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겟세마내! 애널리스트의 무덤>의 줄거리:
애널리스트란 분석가 입니다. 특히 요즈음은 투자 분석가를 뜻합니다. 주식종목및 경제상황을 분석해서 이윤을 낼 수 있는 투자를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행하신 주님의 기도는 세상의 모든 애널리스트들의 무덤입니다. 명분과 이유를 찾기 위한 분석이 끝난 곳에 기독교의 기도가 있고 행동과 선택의 유일한 원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애널리스트의 무덤
(마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겟세마네! 애널리스트의 무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애널리스트들의 무덤이다’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애널리스트가 뭡니까? 증권사나 경제연구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이분들이 뭘 하시느냐?
주식 종목과 경제시황, 현재 이 시간대의 경제 상황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 결과물을 가지고 투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투자를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투자분석가라고도 그러지요.
정말 피 같은 돈을 증권시장에서 주식에 투자하려고 할 때 우리의 투자행위가 허공을 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막연히 돈을 벌고 싶다고 해서 아무 회사의 주식을 사들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불안한 심리를 위해서 애널리스트라고 이름 하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 사람들의 연봉도 굉장한가 봐요, 이름 있는 애널리스트들은 전부 억대가 넘는다고 그래요.
저도 좀 흉내를 내 보자면, 2012년 상반기에 여러분이 투자를 하고 싶으십니까?
2012년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상당히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유럽 재정위기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글로벌 자본시장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꾸준히 이윤을 창출해내던 탄탄한 회사들이 고전을 할 것이 예상됩니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거시경제의 흐름을 봐서는 안돼요,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개별기업들을 관찰해야 됩니다.
개별기업을 관찰하실 때 어떤 점을 주목하느냐 하면 위기를 한번 극복해 낸, 위기극복이 체질이 된 기업을 찾아내든지, 아니면 주가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저평가된 회사의 주식을 찾아내야 됩니다.
그래서 투자를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이거 제가 외우느라고 아주 애썼어요.
어느 신문에 어느 애널리스트가 2012년 경제 상황을 전망하면서 써놓은 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기사에 보면, 조선일보와 에프앤 가이드라는 증권전문잡지에서 선정한 2011년 베스트 애널리스트가 있습니다.
투자부분에는 토러스 증권의 오태동 애널리스트, 그리고 현대증권의 진성혜 애널리스트가 있는데 기업분석부분에서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뽑혔습니다.
애널리스트라는 말이 분석가라는 뜻이지만 애널리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하기 위해서는 그 키워드가 분석이 아니라 명분이에요, 명분.
이윤창출을 위해서 투자행위를 하고 싶은데, 이 투자행위가 정당하다는 명분을 제공해줘야 되기 때문에 애널리스트들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애널리스트로서 분석을 하지만 그 분석의 이유가 뭐냐 하면 행동에 합당한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렇게 치면 우리 모두가 다 애널리스트에요.
자식을 위해서 한 번의 행위를 할 때에, 그 행위를 왜 하느냐고 물어보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는 명분이 주어집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자식에게 이러한 꾸지람을 하고 있고, 이러한 인도를 계획하고 있다, 아내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아내를 위해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아내가 마음이 편해야 집안이 화평할 수 있으니까, 내가 무조건 참는다, 힘이 없어서 참으면서도 이렇게 명분을 갖다 댑니다.
다 애널리스트예요, 애널리스트.
애널리스트들은 분석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게 오해에요.
분석은 과정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명분을 제공하는 겁니다, 명분.
행동과 선택이 옳았다고 하는 명분을 제공해주는 자들이라 이겁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하신 이 기도는 이 세상 위에서 이 지구 위에서 명분을 찾아내려는 애널리스트적 노력의 무덤이드라 이거에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 아마 기도의 영원한 제1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범적인 기도의 장면을 대할 때마다 마음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점, 좀 어색한 점을 억누를 수가 없어요.
어떤 점이 어색한가 하면 예수님의 과도한 고민스러워하심입니다.
고민스러워 하시고 괴로워하심이 당연하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다는 거예요.
성경 속에서 나오고 있는 다른 순교의 장면들과, 아니면 다른 박해의 장면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비록 그 어떤 박해보다도 육체적, 심적으로 더욱 가혹한 고통이 가해진 형벌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생각할 때, 조금 어색하고 이상하다는 것이에요, 잘 안 어울린다는 겁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바울이 선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서 사람들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버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베드로가 내일이면 목베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감옥에서 곤한 잠을 잤던 것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이 당한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에 비해 물리적으로 더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괴로워하신다는 것은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잘 매치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이 말은 곧 뒤따라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이 잔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이 되었던 구원의 사건이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고, 그리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자아의식이 있으셨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면서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런 말은 나올 필요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뒷골목 깡패들도 자기의 보스를 위해서 명분이 주어지고 나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10년을 썩기도 합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무사로서의 그리고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할복자살을 합니다, 할복이라는 건 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칼을 그어댄다는 것이거든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대의명분이 주어져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아니 깡패들이 자기 보스를 위해서, 그 알량한 무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도 고통을 인내하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죽은 사람을 헤아리자면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주님, 어느 한 민족과 나라가 아니고 인류, 이 지구 위에서 종말 때까지 태어날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대의명분으로 따지면, 행동의 이유와 합당성을 따지자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잔을 내게서 물릴 수만 있으면 물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이런 고통,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돼지가 돼지우리에 있는 것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궁궐에서 태어나 자라던 공주가 돼지우리에 들어가 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거지, 노숙자가 돼지우리에 들어가 있는 것, 엘리자베스 여왕의 딸이 돼지우리에 들어가 있는 것, 고통의 크기가 극심하게 차이 날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스테반과 다른 것은 스테반은 박해를 받았습니다마는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저주받아 합당한 자가 받았으면 돼지가 돼지우리에 들어간 것일 텐데, 저주와는 극대점에 있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신 분이 저주에 갇혀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외아들을 저주 속에 집어넣고 계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고민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이 겪은 고민과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예수님과 같은 고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받는 고통이 마음에 주는 괴로움은 전부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을 받는 고통이지만, 주님의 고민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극대점에 서있는 저주 속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그 고통이 극대화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대화 된 마음의 고통 속에서 십자가를 져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라는 행동을 앞두고 모든 분석과 명분을 대기 위한 연구가 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메시아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기도 속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모든 행동을 위한 명분의 껍데기가 다 벗겨져버립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자아의식이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이신 분이 그 저주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메시아라는 자아의식으로 힘들지만 ‘내가 메시아인 한, 아버지하나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저를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행동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애널리스트가 제공하는 것으로도 명분을 댈 수가 없습니다.
왜 그 행동을 했어야 됐는가?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웃사랑이다’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다는 것은 맞아요,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겟세마네 기도를 보니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명분도,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명분 때문에 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지라!’ 하셨기 때문에 지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과 독생자 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두 분이 합의를 보시고 독생자가 자발적으로 내려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독생자가 동료 인간으로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시고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시면서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행동을 위하여 이 세상 어떤 애널리스트들이 이 세상에서 찾아내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하나님아버지가 ‘십자가를 져라’ 하셨기 때문에 지시는 겁니다.
그 이유도 그 명분도 그 구실도 전부 하나님아버지께서 ‘지라’ 하신 것 다음에 부가적으로 첨가되는 명분일 뿐이지요.
이것이 바로 이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취해야 하는 유일한 행동원리라는 겁니다.
자, 내가 자식을 사랑해서 이것 저것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묻습니다, ‘아빠, 왜 나한테 이런 일을 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너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이렇게 인도하고 있다’
이건 다 사치요, 거짓이요, 허공을 치는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애널리스트가 명분을 대는 자들이에요, 분석하는 자들이 아니고 이들의 목적은 분석하는 게 아닙니다, 명분을 제공하는 거예요.
투자를 하는데, ‘당신의 투자는 이윤을 내기에 합당합니다’라고 하는 근거와 명분을 제시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자식에게 아내와 남편에게 행한 행동,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내가 자식에게 그 행동을 했어야 됩니까?
하나님이 ‘하라’ 하셨으니까.
자식이 내가 한 행동을 좋게 받아들이건 나쁘게 받아들이건 오해하건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하라 하셨으니까 하는 겁니다.
내가 왜 교인들을 목양하고 있습니까?
교인을 사랑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 사치요, 거짓말이고 헛된 나를 속이는 마음이에요.
자꾸 내 행동에 이 세상적인 명분을 대지 마세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의 원리가 그렇게 때문이라고 하지 말고, 세상의 유행이 그렇게 때문이라고 하지 마세요!
명품 백을 샀어요, ‘명품 백을 왜 사셨습니까?’ ‘이게 돈은 들어가도 한번 사면 싸구려 백 열 개 산 것보다 가치가 있고 더 오래 갑니다.’ 이런 명분을 생각하지 마세요.
모두가 애널리스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행동과 선택이 허공을 치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할 명분을 찾기 위해서 따집니다, 판단합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거짓이고 헛된 것이고 사치예요.
내 행동은 하나님이 명품 백을 사라 하셨으면 사는 것이고, 그런 답이 없으면 사지 않는 겁니다.
이웃사랑이요? 우린 못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웃사랑을 하라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라’ 하면 하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시면 안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이웃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내 행동이 이웃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이웃을 보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 행동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한 인간으로 오셔서 저주 속에 묻히셔야 되는 이 가혹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극심한 고통 중에 모든 명분을 다 제거해버리시고 죄에 빠져 죽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이 아름답고 굉장한 대의명분을 다 버리시고 오직 아버지께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죠? 그러면 죽겠습니다.’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 자기사랑으로 돌아갑니다.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장렬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그렇게 정하심이 분명하기에 그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 마음은 그래야 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라 그래서 하고 죽었는데 그 행동이 민족을 구원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지요.
그래서 이웃사랑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의 행동의 명분은 오직 하나님이 하라 하셨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거예요.
정 주식을 투자하고 싶으시면 오태동 애널리스트나 진성혜 애널리스트에게 가서 물어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느냐 마느냐 하나님께 물어보면 된다는 겁니다.
오태동 베스트 애널리스트가 말합니다.
‘경제 상황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에 투자 하세요’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지 말라시면 하지 않는 겁니다, 물론 주식시장의 출입 자체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느냐 안 하시느냐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러므로 사업하시는 분들, 경제동향 상관없어요, 세상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간다, 내가 종사하는 이쪽 부분이 어떻게 전망된다, 이런 것 따질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석하고 내가 투자하고 싶은 사업에 있어서 명분을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의 자료를 근거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의 자료를 근거로 자식을 키우려 하지 말고, 아내와 남편 관계를 서로 맺으려 하지 마세요.
명분은 하나, 하나님이 하라 하셨느냐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셨느냐, 하나님이 답을 안 주시면 기다리는 겁니다.
오직 이 한 가지 명분으로 살아가는 자들 그들이 신앙인들이고 신앙인들은 애널리스트의 대척점에 가 있는 자들이고, 신앙 안에서는 애널리스트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행동과 선택에 명분을 대기 위하여 나 스스로가 삶에 대해 애널리스트로 살았습니다.
겟세마네의 주님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도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의명분을 다 제거하고 오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신호를 따라 보이고 들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동과 선택을 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