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미사엘 가는데 제법 비가 내린다. 가뭄이 심한 요즈음 꼭 필요한 때 내려주시는 단비
같다. 예전에 엄마는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신다.’나 ‘아유, 비가 오시네.’라는
존칭으로 표현을 하셨다. 그때는 세례를 받기 전이었는데도 마음 안에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존재가 자리하고 계셨던 것 같다.
6년 전 오늘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날이다. 추기경님에 관한 일화는
너무도 많이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최근에 불자들의 설문조사에서 존경하는 종교지도자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유신의 칼날 앞에서도 필요한 때에 목소리를 내셨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함께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신자든 비신자든 그분을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비서신부님을 지내셨던 장 익 주교님이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만난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하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언젠가 추기경님이 당신의 별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맞춰보라고 퀴즈를 내셨단다.
“글쎄요?” “소품이야” “네?” “그건 말이야, 내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나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거든. 그래서 언제나 나는 그 자리에 소품처럼 있어 주는
거지.” 또 주교라는 자리가 뭐하는 자린지 아느냐고 물으셨단다.
“쓰레기통이야”“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찾아와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좋은얘기, 나쁜얘기를 몽땅 꺼내서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말을 하니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나도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때 추기경님과 함께 사진을
찍느라고 한참을 기다려서 찍은 사진이 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 보니 감회가
새롭다.
명동성당은 주교좌 성당이기에 대미사나 특별미사가 있는 때면 추기경님이 집전을 하셨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세례 받을 때부터 미사드릴 때에는 언제나 앞줄에 앉게 된다. 주송을
오랫동안 하며 앞줄부터 앉으라는 공지를 늘 하였기에 그렇게 앉아야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추기경님이 집전을 하실 때 추기경님으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시는 기쁨도 컸던 것
같다. 그런 날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으니까...
은퇴를 하시면 자신이 직접 작은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작은 희망마저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때가 있다.
당신의 자화상을 그려놓고 ‘바보야’라고 쓰셨던 그 분.
추기경님이 선종하셨을 때 나는 잠시 부천근처 가톨릭대학교가 위치한 역곡에 살 때였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뵈려고 끝도 보이지 않는 줄을 설 때였다.
역곡성당의 같은 반에 사시는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곳엘 가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차 한 대로 갈 수 있는 분들을 저녁 6시에 성당에서 만나 명동성당으로 갔다.
마침 명동성당 건너편에 다녔던 직장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건너가니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게 여전히 줄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함께 간 분들에게 우선 성당으로 올라가 보자고
하였다. 지하성당에서는 그날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곳에서 미사가 계속 봉헌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는지 자리가 있어 다행히도 우리는 미사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옆문이 10m 정도 간격이 벌어져 있다. 근조라고 쓴 검은리본을 달고 들어가라는 안내자의 말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그것을 타려고
한쪽으로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누가 그랬는지 들어가자라는 말에 모두 성당으로 들어갔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새치기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몇 시간씩 기다리고 들어갔는데 순간 대열이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는 어부지리로 입장할 수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줄을 서서 기다리려면 언제가 될지 모르니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말을 하며 나오던 참이었다.
추기경님 앞에 서서 인사하는 시간은 3초정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안한 모습의 얼굴을 뵈니 참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간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시며 돌아오는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명동성당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았고 우리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곳이어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하성당을 찾아간 것이 어찌보면 꼭 그분을 뵙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 같아 솔직히 나도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참 세월이 빠르다. 선종하신 후에 우리는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잘 살아야한다는 다짐을
하곤 했는데,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훌떡 지났어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삶이 괜찮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그거야 누구나 아는 얘기 아닌가"라며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이웃과 화목할 줄 알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걸 실천하는 게 괜찮은 삶 아닌가"라고 이야기 하셨던 추기경님.
서로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요즘 같은 때 세상을 향해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꼭
필요한 단비 같은 그런 분들이 애타게 기다려지는 때다.
그래서 오늘 그분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일게다.
첫댓글 나마리아님 덕분에 귀한 사진을 보았고, 좋은 글을 읽어 행복하고, 또한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또한 참나리님의 글을 읽을 때면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곤 합니다.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시는 것을 보며 부럽다고 생각했지요.
이 시대에 더욱 사무칩니다.
사진의 포즈가 말하는 메시지가 온몸에 전율을 일으킵니다.
오늘은 제주에 계시는 강우일 주교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강우일 주교님... 하느님께서는 어떤 뜻이 있으시겠지요?
주교님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 때입니다.
하느님 옷자락을 잡고 희망의 끈을 당기고 싶습니다.
마음에 새겨 봅니다.^^
고맙습니다.
숙독하고 갑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저도 6년전 평화방송에서 정규프로그램이 중단되고 추모곡이 흘러 의아했는데
추기경님의 선종 멘트에 가슴이 싸아했던 그날기억이 새롭습니다
잘 살아야지 ~~그렇게 실천하며 잘 살아야지
다짐하며 화살기도 올립니다
그때에는 우리 모두가 그랬을거에요.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저도 함께 화살기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벌써 6년이란 시간이 지났네요..
추기경님의 바르고 따뜻하신 말씀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즈음입니다.
그분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은 그분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겠지요.
마리아 언니!
잘 지내시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요즘처럼 세상이 너무 혼란스러울 때는 직구탄을 날릴 수 있는 아니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 듭니다.
안녕, 엘리 공주님. 저도 그 말에 한 표 던집니다.
저는 아직 명동성당도 가보지 못 했습니다. 멀발치에서 보기는 했지만요. 추기경님을 그리워 하며 그 가르침 대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으셨나봐요. 왠만하면 가까이서 보셨을텐데, 먼 발치에서만 보신걸보면.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할텐데...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추기경님의 삶의 자취를 되새겨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세월이 정말 빠른것 같아요. 우리나라를 많이 아끼셨던 분이기에 천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위해 전구하고 계실거에요. 그분은.
세월이 참 빠르네요.
추기경님의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추기경님처럼 바보의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데 참 힘들고 어렵네요. ^^*
추기경님이 그리신 자화상의 바보야가 더욱 그리워지네요.
예. 추기경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맞아요.
언니 모니카예요.
언니와 북한산산행 약속을 못지키고 새해를 맞이했네요.
올해는 그약속 꼭 지킬수 있게 되기를 기도 드려요.
언니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모니카 안녕? 어떻게 요즈음도 서울엔 자주 올라오나요?
함께 둘레길 걷는 날을 나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언니하고 연락해서 꼭 한번 만나자구요. 기다릴께요....
저도 김수환추기경님 그립습니다.
하늘나라 가신이래 늘 제 묵주봉헌에 함께 하게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립고도 구수한 김수환 바보야 추기경님^.^
아, 그러시군요. 기뻐하시겠어요. 추기경님께서. 저도 돌아가신 후에 교구청에서 나온 추기경님 얼굴이
새겨진 열쇠고리에 아파트열쇠를 달아서 매일 뵈요. 그분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