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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레위 25장)
주님의 기도와 함께 한강성당 2층 대성전에서 강의를 시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얼마 전에 만나신 신자분과의 일화를 들려주셨어요..
한강 성당이 아닌 다른 본당의 신자분이신데, 주일 새벽 미사를 꼭 한강성당에서 하고 등산을 하시던지, 하면서 주일을 보낸다고 하셔서, 신부님께서 "왜 가까운 곳이 아닌 한강성당까지 가세요?" 하고 물었더니,
한강 성당 허석훈 루카 주임 신부님의 강론이 너무너무 좋아서 녹음하여 냉담 중인 딸에게 들려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부님이 굉장히 마음이 좋았다고... 허신부님이 훌륭한 학자이시고, 좋은 본당 신부님이신데 강론까지 그렇게 잘하신다고 하시니 교구 안에서 훌륭한 본당 신부의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기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그렇게 훌륭한 본당에서 하게 될 오늘 강의가 부담이 되어 더 열심히 준비하시고 오셨다고^^
평상시엔 낮부터 준비하실 강의를, 오늘을 위해서 어젯밤부터~~~~ 선의의 경쟁을 위한(^^) 준비를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은 희년에 대해서!
내년이 바로 희년이라고 합니다. 2025년!
일반적으로 희년은 50년 간격으로 있는데,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50년째 한 번씩,
혹시라도 나중에 기회가 돼서 성지 순례를 로마로 가시게 되면 로마의 베드로 성전에 가셔서 중앙문 빼놓고 옆에 있는 문하나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그 문이 항상 닫혀있는데, 희년에는 그 문을 연다고 합니다.
동영상 같은 것을 보면,
희년을 맞이하면서 교황님이 벽에다가 완전히 묻어두었던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여는 예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2000년도 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열쇠로 꺼내 문을 여는 예식을 했던 것을 지금도 동영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50년마다 있었던 희년이 근래에 와서 교황님들이 '그래도 내가 살아있을 때 한 번은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하셨는지, 25년마다 한 번씩 희년을 합니다. 신부님께서도 신자들이 희년이 언제쯤이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2050년이죠!"라고 하시면서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셨는데 요즘엔 25년에 한 번씩 한다! 그동안 최근에 교황님들은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2025년도 희년이 될 것입니다.
희년에는 여러 가지 신약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우선 신부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성경해석으로 희년이 어떤 뿌리를 갖고 있나에 관해서 이야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희년은 히브리어로 요벨이라 읽고, יובל이라 쓰고 그것을 영어권 사람들이 옮길 때 두 가지 방법으로 옮겼는데
영미권 사람들은 yovel,
독일어권 사람들은 jobel인데 어떤 것으로 사용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말 발음으로는 요벨.
그리고 그 요벨이라는 히브리말에서 영어의 jubile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희년이라는 개념으로 알 수 있겠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은 그것과 연관되는 기초 텍스트들이 있는데, 첫 번째 텍스트는
탈출 19,13
(숫양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거든,
백성을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라.
이것은 시나이 계약을 맺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려고 하는데, 백성이(?)
여기서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나옵니다. 탈출기에서 보면 산으로 가서 경계를 치고 그 경계를 백성이 절대 넘어오지 못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고선 또 이 말씀을 하십니다.
"백성을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라." 그런데 어디까지 올라오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소에는 모세와 원로들이 함께하였다. 라는 정도의 그림을 가집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계약을 맺는데 전승이 단일하지 않더라~ 이런 이야기도 있고 저런 이야기도 있더라~
그래서 오늘날에도 탈출기와 신명기에서 계약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들었다.라는 이야기가 신명기에 등장하고,
반면에 그들은 듣지 못했고, 모세가 전달했다. 라는 이야기도 탈출기에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단일하지 않고, 그런 단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수 있어?" 하고 불만을 말할 수도 있지만 오늘 배운 내용을 두 자매님들이 만나서 이야기할 때 똑같을까요? 다를까요?
당장 우리 안에서도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도 신부님께서 주위분들과 자주하시는 말씀 중에서 "기억이 우리를 속인다고...."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고 ㅜㅜ
신부님은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이촌동에서 사셨는데, 그때 사시던 아파트가 아직도 재개발이 안 됐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그곳을 지금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보면은 '내가 살던 곳이 저랬었나?' 생각하는 모습에서, 기억이 우리를 속이는 경험을 하시게 된다는....
따라서 구약이 전하고 있는 시나이 사건의 전승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처지에 차이가 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진 게 아니었을까? 하는 관대한 마음으로 차이나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구약 성경을 기술하는 하나의 정신이에요.
탈출기 혹은 모세오경을 편집한 사람들은 "어? 앞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뒤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네? 앞뒤 얘기가 맞지 않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읽을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는 포탈도 봐야하고 유튜브도 봐야하고 신문, 잡지도 봐야하고 읽을 거리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읽을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 당시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텍스트를 읽어주면, 그들은 그 텍스트를 읽어주는 사람들 소리를 듣고 구약 전체를 외웠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텍스트들은 다 암기하기 쉬운 방식으로 운율울 갖고 있어요. 옛날꺼 외우는 것들이 있잖아요. 📀백두산 ~~~🎶
아직까지도 외워지잖아요. 많은 분들 국민교육헌장 외우시죠? 그게 독재의 도구로 사용되서 그렇지 내용자체는 괜찮은 내용인것 같아요.
이렇듯이 다 암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내용상의 균열 혹은 내용상의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들이 보존한 이유는? 다음 세대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들은대로 다음 세대에게 넘겨줍니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시나이 산에 가서 백성들이 정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 중에 어떤 이야기는 들었다고 하고 어떤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줍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판단하십시오.
이런식으로 똑같은 유다인들의 방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 탈무드라는 책에도 이어집니다. 그 책을 보면 유다의 율법들을 가지고 랍비들이 토론을 해요. 그런데 랍비 A는 그 율법을 이렇게 해석했고, 랍비 B는 율법을 다르게 해석했고, 또 랍비 C도 이렇게 해석했다.라는 랍비들의 토론을 그대로 탈무드에 옮겨놓았어요. 따라서 탈무는 결론이 아니라 이런 토론이 있었어~ 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탈무드를 읽은 사람들은 그와 같이 다양한 랍비들의 의견과 토론을 들으면서 이제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상황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식별해내야 하는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이것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내 다음세대를 잘인도해 주실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한 신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다음세대는 분명히 나보다 더 하느님의 뜻을 더 잘알아 들을 수 있을거야! 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 탈출기 19,13절에서 중요한 것은? “숫양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거든, 백성을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라.” 인데, 숫양뿔로 만든 나팔이죠.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 보시면 그들이 숫양 뿔(영어로는 shofar)을 부는 소리까지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특징적인 나팔은 숫양뿔로 만든 나팔과 민수 10장에서 나오는 "은으로 만든 나팔(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동할 때 사용)"이 있어요. 보다 전통적인 나팔은 숫양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두 번째로는,
여호 6,2 "보아라, 내가 예리코와 그 임금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넘겨 주겠다. 가 더 좋은 번역일 것 같습니다.
3 너희 군사들은 모두 저 성읍 둘레를 하루에 한 번 돌아라. 그렇게 엿새 동안 하는데,
4 사제 일곱 명이 저마다 숫양뿔
나팔을 하나씩 들고 궤 앞에 서라. 이렛날에는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저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
5 숫양 뿔 소리가 길게 울려 그 나팔 소리를 듣게 되거든, 온 백성은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에 백성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올라가거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요르단 강을 건너요. 약속의 땅을 진군해가기 위해서, 그러면서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도시가 예리코입니다. 그런데 예리코가 보통의 도시가 아니라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도시입니다.
왜 성벽이 이중으로 되었냐면? 요르단 강을 건너자 마자 있던 도시이다 보니, 예리코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성벽 하나가 아닌 이중의 성벽 구조입니다. 군사적 목적으로 지워진 도시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도시를 쉽게 정복했어요. 전혀 군사를 쓰지 않고 하루에 한 바퀴씩 돈거에요. 사제 일곱 명이 숫양뿔 나팔을 하나씩 불면서, 그리고 나중에 칠일 째에는 일곱 바퀴를 도는 거에요. 그러면서 숫양뿔을 불고 그리고 백성이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예리코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갈대 바다를 건널 때 하느님과 이집트 군사들의 갈등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야훼가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싸워주신다는 신학이 담겨있습니다. 백성은 그저 야훼를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죠.
이곳에서도 하나의 숫양뿔 나팔,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와 함께 전체적인 백성이 움직이게 되는 이 장면은, 사람들의 상상을 통해서 ~~
신부님께서는 만화책에서 가져온 그림을 보여주셨다고 ^^ 재구성을 하기는 어렵지만 숫양뿔 모양입니다.
숫양뿔에 관해서 우리는 한번은 탈출기에서 시나이 계약을 맺을 때, 또 한 번은 여호수아기에서 예리코를 공격할 때 만날 수 있었어요. 흥미로운 것은 그 예리코가 성경 상에서만 있는 도시인줄 알았더니, 1970년대에 발굴이 되어버려요.
성서 고고학자들이 아마 여기쯤 예리코가 아닐까? 하고 땅을 파서 보니까 정말로 그 도시가 나왔고, 그 도시에 벽돌같은 것에서 불탄 흔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이것은 정말로 성경의 기록이 맞나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다음에 과학적 기술이 발달하면서 탄소 연대측정법으로 탄소의 반감기를 계산해서 연대를 측정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측정해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여호수아의 정복이 대충 이정도 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시간대와 잘 안맞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이 성서고고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숱한 문제들과 같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나중에 성지순례를 가실 때 정말로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가이드에게 예리코라는 곳을 한번 가서 봅시다! 라고 하시면 확인해 볼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25장으로 가게되면 본격적으로 희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위 25,2-7 땅의 샵밭(땅의 샵밭, 샤밭)
샵밭이라는 단어는 명사이고 이 샵밭과 연관된 동사인 샤밭은 "멈춘다"로 야훼께서 여섯째 날까지는 일하시고 일곱 째날인 샵밭(안식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25,8-19 희년(yovel, 50)
25,20-22 땅의 샵밭
따라서 희년과 샵밭은 서로 연관된 개념이고, 샵밭은 일주일의 시간입니다. 즉 안식일의 개념이고, 이 일주일의 시간이 년간 단위로 넘어갔을 때는 안식년이 되어 칠년의 개념으로 넘어가고 그 칠년이 일곱 번 반복되고, 그 다음해는 희년(yovel)이 되는 것입니다. (7x7= 49 에서 +1= 50)
이것이 히브리 사람이 갖고 있는 시간의 구조와 연관이 됩니다.
예를 들어,
파스카와 무교절에서 7주가 지나고 하루를 더해서 50일째가 되면 주간절입니다.
그 주간절(히브리말)을 그리스말로 하면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 오순절을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령강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구약의 파스카와 무교절은 신약의 부활절과 관련이 되고, 구약의 오순절은 신약의 성령강림과 관련이 되는데, 그때 어떤 시간의 이해가 사용되느냐면? 칠일씩 일곱 번 (7x7=49)과 그리고 마무리하는 50일째.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 50일째,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과 반면에 이스라엘의 역사로 돌아가 보면은 이집트를 탈출한 그 시간에서부터 50일째인 오순절이 역사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시나이 계약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50일째 시나이에서 계약을 하느님과 맺은 구약의 사건.
그리고 예수 부활부터 성령강림이라는 사건, 이런 것들이 50일이라는 것에 평행하게 구약과 신약에서 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SABBATH(안식년)
레위 25,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그 땅도 주님의 안식을 지켜야 한다.
25,3 너희는 여섯 해 동안 밭에서 씨를 뿌리고, 여섯 해 동안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25,4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
25,5 너희가 수확한 다음에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고,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이것이 땅의 안식년이다.
25,6 안식년에 땅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의 남종과 여종과 품팔이꾼, 그리고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거류민의 양식이 될 것이다.
25,7 또한 너희 가축과 너희 땅에서 사는 짐승까지도 땅에서 나는 온갖 소출을 먹을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개념으로는 조금 이해가 어렵습니다. 여섯째 땅까지는 너희가 가꾸지만 일곱째 땅에서는, 너희가 농사를 지워서도 안되고 그 땅에서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부분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것은?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거에요. "내가 너희한테 이 땅을 빌려준거야. 그러니 6년동안은 너희가 하고 싶은대로 해. 하지만 7년째는 이땅에서 일을 해서도 안 되고 거기에서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돼! 그때는 모두의 것이야." 그런데 그냥 내깔려 두는 것이 아니라,6년까지 갖고 있었으니, 7년째에 무언가가 나오겠죠?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거두어서 나누어 주라는 의미이고, 주인이 그것까지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적인 의미에서 안식년이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날 우리들은, 세금을 냅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정부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세금내는 것을 아까워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에게 잘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게 좋겠습니다.
현 정부에서 많은 부분 세금을 줄여주어, 기업이라던지 개인의 세금도 줄어서 정부의 예산부분을 또 감축하게 되고, 특히나 장애우분들이나 학교 교육에 관한 부분이 많이 줄고, 대학에서 연구하는 부분에서도 많이 줄어든 현상이 일어나서 국민들의 세금부담이 줄어서 좋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한 학생들이나, 연구하는 분들의 예산을 줄인다는 것은 올바른 정책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서는 땅에서 나오는 것! 7년째 것은 종들과 품팔이꾼들과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들의 양식이 될 것이고 가축과 들짐승들고 그것을 먹으면서 구약이 갖고 있는 공존의 생각을 엿보게 됩니다. 이 부분의 샵밭에서,
이 부분전에 탈출기에서도 샵밭에 대한 규정들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으면 그 사람이 종이 되고 나서 칠년째가 되고 나면 그 사람을 풀어주어야 한다." (단지 조건은 히브리 종이에요. 이방인의 종일 경우에는 이 율법에 해당되지 않고 사람을 구별하는 모습)
또 여기에 관한 학자들의 토론에는,
종의 경우에는 종이 된 해부터 칠년인데, 땅의 안식년은, 전국가적인 차원에서 '내년은 안식년이니까 우리 이스라엘 전체는 농사를 안짓습니다.' 하고 말했을까요? 그렇게 되면 경제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을까? 지파마다 아니면 땅마다 칠년의 싸이클이 달랐을까? 아니면 같았을까?
또 어떤 학자들은 레위기 25장에는 분명 이 말이 써있기는 하지만, 그게 실현가능한거야? 예를 들어 구약에서 헤렘법(완전봉헌법)의 경우에, 어디를 정복하면 싹다 죽여버리고, 전멸시켜버려라. 하는 헤렘법이 실제로 가능한거야? 이런것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주석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의 안식년도 또한 이상적인 법률인데, 한 나라의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내년에 우리 농사 안짓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국민들이 뭐라고 할까요? 대통령이 이상해졌구나....하는 반응들이 있을 거에요.
작은 마을 단위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이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안식년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하에서...
레위 26,33 나는 너희를 민족들 사이로 흩어 버리며 너희 뒤로 칼을 빼어 휘두르겠다. 그리하여 너희 땅은 황폐해지고 너희 성읍들은 폐허가 될 것이다.
26,34 이렇게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가 원수들의 땅에 있는 동안, 땅은 비로서 제 안식년을 줄곧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서 땅은 쉬면서 제 안식년을 누릴 것이다.
26,35 너희 땅은, 너희가 그곳에 살 때 안식년에서 쉬지 못한 대신, 이제 황폐해 있는 동안 줄곧 쉬게 될 것이다.
안식년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이 왜 자신의 땅을 잃고 유배갔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고, 그렇게 안식년을 쉬지 않았으니 하느님의 권능으로 땅을 쉬게 하신다는 의미. '너희는 이제 그 땅에서 쫓겨나!'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들이 바빌론의 유배를 가는데 50년만에 돌아옵니다.(희년의 개념으로)
자신들의 역사적인 불행에 대해 레위기가 보여주는 제의적인 해석입니다. 즉 땅의 안식년을 위해서 우리가 50년 동안 이 땅을 떠나있었어야 했었다는 거야.라는 해석
본래 레위기 25장(희년) 텍스트로 돌아가면,
레위 25,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25,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히브리 말중에 "욤키푸르” 라는 말이 있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한 해를 시작하는 개념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한해가 춘분에 시작할 수 있었고(파스카부터 시작하는 것), 또 한해는 추분에 시작할 수도 있어요(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해나 달이나 별을 측정해서 일년에 시간을 측정해야 하는데, 언제가 낮이 제일긴지? 언제가 밤이 제일긴지?를 측정하기가 어렵웠어요. 그러나 그들이 측정하기 쉬운 것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일년의 두번을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히브리지역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떨때는 달력의 시작이 춘분이고 어떨때 달력을 보면 추분이 한해의 시작이 됩니다. 그 두 전통이 다 남아있는데, 그 추분을, 시작할 때는 열흘동안 참회의 시간을 갖구요. 마지막 열흘 째가 욤키푸르입니다. '속죄의 날' 이 날은 하루종일 단식하면서 하느님께 싹싹 빌어요. 그 열흘 동안 하느님이 운명의 책을 한 해 동안 우리들 각자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지를 기록해 놓는다고 고대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잘 써주셔야 하니까 열흘 동안 여러가지 절제된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열흘째 욤키푸르, 속죄의 날에는 싹싹빌면서 '다음 한해 동안은 하느님 슬프게 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의미가 되겠죠.
그 속죄의 날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새 해가 시작하고 열흘이 지나면, 속죄의 날인데 그때 나팔소리와 함께 희년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땅에 나팔, 나팔은 히브리 말로 쇼파르입니다.
25,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거룩'이라는 말은 지상에 삶이 아니라 천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해는 이 시간만큼은 천상에 사는 것처럼 한 해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십계명에도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주일날 만큼은 하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 주일날 만큼은 내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루를 살아가자! 라는 본래적인 십계명의 의미겠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רורד)을 선포하여라." 이 대목이 신부님은 감동적인것 같다고 하셨어요. 하느님이 누구냐? 라고 하면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죠? 세상을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을 위해서 대신 싸워주신 분등 여러가지로 우리가 느낄수 있겠지만, 레위기의 저자는 하느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분! 나를 옭아매는 그 무엇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도 해방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그 죄로부터, 어느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가서 더이상 죄짓지 말아라.' 라는 말씀, 그때에 그 여인이 느꼈던 해방감은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체험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딜레마 중에 하나는? 많은 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추구하는 어떤 이상을 신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저희들이 그것을 법적인 느낌으로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해야해요. 이것은 하지 마세요. 이것은 대죄고, 이것은 소죄고...고백성사 때에 꼭 고백해야하고, 이런것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근본적으로 해방의 체험인데, 그 모든 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라는 해방의 체험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해방의 체험이고, 가톨릭 교회 안의 신앙 생활안에서도 신자 여러분께 사제가 함께 나누고 싶은 체험은 바로 그 해방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이런 것은 해도되고 이런 것은 하지 않아야되는, 많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멍에나 올가미처럼 느낄수 있는 하나의 딜레마가 교회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나는 차를 타고 빨리 가고 싶은데, 자꾸 빨간 불이 나와요. 그래서 청와대 정부의 계시판에다가 "빨간 불을 없애 주세요." 라고 하면은 나는 정말 빨리 갈수 있을까요? 아니면 더 천천히 가게 될까요?'
아마도 더 천천히 가게 되고 아니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수도 있어요. 우리가 함께 사는 삶안에서 우리가 지키는 많은 규칙과 질서들은 결국 우리를 보호해 주더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목적지에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더라. 때로는 우리가 급하게 어딜가야 하는데 빨간불만 계속해서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서로 지키는 질서, 약속이 결국 우리를 안전하고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이끌어주더라. 하는 체험들을...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전하게 되는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와 신자분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는 길이기에 가르치는데 이것이 우리들을 옥죄는 멍에나 올가미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하나의 해방의 체험으로 다가올 수 있는 그 어떤 길이 없을까? 라는 것이 사목적 지혜로움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사제들에게 참으로 힘든 과제가 아닌가? 라는 말씀도 하셨구요.
신부님이 학생 때 탈춤을 배웠어요.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이 많은 탈춤을 두달 정도 배웠는데, 한시간 반정도 춤을 배우다 내려오면, 계단에서 절둑거리면서 내려오곤 했는데, 한달을 배운 뒤 다른 선생님에게 한달을 배울때는 굉장히 재밌게 한시간 반을 배우고선 그냥 못내려오고 계단을 붙잡고 내려오셨다는, 힘이 빠져서
두분 다 잘 가르치셨지만 사람을 가르치는 기술은 두번째 선생님이 더 훌륭하신 것 같았다고,
교회의 가르침, 어떤 규율이 이처럼 억압이 아닌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라갈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거야~ 하는 해방의 체험으로 다가가위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사제들에게 내려오는 숙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도 또한 이런 교회의 가르침, 복음, 하느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하느님을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바라셨던 그것!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관계를 맺을 때 억압이 되지 않는 것! 그러한 것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꾸셨던 꿈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해는 너희의 희년(yovel)이다.(히브리말 텍스트로 정확한 표현)
그리고 소유지를 되찾고 제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부분에서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에 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이 텍스트가 작성 된것은 아직 왕국 이전 시기의 전승인듯 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각각 자기 지파의 영역을 갖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므나쎄 지파의 사람이 농사짓다가 십년 내내 실패해서 자기 땅을 에프라임 지파의 어떤 이에게 팔고 자신도 종으로 들어갔는데, 50년(희년)이 지나면 에프라임 지파에 팔았던 그 땅이 므나쎄 지파로 되돌아온다는 일종의 리셋입니다.
여기서 율법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이 본래 열두 지파에게 주셨던 그 경계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지파간의 균형 혹은 하느님께서 지파간에 땅을 빌려주실 때 50년 단위로 빌려주신 것이라는 의미.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지파를 떠났던 이들도 본래의 지파로 되돌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남성의 경우에서만!(여성의 경우엔 다른 지파로 시집갈 수 있기때문에)
땅도 회복되고 사람도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거룩함에 관해서 조금더 생각해볼때, "거룩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텍스트는 모세오경인데(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스토리 라인만 쭈욱 읽다보면, 창세기와 탈출기 전반부 그리고 민수기 후반부와 신명기가 읽기 편한 텍스트입니다.
탈출기 후반부, 레위기 민수기 전반부는 율법이라서 읽기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탈출기 20장부터서 후회가~~즉 그때부터 십계명이라는 율법이 시작되고 사형이나 부정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하느님의 법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문학적인 구조로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을 가운데 놓기에 모세오경 중에서 레위기가 그 중심에 있어요. 그런데 레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전이에요. 그 레위기를 연구하는 이들이 아마 레위기의 정점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구나! 하는 한 구절을 만나게 된는데 그게 바로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 바로 그 초대의 말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신 이야기,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이야기, 요르단 강 동편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연설한 그 신명기 내용까지가 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냐면?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져라."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요.
그 공간은 성막, 만남의 천막이고
그 시간은 안식년, 그리고 희년이에요.
적어도 그것을 잊고 살았더라도, 적어도 안식년이면, 적어도 희년이 되면, 그리고 적어도 성막이나 만남의 천막에 와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만큼은 그 계명을 생각하라는 의미에요.
신약으로 넘어와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 한마디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세상에 알려졌어요.
적어도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주일과 성전, 거룩한 시간과 장소 하느님과 만나는 그 주일의 미사 시간 안에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속한 다른 이웃들을 사랑해야 마음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뒤따르는 조항에서도 희년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레위 25,11 이 오십년 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땅의 주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25,12 이 해는 희년이다.
먹을 만큼만 먹는 것은 가능한 것.
25,13 이 희년에는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자기 소유지를 팔았던 이들은 그것을 되찾게 될 것이다. 또는 누군가의 소유지를 산 사람은 그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레위 25,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25,15 너희는 희년에서 몇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25,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판 것이다.
그러니까 희년까지 삼년 남았으면, 삼년 동안의 권리만을 팔수 있고 그 삼년 동안의 권리만을 살 수 있다. 삼년이 지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25,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이 있다는 것은 동족끼리 속이는 일이 있었다는 의미로, 속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한다.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를 속이면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으로 나의 보상은 주님께 있다.(이사야) 혹은 나의 복수는 주님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이사야서의 그 구절을 따른다면 나의 복수도 보상도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는 의미.
신부님께서 신부가 되고 나서 잘알고 있는 주교님을 만났는데, 주교님이 "최신부님 이제 새 신부가 됐으니까 충고를 하나할께."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시니 "신자들을 너무 사랑하지 말게." 그래서 신부님은 주교님이 말씀을 잘못하셨나? 라고 생각을 하셨다가 2년쯤 후에 그 주교님을 다시 만나시고 그 말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하셨다고 하시니...
"아, 그 뜻은 그대가 신자들과 함께 사제로 살아가면서 신자들로부터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네."
신자들에게 열심히노력한 만큼 돌려받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하셨던 때처럼, 신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셨을 때도 교수님들과 함께 "한 학기 동안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그것 밖에 못하네." 하는 푸념들에 대해서 신부님이 다른 신부님께 이렇게 말하셨다고 해요.
"혹시 신부님이 잘못 가르쳐서 애들이 시험을 못본게 아니었을까요?"
신부님이 신학교때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도 시험답안이 어떤 해에는 정말 좋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아...내가 이번 학기에는 정말 강의를 잘못했구나." 라고 생각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고....
일상 안에서도 우리가 자주 겪는 '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이럴수 있어?'라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살아가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은 아닌 것 같다고...
왜냐하면? 우리들의 보상은 하느님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주교님께서 걱정하신 일은 신부님에게는 일어나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대로 신부님께서 사제 생활하시는 동안 신자들에게 주먹만큼 하시면, 그보다 더크게 신자들에게 돌려받으시는 경험을 많이 하셔서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받을 상을 세상에서 다 받아서 하늘나라에서 없지 않을까?' 생각으로 본당 신부하시면서 굉장히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왜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되나?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서 수평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하느님께서 못본척 하시지 않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5,18 너희는 나의 규칙들을 실천하고, 나의 법규들을 지키며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땅에서 평안히 살게 될 것이다.
25,19 그리고 땅이 열매를 내주어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그곳에서 평안히 살게 될 것이다.
25,20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소출을 거두어서도 안 된다면, 우리가 일곱째 해 에는 무엇을 먹으리오?' 하고 너희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25,21 그러나 나는 여섯째 해에 나의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나게 하겠다.
왜 세해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만나를 안식일에는 거둘수 없으니 6일째에 이틀분이 내리는데, 안식년일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안식년에 씨를 못뿌리니 그 다음해에 소출도 없고 그러니 세해째를 주어야 해요. 6년째해 세해 분을 주어서 6년째, 안식년과 그 다음해 분인 세해를 주어야 합니다.(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이라고 하셨어요!!^^)
25,22 그래서 씨를 다시 뿌리는 여덟째 해에 너희는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다. 아홉째 해가 되어 그해 소출이 날 때까지 묵은 곡식을 먹게 될 것이다.'
여덟째 해에는 씨를 뿌릴 순 있지만 먹을 것은 없어서. 6년째 해 났던 소출로 세해 동안 먹게 된다.
율법을 기술한 이의 디테일한 면을 엿볼수 있어요.
이사야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에게 하는 말로서 이사야서 36장~39장은 이사야 예언자와 히즈키야와의 역사적인 보도인데 거기에 앞서서 이사 37,30절에서 다음과 내용이 나옵니다.
이사 37,30 너희가 올해에는 떨어진 낟알에서 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는 뿌리지 않고 저절로 난 곡식을 먹으리라. 그러나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마치 안식년, 희년을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해에 소출에 대한, 유다의 안녕을 예고하는 예언자의 말씀을 히즈키야 듣게 됩니다.
37,31 유다 집안의 살아남은 생존다들은 다시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7,32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리라.
히즈키야 시대에 유다는 아시리아 공격을 받아서 예루살렘까지는 멸망하지는 않지만 큰 피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너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실 것이다. 라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우리의 주님의 기도까지 연결되있어요.
주님의 기도 가장 중심에 있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이고, 후에 다시 설명해 주시겠지만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는 단지 빵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복음서의 말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산다."는 오늘 우리에게 빵과 함께 일용할 양식인 말씀을 주시고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체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의미
이렇게 희년, 안식년을 이야기하면서
소유지 / 밭 / 집(땅)
부동산에 관한 관심이 굉장히 큽니다. 구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이고, 그 땅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이다.
따라서 땅을 되사는 권리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레위 25,23-34 "땅을 되사는 권리"
그 중심은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하느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레위 27장의 봉헌된 밭의 경우에는?
봉헌 된 밭이 자기 밭일 경우(자신의 지파에 속한 밭일 경우)와 A라는 지파에서 B라는 지파의 땅을 산 다음에 그 산 땅을 봉헌했을 경우에 구별하는 것, 최종적으로 모든 땅은 다시 희년에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 라는 정신을 유지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봉헌했을 때, 어떤 땅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것으로 남고 어떤 땅은 그렇지 않은지 구별하는 것!
민수기 36장에서는 여성의 상속에 관하여 나옵니다. 희년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땅은 원래로, 그리고 떠났던 이들도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는데(특히나 남성들만)
구약에서 외동딸의 경우에 부모의 죽음후 상속을 받을 때, 그 딸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버리면 그 땅이 다른 지파로 가게 되서 땅이 되돌아오지 못하니까 민수 36장에서는 모세가 "오!! 그런 문제 있었네? 그렇다면 그 여성은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지마시오!"
라는 내용으로 나와요.
우리나라에 오랜동안 존재한 동성동본과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이런 디테일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어떤 학자들은 샵밭이나 희년과 같은 규정이 역사적으로 정말 지켜졌을까? 생각하는데, 신부님은 유다 역사 전체를 통해서 볼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남아 이것은 지켜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고... 이런 디테일에 관한 언급이 세부조항으로 만들어져 있으므로.(어제저녁까지의 신부님 생각)
희년, 땅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했어요. 분명한 것은 적어도 히브리 사람의 경우, 안식년이 되거나 희년이 됐을 때 본래의 것을 다 회복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유인으로서의 본래의 자유를 회복한다.
구약의 세계관 안에서 조금은 어쩔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에서,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종으로 남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종 (사람)
레위 25,35-38
25,39-43 종(가난한 형제가 종이 된 경우)
25,44-46 종(이방인 / 거류민이 종인 된 경우)
25,47-55 종( 가난한 형제가 이방인 / 거류민의 종이 된 경우)
마지막 구절이 중요한데요. 레위 25,55절 말씀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속한 종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나의 종들이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예레미야 34장을 보면
34,8 치드키야 임금(유다의 마지막 임금)이 해방(희년)을 선포하기고 예루살렘에 사는 온 백성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치드키야때에 유다는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어요. 한데 일시적으로 치드키야는 일시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희년)을 폅니다.
38,9 그 계약이란 모든 이가, 자신의 종이 남종이든 여종이든 히브리인이면 누구가 자유롭게 풀어 주어, 어느 누구도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8,10 이렇게 자신의 남종과 여종을 풀어주어 자시는 그들을 종으로 삼지 않겠다고 계약을 맺은 모든 대신들과 온 백성은 그 계약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들은 계약에 따라 종들을 풀어 주었다.
뒤따르는 것은 무얼까요?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붙잡아 옵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멸망합니다. 저 당시에 치드키야 임금이 신념을 가지고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아서는 안돼!" 하고 했다면 아마도 유다는 멸망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치드키야는 거기까지 용기를 내지 못했고 자신 주위에 있는 힘있는 대신들과 자신의 탐욕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그 길을 가지 못했고 결국 유다는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열왕기, 역대기,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서를 통해서 읽게 됩니다.
마무리하면서 몇몇 신약적인 문제가 남았는데요.
- 희년은 안식년 다음해? 일까? 또는 같은해?
49년째가 안식년이 희년일까? 그 다음해가 희년일까?
49년째가 안식년이고 다음해가 희년이면 땅을 놀리는 기간이 너무 길어요. 2년이나 돼니까, 따라서 49년째가 바로 희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도 있고 그것 때문에 토론이 있습니다. 성경상의 텍스트로만 보자면 49년째가 안식년이고 그리고 그것을 지나서 50년째가 희년이라고 보는 것이 텍스트만 보면은 일반적일 것 같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경우에는 2년 연속 땅을 쉬게해야 해서 그것은 너무 힘든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 희년은 윤년(49일)?
희년에 관한 49년 규정이 음력 윤년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라고 주장하는 논문도 있는데, 그것을 따르는 주석가들은 많지 않습니다.
- 희년은 안식년을 대체하는(또는 보완하는) 제도?
이들의 주장은 7년만에 땅을 일년씩 쉬게하는 것은 그러니까 50년에 한번씩 쉬게 하자! 라는 일종의 대안으로서 7년은 율법만 남기고 실제로 50년에 한번씩만 하자.라는 희년 규정이 있었을 것 같다는 학자들도 있고..
- 희년은 실제로 실행되었을까?
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나 역대기 역사 기록을 보면 희년의 실행이라던지 거기에서 여러가지 부차적인 문제들이 생겼을것 같은데 그런 것에 대한 기록이 없는걸로 봐서 역사기록 안에서 희년이 기록이 없지? 라는 것에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데,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년 규정과 관련된 세부조항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적어도 단기적으로 희년의 규정을 존재했던 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사실 우리가 희년을 지키지는 않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지킬수 있어야 해요. 땅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이다. 공간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 시간이라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런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들이 살아갈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라는 것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인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화지 하나에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나요? 그렇지 않나요? 라는 것에 대해서 후에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께서 물어보실 것 같아요.
"아, 그래...어떤 그림을 그렸어? 한번 보여줘." 그랬을 때, "저는 안그렸는데요?????"하고 말해도 하느님께서는 웃으시겠지만, 그때에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하느님에게도 얼마나 좋은 일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우리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간과 공간과 그 외에 많은 소유의 개념들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워지는 체험 역시 레위기 25장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을 우리가 한번쯤 묵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말씀과 함께 강의를 마무리 하셨어요.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현강에서 들은 내용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