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43) 주모 반월댁
추석이 열흘 넘게 남았는데 주막은 벌써 썰렁해졌다.
벌초를 한다, 오곡백과를 추수한다, 지난 장마에 허물어진 담을 고친다 하며 주막 나들이를 피하기 때문이다.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던 주모 반월댁이 벌떡 일어섰다.
자반장수 곽 서방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손님이 많을 땐 고등어 비린내를 풍기는 곽 서방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반월댁이
버선발로 내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장대 끝에 매달려 가을바람에 간당거리던 주막 초롱을 내려버리고
사립문을 잠근 뒤 곽 서방 소매를 안방으로 끌어당겼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서로 건네다 초롱불을 끄고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일합을 거하게 치르고 나서 반월댁을 팔베개해준 곽 서방 왈.
“추석 때 한참 동안 주막 문을 닫지, 아마?”
반월댁이 한숨을 토했다.
“추석 앞뒤로 이레씩 보름간. 반겨줄 집도 없고….”
곽 서방이 반월댁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하고 월기봉 단풍유람이나 가세.
난들 어디 반겨줄 식솔이 있나.”
그렇게 베갯머리 의기투합이 됐다.
추석을 엿새 앞두고 잔뜩 모양을 낸 반월댁이 남색 장옷자락을 가을바람에 휘날리며
곽 서방 손을 잡고 삼정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칼을 든 산적들이 펄쩍 뛰어내려 곽 서방과 반월댁을 가로막았다.
“엄마야!”
반월댁이 소스라치게 놀라 곽 서방 품에 안겼다.
곽 서방인들 칼을 든 산적 둘을 당해낼 재간이 있나.
산적이 검은 보자기로 반월댁 얼굴을 가리고 노새 등에 태웠다.
까닥까닥 산적에게 고삐가 잡힌 노새가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곽 서방, 어, 어, 어디 있소?”
“나도 눈이 가려진 채 끌려서 걸어가고 있소.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모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곽 서방은 눈을 가리지 않은 채 빙긋이 웃으며 산적들에게 눈을 찡긋했다.
서너 식경을 걷고 걸어 노새가 걸음을 멈추자 산적들은 반월댁을 내리고는 보자기를 풀었다.
말로만 듣던 광림산채였다.
눈에 보이는 산적들이 아홉이었다.
“반월 아줌씨, 오시느라 수고했소.
나는 곰덕이라 하오.”
곰덕이라.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300리를 다닌다는 산적 두목!
팔척장신에 어깨는 떡 벌어졌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서는 은근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반월 아줌씨를 여기 모셔온 이유가 있소.
이리 오시오.”
산채에서 100보를 채 안 가 개울물이 흐르다 소를 이룬 곳에 도착했다.
큰 독이 칠할쯤 잠겨 있었다.
곰덕이 뚜껑을 열고 허연 물을 한바가지 퍼서 반월댁에게 디밀었다.
반월댁이 마셔보니 막걸리라고 빚은 것 같은데 반은 식초였다.
“에게게, 이게 뭐여. 퉤퉤.”
“막걸리를 한번도 제대로 담근 적이 없소.
그래서 반월 아줌씨를 모셔온 거요. 컬컬컬.”
그날 밤 반월댁은 관솔불을 밝히고 산채 한 움막에서 고두밥을 짓고
누룩을 섞고 들국화를 따오고 더덕을 다듬어 국화주와 더덕술 두 단지를 빚었다.
“닷새가 지나면 술이 익을 것이오.”
반월댁의 이 한마디에 산적들은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그날이 곧 추석이요. 컬컬컬.”
두목 곰덕은 너털웃음을 날렸다.
그날 밤,
며칠 전 사로잡은 산돼지의 목을 따고, 식초 같은 막걸리가 담긴 독을 통째로 내놓고
산적들은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술판을 벌였다.
반월댁이 수중가를 불러젖히자 산적들이 자지러졌다.
삼경이 지나서야 술판이 파했다.
반월댁은 산적 집사가 마련해준 방에서 살짝 나와 개울에서 뒷목을 하고 제 발로 두목 곰덕의 움막으로 들어갔다.
두목이 벌떡 일어나 관솔불을 켜더니 외쳤다.
“안되오. 부하들을 제쳐놓고 혼자서 댁을 독차지한다는 건 두목으로서 할 짓이 아니오!”
반월댁이 말했다.
“쇤네가 이 산채에 열흘도 넘게 머무를 것이오.
약속하리다.”
그날 밤 두목과 삼합을 치르며 반월댁은 온몸이 녹아내렸다.
이튿날부터 하룻밤에 한명씩, 적게는 삼합 많게는 오합을 치렀다.
추석날 산적들은 송아지 한마리를 잡고 더덕막걸리와 산국막걸리를 마시며 질펀하게 명절을 보냈다.
반월댁이 하산하는 날 두목의 명으로 집사가 보석함을 가져왔다.
주막으로 돌아온 반월댁은 산채의 세작이 됐다.
심 참봉이 벼슬을 사러 돈을 싸들고 언제 삼정고개를 넘는다는 정보, 백 대인이 열다섯
숫처녀를 사려고 묵직한 전대를 차고 용바위골로 간다는 정보, 관군이 산채를 치러 언제 출동한다는 정보….
그런 정보를 갖고 산채로 가는 사람은 자반장수로 위장한 곽 서방이었다.
첫댓글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토요일
활기찬 발거름으로 출발하시고 신나고
행복이 가득한 주말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