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7. 서안 자은사 대안탑에서/
현장스님과 대당서역기
삼장법사 현장스님 중국불자에 최고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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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대안탑> |
사진설명: 자은사 뒷 편 언덕 위에서 촬영한 일몰. 황홀한 광경이었다. |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를 위해 2달간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현장스님(?~664) 부분’이다. 중국인들에게 역사상 누가 최고 미남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삼장법사님이 중국 역사상 최고 미남”이라고 대답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천축으로 가는 도중 무수한 요괴들이 유혹하고자 하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답은 지역을 막론하고 똑 같았다. 현장스님이 최고(最高) 미남이고, 중국 불교사상 위대한 스님이라고 자랑했다. 나아가 “불교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에서 실질적으로 발전했다. 중국불교 발전을 견인한 사람이 삼장법사”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초기 중국불교 토착화 및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을 몇 명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안세고.구마라집.불도징.도안.승조.혜원스님 등을 든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달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안세고.불도징.구마라집스님 등은 한족(漢族)이 아니다. 그들은 서역 출신으로 중국에 가 불교를 전파한 스님들이다.
안세고 스님의 고향은 우즈베키스탄 부하라고, 구마라집.불도징스님 역시 서역이 고향이다. ‘자존심 강한’(?) 한족이 이들을 최고 스님으로 평가할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들은 현장스님을 내세우는 걸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를 순례하는 사이 현장스님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은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구마라집.불도징 스님 등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현장스님에 대한 경외심은 역으로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모래바람을 뚫고 627년부터 645년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순례한 현장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 하는 동안 더욱 ‘거대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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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과 대안탑> |
사진설명: ‘중국 최고의 고승’으로 평가되는, 자은사에 있는 현장스님의 동상과 대안탑. 육환장을 들고 걸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고도 서안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던 2002년 10월6일. 드디어 장안에서 현장스님을 만나게 됐다. 현장스님과 긴밀한 인연이 있는 자은사 대안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인도 룸비니에서 시작해 경주 남산에서 끝나는,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의 수호보살은 혜초스님과 현장스님이었다.
원류(源流)를 찾는 내내 ‘혜초스님의 길’과 ‘현장스님의 길’을 생각했다. 인도의 룸비니.쿠시나가라.나란다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바미얀에서, 중앙아시아의 타쉬켄트.사마르칸드에서, 그리고 신강성 곳곳에서 항상 생각한 스님은 혜초스님과 현장스님이었다. 그 현장스님 구도여행의 기착지이자 종착지가 바로 장안, 즉 서안이다.
오후 4시경. 자은사(慈恩寺) 입구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 보니 사람들로 붐볐다. 자은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대안탑이 있는 사찰. 차에서 내려 산문으로 걸어갔다. 순간 눈에 거대한 동상이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의 - 아마도 천축 구도여행 하는 모습인 듯 - 현장스님 동상이 보였다. 과연 잘생긴 얼굴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의 진의를 파악해 중생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해주고자 나선, 힘든 천축 구도여행의 한 순간을 형상화한 동상 같았다. 얼굴과 전신(全身)에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자세가 가득했다. 현장스님 동상 앞에서 다시금 스님의 일생을 떠올렸다.
중국 2대 역경가 … 28세 때 홀로 서행길
중국 2대 역경가의 한 사람인 현장스님의 속명은 진의, 하남성 낙양 출신이다. 11세에 형을 따라 낙양 정토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다 13세에 승적을 얻어 화상(和尙)이 되고 ‘현장’이란 법명을 받았다. 사천, 성도, 공혜사 등지에 있다 23세에 장안으로 돌아가 대각사에 머물렀다.
다양한 불전을 공부한 현장스님은 경전을 깊이 공부할수록 각 종파의 교리에 대한 의혹과 역경에 대한 의문이 깊어갔다. 불전 원본만이 이러한 의혹과 의문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불교발상지 천축에 가 경전을 구해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26살 때 천축행을 주청했다. 당시는 법적으로 옥문관 서쪽 출입이 금지됐기에, 현장스님의 주청은 허락되지 않았다.
서기 627년 8월 현장스님의 나이 28살 때, 홀로 몰래 장안을 출발해 서행길에 올랐다. 진주(천수).금성(난주).양주.과주(돈황).옥문관에 도착했다. 옥문관을 돌파해 800리 사막 길을 붉은색 노마(老馬)를 타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걸어갔다. 5일 만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졌으나, 닷새째 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깨어 걸으니 10리 앞에 못이 있었다. 다음날 이오(伊吾)에 도착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엔 옥문관에서 이오의 여정에 대해 이렇게 나온다.
“밤에도 요사스런 도깨비 불빛이 찬란하기가 마치 별빛 같았고, 낮이면 거센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흩뜨리는 것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중략) 4일 밤, 5일 낮 동안 한 방울의 물도 적시지 못해 목구멍과 배가 바싹 바싹 타들어갔고, 거의 절명 상태로 다시는 나아갈 수 가 없게 됐다. 마침내 모래 위에 누워 사경을 헤맸다. 그런데도 법사는 잊지 않고 관음을 염하면서 관음보살에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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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서안 최고 명물 중 하나인 자은사 전경. |
이오에 도착한 현장스님은 계속 나아갔다. 이오.고창국(투르판).언기(카라샤르).능산(천산산맥 북쪽).대청지(이시크쿨호).달라사성(탈라스).타쉬켄트.사마르칸트.마자르이샤리프.가필시(아프가니스탄 베그람).잘랄라바드.건타라국(페샤와르).오장나국(스와트).캐시미르 서북부.탁샤실라(탁실라).가습미라(캐시미르).마투라.쉬라바스티.룸비니.구시나가라.나란나에 도착했다.
나란다 대학에 15개월 동안 머무르며 무착보살과 세친보살의 직계제자인 106세의 계현(戒賢. Silabhadra)스님에게서 유식학을 배웠다. 불교철학과 범어를 완전히 익히고, 경전들을 구한 현장스님은 641년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중아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천산남로를 이용, 520상자 657부의 경전을 들고 장안에 돌아왔다. 중국을 떠난 지 17년 만인 645년 2월이었다.
장안에 돌아온 현장스님은 융숭한 환영을 받았다. 국경을 몰래 넘어, 수비병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며 밤에만 길을 걸었던 과거의 여행과는 확실히 다른 대접이었다. 귀국한 며칠 뒤 현장스님은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났다. 태종은 현장스님이 지나간 나라의 풍습과 환경 등을 자세히 물었다. 자은사 번경원(飜經院)에 주석하며 역경에 몰두, 73부 1,330권을 한역했다.
구마라집스님과 현장스님을 2대 역경가로 평가하는데 두 사람의 역경방식은 차이가 난다. 대만 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진홍스님은 이에 대해 “중국은 크게 2대 역경가를 꼽는데, 구역은 구라마집스님이고 신역은 당 현장스님이 대표한다. 구라마집스님은 의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직역했다. 구라마집스님의 역경 부수는 당 현장스님보다 작지만 경을 번역한 범위는 더 넓다. 화엄.십송률.중론.중관론 등 손을 안 댄 부분이 없다.”
서역에서 520상자 657부 경전 들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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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안탑 안에 봉안돼 있는 구법중인 현장스님의 석각. |
역경과 함께 현장스님은 “암흑에 뒤 덮인 7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지리에 한 줄기의 광명을 비추는”〈대당서역기〉를 남겼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서구학자들의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됐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학술탐험의 귀중한 지도 역할을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한 영국의 오렐 스타인은 현장스님과〈대당서역기〉를 열렬히 숭배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언종스님과 혜립스님이 지은〈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을〈대당서역기〉와 같이 보는 것이 더 좋다. 664년 현장스님이 입적하자 당 고종은 스님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조회를 폐했다 한다.
현장스님 동상에 예배하고 천천히 자은사 경내로 들어갔다. 자은사는 당 고종이 된 황태자가 648년 돌아간 자신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위해 수나라 때 절터에 창건한 사찰이다. 경내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서안 시민의 휴식처 역할을 똑똑히 하는 것 같았다. 경내를 돌고 돌아 대안탑에 도착했다. 대안탑. 이 탑 건립에 대해〈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엔 이런 기록이 있다.
“652년 3월 법사는 단문 남쪽에 석불탑을 만들어 서역에서 가지고 온 경장을 안치하고자 했다. 탑 기단의 사면은 각각 140척이고 구조는 서역의 제도를 본뜨고 중국 고래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중략) 5층으로 기공에 임박해 법사는 친히 삼태기를 들고 벽돌을 운반했다. 2년 걸려 탑이 완성됐다.”
대안탑은 652년 본래 5층으로 조성됐다. 현장스님이 인도에서 갖고 온 불상과 경전 등이 이 탑에 안치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훼손되자 701년 7층으로 개축됐다. 오대, 송, 명, 청대 중수됐다. 대안탑에 올랐다.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서안 시내가 달라보였다. 7층에 올라 서안 시내를 일별했다.
자은사 앞에 만들어진 큰 길을 따라 아스라이 사라지는 길을 바라보며 현장스님의 구도행을 생각했다. 얼마나 힘든 길이었을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간 법현스님이 남긴〈불국기〉한 구절이 되살아났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해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도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를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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