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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햄릿과 가룟유다>의 줄거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고뇌에 찬 햄릿이 던지는 이 질문의 자리에 가롯유다가 함께 서있습니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한, 반드시 이 질문의 지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우회로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그 답에 따라 성령께서 임재하실지 아니면 사단이 안으로 들어올지가 결정 됩니다.
햄릿과 가룟유다
(눅22:1-6)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햄릿과 가룟유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햄릿과 가롯유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섹스피어의 햄릿이라고 하는 작품에 나오는 이 명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런데 햄릿이라고 하는 그 작품 속에서 어떤 배경과 어떤 대목에서 햄릿이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됩니까?
이게 중요한 것은, 정말 섹스피어가 무슨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모든 신앙인에게는 이 질문의 지점이 반드시 통과 되어져야만 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룟 유다가 앞서서 2000년 전에, 물론 섹스피어는 1600년대 사람입니다마는, 바로 이 지점을 햄릿보다 앞서서 통과한 것입니다.
이 질문의 지점을 통과하면서 답을 내고 인생을 다음 단계로 발전을 시켜 간 것이에요.
자, 그러면 햄릿이 어떨 때 이 질문을 하게 됩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인데, 덴마크의 왕인 부왕이 죽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어머니가 새롭게 왕이 된 숙부, 자기 삼촌이 왕이 됐는데 그 숙부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대사 들어보셨지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인가’
이게 바로 햄릿에 나오는 대사에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인가’
어머니를 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시신을 따라가서 매장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숙부와 결혼을 할 수가 있느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인가’
자, 이렇게 결혼했는데,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동생인, 지금의 왕, 햄릿에게 삼촌인 그 왕에게 독살 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듣고, 햄릿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 충격과 그 분노로 복수를 해야 되는데, 복수를 부탁하는 아버지의 유령의 말을 듣고 복수를 해야 되는데, 이미 왕이 되어 버렸고 싫으나 좋으나 자기 어머니의 남편이 되었고, 말하자면 자기의 새 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힘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 어떻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며 복수를 해 나갈 것입니까?
여기서 햄릿이 고민하게 됩니다.
이때 한말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라는 얘기에요.
너~무 가혹한 운명의 상황을 앞두고, 이 상황을 헤쳐가면서 복수를 이루고, 모든 상황을 제자리로 돌려놓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고 자기 자신이 무력하고 상황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버릴까를 생각합니다.
‘죽는다는 게 뭐 별거냐? 죽는다는 것은 오직 잠자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원한 잠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고, 그렇게 볼 때는 오히려 죽음이라는 게 인생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모~든 인생의 노력과 수고를 다 들여서 쟁취해야 될 인생의 정점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합니다.
근데 갑자기 멈칫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충격을 받고 이런 분노에 사로잡혀서 이런 번뇌하고 있는 상태로 죽어서, 영원한 잠에 빠져들 때에 꿈을 꾸게 될 텐데(잠에 빠져드니까), 그 꿈속에서 과연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가?
평화롭고, 평강의 꿈이 꾸어지겠습니까?
이래서 죽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한말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살아서 복수를 할 것이냐, 아니면 이 가혹한 운명에 상황을 피해서 죽을 것이냐, 죽는 게 좋을 텐데, 편할 텐데, 죽었을 때 꿀 꿈을 생각하니까, 그 꿈속에서 지금의 번뇌가 반복된다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고민하다가 결국은 ‘To be’ 살기로 결정하고,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복수를 다짐하며 살기로 결정한 이 결정 이후의 순간은 햄릿에겐 지옥이었습니다.
숙부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점이 알려질까 봐 일부러 위장된 미친 사람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애인 ‘오필리아’와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오필리아의 아버지가 그 궁정의 집사였는데 커튼 뒤에 있는 것을 숙부로 오해해 가지고 칼로 찍어 죽입니다.
애인과 의절하고, 아버지가 죽은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충격을 받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숙부인 클로디우스 왕이 이제 햄릿을 죽이려,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오투스, 아버지도 죽이고 자기 동생도 죽게 한 햄릿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데, 결투장을 만듭니다.
거기에 독주를 갖다 놓는데 어머니가 그 독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햄릿자신은 레오투스의 독이 묻은 칼에 맞아 죽게 되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왕을 찔러 죽이며 복수를 하게 됩니다.
모두 다섯 명이 다 죽어요, 햄릿 주변에 완전히 초토화가 돼 버린 거예요.
살기로 결정한 결과가 이렇게 돼 버리고 마는 겁니다.
자, 가롯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궁금하지요, 여러분?
어느 때 사탄이 들어올까? 어느 때 사람 속에 사탄이 들어갈까?
바로 ‘To be or not to be’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나면 결정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서 ‘To be’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사탄이 들어가는 것이고 ‘Not to be’ 쪽, 죽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성령이 임재하시는 겁니다.
자, 이 질문의 시점을 가롯 유다의 입장에서 한번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가롯 유다는, 정확하게 봅니다.
예수님에게 전~혀, 지금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변화와 어떠한 개선도 일으키시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12제자가, 그 쭉~ 내려가다 보면 24절에, 예수님께서 내일이면 잡히고 재판 받으시고 돌아가실 텐데 그 바로 직전에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다시 벌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지금 오리무중이에요.
예수님께서 향하여 가시는 이 길의 마지막 지점을 전혀 못보고 있는 반면에, 가롯 유다는 정확하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 경제파탄에 있는 이 민중들을 위해서, 이 상황을 바꾸고 개선하고 정복하고 승리할 아~무런 의지가 없는 자이고, 오히려 이대로 나가다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끝이 날것이라는 것을 가롯 유다가 정확하고 확신 있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고민합니다, ‘To be or not to be’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얹혀 져서 같이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이 삶의 현실에 남아 있으려면 그래서 조국의 통일을 시도하고 삶의 개선을 시도하고 더 나아지는 생활을 이루기 위해서는, ‘To be’ 하기 위해서는, 예수와 관계를 끊어야 됩니다.
예수와 계속 같이 동행한다는 것은 ‘Not to be’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 세상에서 내 삶을 개선하고 성공으로 이끌고 형통의 삶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 세상에 남아 있기로 결정할 때 사탄이 들어옵니다.
이 사탄이 우리에게, 사람에게 들어가는 시점이에요, 바로.
여러분, 햄릿과 가롯 유다가 다른점이 있다 그러면, 햄릿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를 못합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요, 의구심과 두려움과 의심에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의 ‘Not to be’의 길은, 예수님께 얹혀 진 죽음이에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에게는 이 햄릿이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지점을, 가롯 유다가 결정을 하고 답을 내린 이 지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아직 제자들은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어요.
절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의 삶을 위하여 전혀 필요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무짝에도 예수님이 쓸모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에서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분입니다.
이걸 유다가 깨달은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아직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리고 결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세상의 삶에 쓸모없는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 밖으로 빠져나갈 것인지,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형통하게 이끌어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빠져나가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이 ‘To be’ 하지 않게 ‘not to be’ 하게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에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필요하신 분입니다.
적어도, 내가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아직도 책임을 지고 있고 주체가 되어서, 이것저것 주체가 되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특징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 증거가 뭡니까?
내가 아직도 이 세상의 삶에서 작던 크던, 사소하던 중요하던 소원을 갖게 됩니다, 바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요게 요렇게 되면 좋겠다, 저거는 안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직도 나는 내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주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삶에 대해서 주체가 되어 있는 한, 예수님은 내가 바라는 대로 무엇을 해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시라는 사실을 가롯 유다는 깨달은 겁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오리무중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가롯 유다는 햄릿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계속 따라가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와 끊고 아직도 한이 맺혀 있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계속해서 나의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었고, 가롯 유다는 ‘To be’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햄릿이 번뇌 끝에 아버지의 복수를 해 나갈 것으로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롯 유다가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 결정의 시점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탄이 임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알고 예수님과 의절할 때, 사탄이 임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전의 상태는 어떤 상태냐? 죄에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죄에 묶여있는 상태와 인격적으로 사탄과 연합하는 상태가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된다는 거예요.
무섭지요!
이 지점이 무서운 것은, 어떤 사람도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삶에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 따라서 이 세상 바깥으로 내 마음이 빠져나갈 것인가, 계속 예수님과 의절하고 나는 나대로 이 세상의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되는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이 세상의 삶을, 내가 원하는 소원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는, 이건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뭣도 아닙니다.
그저 그냥 좋게 말하면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자들처럼?
언젠가 가롯 유다의 지점을 깨닫고, 제자들처럼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음이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따라가는 바람에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그런 참 기독교인의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일지언정, 아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마음이 빠져나갈 것으로 ‘Not to be’로 결정을 할 때에, 천국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성령님께서 오시면서, 그 천국의 세상을 내 마음이 느끼도록 해 주시고 그곳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고, 반면에 이 세상에 계속 남아있기로 결정할 때에, 사탄이 들어가서 사탄과 연합하게 됩니다.
성령과 연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과 연합하게 되는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은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이에요.
햄릿처럼, 어머니가 한 달도 안돼서 숙부와 결혼하고, 알고 봤더니 숙부는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의 자리에 앉은 자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무력합니다, 그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런 가혹한 운명을 만난 것처럼, 지금 현재 나의 상황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다.
간단해요 ‘Not to be’ 하는 겁니다.
주님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제로가 되는 거예요, 제로가.
제로원 복음이라 할 때, 제로원이 뭡니까? 이게 바로 ‘To be or to be zero’
여러분 냉장고 스위치 보면, 동그라미가 있고 가운데 ‘1’ 자가 그려져 있잖아요, 사과꼭지 같이 생긴 거, 그게 바로 ‘0’ 와 ‘1’ 입니다.
끌 것이냐? 켤 것이냐?
이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을 ‘on’ 할 것이냐 ‘off’ 할 것이냐.
‘To be on or to be off’ 결정하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을 따라서, 이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갈 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어떤 가혹한 상황이 주어진 상태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로 삼으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햄릿이 ‘To be’ 로 결정할 때, 주변상황 전체가 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카오스로 돼요, 카오스가.
실수로 애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걸 보고 애인이 자살하고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가 먹도록 만든 그 의붓아버지의 독배를 마시고 어머니가 죽어버리고, 자기가 그 복수를 하지마는 자기 자신도 칼에 맞아 죽게 되는, 그런 지옥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살기로 결정하면 할수록.
가롯 유다가 살기로 결정했을 때, 결국은 목매달아 죽게 됩니다.
주님 따라서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어떤 위급한 상황이라도, 어떤 처참한 아니면 어떤 고난에 찬 상황이 주어졌을 지라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나는 주님의 십자가 따라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내 마음을 이 세상에서 빼내어서 아버지께로 가게끔 하려고, 천국을 갖게끔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혹독한 번뇌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황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질서의 세계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일이에요, 전혀 내 일이 아니에요.
내 몸이 간판이라고 해서, 이 간판으로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을 내 일로 채택하지 마세요.
간판을 거신 분의 일입니다.
내 마음은 ‘To be or not to be’ 의 질문의 지점에서 ‘No to be’,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Not to be’의 대답을 마음으로 부여잡고, 십자가까지 주님을 따라가서 세상을 빠져 나가서 하나님을 향해 줄곧 뻗어 나가는 겁니다.
더 이상 우리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햄릿의 답에 갇혀 있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생이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대답 한번 결정함에 따라서,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죽어 주셨고 예비하신 그 죽음에 얹혀 지기만 하면 우리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갈 것이고, 빠져 나간 마음에 성령이 임하여 천국을 갖게 되고, 빠져나간 뒷자리인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질서의 삶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 경이로운 기적의 은총을 오늘하루 충만이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에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필요하신 분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