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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산(雲門山) 줄기가 서남(西南)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곳에 우뚝하게 되솟은 소천봉(小天峯)을 중심으로 그 북쪽 오지에는 신곡(新谷), 매화(梅花) 두 동리(洞里)가 자리 잡았고, 남 (南)쪽에는 도곡리(道谷里), 서쪽으로는 고정리(高亭里)라는 산중(山中) 분지(盆地)를 형성(形成)하였다. 그리고 소천봉(小天峯)에서 다시 서남(西南)쪽으로 산자락이 흘러내려 낙하산(落霞山)과 보두산(步斗山)이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서편으로는 금산리(金山里), 남쪽으로는 가곡리(佳谷里) 등 역사 깊은 동리(洞里)가 자리 잡고 있다. 금산(金山), 가곡(佳谷) 두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너머에는 동창천(東倉川)과 청도천(淸道川)의 물을 함께 모운 북천수(北川水)가 남북(南北)으로 길게 흘러 이 면(面)의 젖줄이 되어 있다. 응천강(凝川江) 상류(上流)에 해당하는 북천수(北川水) 건너에 자리 잡은 안인리(安仁里)는 옥교산(玉轎山)을 서쪽으로 등지고 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옥산리(玉山里)는 험준한 철마산(鐵馬山)을 배경으로 유천(楡川) 앞으로 마을이 열려 있다.
이 면(面)의 동쪽 경계는 용암봉(龍岩峰)을 사이에 두고 산내면(山內面) 용전리(龍田里)와 인접(隣接)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옥교산(玉轎山)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부북면(府北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중산(中山), 낙하산(落霞山), 비학산(飛鶴山) 등의 릉선(稜線)을 경계로 하여 산외면(山外面)과 이웃해 있고, 북쪽에는 운문산(雲門山)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慶北 淸道郡)과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비록 사방(四方)으로 첩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나 이 지대(地帶)의 젖줄이라 할 운문천(雲門川)과 북천수(北川水)를 중심으로 그 언저리에는 들마들(大栗坪), 원아랫들(院下坪), 밤갯들(栗浦坪), 중섬들(中島坪), 빈지들(빈地坪), 신안들(新安坪)과 같은 기름진 들판이 군데군데 전개(展開)되어 산 좋고 물이 맑아 인심(人心) 좋은 고장으로 평판이 높은 곳이다.
상동면(上東面)이란 이름은 이조 초기 밀양도호부 시대 이래(李朝 初期 密陽都護府 時代 以來) 줄곧 변함없이 사용되어 온 것으로 그 위치가 북동쪽(上東)이라 한데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이는 부(府)의 정동(正東)쪽을 중동면(中東面)으로,남동쪽을 하동면(下東面)으로 이름 지은 것과 대비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884년(고종(高宗)21)에 행정 구역 정비시(行政 區域 整備時)에도 그대로 상동면(上東面)이라 했으며, 면사무소를 고답리(高踏里)에 두었는데, 1912년에 이르러 사지(沙旨)(사포동(沙浦洞))를 경북 청도군(慶北 淸道郡)으로 넘겨주는 대신 청도군(淸道郡)에 속했던 대율포(大栗浦)(용운동(龍雲洞))를 편입하여 행정 구역을 재편하였다. 1930년에는 면사무소를 고답(高踏)에서 옥산리(玉山里)로 옮겨왔으며, 해방후(解放後) 1948년에 다시 금산리(金山里)로 이전(移轉)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나타나 있는 상동면(上東面)의 방리(坊里)를 보면 평릉리(平陵里), 가곡(佳谷), 신원(新院), 구칠(仇漆), 금곡(金谷), 유천(楡川), 분항(盆項), 고답(高踏), 사지(沙旨), 오곡(烏谷) 등의 지명(地名)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지금 이 면(面)에 소속된 마을이며,그 후 청도군(淸道郡)과의 경계 조정시(調整時) 일부(一部) 마을이 넘어가고 편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또 상동면(上東面)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운문천(雲門川)을 사이에 두고 경북(慶北)과의 도계(道界)를 이루어 온 만큼 그 지리(地理)와 력사상(歷史上) 특수한 유적(遺跡)과 고담(古談)도 많은 곳이다. 고대(古代) 이서국(伊西國) 접경지로서 마전암(馬轉岩)에 얽힌 고사(古事)를 비롯하여 평릉부곡지(平陵部曲址), 철마산성지(鐵馬山城址), 경락암(經絡岩), 밀암(蜜岩), 박연정(博淵亭)이 있는가 하면 삼남대로(三南大路)에 이르는 유일한 요충지로서 금곡원(金谷院), 신원(新院), 분항봉수대(盆項烽燧臺), 유천관(楡川館)과 같은 교통 통신(交通 通信)의 유적지도 있다. 현재 면내(面內)에는 8개의 법정리(法定里)와 31개의 자연 부락(自然 部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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