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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할배
늑대 이성직
남대문 시장 끄트머리 구석진 곳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 순영은 어릴 때부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홀로 사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네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순영을 담양에서 홀로 살던 외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사뭇 연락 없이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다 외할머니 임종 때에야 나타났다. 그 후 순영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농사짓는 외할머니와 몸짓과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고 자라난 순영은 말을 못하는 데다가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어 서울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열세 살을 넘어설 무렵 순영은 아버지 권유로 붕어빵 굽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혼자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도 자주 들러 잔심부름을 해주거나 주위 청소를 하는 등 나름대로 딸을 도왔다. 주위에서 장사하는 분들도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대개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것 같았다. 담양에서 살 적에 외할머니가 순영에게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다.”라고 늘 말했기 때문에 막연히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지내왔다.
-아버지의 서울
잎 새의 행간에 새벽이슬이 묻어난다. 라일락꽃 향기는 초록의 끝자락에 서서 서늘한 공간을 채워나간다. 할배는 호흡을 끊고 남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발 디딜 공간조차 없는 서울 시내를 세세히 훑는다. 토건족의 전성시대를 보고 있자니 고고한 심지로 이 땅을 지켰던 남산 딸깍발이 어른이 눈앞을 스쳐 간다. 열여섯 나이에 시작된 객지 인생은 세월만 집어삼켰다. 왕십리 철공소에서 시작된 고단한 삶은 예나 지금이나 빈손이다. 평화시장 한복집 미싱사를 만나 동거를 시작하면서 정말 꿈을 잃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왔다. 하지만 가난은 앞서 달리기 일쑤였다.
재개발된다는 양동을 향해 아릿하게 저려오는 가슴을 달래며 야외음악당을 돌아 내려온다. 좁다란 골목 닭장 같은 쪽방 한쪽에 빛바랜 부부의 사진이 있다. 어린아이를 안고 함께 찍은 흑백 사진 속에 예쁜 여인과 단단한 기백의 군인은 정겹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군인 차림이 꽤나 인상 깊다.
옆방의 영감은 벌써 무료급식을 찾아 나갔는지 기척이 없다. 할배는 주섬주섬 방을 치우고 서울역 근처로 한 끼 식사를 찾아 나선다. 급식을 기다리는 낯익은 얼굴들의 수척한 몸매에선 고된 삶이 걸어 나와 숟가락과 동행한다.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내고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설 즈음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진다. 저만큼 시장 골목 어귀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 딸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서서 비를 피한다.
-아줌마의 일상
아줌마가 발가락 수술 후 깁스를 하고 퇴원할 때 의사는 간단한 주의사항을 들려주었다. 가급적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꼭 뭔가 하고 싶을 때 네 맘대로 하시면 후회하게 된다는 주의사항 한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아줌마는 하고 싶은 것은 막무가내로 지르는 성격이다. 퇴원과 동시에 함부로 나대고 설레발을 치며 주위의 잡것들 기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랑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용감무쌍한 아줌마는 한 손에 개다리(목발)를 짚고 다른 손에 우산을 든다. 어깨에 에르메스 핸드백을 메고 엉덩이와 상체 하반신을 앞뒤 좌우로 흔들며 나들이에 나섰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던 중 서른 살 남짓 여성이 황금 잉어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참지 못하는 주책에 날름 한 봉지를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앞으로 움직여야 할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개다리에 잉어빵 우산도 버거운데, 찰랑대며 늘어지는 핸드백이 도통 성가시다.
슬쩍 뒤로 돌리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개다리를 겨드랑이에 끼운 후 우산을 쥐고 빵 봉지는 입에 문다. 남은 손으로 백을 잡아 자세를 고정한다. 흐뭇한 기쁨에 미소 짓는 순간 아뿔싸 입을 너무 벌려 빵 봉지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에구에구 아까운 내 빵!” 외치며 허리를 굽히는 찰나 우산이 날아간다.
우산을 향해 팔을 휘젓는 순간 흐트러진 중심에 개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깨금발로 삐끗삐끗하다가 아줌마는 해까닥 자빠져버린다. 자신도 모르게 “육시랄 날궂이에 재수 옴 붙었구나.” 하고 중얼거린다. 버스정류장에 모인 몇몇 인파가 보이기에 도움을 받아보려고 “아…으……!”하며 팔을 휘젓는데 모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사람 눈에 띄지 않음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쪽팔리기 전에 일어서려고 자세를 잡는데 상큼한 세단이 옆에 다가와 선다.
‘그럼 그렇지 나름 한 미모 하는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어서 어느 병든 닭이 선심 쓰는구나.’ 하고 삼삼히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고개 젖혀 슬며시 흘겨보며 분위기를 파악한다. 하지만 세단 속 잡놈은 내리지 않고 유리창만 내린 채 모가지를 쭉 빼며 약을 올린다.
“아줌마 왜 그러세요? 살기 싫으시면 집에 가서 뒈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줌마는 눈을 사납게 뜨며 악을 쓰듯 대거리한다.
“쓰벌 급살 맞아 거꾸러져도 시원찮을 놈, 지랄 말고 네 다리나 긁고 어서 꺼져라, 개새야.”
정류장 인간들이 킥킥대고 웃다가 눈 마주치자 얼른 다른 곳 쳐다보는 시늉을 한다. ‘저것들 진작부터 볼 거 안 볼 거 다 보며 쌩 까고 있었던 것 아니냐?’ 열불 터져 눈자위 적시며 가까스로 일어나 자세를 잡는데 헐렁한 할배가 발 앞에 와서 곱게 앉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비도 오는데 음식 함부로 버리면 안 돼. 젖으면 누가 먹으라고. 돈 아까운 걸 알아야지.”
할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민첩한 동작으로 빵 봉지를 주워든다. 날아간 우산도 챙겨 쓰고 몇 개 흐트러진 빵을 발끝으로 모은다.
“아줌마 이건 개 갖다 줘. 더 젖기 전에 주워 담아. 젖으면 개도 안 먹는다.”
가르치듯 당부한 다음 할배는 홀연 자리를 뜬다. 아줌마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히니 빗물인지 눈물인지 물이 뺨을 적시고 가슴에 맺힌 속울음이 터진다.
“에라, 몹쓸 세상 늑대 같은 인간들아, 꼭 그래야만 하겠니?”
아줌마가 떨어트린 빵 봉지를 주워 든 할배는 염천교를 지나 서부역으로 향한다. 드문드문 낯익은 노숙자들과 눈인사를 하며 지나친다. 때때로 할배를 보며 거수경례를 하고 장난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먼발치에서 할배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온다. 한쪽 다리를 절며 외다리 목발을 짚은 사십 초반의 사내 머구리다. 그가 할배 곁에 서서 말한다.
“형님 우리 사는 곳이 재개발된다는데 보통 일이 아닙니다, 또 다시 난장을 깔아야 하는 건 아닌지 요새 잠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글쎄 나도 걱정이 많다. 인간들의 아파트 사랑은 끝이 없구나, 눈먼 사랑에 결국 모든 것을 잃겠지. 백 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살 것 같이 집을 붙들고 있는 건 허황된 꿈이지.”
할배는 머구리에게 빵 봉지를 건네주며 길가에 쪼그려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도시빈민은 예와 같이 떠나야 한다. 떠나는 것도 잠시, 또다시 아파트의 그림자가 그들 곁으로 스며든다. 한 곳이 없어지면 다른 곳이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왕십리에서 금호동, 금호동에서 약수동, 약수동에서 청계천, 청계천에서 창신동, 창신동에서 양동으로 도시빈민은 하염없이 쫓겨 다녔다. 할배는 문득 아득한 옛 시절의 일들을 떠올린다.
-끈적대는 기억, 쓰라린 추억
그해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다가올 즈음 태풍이 몰아쳤다. 연거푸 세 번의 태풍이 몰아치던 날 기어이 한탄강은 둑이 터졌다. 농경지와 마을을 휩쓸고 성난 물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살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었다. 재난방송이 연거푸 메아리칠 때 해군(유디티) 잠수부가 투입됐다.
교각 밑 소용돌이 곁으로 사람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잠수부는 거침없이 강물로 향해 뛰어들었다. 가까스로 떠내려가는 사람을 붙들어 교각 기둥 주춧돌 위로 끌어올렸다. 다리 위와 강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다리 위에서 밧줄을 내려 구조하는 중에 또 한 사람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잠수부는 다시 물살을 헤치며 떠내려오는 사람의 머리채를 휘감고 등을 받치며 끌기 시작했다. 교각 근처에 거의 다가왔을 때 커다란 통나무가 미친 듯 떠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구조한 사람을 교각 위로 올리는 순간 통나무가 잠수부의 고관절을 들이받았다. 중심이 흐트러진 잠수부는 물살에 떠밀리며 맴돌기를 거듭했다. 거친 물살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모두들 발만 동동 굴렀다. 신체 고통으로 체력이 한계에 이르러갈 때 다리 위에서 헙수룩한 할배가 뛰어내렸다. 할배는 능숙한 동작으로 물살을 헤치며 잠수부를 끌어안고 교각 주춧돌 위로 기어올랐다.
주위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다리 위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잠수부와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사람들은 군용차와 구급차에 실려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갔다. 홀딱 젖은 사지육신을 부르르 떨며 호흡을 정돈하는 할배 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병원으로 가셔야지요!”
할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끄떡없다, 예전에 내가 한 일에 비하면 이런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나를 떠 밀은 인간은 누구냐? 어른을 물로 보더니 할배를 강물에 빠트리다니 에라 몹쓸 세상 짐승 같은 인간들아!”
할배는 신체검사 후 첫 딸이 태어나던 그해에 조국의 부름에 응했다. 어려운 살림을 극복하려고 북파공작원에 지원 입대했다. 몇 해만 고생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얘기에 기꺼이 젊은 청춘을 던진 것이다. 마지막 휴가 때 집에 오던 날 사랑하던 부인은 그만 어린 딸을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오뚜기 마아가린과 닭표 간장, 달걀 몇 개를 담은 봉투를 가슴에 품고 오던 할배는 미처 대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 어린 딸은 처가에서 데려갔다. 할배는 몇 달 후 제대를 한 다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장모님에게 주었다. 못난 인간을 용서하시라는 말과 함께 세상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할배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아는 장모는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할배는 부디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그 후 공장과 막 노동판을 전전하며 숱한 역경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한탄강에서 인명을 구조하다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해군 유디티 잠수부 머구리는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렇게 할배와 인연이 되어 연락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양동으로 흘러 들어왔다. 두 사람은 틈틈이 요리학원과 제빵 학원 등을 돌며 학원생들이 실습한 음식을 모아 노숙자들에게 배급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노숙의 넋두리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볼 필요 없어. 지금 하는 짓은 그 누구의 얘기처럼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라는 구절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야. 빈곤한 삶의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딛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자부심과 독보적인 자유 철학을 음미하고 있다는 게야. 당신들은 이 꼬라지 될까 무서워 더욱 몸부림칠 것이고 그렇게 구차하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발악하겠지. 부지런히 사지육신 버둥거려 날아다니는 돈 잡으려 갖은 발광 할 것 아닌가? 그게 다 누구 덕분이겠어, 세상엔 자신도 모르게 삶의 애착을 갖게 해주는 요소들이 도처에 가득하지. 바라보는 눈높이를 조금 바꿔보면 그다지 짜증 낼 필요 없다는 게지.
영혼 메말랐다는 얘기는 속내 몰라서 하는 것이지. 누구나 왕년에 한때가 있듯이 열렬한 사랑을 위해 대가리 깨지는 것 다반사로 여겼었어. 고기를 잡고 보니 잠시 밥 주는 걸 잊었을 뿐이고 시들해진 고기 옆에 싱싱한 고기들이 넘쳐났었지.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 이루어 흘러넘치는 게 고기라 값은 바닥 치는데 난들 어쩌겠어? 거기다 외래종 들어와 황홀한 지경 연출하니 덩달아 그쪽으로 발길 돌렸던 게야. 염병한 외래종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줄 꿈엔들 알았을까. 정신 차려 내 주위 단속하려니 죄다 널브러져 송장 치를 날만 고대하고 있었던 게야.
말 그대로 홀딱 벗어주고 이곳으로 왔을 땐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도 때도 없이 술 퍼마셔 비몽사몽간 연명했지. 지내다 보니 차츰 그럭저럭 지낼만하고 이것도 숙련이란 게 통하다 보니 제법 큰 소리로 방귀도 뀔 수 있었지. 초점 없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나치는 인간들 직업과 성질머리 건강 상태를 가늠하며 구걸 방법과 포기하는 수순을 잽싸게 익혀 나갔지.
아닌 건 아니라는 철칙이 여기서도 백발백중 들어맞는데 정장 차림 신사와 뾰죽한 하이힐 신은 요조숙녀는 절대 동냥에 도움이 안 돼. 비굴하게 엎드려도, 처량하게 읊어도, 눈 부라리며 겁줘도 시간 낭비일 뿐이지. 차라리 드러누워 갈길 방해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곤 하지.
아무튼 추운 계절 몇 번 바뀌고 나면 어엿한 직업과 직책에 자부심 생기지. 요즘엔 신고식도 없이 좌판 깔고 뒤집어지는 식구 차츰 불어나고 제법 먹물깨나 든 인간도 서슴없이 안면 철판 깔고 구걸을 하고 있지. 경륜이 모자라 허다한 헛손질에 손금만 들여다보는데 하는 짓은 영 싸가지가 없고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격이지.
지난여름엔 볼거리 많고 그럭저럭 먹을 게 많아 나름대로 왕성하게 지역구를 넓혀나갔지.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동원하여 제법 괜찮은 나와바리는 공동으로 관리를 하곤 했었어. 들어오는 게 많으니 집중적으로 투자했는데 낙엽 한 장 두 장 날리기 시작할 때 판이 깨졌지. 사람들 발걸음과 어깨가 움츠러들더니 구걸하는 깡통엔 먼지만 남았어. 아차, 싶어 다른 쪽으로 이동했는데 파장된 지 오래되었고 힘없는 노인 몇몇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더라고. 급식 차에서 주던 식사도 현격히 줄어 차마 줄 서고 기다리는 게 상호 간 속내를 들추는 것 같아 조용히 이곳으로 발길 돌렸던 게야.
발길 접는 사람 많을수록 다른 이웃에게 순서가 돌아가는 것이니 아무래도 짬밥 많은 선수가 눈치껏 빠지는 거지. 우리야 난장에 대충 자빠져도 버벅거려 개기면 하루해 넘길 수 있지만, 한 끼 식사에 목숨 걸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땟거리를 가로챌 수 없기 때문이야. 생각해 봐 오죽하면 새벽 칼바람 맞으며 첫 차 타고 여기까지 올라오겠는가. 먹어야 산다는 열망과 조그만 희망을 누가 구걸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며 능력 없다고 비웃을 수 있겠어.
이제 슬슬 추위가 몸 풀기 시작하고 조금 지나면 본격적인 얼음 굴 맞보게 되겠지. 아무래도 겨울이라는 수식어가 정해진 만큼 모두 이 악물고 버티기 때문에 그다지 큰일은 벌어지지 않지. 자선단체도 가끔 얼굴 내비치며 구호품 전달하고 연말연시에는 인파가 많이 몰리는 곳에서 때 아닌 횡재수가 있기도 해. 다들 웅크리며 살아남아 다시 살아가기 위해 국경 없는 계절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며 삶의 고지를 지키는 게야. 이때 정말 강적은 우리를 조소하고 비아냥거리며 험한 소리 해대는 인간들이야.
어차피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왜 제 가슴 더럽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길 간다는 이유로 막말한다면 정작 자신 정한 길로 가면 될 것 아닌가? 우리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렀으며 네다리 긁고 내 다리 긁는다는 건 기본으로 익혔어. 체력이 달리는 관계로 삽질하는 것 접었으니 그대들도 동냥은 그만두고 깡통이나 찌그러뜨리지 말란 얘기지. 엄연히 숨 붙어, 살아 움직이는 사지육신 부러뜨릴 수 없고 나름대로 열심히 쉬고 있는 호흡을 별안간 멈출 수 없는 건 같은 형편 아니겠는가?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 땅을 파던지 건설현장 막일이라도 하겠다고 헛소리하는데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거야. 농사일이 그렇게 맘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야. 새벽에 일어나 밭에 나가고 해거름에 논둑길 걸어보면 허리가 펴지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려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안 할 거야. 생명 보살피고 가꾸며 거둬들이는 신성한 일이 한순간 객기로 되는 게 아니지. 땅과 사람이 호흡하려면 정성과 노력 상호 간 통하는 기가 서려야 하는데 허투루 소일거리 하듯 덤비면 쌍코피 터지는 법이야. 개 잡부라고 부르기 쉬워도 그냥 지게 다리 지고 있다고 일당 주어지는 것 아니야.
허리가 휠 정도로 등짐 져야 하고 목숨 저당한 채 안전망 그물 위를 넘겨다보며 갖가지 연장을 수시로 사용하고 전달해야 하는 거야. 무작정 높은 곳에 오르다 보면 밑을 보게 되는데 순식간 아찔하여 섬뜩한 공포감 몰려오지. 그때부터 고소공포증이라는 것이 찾아와 꼼짝 못 하고 주저앉아 매미처럼 난간에 달라붙어 찔끔찔끔 오줌발이 새어 나오기도 해. 현재 있는 위치에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남 하는 일 쉬워 보인다고 함부로 나서는 건 죽지 못해 발악하는 것이지.
아무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그 무엇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우리 가슴에 있어. 살아가는 도중 가끔 주위를 돌아보며 혹시나 하는 긴장감이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거야. 길거리 생활 되짚어보면 남은 게 없고 대책 없는 미래에 무서운 생각 들지만, 사형수도 죽기 전까지 숨 쉬고 있잖아. 고귀한 생명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듯 이끌려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게지.
주어지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누군가처럼 고도를 기다린다고 하면 웃기겠지. 그래도 길거리 생활에서 기반 닦아 반 무당 된 처지이니 삐딱하게 째려보지 말았으면 좋겠어. 행색도 이젠 어느 정도 구비가 되어 촛불 들고 철학하는 사상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모든 것을 버렸고 끌어안고 늘어지는 물욕 없으니 수도승과 견주어도 막상막하 아닌가? 한 세상 산다는 거 어렵지만 목숨 하나 부지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 아니야. 잠깐 이승을 빌려 쓰고 영원히 사라지는 건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지. 결코 내 것 아니고 머무를 수 없는 세상 빌려 쓰면서 점잖게 살다가 의연하게 떠나가면 어떻겠는가?
-할배와 머구리의 활약
아줌마는 친구 옥화의 전화를 받고 급히 나선다. 이번에도 지나는 길에 남대문 시장 어귀에서 붕어빵 한 봉지를 산다.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가방에 넣고 약속장소로 향한다. 회현동 조그만 빌딩 커피숍에 옥화는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 반가운 표정의 두 여인이 얘기도 꺼내기 전 덩치 큰 사내들이 주위로 다가온다. 옥화는 사색이 되어 몸을 사리고 사내들은 주위를 에워싸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는 옥화가 형편이 어려워 사채를 빌려 쓴 것이다. 원금보다 이자가 많아진 후 감당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급기야 사채업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고 따라다니며 돈 갚으라고 독촉을 한다. 사정을 알게 된 아줌마는 옥화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서는데 허름한 할배가 아는 체를 하며 빙그레 웃는다. 아줌마가 며칠 전 필름을 다시 돌려보니 무안하고 괘씸한 생각이 든다. 쌩까고 급히 방향을 돌리는데 건장한 사내가 앞길을 막아선다.
사내는 옥화의 팔을 붙들고 손짓으로 구석진 곳을 가리키며 우악스런 힘으로 이끈다. 아줌마는 옥화의 다른 팔을 붙들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돌아보는 사내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순간 할배가 끼어든다. 할배는 사내의 가슴을 밀치고 손목을 내리치며 아줌마와 옥화를 한쪽으로 돌려세운다. 사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리고 큰소리로 윽박지른다.
“영감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기 전에 비켜나시오”
할배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사내의 말을 되받는다.
“요즘 역병 때문에 뒤숭숭한데 내가 육송 가다마이 한 벌 적선하지.”
할배를 피해 사내가 옥화를 향해 다가서는 순간 아줌마는 사내를 붙들고 늘어진다. 사내가 귀찮은 듯 아줌마를 떼어버리려고 팔을 휘두르는 순간 할배가 달려든다.
할배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왼손 수도로 사내의 울대를 올려 치고, 오른손 주먹으로 간장(명치와 옆구리)을 내지른다. 큰 덩치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다른 한 명이 달려든다. 할배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발을 올려 달려드는 사내의 사타구니를 걷어찬다. 비틀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손가락을 반듯이 펴서 양쪽 눈을 찌른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사내의 머리를 아줌마가 가방으로 후려치고 길가로 내려서서 급히 택시를 부른다. 할배는 쓰러진 두 사내의 상태를 확인하며 주위를 살핀다. 아줌마가 옥화와 함께 택시 곁으로 다가서는데 할배가 민첩한 동작으로 달려와 앞문을 열고 탄다. 어리둥절한 두 사람이 머뭇대는데 할배가 손짓으로 어서 타라는 시늉을 하며 재촉한다. 순식간 일어난 상황에 두 여인은 어안이 벙벙한데 할배는 여유롭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세 사람을 태운 택시는 남대문을 돌아 남산을 향해 달린다. 남산 식물원 근처에서 할배는 택시를 세우고 요금을 정산한다. 분위기가 어색한 세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할배가 빙긋이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곳은 내가 수십 년 살아온 터전이니 아무 걱정들 마슈.”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은 세 사람은 각자의 신상 명세서와 간단한 호구조사를 주고받으며 짧은 시간 가까워진다.
옥화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들은 할배가 말한다.
“가게를 정리하여 원금을 청산하셔. 이자는 벌써 터무니없이 지급됐으니 갚지 않아도 돼.”
아줌마의 표정에 그러면 뭘 먹고 사느냐는 근심 어린 표정이 가득하다. 옥화 역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그러고 싶긴 하지만, 역병이 창궐한 지금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요.”
할배가 말한다.
“붕어빵 장사를 하면 어떨까. 마침 내 딸이 붕어빵 장사를 하고 있으니 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어.”
아줌마는 놀란 눈으로 할배를 쳐다본다. 직감적으로 본인이 자주 다니는 곳에 있는 붕어빵 처녀가 할배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줌마는 궁금한 것이 있지만 표현하기가 망설여진다. 쭈뼛거리며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할배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딸이 어릴 때 뭐가 잘못됐는지 말을 하지 못한 채 자랐지. 붕어빵 장사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해도 누구한테 손 벌리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이 없어.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 한 사람은 계속 빵을 굽고 남은 사람이 팔고 계산하며 주위를 정돈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는 어렵고, 둘은 있어야 장사하기가 수월하지. 손님이 많을 때는 먼저 구운 것을 레인지에 돌려 급히 내놓고 반죽을 준비하며 주위를 정리하는 것이 큰 임무야.”
아줌마와 옥화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옥화가 가게를 정리하던 날 할배와 머구리가 동행했다. 다행히 사채업자의 채무 관계도 수월하게 끝났다. 사채업자는 암암리에 할배와 머구리의 흔적을 살펴본 것 같았다. 옥화를 돌려보내고 두 사람은 남산 돌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구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형님 옥화에게서 이상한 것 못 느꼈나요?”
“글세 심신이 초조하고 불안에 떠는 것 빼고는 그다지 이상한 것은 못 느꼈어.”
“형님. 옥화는 사채업자들에게 작업을 당한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도 작전을 짜야지.”
“형님,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옥화 손가락 떠는 것 보셨죠? 작대기(마약)입니다.”
“뭐야? 옥화가 약쟁이(마약중독자) 손을 탔다는 거야?”
“틀림없습니다. 그놈들이 뽕(마약) 작업했는데 패 꼬이면 우리만 호구 됩니다.”
두 사람은 사태의 심각성을 해결하기 위해 아줌마에게 연락을 했다. 옥화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혼자만 나오라고 단단히 일렀다. 아줌마는 지난번 사채업자들과 만났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커피숍에서 머구리는 얘기를 풀어나갔다. 아줌마는 옥화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다. 아줌마는 “옥화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로 아무 말도 못 하는 먹먹한 시간이 한참 흐르고 숙연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할배가 운을 뗀다.
“일이라는 것은 선수(先手)가 장군이다, 먼저 지르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맞습니다, 형님 채비 단단히 하고 먼저 들이댑시다.”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으며 아줌마를 안심시키고 커피숍을 나섰다.
다음 날 할배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남대문 경찰서로 향한다. 마약반 담당 형사와 마주한 할배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장사하던 여자가 뽕쟁이(마약중독자)가 됐는데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윗선에서 얘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야 법대로 집행하지만, 본인이 자수를 하는 것이고 추후 조사내용에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정상 참작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채업자들 인적 사항은 알고 계십니까?”
“저는 자세히 모르는데 옥화가 그자들 사무실과 자주 다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옥화 씨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충남 공주에 있는 치료감호소와 연계하여 치료를 받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채업자와 연락이 되거나 마주치게 되면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영장은 없어도 임의동행이나 현행범으로 신병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배와 머구리는 두려움에 떠는 옥화를 달래어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아줌마도 옆에서 거들며 “치료가 끝날 때까지 붕어빵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힘들더라도 굳세게 이겨내라.”고 안심시키며 다독였다.
머구리는 외다리 목발 대신 대나무 속을 파내고 새끼손가락 굵기의 기다란 피아노 선을 집어넣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할배와 머구리는 옥화가 알려준 사채업자 사무실로 향했다. 예전에 금호동 산동네가 있던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야트막한 고개 위 댄스교습소가 있는 건물로 들어서자 눈에 익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새 희망 대부, 급전 필요하신 분 환영-
위치를 확인한 할배는 경찰서로 급히 출동해 달라는 전화를 한다.
-열씨미 노력하고 차카게 살자!-
고전적인 문구가 적힌 문을 대차게 걷어차며 들어서자 지난번에 다구리(몰매) 터진 둘 말고 세 명이 더 보였다. 중앙에 있던 고깃덩어리(사람)가 사정없이 설레발치며 소리친다.
“영감! 너무 나가는 것 아냐? 부속(장기)이라도 팔아서 채권 회수하는 게 원칙인데 편의를 봐줬으면 접시는 깨지(허튼수작은 벌이지) 말아야지.”
할배가 피식 웃으면서 되받아친다.
“말 잘했다, 이 몸이 쉬었어도 모지방(용모)을 삼삼하게 올려 여권을 만들었다, 이 땅에서 부속 털어내는 것은 불법이니 외국으로 가자. 원하는 대로 꺼내주마.”
그러자 옆에 있던 머구리가 한마디 거든다.
“형님 요즘 역병 때문에 외국 못 나갑니다. 그냥 간직하고 계십시오.”
바로 그때 사내 둘이 쇠 목소리를 공중에 띄운다.
“재껴 버려!”
말을 마치자마자 사내들이 위협적인 몸짓으로 달려든다. 순간 머구리가 바닥에 누워 몸을 굴리며 대나무 지팡이로 사내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사내가 중심을 잃고 절룩인다. 할배는 그 틈을 재빠르게 파고들며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고 쌍수도로 관자놀이를 때린다. 무협영화 장면처럼 번개 같은 동작에 사채업자는 뒷걸음을 친다. 할배는 멍때리고 서 있는 사내 둘의 귀싸대기를 쌍장(양쪽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머구리는 머리채를 잡아 지팡이로 찍어 내린다.
소란스러운 상황이 거의 종료될 즈음 마약반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사물함과 책상 서랍에서 마약과 주사기가 발견되었다. 사채업자 일행이 연행되는 것을 보며 할배와 머구리는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왔다.
-희망의 빛
공주 치료감호소에 있는 옥화에게서 온 편지를 받은 아줌마는 할배를 만나러 찾아 나선다. 할배는 남산 돌계단 근처에서 야바위꾼과 박보장기를 두고 있다.
아줌마는 할배를 보자 말한다.
“옥화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할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순영이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할배의 눈에 반짝 빛이 난다.
“무슨 좋은 일?”
“제 여동생이 간호사로 있는 병원에서 순영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한대요. 그 병원 전문의가 선천적으로 농아인이 된 것이 아니고 후천적인 것이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다고 한다네요. 검사를 해보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으니 병원에 와서 종합검사를 해보자고 했다는군요.”
꿈같은 소식에 할배는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정말이야?”
“정말이지 않고요. 내가 왜 더운 밥 먹고 식은 소리 하겠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분명 꿈은 아닌데…. 순영이가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순영이는 할배의 영원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희미한 청력으로 생활하는 순영은 자세히 듣진 못해도 입 모양과 신체 움직임, 수화로 소통한다. 그런데 세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보통 답답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조바심이 난 할배가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결과가 어떤가요? 치료를 받으면 소리를 듣고 말을 할 수 있는지요?”
의사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네, 치료가 가능합니다. 어릴 때 모종의 충격으로 말하는 것을 잃어버렸는데 치료하면 말하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청각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순영 씨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은 달팽이관이 작동된다는 것이지요.”
할배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맺힌다.
순영은 말할 수 있는 단어를 하루가 다르게 빨리 늘려갔다. 머구리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붕어빵 트럭 위에 설치하고 핸드폰 음악을 틀어놓는다. 아줌마는 순영에게 수화를 배우고 소리 내는 입 모양을 순영에게 가르쳐준다. 붕어빵 트럭 주위에 네 사람이 붙어 하루 종일 소란스러우니 시장 사람들에게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붕어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때가 다가온 것이다. 서울역과 남대문 노숙자들은 무더운 여름을 버티고 겨울을 지내기 위해 옷깃을 여미는 중이었다. 예와 같이 시련의 계절이 돌아오지만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불시에 떠나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악착같이 목숨 붙들고 있는 사람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남대문에서 노숙자들에게 빵을 배급하고 돌아오는 길에 머구리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형님. 동묘가 있는 종로구 숭의동에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답니다.”
‘학교’라는 소리에 할배는 놀란 눈으로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형님. 주야간 중·고등학교라고 합니다. 학력 인정학교인데, 1년 3학기제로 2년에 졸업한답니다.”
딸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우리 순영이가 입학한다면 4년에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얘기야?”
“네, 그렇습니다. 4년 후에는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아줌마에게 얼핏 들어서 자세히 모르니 직접 학교에 가서 알아보십시오.”
붕어빵 장사가 끝날 때쯤 할배는 순영에게 다가가 의중을 살핀다.
“순영아! 네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순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한다.
“아버지 저도 아줌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저도 학교에 가서 배우고 싶어요. 오전에는 바쁘지 않으니 아줌마에게 맡겨놓고 학교 끝나고 오후에 장사하면 어떨까 해요.”
“그래 알았다. 내년부터 다니기로 하자.”
법무부에 속한 교정시설 학교가 익숙한 할배는 딸이 다닐 수 있다는 문교부 산하 학교를 상상하다가 돌아서서 웃는다.
할배가 막 어둠이 내리깔리는 남산에 올랐다. 저 아래 점점이 박힌 불빛이 빼곡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를 떠난 것들은 켜진 불빛이었을까 꺼진 불빛이었을까? 그 틈새를 채워나가기 위한 치열한 삶의 열정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제 떠나야 할 날까지의 시간이 짧아진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것에 능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쉬워도, 주위의 그 어느 것도 놓는 게 아직은 싫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자꾸만 미련이 남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혼잣말을 중얼대는 할배 가까이에 인기척이 있다.
머구리와 아줌마가 곁으로 다가온다. 머구리가 말한다.
“형님 내년 3월에 옥화가 출소한답니다.”
“그래? 잘 되었구나 한 여자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여자는 학교에 가는구나. 인생사 오고 가는 것이고 주고 나면 다시 받는 것이 맞는가 보다.”
아줌마도 한마디 한다.
“그렇게 얘기하면 뭐가 달라지거나 좀 있어 보이나요? 잘나가다 가끔 왜 흰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머구리가 할배의 손을 잡았다.
“형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만 내려갑시다.”
“그래 그만 내려가자.”
세 사람은 남산을 내려와 양동 골목으로 들어선다. 곳곳에 ‘재개발 결사반대 목숨 걸고 지킨다!’라는 표어가 붙어있다. 할배는 생각한다. 재개발을 막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일체의 사리사욕 없이 재개발의 이점만을 진실로 믿고 추진하는 사람은 또 있을까? 그렇게 상반된 입장에서 매번 맞서서 싸우는 일은 궁극적으로 정녕 누구를 위한 투쟁일까?
눈앞에 남대문이 보인다. 옛날 시골에서 서울 갔다 온 사람과 안 갔다 온 사람이 싸웠다. 서로가 서울에 다녀왔다고 우기다가 남대문 문지방이 무슨 나무냐고 물었다. 갔다 온 사람이 대답을 못 하자 안 갔다 온 사람이 대추나무라고 했다. 결국 갔다 온 사람이 졌다. 훗날 남대문에 가서 확인해보니 문지방이 없었다. 때에 따라서 목청 큰 놈이 이기는 거다. 무식하고 소신 있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세상이다.
할배는 모두의 인생이 서로의 소신을 지키는 일이기를 바라며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남대문을 지나간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가슴속에 소설 같은 긴 이야기를 담고 살아간다. 삶이란 나름대로 한 편의 소설을 써나가는 것이다. 굽히지 않고 꿋꿋이 써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선수가 장군이고 다구리에 통뼈가 없다는 진실을 심신에 담고 할배는 달린다.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달린다. 언제나 뒤를 조심하면서….
첫댓글 할배의 활약이 대단하군요.
혹시 늑대님이 할배?
저는 아닙니다 ㅎㅎ **
잘 읽었습니다. 정의의 사도, 할배 파이팅!
이 시대의 서민 순영도 치료 잘 하고 학교 생활 잘 하길 기도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에 능숙해져야 한다는 할배 말씀도 잘 듣겠습니다.. 충성~!!
고맙습니다. ^^
힘든 시기에 위로를 주는 즐거운 글입니다.
할배처럼 모두 힘내서 달려요.
고맙습니다. ^^
할배 응원합니다ㆍ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