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그래도 아쉬운 것은......
1.
웃음 속에 감추어진 자본주의의 추악한 욕망, 그 추악한 욕망을 뒤늦게 깨닫고 강하게 저항하는 소수의 인간들, 그리고 점차 공감하는 다수의 인간들, 그러나 저항은 연약했던 소수의 인간들의 분노 섞인 강인한 의지와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지속되는 것, 한때는 참신한 구조였으나 지금은 다소 진부하다. 특히 그 결말이 행복해질 때는 다소 싱거워지기도 한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그리고 옥자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 영화는 위와 같은 틀을 기본으로 한다. 그럼에도 상투적으로 여겨지지 않고, 뭔가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을 겸비한 연출 능력 때문이다. 옥자 또한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 능력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2.
자본주의의 추악한 욕망, 그것은 소수 자본가들만의 문제일까?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추악해질 수 있는)자본주의적 욕망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 옥자에서 보이는 부패한 자본주의의 잘못된 행태는 부패한 자본주의이기 이전에 자본주의의 또 다른 속성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속성, 이것은 소수 특정 자본가만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내재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추악한 욕망으로 인한 문제를 인간 개개인의 착한 본성을 믿고 그것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타당한가?
공감과 소통은 사회변혁의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다. 공감해야 소통하기 쉬우니 공감은 소통의 중요한 전제이다. 공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공감한다가 아니라 어떤 공감을 하느냐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본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추악한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법적 제도적 장치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을 위한 노력이다.
3.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이것이 부족하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라는 것도 먼저 사회 구성원들끼리의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도 선한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이런 사회 구성원끼리의 공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약자(또는 피해자)인 주인공이 가족애든, 생존본능이든 이런 것들이 원동력이 된 강한 의지로 잘못된 것들에 저항해왔을 뿐이다.
영화 옥자에서 공감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그 공감은 구성원 전체의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부패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 또는 소수 집단의 저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옥자가 부패한 자본주의의 추악한 욕망을 파헤친다는 거대한 담론에 비해 그 결론이 단순하고 쉽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