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티스 한 벌
권 순 경
스타티스 한 다발을 샀다. 사천 원이었다. 붉은 보랏빛 꽃은 종이 같은 질감이 나서 자칫 조화가 아닐까 착각을 한다. 말려두면 두고두고 볼 수 있어 말려볼 요량으로 진한 빛깔을 골랐다. 공연히 꽃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우쭐해지고 향기도 별로 없는데 꽃향기에 흠뻑 취하는 같다. 늘 지나다니면서 아주 가끔씩 장미 한 다발을 사거나 소국이나 물망초를 사 올 때도 있지만 대게는 그냥 구경만 한다. 내게 선물을 줄만큼 잘 보낸 날이 별로 없었던가.
같이 간 동네 동생뻘 되는 아줌마 둘이 티셔츠를 사겠다며 옷가게에 들른다. 나는 살 것도 없었지만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들러리를 하고 있다. 마침 단골 가게라며 반색을 하는 주인과 인사를 하고 들어섰다. 그녀들은 열심히 옷을 고르고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고 쇼핑에 열을 올린다. 나는 멀찌감치 앉아서 구경을 하며 흥정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옷이나 신발이나 가방 따위에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입고 갈 때도 없다면서 푸념을 하고 입어도 어울리는 것이 없다며 투덜거리기만 한다. 진심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입고 갈 때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며 나이 탓을 하고 있지나 않는가. 내게 어울리는 것은 많지만 쉽게 찾아내지 못하고 아무렇게나로 퉁치며 쉽게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수도 없이 입었다 벗었다 하며 자신을 돋보여줄 옷을 고르는 그녀들이 왠지 좋아 보인다. 아직도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주어진 삶의 밭갈이를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거 예쁘네.”
내가 한마디 하기 무섭게 주인은 얼른 옷을 입힌다. 그리고는 너무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젊어 보인다고 격한 아부성 멘트를 쏟아낸다. 옆에서 부추기고 있으니 솔깃해지고 점점 사실처럼 뇌가 동화되어 간다. 하지만 이걸 입고 어디를 갈까, 내 나이가 얼만데 이 차림새는 좀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나비처럼 나폴거리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멈추어 버린다.
“길이가 너무 짧아. 목둘레가 너무 넓게 파였네.”
스타티스 꽃들이 일제히 노려본다. 꽁무니를 빼며 입어보았던 옷들을 슬그머니 벗어 놓는다. 내 삶의 밭을 가꾸는 것에 흥미를 잃은 것인지 나잇값을 계산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물러서고만 있다.
내가 서른, 마흔 즈음 엄마가 자꾸만 ‘괜찮다’고만 하며 삶의 무대에서 내려서려고만 할 때 안타까웠다. 막춤이라도 추던지 뽕짝이라도 부르던지 자신에게 주어진 무대에서 활개 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때 엄마 나이의 지금 내게 펼쳐진 무대가 너무 높고 넓어서 만만하지가 않다. 하이힐을 벗고 굽이 없는 플렛슈즈로 바꿔 신는 것처럼 편하게 안주하기를 바랄 뿐이다. 땀을 흘리며 밭갈이를 하기에는 남은 해가 짧아서 밭만 어지럽혀 놓을 것 같다.
풀죽은 꽃다발을 챙기며 슬쩍 건너다보니 신이 난 그녀들이 옷 보따리를 흔들며 물건 값을 셈하고 있다.
“많이 깎아 준 거예요. 육십이만 원.”
“그리고 이 언니는 십육만 원.”
나는 소리 없이 놀라고 있다. 행여 소리 내어 ‘뭐라고?’ 했다가는 주눅 들어 보일까봐 바삭바삭 소리 나는 스타티스를 쓰다듬으며 태연한 척 한다. 가게 주인은 기분이 좋아 따라 간 내게까지도 티셔츠 한 장씩을 선물하며 몸놀림이 경쾌하다. 각자 저마다의 삶을 제 방식대로 열심히 경작하고 있다.
스타티스를 화병에다 꽂았다. 나도 사천 원짜리 보랏빛 옷 한 벌을 환하게 입었다. 보랏빛 꽃잎들이 가슴에서, 옆구리와 종아리에서 부산스럽게 피어나며 바삭바삭 하늘을 반쯤 가로질러 날아간다. 잠깐 멈추었던 머릿속의 내가 다시 나비처럼 나폴거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