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옆 방지(方池)를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의 사당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사당에는 원 래 불천위와 더불어 4대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구국(救國)의 일 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藏主)하여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습니다.
집을 짓는 데 있어 그 평면구성을 일, 월, 길(日月吉) 등의 글자를 취해 지으면 좋다고 하는데 임청각의 평 면구성을 보면 일(日)자, 월(月)자 또는 그 합형(合形)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일형과 월형, 용 자형은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 니다. 팔작지붕는 한 마리의 새가 날개 짓 하는 형상을 하였다.
반집은 살림채, 사당, 별당(군자정)으로 구분되고 살림채는 또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로 나누어져 있는 데 이 복잡한 구성과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 는 마당의 운용이 탁월하여 다른 대갓집에서 느끼던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 없다. 안마당, 사랑채마 당, 행랑채마당, 대문진입마당 그리고 헛간마당 등 다섯이다. 이 마당들은 각기 자기 기능에 알맞 은 크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레벨을 몇단으로 나누어서 대문진입마당과 사랑채마당 사이에는 2.5cm정도 높이의 차이가 난다.
이로인해 외용상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옥의 온화한 정취도 함께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같은 대갓집이면서도 경주 안강 양동마을의 여강 이씨 향단이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한 몸체로 엮어서 여백의 묘를 살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할 때 임청각의 마당 운용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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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에 올라와서 입구 |
군자정으로 가는 출구 |
영남산에서 본 임청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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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예술무늬 |
군자정에서 바라본 연못 |
임청각 옆 군자정 |
◆ 1519년 조선중기에 이명이 임청각 건립
(살림채, 사당, 별당(군자정)등 99칸 전통 복합주택 살림채는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분)
◆ 18세기 허주가 집주인이 됨(1726년∼1773년) - 11대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임청각의 종손
◆ 수난의 민족사는 임청각으로 하여금 유한공간으로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임청각은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었고, 무언의 노력 속에 독립운동사의 뒤편에 묻힌 새로운 이력 하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기억할 것인데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였습니다.
◆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출생 생가. 한말 독립운동가 아홉분이 임청각에서 출생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는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습니다.
석주의 아들 동구(東邱 : 이준형李濬衡)와 손자 소파(小坡 : 이병화李炳華)도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로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敍勳)을 받은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의 집입니다.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고 말하며 망명길에 오른 2년 뒤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이준형에게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 임청각과 산판을 매매하였습니다.
◆ 일제 강점기에는 불령선인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중앙선 철로 부설 때 50여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당함.
◆ 『임청각, 군자정에 오면 항시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워하고 또 고마워한다 하나는 이 집을 항시 개방하고 있는 너그러움이다. 살림집이 자기를 노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것도 사시사철 밤낮없이 답사객이 다녀갈 수 있게 한다는 친절성은 고마움을 넘어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또 하나는 이 엄청난 대갓집을 유지하는 데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따로 없을리 만무한데도 이처럼 큰 집을 생생히 보존·관리하고 있는 정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는 의문 아닌 놀라움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종가만은 끝끝내 유지하려는 안동 양반들의 지극한 정성만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양반의 삶을 흔히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그 특징을 요약하기도 한다. 제사를 받드는 그 정성이 이 거대한 종택을 유지케 하고 손님을 기꺼이 맞는 전통이 이 집을 항시 개방하는 너그러움을 발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집안에 무엇이 득이 되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득실을 따져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지금 안동 분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중에서>
◆ 2004년 전통생활 체험장으로 개방. 문중의 모임이나 세미나 등으로 임청각을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