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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4장 34-36절
육신의 치료를 통해 알리시는 것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사건을 언급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만 하더라도 8장과 9장에서 치유 사건을 언급하고 있으며, 12장 그리고 14장에서 몇몇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14장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략하게 치유 사건과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금 말씀드리자면, 우선 치유 사역의 경우 치유 사역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마14:33)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기적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을 기록한 것은 구약에서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 취급이 되었는데 그런 부정한 자로 하여금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시고 난 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통하여서는 죄에 대하여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이요,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통해서는 죽음을 정복하고 악한 마귀의 권세도 정복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적의 역사를 통해 기적이 주목되기 보다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외에도 치유 사건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실상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방금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말해 본다면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예수님은 부정한 자를 정결하게 하신다고 할 때 실상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자와 같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귀신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귀신의 권세,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 자체는 육신의 문제로 있지만 성경에서 이런 사건들을 기록한 것은 실상 우리의 영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는 한 마디로 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치료하시면서도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기도 하시느냐 하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그에게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그런 외적인 표를 통해 알리기도 하시는 내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고(마9:13),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저들의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까지 고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씀하시는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마8:17). 물론 이사야가 예언할 때 그 전체적인 맥락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을 읽어드리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고, 그런 고난을 통해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화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낫게 된다는 그런 의미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마치 육체적인 것이 나음을 받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육체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나음을 통해 실상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만나를 먹이시지만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을 알린 것처럼 예수님 역시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듯 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가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구절을 통하여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고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정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문제를 고치고자 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한시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육체의 문제를 고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할 때 단지 치유 사역만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복음에 관한 말씀을 분명 하셨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해서 살필 때 마태복음의 경우 병자를 고치주신 것만 말했다면(마14:14) 마가복음에서는 가르쳤다는 말씀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막6:34). 그리고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가르침과 고치심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데(눅9:11), 혹 같은 내용을 말하는 다른 복음서가 가르치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고 할 때는 결코 말씀이 제외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본문을 살펴보자면, 우선 34절을 보시면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어디로 가고자 했는가 하면 벳새다라는 곳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지난번에 살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이후 제자들을 속히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는데, 마가복음에 의하면 건너편 벳새다라는 곳으로 보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막6:45 참조). 그러나 풍랑으로 인하여 벳새다가 아닌 게네사렛이라는 곳으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게네사렛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5절을 보시면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전에 이곳에 오신 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이곳에 오셨을 때 병든 자들을 고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고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자세하기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6장 55절에 의하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알고 병든 자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그들 스스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을 그들의 가족이나 혹은 친구나 되는 사람이 침상 째로 데리고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 9장을 통해 이미 비슷한 사건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마9:1-8). 그리고 그 본문을 통하여 믿음에 대하여 그리고 죄 사함에 대하여 살핀 적이 있었는데, 핵심은 믿음을 보시고 병을 치료해 주신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그들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질병을 치료하러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서 죄를 사해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말씀하셨지만, 믿음이 그들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 사함 역시 그들에게 어떤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러 왔는데 죄사함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목적이 질병 자체를 치료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가? 마태복음 9장 6절을 보시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사건 자체는 질병을 치료하는 사건으로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다르지 않는 내용을 요약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게네사렛에 도착하였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곳 사람들이 그 근방에 알려서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온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들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든 아니면 친구든 간에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께로 데려 오고자 하는 열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가복음을 통해서는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자를 고치기 위해 침상을 들고 온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열심이 특심이라 할지라도 그런 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홀로 자존하시며 어디에 매여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일하실 뿐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마치 인간의 열심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원인이 있어야지만 그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뭔가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삼상2:30).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매여 계시는 분이시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근원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뭔가를 먼저 행한 것은 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먼저 존중히 여긴 자가 있는가 했을 때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을 멸시하였을 뿐입니다. 때문에 이런 원리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경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고자 작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통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존중히 여길 자를 존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멸시하는 자들, 그러나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먼저 존중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땅에서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나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된 자들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존중히 여길 자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내가 너희를 존중히 여기고 있는데, 너희도 존중히 여겨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서 말씀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혹은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로부터 경멸을 받는 것 외에는 없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경고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향해서는 이런 말씀이 더더욱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음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열심이 근거가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외형으로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가려놓았을 뿐, 가려놓았다고 해서 그것을 잊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열심을 부추기며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들의 열심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 열심 때문에 주님께서 일하신다고 보면 안 되고, 그때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 거기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열심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이란 곳에 도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목적지는 어디였는가? 벳새다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풍랑을 통해 가게 된 곳은 어디냐? 게네사렛 땅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연처럼 보이고,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본래 뜻은 벳새다가 아니라 게네사렛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뜻은 결코 변함이 없었고,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로 있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경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실은 뭔가? 하나님께 먼저 드린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받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바울로 로마서를 통해 말한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3-5)가 진실이요, 진리로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린다면 여기서도 병을 고치시지만 주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알리신 것처럼 궁극적인 목적은 병 자체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보면 오늘날도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 가운데 한 부류로서 은사주의자들이 있고, 그들 안에 보면 치유 사역을 하는 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부 성도라 일컫는 자들은 그런 자들에게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는데, 기적은 기적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기적을 보이시느냐?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자라 말씀하시지만 인자라고만 말씀하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기적의 모든 역사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섬기기 위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4장 3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여기 보면 두 사도라고 나와 있지만 원문에는 ‘두 사도’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단지 머물렀다, 거주하였다는 단어가 3인칭으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1절도 보시면 ‘두 사도’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3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경우 사도로 칭해졌지만 바나바의 경우 사도로 부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오랜 시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어떤 역사를 펼치셨는가?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셔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는가? 은혜의 말씀을 위해서란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 없는 기적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적 역시 말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심지어 말씀 없이 기적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사단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살후2:9-10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을 통해 어떤 말씀도 하셨는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더불어 기적의 역사는 말씀이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비상시대에 말씀을 섬기도록 주신 것이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에게 주신 이상 더 이상 기적의 역사는 없다는 것도 잘 정리하셔야 합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없다기보다는 성경 계시와 관련된 기적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것처럼 거기에 우리 마음을 둘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으로 오셨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많은 병자들은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6절인데, 여기 보면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도 우리는 마태복음 9장에서 살핀 적이 있는데(마9:20-22), 그때는 예수님의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와서 그 겉옷을 만졌는데, 그 마음에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해 주십사 간구하고서 만졌습니다.
일단 마태복음 9장의 경우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인의 생각과 행동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을 행하는 자에게서 능력이 나오기 위해서는 능력을 행하는 자가 줘야 가능한데, 지금 이 여인은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어떤 면에서는 미신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굳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만큼 예수님만이 자기 자신의 마지막 소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미신적인 생각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인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능하다고 할 만한 의사를 찾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혈루증의 경우 좋아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상태가 그대로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라고는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의 소문이 들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또 자기 병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기에, 옷이라도 만져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기를 숨긴 채 예수님께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옷이라도 만지면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서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마지막 소망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그 마음이 비록 미신적이긴 하였으나 겉옷이라도 만져보자는 마음으로 주님께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어떠한가?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미신적이라고 보지 않고 이것을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읽어드리면 “어떤 이들은 그들이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한 것은 그들 가운데 퍼져 있었던 어떤 미신을 근거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보고, 도리어 내게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였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들린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충만한 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그에게서 능력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믿음보다는 미신에 가깝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믿음보다는 미신에 가깝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나아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주어져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서 인식하였을 뿐이라는 차원에서 나아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서 말씀만이 아니라 능력도 행하시는 분으로서 인식하고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믿음이 구원과 관련된 믿음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적에 대한 믿음이 구원과 관련된 믿음이냐?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해 주시도록 간청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요청이라기보다는 다소 미신적인 것이 들어가 있는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그 방식에 있어 미신적이요, 그런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미신적인 요청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미신적인 요청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 때문에 우리 역시 미신적인 요청을 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요청하는 것에 대하여 다 허락해 주신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옷자락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능력은 어디 있는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지 능력이 나가는 것이지 예수님의 뜻 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뜻 없이 능력이 나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몰래 와서 손을 댄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 자체로 보면 마치 주님이 모르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상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기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성물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가톨릭 측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을 거룩한 것으로 구별해서 거기에 마치 어떤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역시 할례를 받으셨는데, 할례 시 베어낸 포피가 500년이나 발견되지 않다가 이후 발견되어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도 그가 죽은 지 7, 8백년이나 지난 이후에 발견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가톨릭 안에 얼마나 많은 성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것만 하더라도 그가 쓰신 가시면류관, 그리고 그가 입었던 홍포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거기다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관련된 성물, 그리고 소위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의 성물까지 굉장히 많은 성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소재의 영화 혹은 미국드라마의 내용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굉장히 미신적입니다.
칼빈은 이런 성물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이러한 성해들을 갖는다는 것이 거의 유익하지 않거나 온전히 쓸데없고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이며, 오히려 점점 우상숭배로 기울어지지 않기가 매우 어렵거나 아니면 아주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한 존경 없이 그것들을 바라보거나 다루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들을 존경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존경을 즉시 그것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앞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한다면, 성해를 갖으려는 탐욕은 거의 미신에 불과하며, 더 심하게 말하면, 그것은 늘 상 동반하는 우상숭배의 모체다.”고 말합니다(칼뱅 작품 선집 3권, 성해론, p.262).
그럼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명확하게 이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의 옷을 만지는 것에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결부시킨 데에는 약간의 미신이 섞인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신앙의 불을 꺼버리시지 않고 그들의 천진성에다 자신을 적응시키셨다.” 쉽게 말하면 그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셨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를 향한 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참으시고 참으시는 모습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셨다는 것 때문에 지금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톨릭의 모습을 열어놓는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덧붙어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자신들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무 조각이나 못이나 의복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구실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말씀을 정리하기에 앞서 오늘 본문과 관련해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분명 치유 사건이 구원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고, 또 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해 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그렇게 손 댄 모든 자들이 나았다는 것을 통해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 치유 사건을 통해 영적인 병을 치료하실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치료 받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죄 사함을 받았는가?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눅17:19). 앞에서 사도행전 14장 3절을 인용했는데 4절에서도 이런 증거가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읽어드리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표적과 기사를 행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아니라 여전히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기적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이 지역과 더불어 그 근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알려졌다는 것이고, 이런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한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는 고향에서조차 배척을 받으셨을 때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였지만, 혹 능력을 많이 행한다는 것이 곧 그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분명 치유 사건을 소개하고 있고 또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있는 그것보다 치유 사건이 더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치유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육체의 구원이 아니라 그들 영혼의 구원이 일차적인 목적으로 있는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본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저 육신의 질병만 해결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면 주님께 나아온다 한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누가 유익을 받았는지, 누가 유익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고 있지 않지만 분명 그들 모두가 유익을 받은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주께서 목적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에 있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교훈도 동일합니다. 떡을 주시지 않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떡을 먹이시면서 그런 교훈을 하신다는 겁니다. 육체를 치료하지 않고 영혼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시면서 영혼의 문제를 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경 시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우리 마음에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정리하시고, 주의 뜻을 따라 말씀으로 사는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