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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 - 세 가지 자랑거리를 지닌 하느님의 정원 |
배론 교우촌의 형성
배론 성지의 주소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644-1(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이곳은 해발 1,087m의 백운산(白雲山)과 985m의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싸인 심산유곡의 벽촌이다. 배론〔舟論〕이란 명칭은 이곳의 깊은 골짜기의 형상이 배의 밑바닥같다는 데서 붙여졌다. 한편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관계로 경치는 수려하여 제천십경(提川十景)의 하나로 순례객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이 부근의 촌락으로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천주교 박해시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들어와서 교우촌을 형성한 것은 단연 6촌락 중에서 점촌배론이었다.
점촌(店村)은 토기·유기·철기·옹기를 생산하는 마을이나 광산촌으로 각종 장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생산 활동을 하는 마을을 일컫는다. 따라서 점촌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경북 문경의 점촌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문경의 점촌은 광산 지역이면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특화된 마을이었다.
점촌배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박해를 받아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따라서 옹기 굽는 일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옹기 굴속에서 숨어 지내기에 박해의 감시로부터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이렇게 하여 박해를 견디어 내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마을 이름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배론 성지의 의의
배론은 박해 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한 순교자들의 요람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알렉시오가 비단 글씨 곧 백서(帛書)를 작성한 곳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고, 1855년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황사영이 머물렀던 토굴과 성 요셉 신학당, 그리고최양업 신부의 묘를 배론 성지의 3대 보물이요 자랑거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황사영 백서 토굴(1801. 2-1801. 9)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배론 마을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소재(素材)는 명주천이고,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세필로 쓴 깨알 같은 글자 수는 122행, 13,384자나 된다.
이 백서는 첫째, 인사말(1-5행), 둘째,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6-32행), 셋째, 순교자 열전(32-90행), 넷째,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8행), 다섯째, 관면 요청과 맺음말(119-122행)로 되어 있다.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편지 심부름을 맡았던 옥천희(玉千禧)가 1801년 6월에, 사전 모의를 했던 황심 토마스가 9월에 체포되어(10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황사영도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다. 순교 다음날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정약현의 딸)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다. 현재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한문본은 절두산 박물관에 있다.
▲성 요셉 신학당(1855 - 1866)
성 요셉 신학당은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는 3대 교구장 페레올이 선종하고 아직 교구장이 파견되지 않아 메스트르 신부가 교구의 장상으로 교구장을 대신할 때였다. 이때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였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1856-1866)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1862-1866)가 교수로 재직 하였다.
학과는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두 서양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다.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하여 두 신부를 체포하였는데, 두 신부는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장주기 요셉은 3월 30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 때 흰 무지개 다섯 개가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성 요셉 신학당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임과 동시에 조선 최초의 근대 신학교육 기관이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학교도 바로 이 학교이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1861. 11 - 현재)
배론 성지에는 우리나라 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의 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 코(1805-1839)이고 어머니는 복녀 이성례 마리아(1801-1840)이다. 그는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며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사목한 구역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 5도이며 6천여 명의 신자들과 127개의 공소를 대상으로 사목했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그해 11월경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당시 신학교가 있었던 이 곳에 묻히게 되었다.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 추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구원에 이끌기 위해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지 개발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했다.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2004년 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게 하였다.
2005년 7월에는 건축된 지 30여 년이 지난 순교자들의 집을 새로 단장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황사영 순교 현양탑 앞에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을 세웠다. 2006년 2월 27일 배론 공소와 배론 성지를 합해 장주기 요셉 성인을 주보로 하고 성 요셉 성당을 본당으로 하는 배론 준본당이 설립되었고, 2010년 9월 3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6일 신자들에게 문화와 영성을 교육하고 교구 교회사와 영성을 기록 · 보관 · 연구함으로써 교회와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기틀이 되고자 설립한 문화영성연구소 축복식을 봉헌했다.
원주교구는 교구 설정 53주년 기념일인 2018년 3월 22일 배론 성지에서 피정시설인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기공식을 거행하여 이듬해 12월에 완공하여 2020년 8월 15일 봉헌식을 가졌다.
오후 4시가 넘어 베론 성지에 도착했다. 이외로 성지가 매우 넓다. 입구 주차장에 내려 성지 쪽으로 가니 먼저 나타난 것은 로컬푸드관과 화장실이다.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건물 사이에 매우 좁게 나 있다. 마치 관광지 휴게소에서 상품 판매소를 거쳐 화장실에 가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왜 성지 정면에 높은 건물과 화장실을 세워 성지 시야를 가리고, 농산품 판매소를 거치도록 했는지 의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일까? 처음 온 사람들은 성지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입구를 통과하여 성지에 가까이 가면 여러 개의 안내 표지판이나 배치도가 나오는데 시설이 많고 넓기도 하여 이를 보고 미리 성지 순례의 동선을 정해야 한다.
성지의 모든 시설은 구학천을 기준으로 좌우에 갈라져 펼쳐진다. 구학천 왼쪽으로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학교를 지나 계속 오르면 성모동산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인생의 미로, 로사리오의 길, 성모상, 최양업 기념성당(소성당, 대성당)이 나오고 맨 뒤에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으로 끝이 난다.
구학천 오른쪽으로는 마음을 비우는 연못, 무명 순교자의 묘, 이어서 성요셉 성당으로 간다. 좀더 오른쪽으로는 관리소, 사제관, 성모동굴, 성요셉 신학당, 황사영백서 토굴, 옹기굴, 황사영 알렉시오 현양탑. 황사영기념관(경당), 순교자들의 집이 있다. 성모동굴에서 산쪽으로 오르면 십자가의 길, 최양업 묘소와 성직자 묘가 있다. 이들이 배론 성지의 거의 전부의 시설이다.
우리는 일단 입구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거쳐 먼저 최양업 묘소를 갔다 와서 계곡 따라 올라가면서 계곡 오른쪽 지역을 순례하고 다리를 건너 계곡 왼쪽지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시설은 2020년에 봉헌된 피정시설인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이다.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기도학교는 성당과 식당, 강의실, 회합실, 성체조배실 등을 갖추고 최대 250여 명이 숙박하며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다. 아직은 외부의 환경정비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인 것처럼 보이나 예약 운영 중이며 아마도 지금까지 다녀본 국내 성지 중에서 가장 큰 피정시설이 아닌가 한다.
기도학교를 지나 인생의 미로의 기도처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업교를 건넌다.
양업교 - 7성사와 7극
성지 왼쪽 지역 오른쪽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인데 그냥 건너가다가 자세히 보니 그냥 다리가 아니었다. 다리의 좌우 난간에는 각각 7개의 난간석이 있고 각기 칠극(七克)과 칠성사(七聖事)가 새겨져 있다.
칠극(七克)이란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오만·음란·나태·질투·분노·인색의 7가지 악덕을, 은혜·겸손·절제·정절·근면·관용·인내의 7가지 덕행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1614년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龐迪我)가 북경에서 지은 가톨릭 수덕서(修德書)에 나오는 교리로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이름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교리는 유교의 극기론인 극기복례(克己復禮), 사물(四勿)과도 관련이 있어 유교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쌍벽을 이룬 교리서이다.
천변에 책모양의 퇴색한 조각품이 버려진 듯 놓여 있다.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양업교를 건너 바로 계곡 상류 쪽에는 연못이 있는데 이름이 마음을 비우는 연못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를 바라보면서 바로 최양업 신부 묘지로 향한다. 왼쪽에 사무실과 성물방 건물이 나오고 이어서 성모동굴이 나온다.
최양업 신부 상
최양업 신부 묘소로 가는 오르막길 바로 밑에는 최양업 신부 석상이 있다. 대좌 측면에는 약력이 소개되어 있고, 대좌 앞면에는 최양업 신부가 직접 지은 천주가사 사향가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가사는 3·4조 또는 4·4조 음수율의 4음보 운문시가로 낭송하기도 좋고 우리의 전통정서에 깊이 와 닿기에 신앙심을 고양시키기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사향(思鄕)에서 고향이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늘나라를 말한다. 능숙한 라틴어에 가사까지 지은 최양업 신부의 재능이 놀랍다.
최양업 신부 상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부귀영화 얻었던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빈궁고난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리
이렇듯한 풍진세계 안거할곳 아니로다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없으리라
아마도 우리낙토 천당밖에 다시없네
우리인생 바랄것이 이곳밖에 또있는가
천하만복 다받은들 천당복에 비길쏘냐
이 석상은 1984년에 세웠으며 옆에 봉헌자 명단 비석이 희미한 글자로 남았는데 읽어보니 전면 제자(題字) 최도마 양업신부상는 지학순 주교가 썼다.
길 건너에는 큰 바위에 기대어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를 하고 계신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제자들은 다들 잠들었는데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고뇌의 시간을 겟세마니에서 기도로 보내신 것이다. “주님 가능하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넒은 광장이라 야외 제대도 있다.
묘소 가는 길은 바로 올라가는 길과 십자가의 길을 거쳐 돌아가는 길이 있다. 일단 바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십자가의 길을 내려오기로 한다. 처음엔 시멘트블록 길이었으나 조금 오르니 흙길이어서 편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해 오르기에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가며 부지런히 걸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
마침내 나타난 묘소는 언뜻 보아도 좋은 터인 것 같다. 등성이에 위치하며 양쪽 계곡으로 물길이 감돌고 좌우의 산세가 안온하게 묘를 감싼 듯하다. 묘제도 전통적인 봉분형에 묘비와 상석도 전통양식이었다. 오른쪽에 묘비, 왼쪽엔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과 함께 최양업 신부 묘 재조성용 봉헌함도 놓였다.
묘비에는 司祭篤瑪崔鼎九之墓라고 쓰였는데 篤瑪(독마)는 최양업 신부의 세례명 토마스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런데 묘비에는 ‘良業’이라는 이름이 없고 ‘鼎九’로 기록돼 있다. 정구(鼎九)는 관명(호적에 오르는 정식 이름)인 구정(九鼎)을 오기한 것이다.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이에 대해 “최양업 신부님 조카인 최상종(빈첸시오)이 착오로 증언한 것에서 오류가 비롯됐다”며 “최양업 신부님 남동생들 이름이 희정(羲鼎), 선정(善鼎), 우정(禹鼎), 신정(信鼎) 등인 것을 봐도 최양업 신부님 이름은 구정(九鼎)이 맞다”고 했다. 실제 경주 최씨 세보(世譜)에는 최양업 신부가 ‘장자 구정’(長子 九鼎)으로 올라가 있다고 한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치고 내려올 때는 십자가의 길을 거쳐서 내려왔다. ‘가경자’란 ‘하느님의 종’이 교황청에 공식 접수된 단계로 복자 위에 오르기 직전이다.
성 요셉 신학당
1855년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성 요셉 신학당을 세우고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 학교 교장이었던 푸르티에 신부의 후일 회고담을 들으면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오두막집에 8년 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이 완전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두 방이 잘 닫히지 않는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어서 발산하는 냄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게 침투합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학생들에게 옮겨 주어서 차례차례로 앓고 있습니다.(1865년 11월 20일자 서한 중에서)
학생은 김 사도 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권 빈첸시오, 박 필립보, 이만돌(바울리노), 이 토마스 등인데 이들에게 라틴어, 수사학, 철학 등을 가르쳤다. 기숙사 시설이 없기에 몇 명씩 각 마을에 배정하여 숙식을 제공하고 다니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열악한 형편임에도 요셉 신학당은 나중 부임한 베르뇌 교구장의 전폭적인 지원, 선교사들의 열정, 신자들의 기도로 신학생 양성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 결과 1866년에는 라틴어 과정 4명, 신학과정 2명, 삭발례자(削髮禮者) 1명, 소품자(小品者) 1명 등 8명의 신학생이 수학했다. 얼마 후면 사제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두 명의 외국인 신부와 회장 장주기, 그리고 세 명의 신학생이 순교함으로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 전쟁 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인데 그야말로 초가삼간이다. 이곳이 교실도 되고 교무실도 되고 사제관도 된다.
바깥벽에는 그림이 걸렸다. 이 그림은 성신 가톨릭대학교 2015년 개교 16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이콘 연구소에서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다. 그 개교 160주년이 바로 이 배론 신학당이 세워졌던 1855년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배론 성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에 그 기념화를 복제해서 건 것 같다. 서울 순례때 성신 가톨릭대학 성당에서 이 그림을 본 것이 기억이 난다.
예수님 아래 왼쪽은 검은 수단에 모관을 쓰고 순교의 상징 팔마 가지를 든 김대건 신부님이시고 오른쪽은 지팡이에 교리책을 들고 여행자 차림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이시다. 아직 시성이 되지 않아 머리 뒤에 후광이 없다. 예수님 발 아래 초가집은 베론 신학당이며 예수님이 들고 계시는 글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내용이다.
방에는 당시 학생들과 선교사의 모형상이나 그림이 벽에 걸렸다.
바깥에는 두 선교사의 석상과 장주기 회장의 흉상이 조성되어 있다.
▲ 푸르티에 (Pourthi, Jean Antoine, 1830∼1866) 신부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하였다.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신부 (1828∼1866)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어 프리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묘소도 프리기에 신부와 같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짓기도 했다.
황사영 백서(帛書) 토굴
1801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黃沁) 토마스를 만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써서, 옥천희(玉千禧) 요한으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는 1801년 6월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황심도 음력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황심의 자백으로 배론에 숨어 있던 황사영마저 음력 9월 29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교회의 재건책을 단적으로 말하면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비록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고 해도 외국 군대를 동원하자는 것은 분명 반역 행위로 조정에서는 물론 교회에서도 결코 두둔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에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섣부른 두둔은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이롭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가냐? 신앙이냐? 참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강대국을 끌여들여 압력을 행사하자거나 국내 문제를 유엔에 보고하는 것도 크게는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든 황사영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21년에 와서야 황사영은 ‘하느님의 종’ 133위에 포함이 되어 현재 시복을 추진 중이다.
참고로 한국 천주교 신앙에 목숨을 바쳤으면서도 신앙 고백에 대한 기록 미비와 배교 논란 등 여러 이유로 추진 대상에서 누락되었던 순교자들, 곧 이벽 요한 세례자, 김범우 토마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브로시오,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등도 포함이 되었다.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명문가 태생으로 3대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사람이 사전에 발각이 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혔다. 조정에서는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하고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으며 가족도 모두 유배되었다. 황사영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진복문, 전시관,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백서 토굴 옆에 진복문(眞福門)이 있다. 물론 마태오복음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진복팔단(眞福八端)에서 이름을 취했다. “문 양쪽 기둥에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이 양쪽 기둥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문 안에는 전시관이 있고 문 옆에는 배론 성지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상이 서 있다.
원래 진복문은 원래 황사영 경당에 들어가는 문으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경당은 없어지고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출입문 옆에 전시 안내 포스터가 붙어있다. 2022년 12월부터 김옥수 도미니코 신부가 제작한 가톨릭 성인전 조각상이 전시 중인데 문은 잠겨 있다. 관리실에 전화로 물어보니 동절기에는 열지 않는다는 대답이다. 그래서 건물 왼쪽에 있는 황사영 순교현양탑만 보고 돌아섰다. 탑 앞에는 영혼이 하늘을 향해 오를 듯한 역동적인 황사영 동상이 있다.
무명 순교자 묘
황사영 순교현양탑 앞길 건너편에 있다. 대형 십자가형 예수님상 아래 성모님께서 순교자를 상징하는 팔마가지를 든 어린이와 와 함께 순교자의 영혼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
성 요셉 성당
성 요셉 성당은 지은지 오래 된 작은 성당이지만 최양업 기념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 성당이 주성전이었다. 지금은 순례자 전문성당이다. ‘순례자 미사 장소’라고 커다랗게 현수막이 붙었다. 건물 뒤에서 보면 2층 다락집의 형태로 1층은 차가 통행하는 찻길이다.
성 요셉 성당을 나와 성지 오른쪽 지역 맨 꼭대기에 있는 순교자들의 집을 간다.
피정의 집 순교자들의 집은 최대 100명까지 단체 피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지은 지가 오래된 낡은 건물이다. 그래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세워진 뒤에는 운영하지 않고 일부 순례자들을 위한 식사 장소로만 활용된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집에서 나와 작은 다리를 건너 성지 왼쪽지역으로 간다. 다리를 건너면 쉼터 육모정자가 있고 계곡 아래를 바라보니 조금 전에 갔던 성 요셉 성당이 시냇가에 서서 통행인에게 1층을 양보하며 서 있다.
정자 아래쪽에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이 있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2004년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는 베론 성지에 조성한 공원이다. 여기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오석에 새긴 30개의 조각 작품이 둘러져 있으며 그 내부는 납골 봉안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구에는 조각공원 표지석이 있고 최양업 신부 좌상이 있다.
30개의 조각품은 좌우에 각각 15개씩인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출생(1821.3.1.)
▲신학생으로 선발됨(1836.2.6.)
▲마카오로 유학(1836.12.3.)
▲신학공부(1937-1942)
▲동료 최방제의 죽음(1938.11.27.)
▲기해박해(1939.5)
▲부모님의 체포(1939.7)
▲포도청에서의 옥중 생활
▲동생 의정(야고보)에게 한 모친 이성례(마리아)의 유언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에 갇힌 모친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순교(1939.9.12.)
▲옥중의 모친을 돕는 의정(야고보)
▲모친의 순교(1940.1.31.당고개)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니는 의정(야고보)
▲소팔가 교우촌(만주 장춘부근)에 머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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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과 기쁨(부모님 순교 소식과 부제 서품 받음)
△조선 입국을 위한 여정 (6차례나 시도)
△영원한 사제 서품(1849.4.15.)
△귀국에 성공함(1849.12)
△동생들과의 만남
△열정적인 사목활동
△두 동생에게 혼인성사를 줌
△교우촌을 찾아가는 최신부(1851.10)
△교우 안나에게 고해성사를 줌(1850.10)
△성직자 양성과 교회서적 번역
△배론 신학교의 설립과 방문
△진밭들 교우촌에서 습격을 당함
△문경에서 과로로 쓰러짐]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선종(1861.6.15.)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조각 공원 바로 아래쪽에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인 대성당과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공원에서도 바로 보인다. 건물 전체가 배 모양이다.
창문에는 대성당과 소성당은 동절기에는 개방이 되지 않으니 맞은편 성 요셉성당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성 요셉성당은 갔으니 바로 이어지는 대형 잔디밭 성모동산으로 이동 했다.
성모동산
성모동산 가운데 있는 성모상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넓은 잔디밭이다. 이 성모동산의 아래쪽에는 인생의 미로, 묵주기도의 길, 더 아래로는 처음 도착해서 보았던 피정의 집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집이 있다.
인생의 미로 기도처
성모 광장과 인접한 양업교 입구에 있다. 그러나 정작 인생의 미로는 보수 중인지 포장이 덮여져 있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의 제목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다
“당신은 순례자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어 마음이 급하지요. 인생길은 순례길 서두르지 마십시오.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간을 돌아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도하면서 미로를 따라 걸어 보십시오. 인생여정에는 동서남북, 사해팔방, 춘하추동, 생로병사, 유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어느 과정도 생략할 수 없고 다 거쳐야 목적지에 이릅니다. 인생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며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조급해 하면서 순례하는 우리를 꾸짖는 말로 들린다.
인생의 미로 옆에 묵주기도의 길이 우회해서 조각공원으로 이어진다. 각처마다 성모님의 행적을 청동으로 새긴 조각품이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묵주기도 시작점 표지판 옆에는 누운 십자고상이 있다. 이 인생의 미로 바로 아래에는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집이 있다.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집에서 더 내려와서 성지교라는 다리 하나를 건너면 처음 출발했던 로컬푸드 관이 나온다. 흔히 인생이란 미로처럼 복잡하다고 하지만, 출생이라는 출발점에서 빈손으로 나와 다시 빈손으로 죽음이라는 종착점으로 가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매우 단순하다고 볼 수도 있다.
성지교의 네 모퉁이에는 복음사가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복음사가(福音史家)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복음사가(福音四家)라고 하면 4복음서를 쓴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을 가리키는데 3세기 이후 이들은 각각 천사, 사자, 황소, 독수리 의 고유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저녁때인 5시40분 출발했다. 9시는 넘어야 도착할 것이다. 여행작가 김영수 시인의 시 한편으로 이번 순례를 마무리 한다.
부활이 보이는 날에는 (배론에서)
배 안처럼 아늑한 곳
햇살 모인 골짜기에는
아직도 옹기장이의 불 타고 있습니다.
백서(帛書) 쓰던 토굴에는
여전 비장한 숨결 푸릅니다.
영원한 젊음의 노래
그보다 질기고 긴 사랑 있을까요
생애는 쉬이 끊어지는 실바람이라지만
햇살은 영원 달리는 기도입니다.
부활이 보이는 날에는
늘 눈물 어리는 법
바람소리 물소리 만나는 곳에서는
황홀히도 참회의 숲이 열립니다.
일생에 누구 하나에라도 길 열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불빛일 수 있습니다.
가슴에 작은 불 밝히면서
쓸쓸한 이웃 하나 깨울 수 있다면
깨워서 눈물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미소일 수 있습니다. (김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