) 아들 김우진金宇鎭이 숙종이 소론 윤선거尹宣舉의 문집을 훼판毁板한 병신처분丙申處分의 잘못을 지적하고, 소론인 조태구趙泰耇와 유봉휘柳鳳輝를 옹호한 죄로 제주도에 유배될 때에 그도 아들을 전보全保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되었다 1791년(정조 15) 죽은 뒤 정조의 조처로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상적金尙迪은 김시형의 아들로 1708년(숙종 34) 태어났다, 1733년(영조 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교리가 되었다, 1735년 사관史官이 되어 사초史草의 작성에 종사하였으며, 1741년(영조 17) 홍상한洪象漢을 대신하여 관동 어사로 파견되었다. 곧 지평과 장령을 거쳐 1743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응교應敎로서 궁중에서 사용할 가인례家人禮에 대해 진술하였다. 1746년(영조 22) 경상도 심리사審理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8년 형조 참의로 있으면서 참핵사로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압수한 것을 영수할 것과 잃어버린 은銀에 대한 두 안건을 추고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예조참판, 1750년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그해에 어염세를 균등히 하기 위하여 6도에 삼사三使를 파견할 때 경기도와 황해도의 균세사均稅使로 나가 민정을 살폈다. 풍모와 지기가 뛰어났고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1750년(영조 26)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사순士順이다.
김노진金魯鎭의 자는 성첨聖瞻으로 이조판서 김상성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태어나 1757년(영조3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이 되었으나 1761년에 경현당景賢堂의 『대학大學』강의에 불참한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복직되었으며 1781년(정조 5) 형조판서 가 되어 형조의 관장 사무, 판결 및 처형에 관한 절차의 관리를 통일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낭관 박일원朴一源에게 위촉하여『추관지秋官志』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국조보감國朝寶鑑』의 찬집당상도 겸임하였다. 1784년 청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뒤에 벼슬이 이조판서에 올랐고 우참찬이던 1788년(정조 12) 사망하였다. 편서로는『강화부지江華府誌』가 있다.
김화진金華鎭의 자는 성재聖載로 1728(영조4)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상적이며, 종숙부인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김상우金尙遇에게 입양되었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78년(정조 2) 예조판서에 제수되었고 호조와
병조의 판서 에도 제수되었으나 파직되었다. 1781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으며, 숭록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782년(정조 6) 형조판서가 되고 우참찬, 예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두루 지내면서 공부貢賦와 식화食貨, 조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시정에 힘썼다. 1783년 서학 문제로 채제공蔡濟恭의 조를 탄핵하다 일시 파직 되었으나 도감제조都監提調에 다시 임명되었다. 1784년(정조 8) 형조판서에 임명되어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인 천주교도들을 체포했으나, 대부분이 양반의 자제들이라 타일러 보내고 중인中人김범우만을 단양으로 귀양보냈다. 1796년 호조판서에 제수되어 주전鑄錢사업과 전세錢稅문제를 관장하였고, 특히 동전이 박열薄劣해지는 것을 근심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파직되었다가 이어 동지冬至겸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해 12월에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김재찬金載瓚이 직을 대신하고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노론으로 남인의 규탄에 참가했으나 비교적 완론緩論에 속하였다, 1803년(순조 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김계락金啓洛은 김화진華鎭의 아들로 1753년(영조29) 태어났다 1773년(영조 49)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진사가 되었다. 1783년(정조 7)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교리, 수찬, 시강원 사서, 검상檢詳, 동학 교수東學敎授, 서학 교수를 거쳐서 1785년에는 충청도 경시관京試官이 되었다. 이듬해에 강촌江村 4백 호가 불에 타자 지평으로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어 그 실정을 조사한 뒤 이들의 조세 감면을 건의하였다. 1788년에는 전라도 경시관이 되었고, 1791년(정조 15)에는 경상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으며, 당시 영남 지방에 수재가 나자 왕명을 받아 각종 민폐를 개선하였다. 1803년(순조 3)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상으로 사퇴하였고, 상을 마친 뒤 형조판서,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변려문에 능했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사부詞賦, 시율詩律, 표전表箋, 송頌, 조詔, 책策 등의 문장에 뛰어났다 1815년(순조 15)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첨경金添慶은 김양남金楊南의 아들로 자는 문길文吉, 호는 동강東岡또는 장주이다. 1525년(중종 20) 태어나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의 천거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1559년(명종 14)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이조판서 윤개尹漑가 불공평한 인사행정을 하자, 이를 비난한 김규가 모욕죄로 몰려 죽게 된 것을 구하였다가 이듬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어 대사간, 병조 참의, 전주 부윤, 부제학, 대사헌, 호조 참판, 형조 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역학에 자득自得의 묘를 얻었고 경학에 전력하여 모든 의론이 다 거기에서 유출되었으며, 기품이 청아하고 효우孝友가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며
1583년(선조 16) 사망하였다.
우참찬 김첨경의 묘비. 경기도 연천군
김상집金尙集의 자는 사능士能이며, 김시영金始煐의 아들로 1723년(경종 3) 태어났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1761년 정언이 되고, 경현당景賢堂의 문신 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다. 이듬해 김상숙金相肅, 유한길俞漢吉등을 탄핵하였으며 1763년(영조 39) 3월에는 송명흠宋明欽사건으로 홍양한洪良漢과 함께 삭직되었다. 같은 해 다시 복작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암행어사를 지냈는데, 강원도 어사로 있을 때는 영남과 호남의 곡식을 옮겨다가 여섯 읍의 백성을 진휼하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773년(영조 49) 대사간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이조판서로 사은謝恩겸 진주陳奏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과 형조판서에 올랐다. 1787년(정조 11)에는 경상도 관찰사로서 화전火田이 늘어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한성부 판윤을 거쳐 병조·공조·예조의 판서와 우참찬을 지냈다. 그의 사망한 해는 확실하지 않다.
김시위金始煒의 아버지 김홍기金弘機, 어머니는 남취명南就明의 딸로 그는 1694년(숙종·) 태어나 1730년(영조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김시위는 1739년(영조 15)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정국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지평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장기長冀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듬해 석방되어 1741년 다시 지평에 올랐으며 부수찬, 수찬, 부교 리 등을 역임한 뒤 1751년(영조 27) 승지를 거쳤으며 영광 군수 등 지방관도 지냈다. 그의 자는 계문季文으로 사망한 해는 확실치 않으며 저서로『동포휘언東圃彙言』이 있다.
김기종金起宗은 김철명金哲命의 아들로 1585년(선조18) 태어났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1618년(광해 10)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전날 이이첨李爾瞻이 사당私黨을 심기 위한 과거에 참여하여 장원하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공정성을 주장사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청
요직에 허락되지 않았다. 1624년 관서關西원수 장만張晩이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자, 조정은 잘못을 용서하고 등용하였다.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진무振武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지고 당상관에 올랐다. 김기종은 청렴하고 조선하여 과거에 오른 지 12년 만에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자는 중윤仲胤, 호는 청하聽荷,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김기종의 편서로 『서정록西征錄』이 있으며 1635년(인조13)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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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방대한 자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