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여름호에서
야생의 마음
이종민
담장 앞에 늑대가 찾아왔다
우유를 데워 먹이고 밤에는 이불을 깔아주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늑대 나를 보면 다가와 얼굴을 핥았다 웃자란 송곳니에 작은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 있잖아 은빛 털이 아주 보드랍지 않니
사람들은 집 안에 무슨 늑대냐며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담장 앞에서 집을 지키는 늠름한 나의 늑대
고깃덩이를 들고 있으면 꼬리를 흔드는 나의 늑대
가끔 나를 물어서 작지 않은 상처가 났다 상처가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기르는 늑대에게 물렸다고 대답한다
정말 큰 개를 기르시나 봐요
상처를 볼 수 있으면서도 늑대는 믿지 않는 사람들
손하면 발톱을 주는
밤이면 대신 울어주는 나의 늑대
어느 날 늑대가 떠났다
담장 앞에 남은 이불과 살을 다 발라낸 뼛조각
사람들이 물었다 저렇게 큰 늑대가 왜 집 안에 있느냐고 담장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놀라워하며 말했다
상처가 가려웠다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장성한 나의 늑대
나를 지켜주는 나의 늑대
이종민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에서
수덕사 느티나무
권혁재
대웅전 앞마당 모퉁이에
만행을 나갔다 돌아온 스님처럼
산문을 향해 우뚝 서서 합장한다
오백 년 동안 나이테로 새긴 층층의 독경에도
해탈의 길은 멀어
허공으로만 뻗어간 가지들
법당으로 건너오라는
큰스님의 손짓에도
세속 이야기가 궁금한지
귀가 열린 몸쪽이 사바로 기운다.
『시와경계』2022년 겨울호에서
악천후
김연종
지옥 같은 날이었어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 있지 오 촉 짜리 알전구, 어두운 홍등가에나 있음 직한 그 불빛 아래서일 거야 그래도 리즈시절이 없었냐고? 뽕 같은 날이 있었지 하필이면 뽕밭이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쳤지 살랑거리는 휘파람 소리가 나를 구원할 환청으로 들렸다니까 봄날은 오래 가지 않았어 뽕잎은 한 철을 버티지 못하고 벌레처럼 변해 버렸지 부드럽던 새순마저 우악스러운 가시로 바뀌었으니까 그렇게 한평생이 지나갔어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내 손목을 끌어당기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아 미칠 지경이야 중풍 맞은 영감탱이 곁에 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자꾸 피하다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쩔 거야 문지방 넘을 힘도 없는 번데기 주제에 나 원 참, 팔팔한 스무 살 언저리에서 팔순이 된 지금까지 이러는데 더는 참을 수 없어 오죽하면 젊은 의사 양반한테 이렇게 하소연하겠어 제발 그 약 좀 처방해줘 노인정에서 그러던데 의사 처방받아야 한다고 그래 맞아 정력감퇴제 근데 이런 말 하는 내가 주책이지 또 나한테만 이상하다고 그러겠지 팔다리가 결리고 온몸이 쑤시는 건 순전히 날씨 탓이겠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자식들한테는 꼭 비밀로 해 줘
『애지』, 2022년 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