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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정필도목사/믿음과 행위 (약 2:17-26)
제가 어려서 살았던 동네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이 연못 주변에 모여 재미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동네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무슨 일인가 하여 가까이 가보았더니, 한 어린 남자아이가 마치 잠을 자듯이 반듯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으나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무리 몸이 멀쩡해도 혼이 떠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믿음이 “산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과 20절을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증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 믿음의 증거가 그 사람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말로는 믿음이 있다 해도 믿음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본문 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할 뿐만 아니라 행하는 만큼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라고 강조했습니다(약 1:22).
영국의 헨리 브래컨베리 경이 파리의 육군무관으로 있었을 때에 한번은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가인 레온 갬베타와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갬베타 씨는 “요즘에 군인이 알아야 할 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즉 행군하는 방법과 총을 잘 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영국 귀족은 “각하, 실례지만 각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갬베타 씨가 다시 물었을 때 그는 “군인은 복종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군인은 행군도 잘해야 하고 총 쏘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위험한 군인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강한 군대가 되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라면 기독교에 대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백전 백승의 강한 군대가 될 줄 믿습니다.
빌리 선데이라는 소년이 목사님을 찾아가 “목사님,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하루에 한 시간만 내가 가르쳐준 대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소년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하루에 한 시간을 못하겠습니까?”하고 답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에 15분씩 기도하고 15분씩 성경을 묵상하게. 그리고 15분씩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15분씩 사랑을 실천하게. 그러면 자네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일세.”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주었습니다. 빌리는 목사님의 교훈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후에 하나님이 쓰시는 훌륭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이 사람이 되려면 교육을 통해 똑바로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는 대로 실천에 옮기는 훈련이 동반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해질 때까지 교육과 훈련이 반복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마치 배의 양쪽에 있는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한쪽 노만 저으면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배의 양쪽 노를 함께 저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도 같이 가야 합니다. 믿음 없는 행위나 행함 없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믿음만큼 행하고 행하는 만큼 믿음이 있어야 온전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두 명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믿음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평하거나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번제할 나무를 취하여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올라갑니다. 이때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며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준비하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들을 안심시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곳에 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하늘로부터 아브라함을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창 22:12).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증거는?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인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과연 자신의 믿음의 고백대로 그곳에 번제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독자라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보여드렸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을 행함으로 증거한 또 다른 사람으로 라합이라는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나라인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부끄러운 삶을 사는 기생으로 창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이 여인을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합에게서 나타난 믿음의 증거는?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11을 보면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시인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만유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고 또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게 되었으며, 결국 마음으로 믿게 되어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듣는 것이며, 어떤 신앙고백을 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수천 수만 명의 군중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즉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중요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 구세주, 구원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란 뜻으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한 분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참 구원자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10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믿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입으로 늘 시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믿음이 없으면서 입술로만 고백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위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마음속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입술로 당당하게 믿음을 고백하거나 자랑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32~33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로마제국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든지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목 베임을 당하고 사자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며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통곡하고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며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환경 때문에 겉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도 언젠가는 베드로처럼 회개하게 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믿음이 너무 약해서 친구들이나 가족들 앞에서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거듭난 신자는 반드시 회개하고 언젠가는 죽을 각오하고서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호수아 2:9을 보면 기생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여인은 확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의 고백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고 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증언했습니다(약 2:25~26).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보호한다고 해서 당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탄로가 나면 자신과 온 가족이 죽음을 당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행동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에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기생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그 결과 라합과 그녀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태복음 1:5를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구원받은 후 그녀에게 놀라운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비록 과거에는 부끄러운 기생으로 살았으나 구원받은 이후로 얼마나 거룩하게 살았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여인이 되었을까요.
우리 중에도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행위가 완전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부족하고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변화된 성품과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은혜를 충만히 받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오늘날 수영로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부흥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 받은 성도님들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성품과 인격과 삶이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 속에 날마다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날마다 믿음이 성장하여 믿음과 행함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