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존자 가전연은 세존에게 예배하고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존자 가전연은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대덕(大德)이시여, 정견〔正見: sammaditthi〕이라고 하시는데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유(有)와 무(無)의 둘에 의지되어 있느니라."
[南傳大藏經 12권, 相應部 經典 迦 延經]
가전연(迦 延: kacayana)이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주 논의에 밝은 논의제일(論議第一)의 가전연존자를 말합니다. 세간의 모든 학문이나 종교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는데, 변견이란 곧 편견이라는 뜻입니다. 일체의 상대적인 대상에 대한 가장 뿌리깊고 근본적인 치우친 견해가 있다 유[有]와 없다 무[無]는 두가지이므로 유와 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모든 상대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와 무를 대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초전법륜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다섯 비구가 너무 고행(苦行)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양 극단으로서 고와 낙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른 견해[正見]라는 근본적 문제를 심도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세간의 모든 편견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인 유와 무를 거론한 것입니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긴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無]이 없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有]이 없다.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經典 2 迦 延經 p.24]
여기에 나오는 집(集)과 멸(滅)은 사성제(四聖諦)의 집제(集諦)와 멸제(滅諦)를 말합니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집약하여 설한 것입니다.
고제(苦諦)는 중생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 집제(集諦)는 그 괴로움의 원인, 멸제(滅諦)는 그 괴로움의 소멸, 도제(道諦)는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방법을 말합니다. 위에 나오는 괴로움의 원인을 말하는 집(集)과 괴로움의 소멸을 말하는 멸(滅)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경문의 이후에 나오는 바와같이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의 내용입니다.
연기는 보통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열 두 가지로 연관된 십이연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과 역관이 있습니다.
순관은 십이연기를 차례로 관찰
순관은 십이연기를 차례로 관찰하는 것이니, 곧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역관은 순관과 반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내지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하고 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집(集)은 바로 연기의 순관을 말하고, 멸(滅)은 연기의 역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순관에 의하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마침내 생이 있고 노사가 있게 되므로, 이 세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또 역관에 의하면,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마침내 생이 멸하고 노사가 멸하므로 이 세간에 실체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방편(方便: upaya)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사로잡히느니라. 성제자(聖弟子)는 이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我我所〕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한다. 가전연아, 이와 같음이 정견이니라.
무엇이 있다거나,무엇이 없다 하는 변견에 집착하는 이유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거나, 무엇이 없다 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이리저리 헤아리고 이것저것 구별하는 사량분별(思量分別) 때문입니다. 자아(自我)인 주관과 내것(我所)인 객관 등에 집착하고 사로잡혀 사량하고 분별하는 이것을 여기서는 방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이 생기는 이유는 사량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려서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납니다.
그리하여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냥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바로 보는 것입니다.
'집착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사로잡히거나 머물지 않는다' 함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無住心〕이나 분별하지 않는 마음〔無分別心〕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분별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으면서도 능히 괴로움의 생함과 멸함을 보는 것이 참으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생멸적(生滅的)인 변견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세간에서 보는 견해이고, 생멸을 떠나서 생멸을 본다는 것은 묘유(妙有)의 관점에서 보는 견해로서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또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고 했으나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라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생멸입니다. 생멸에서 말하는 생멸이 아니라 쌍차(雙遮)에 의지한 쌍조(雙照)의 생멸입니다.
마음의 의지처,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의 의지처, 즉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을 부정한 것입니다. 또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서 괴로움이 생하면 생하다고 보고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이에 분별심이 없이 지혜가 생한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서 긍정이 성립됩니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마음이 청정한 것〔心淸淨〕이고 진공〔眞空〕이며, 마음이 청정한 상태로 생멸을 바로 보면 마음이 밝게 빛나는 것 심광명〔心光明〕이고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곧 대승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의 뜻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하는 이것이 정견이다'라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않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진실한 지혜를 정견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견은 앞에서 누차 해설한대로 모든 집착심이나 생멸심을 다 버리고서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중도라 하여 양변을 여읜다는 부정의 면은 보통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다시 양변을 살린다고 하여 부정한 후에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이것을 학자들이 잘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좀 많이 연구했다는 사람들의 글을 봐도 양변을 여읜다는 것,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經)에 드러나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증거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후 그것을 다시 긍정하는 면에 대해서는, 즉 양변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비밀한 뜻〔密意〕으로 은밀히 말했다고만 말하고 확실한 증거를 잘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어려운 대목입니다.
사실은 비밀한 뜻으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이에 지혜가 생하니 이것이 정견이다' 라고 다시 분명히 긍정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비밀한 뜻으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有]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의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無]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이니라.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느니라.
모든 것이 있다는 견해
모든 것이 있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이것이 첫 번째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 없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떠한 실체가 없어서 소멸되어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하는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앞 문장에서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 는 것은 양 극단을 여윈 뜻이니 이것은 진공이요,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苦)가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는 것은 묘유입니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이 경문이 뜻하는 바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非有非無〕또한 있는 것이고 또한 없는 것 〔亦有亦無〕이 되는 것입니다. 여래가 정등각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중도인데,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면 또한 양 극단이 서로 원융하게 통하는 것입니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러한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全苦蘊] 의 모임[集]이니라. 무명의 멸에 의하여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의 멸이 있느니라. 이러한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이니라.
처음에 십이연기의 순관을 들고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성제의 집제(集諦)입니다. 앞에서 집제를 바로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고 했는데, 그 뜻은 이 세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은 있다는 뜻입니다. 생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가 아니며, 없다는 견해가 없다는 것은 생함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십이연기의 역관을 들고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성제의 멸제(滅諦)입니다. 앞에서 멸제를 바로 보는 사람은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실체적인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이므로 결국은 없다는 뜻입니다. 멸을 바로 본다는 것은 있다는 견해가 아니며, 있다는 견해가 없다는 것은 멸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것을 증명중도(證明中道)라고 합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이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기의 내용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중도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흔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십이연기를 시간적으로 보아서 생사의 윤회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후대의 한 가지 해석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참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남전장경에도 북전장경에도 부처님이 중도를 말씀하신 후에는 증명중도로써 연기를 인용했습니다.
연기를 순관해서 보면 생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생을 바로 본다는 것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는 말이며, 역관에서 보면 멸함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멸함을 바로 보다는 것은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총결적으로 말하면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없으면서 〔非有非無〕있고 또한 없다〔亦有亦無〕는 것이니 이것이 중도의 참된 내용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