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죽당공 9세손이며 조선말 서부경남에서 유명했던 한학자 수당공(修堂公) 최경병(崔瓊秉)과 모산공 후손 및 하동 유림들이 경현당유계(景賢堂儒契)를 조직하여 1903년(고종 40) 경현당을 다시 건립하고 인천서원(仁川書院) 현판을 옮겨 걸었다.
하지만 경현당 만으로는 서원으로서 요건을 갖출 수 없는 상태에서 교육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1960년 유림 및 후손들의 결의로 경인사(景仁祠)를 새로 지어 정재공, 모산공, 죽당공, 주담공 4위의 위패를 봉안함으로 인하여 전학후묘의 서원으로서 요건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21일에 향사를 지낸다.
인천서원에는 정재공과 모산공도 배향되어 있지만, 처음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도 죽당공 후손이고, 지금까지 운영 주체 역시 죽당공 후손이다.
경현당에는 죽당공 교지 3건, 분재기 1건, <죽당최선생실기(竹塘崔先生實紀)> 및 목판 일부, 주담 김성운의 문집인 <주담집(珠潭集)>을 소장하고 있다. 분재기는 후손에게 재산을 분배한 문서로, 조선 후기의 상속 관행 등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죽당최탁선생실기(竹塘崔濯先生實記)>라는 책으로, 문성공서울종친회 최규용씨가 준 것이다.
이 책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뒤에 원문 영인이 붙어 있다.
학자들은 대개 아무개실기라는 책을 접하면 아예 읽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제목은 실기 이지만 내용이 황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如水도 아무개실기라는 책은 반드시 여타 문헌과 비교 검토한 다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다.
여기에서도 <죽당최탁선생실기>는 참고만 하기로 하겠다.
죽당공은 1598년(선조 31) 4월 11일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태안 군수 최기변(崔琦抃)과 어머니 용궁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33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앞서 구인정유허비에서 도장 끈을 정자나무에 걸었다는 9분 중 한 분이다.
무과방목에는
인조 8년(1630) 경오식년시 을과 5위(8/28)
승의랑 최탁(崔濯) 자 : 극수(克修) 호 : 죽당(竹塘)
생년 : 1598년(선조 31) 졸년 : 1645년(인조 23)
본관 : 전주(全州) 거주지 : 진주(晉州)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심.
아버지 : 최기변(崔琦抃) 통훈대부 행 태안 군수.
형 : 최호(崔滬)
무과 급제자는 비록 급제했다 하더라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벼슬에 나간다 하더라도 문과 급제자처럼 빠른 승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죽당공은 승진이 문과 급제자에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빠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죽당최선생실기 죽당최선생행장(정종로)에는
1633년(인조 11) 특별히 선전관 겸 비국랑에 임명되었고, 1635년(인조 13) 형조 좌랑으로 옮겨졌고, 조금 있다가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癸酉特拜宣傳官兼備局郞乙亥遷刑曹佐郞尋拜監察不就
1630년(인조 8) 무과에 급제, 3년 만에 선전관, 비국랑(6품)이 되었으니 매우 빠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비국랑은 형조 좌랑과 같은 6품관이어서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임이 <승정원일기>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1635) 6월 29일
정언 이시만이 와서 아뢰기를
육조 낭관의 직임은 몹시 중대하니 사람마다 함부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형조 좌랑 최탁은 이력도 없고 명성도 없는 데다 겨우 6품으로 오르자마자 바로 낭관에 제수되었으니 관방이 어지럽혀지고 정사의 체모가 온당치 못합니다.
<죽당공행장>에서는 형조 좌랑에 올랐다고 적혀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오르자마자 체직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런 경우 대개 형조 좌랑을 역임했다고 기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관례이고, 또 비록 형조 좌랑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벼슬에는 올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죽당공은 훗날 다시 형조 좌랑에 임명 되었고, 그 때 받은 교지가 전해오고 있으므로, 먼저 발령 받은 것과, 뒤에 발령 받은 것 사이에 혼동의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뒤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병자호란 이전에 마지막으로 오른 벼슬에 관한 논란이 있는데, 같은 병조 좌랑에 병자호란 이전에 한 번, 이후에 또 한 번 두 번 발령을 받았으므로, 자칫 혼선을 빗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교지 최탁을 조산대부로 삼아 광양 현감으로 임명한다. 숭정 9년(1636) 2월 11일
敎旨 崔濯爲朝散大夫行光陽縣監者 崇禎九年二月十一日
무과 급제 3년 만에 종6품 비국랑이 되고, 2년 만에 정6품 형조 좌랑이 되고 이듬해 종4품 상 조산대부 광양 현감이 되었으니 이 같은 고속 승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교지 원본이 없거나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없고 오직 <죽당최선생실기>에만 기록되어 있다면, 사실이 아니라고 배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지 원본이 엄연하게 전해오고 있고, <승정원일기>에도 뚜렷하게 적혀 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어떤 이유로 이같이 빠른 승진이 가능했는지에 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