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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2013.9.1.) 이승희 목사
큰 잔치 비유
누가복음 14:15~24 주일오후예배 / 하나님나라 비유 강해
큰 잔치 비유는 신약에서 마태와 누가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마 22:1~14; 눅 14:15~24). 두 텍스트의 공통점은 초대장을 받은 손님들은 거절하였다. 초대받은 손님 대신 신분고하와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초대에 응한 사람은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차이점은 누가에서 잔치의 주인은 ‘어떤 사람’으로 묘사된다. 초대를 알리는 종들을 나쁘게 대접한 것과 살인한 자들의 마을을 멸망시키는 것과 예복에 대한 내용은 없다.
제 13 절 땅의 잔치와 재림 때 보상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3,14)
1. 축의금을 내는 자
집안에 잔치가 있게 되면 청첩장을 찍어 보낼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집안 어른들, 친지, 친구, 교회나 회사 동료들, 부한 이웃 사람들, 때로는 계꾼 등이다(14:12). 여기서 교회와 회사 동료라고 해서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지난 날 관혼상제에 빠짐없이 부조를 한 사람은 일순위일 수 있다. 축의금을 했으니 부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물론 속물인 인생이다. 암튼 뭐가 이해관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계산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보면 대상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진다. 축의금 없는 혼례식을 하자는 것도 어렵지만, 빈손으로 와서 밥만 축내는 사람을 부를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참여하는 데 의미를 두는 올림픽이 아니잖는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요, 무료음식을 제공하는 사회복지가도 아닌 이상 초청 대상에 신중을 가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다보면 공수로 오는 자를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잔치를 베풀면 차라리 그런 사람을 초청하라는 말씀이다. 공수로 와서 밥만 축낼 사람을 잔치집에 초청하라. 오늘의 혼례문화와 허례허식을 깨뜨리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말씀이다. 상식을 뛰어 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말씀이다. 부조는커녕 봉투에 음식을 야금야금 싸 갈 사람들이다.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경제적 형편으로 부조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자들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결혼잔치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조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동네에 가난한 독거노인, 몸이 불편하여 지팡이와 휠체어에 의지하는 지체장애자들, 절름발이와 맹인들이 잔치에 대거 참석하는 장애인 올림픽을 여는 것이 아니 잖는가?
그런데 주님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을 하라는 말씀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갈 듯 싶다. ‘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말 다르구나. 예수 믿고 잘 산다고 마냥 없는 사람들을 괄시하고 거만을 떠는 줄 알았는데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을 볼 때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하나님의 나라(그들은 분명 천국이나 천당을 말할 것이다)가 따로 없구나. 고맙구나’라는 말이 터져 나올 법 하지 않는가?
2. 하나님께 빚진 자
예수님이 우리의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밑지는 장사를 하는 말씀일까? 잔치를 통해 전도가 되게 하라는 말씀인가? 잔치를 통해 믿는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이기적인 공동체가 되지 말라는 의미일까? 14절에 예수님 자신도 우리의 속마음을 알고 계신다. 이 말씀으로 설교한다고 하자. 청첩장은 보내되 축의금을 받지 말라고 외칠 것인가? 한 쪽은 하례객이 붐비는데 자신의 쪽은 빈 좌석일지라도 만족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폐해를 무릅쓰고 청첩장도 보내고 축의금도 칼같이 받으라는 말인가? 우리나라의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을 고치기 위해 부유층과 지도자층이 앞장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마음이 물질보다 앞선다는 선심후물(先心後物)의 좌우명을 가진 한국총재의 사례를 들먹거릴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고주알미주알 혼례문화를 개선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영적인 의미를 말씀하신다. 축의금을 낼 수 없는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하게 될 경우에 사람들에게 도로 받는 물질적인 보상은 없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속이 불편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말은 쉽지만 막상 큰일을 치르게 되면 복이 되리라는 말이 귓전에 울릴 뿐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보상과 부유함에 올인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다소 물질적인 손해를 볼지라도 눈을 들어 의인들이 부활하는 재림의 날을 한 번 더 소망하고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의인의 반열에 서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할 것인데, 여기에 멈추지 않고 이 땅에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상급이 아닐 수 없다. 재림과 그 때 받을 상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즉 의인답게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하라는 말씀이다. 즉 맘모니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노릇하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제 15 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눅 14:15)
잔치를 베풀거든 축의금을 내지 못할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설교)에 한 사람이 겉으로 반응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군요. 이 사람의 말 자체는 옳은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묘사한 점은 정말 탁월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14절에서 ‘의인들의 부활 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며,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심이 있는 잔치가 열릴 것이라는 생각은 뛰어난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부를 잘 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한 가지는 아는 데 한 가지를 놓친 것이 있다. 무엇인지 알겠는가?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요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here and now) 잔치를 베풀고 축의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이 땅에서 일어나기 힘들고 불가능한 것이다. 손해 보고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축의금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축의금으로 들어가지 않을 잔치가 있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뿐이다. 그래서 장치 하나님이 오셔서 베푸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축의금 없이 참석하여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뉘앙스가 다분이 빼어 있다. 그렇다. 이런 추측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잔치집에는 축의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상석에 앉고, 봉투를 준비하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세상의 잔치와 사뭇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심이 풍성하고 기쁨이 가득한 잔치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나라에만 생각이 꽂혀 있으면 안 된다. 죽어서 가는 나라, 우주적인 종말과 함께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지 하고 이 땅에서는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해 왔던 혼례문화를 따르고 허례허식을 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적용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심이 아니다. 말은 맞지만 적용의 핀트에 문제가 있다.
제 16 절 하나님 나라의 통합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눅 14:16)
예수님은 ‘의인이 부활 시’에 있을 잔치, 마지막 날에 있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대한 상상에서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에서 잔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자는 미래에 매여 살고 있다면 후자는 미래와 함께 현재에서 잔치를 경험할 것을 말씀한다. 이미 주님은 잔치에 초대할 자들이 어떠한 자들이어야 하며 이로써 미래에 임할 의인들의 부활시에 있을 보상까지 말씀하셨으니 충분히 거론하신 것이다. 이제 주임의 해석의 적용은 단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만 생각하고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잔치설교로 주제를 흐려놓는 데 방향을 잡아주고 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푼 것은 시제로 보면 미래가 아닌 현재요, 무대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이다.
제 18 절 참석을 거부한 청함을 받은 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8)
1. 청함을 거부하는 사람들
초대장 혹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 ‘일치하게’라는 말은 ‘똑같이(in the same wa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로(with one occord)’ 또는 ‘즉각(all at once)’를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를 침노한 자
잔치에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참석을 거부한다. 이유인즉 자신의 소유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고서는 잔치 참석을 거부한다. 맘모니즘의 사례이다. 결혼 역시 아내를 소유하고 이로써 새가정에서 안정을 찾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왕의 잔치를 거부한 것이다. 이 모두 탕자처럼 자신의 힘과 자원으로 안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스스로 왕됨을 자처하며 하나님의 잔치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잔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불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되지 않는다.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보내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신체적으로 불편한 자들을 초청하여 잔치 자리를 가득 메꾸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당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침노를 당하게 된다.
제 21 절 잔치에 참여한 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
예수님은 14장에서 두 번에 걸쳐 새로운 초대를 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과 육체적으로 불편한 자’외에 성 밖에 있는 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차원에서 누가복음 전체에서 이와 같은 부자와 대비되는 가난한 자들과 신체적으로 병들거나 몸이 불편한 자들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잔치에 초대받게 하는 것이 누가복음에 아주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1. 가난한 자
원래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살려고 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 남을 속이고, 남을 착취하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남의 것을 막 뺏고 도둑질하고 이렇게 해야 부자가 되는 세상에서 대개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가난한 자'란 말은 일차적으로 신학적인 숙어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부자도 가끔 있다. 그러나 대개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이다.
제 23 절 선교적인 교회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1. 길과 산울타리 가의 사람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세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된다. 첫 번째 사람은 초대장을 받고도 거부한 뻔뻔한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지역의 사람들로서 소외된 자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지역 밖의 사람들이다. 잔치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것과 같은 자들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세 번째 분부는 성 밖의 길과 산울타리 가에 사는 사람들을 성 밖으로, 그리고 울타리 안으로 데리고 와서 잔치 집에 앉게 하는 것이다. 주인의 세 번째 주문을 받은 종들의 생각이 어떠했을까? 으레 올 것이라는 자격있는 자들이 거부할 때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두 번째 초대한 손님들을 볼 때 한 편으로 짜증이 날 법한 일이다. 지질이 가난하고 몸에 장애를 가지고 있고 앞 못보고 저는 자들을 그 귀한 잔치상에 앉히고 자신들은 죽으라고 서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화가 날 법하다. 그런데 왕짜증 나는 일이 터졌다. 성문 앞에 가서 사람들을 호객행위하라는 것이다. 산에 친 울타리라는 것은 민족과 민족을 경계짓는 국경선과 같은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큰 잔치 비유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 잔치가 현재로 앞당겨 경험하게 한다. 잔치는 준비되어 있다. 손님들은 도착하였다. 이래저래 변명하고 구실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잔치상을 제 발로 거부한 사람들이다. 자리는 찼다. 연회는 진행 중이다. 마태에서 언급하는 왕의 도착은 이 잔치의 기쁨에 대한 하이라이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그 날은 심판의 날이다. 그날은 마지막 때이다. 잔치를 앞두고 두 가지 소식이 존재한다. 좋은 소식과 불길한 소식이다.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자는 혹 강권하여 잔치에 참석하였더라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잔치를 현재적인 기쁨으로 경험할 수 있다. 왕이신 주님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은 현재적 은혜인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오늘 여기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다.
제 1 절 시내산 잔치
필자가 출 19장과 20장을 Q.T.하면서 말씀에 대한 묵상과 적용에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종말론을 강의하고 또한 성경을 보기 까닭이다. 다분히 분석적이고 학자적인 태도로 말씀을 이해하고 설교하고 가르쳐왔는데, 숲을 보고 나무를 보아야 하듯이 시내산 언약을 하나님의 나라로 보므로 인한 해석과 이해가 폭넓어졌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다음 내용은 출애굽기 19장을 묵상하며 기록한 내용이다.
1. 중재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출 19:3)
출 19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출발한 지 삼 개월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된다.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불러올린다. 모세 개인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어 올라오게 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심부름꾼, 퀵서비스를 할 목적으로 부르신 것이다(3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메시지는 출 19:5~6이다. 하나님과 맺을 언약을 잘 지키면 소유,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것을 당부하신다. 모세는 1차 등정(登頂)을 마치고 산 밑으로 내려와 백성의 장로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을 때 8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며 동의하게 된다(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는 백성과 장로들의 말을 듣고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전달한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는 중재자로서 사역과 백성의 반응을 듣고 다시 나아가서 전하는 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중재자는 하나님의 편에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고, 중보자는 백성의 응답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철저하게 심부름하는 종이요(히 3:5), 사환의 사명인 중재자적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2. 정결식과 회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출 19:10)
모세가 2차로 시내산에 등정하였을 때 구름 가운데 임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직접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신 뒤 몇 가지 준비 사항을 말씀하신다. 그 첫 번째가 정결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찍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고, 계속해서 구름 가운데 세례를 받고 있다(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제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왕되시고 자신들이 백성이 되는 언약식을 체결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에 입문하기 위한 절차로 목욕식, 즉 청결식을 거행해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이 자신의 옷을 빠는 것이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15절). 그리고 셋째 날을 기다려야 한다. 셋째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것이다(11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이집트에서 나와 홍해를 도하하므로 이집트에서 해방하고, 바로의 종살이에서 자유하였지만 이제 왕과 아버지요 목자이신 하나님을 뵙기 전에 정결식, 즉 회개를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 바로의 종으로서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히브리어, shub, 헬라어는 epistrephein)”과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같이 말씀한다(신 30:2, 3, 8). 신명기적 관점에서 볼 때,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 오는 표로서 정결식을 행하는 것, 즉 회개하는 것은 쉐마(Shema)이다.
전심을 다하여 오직 여호와만을 왕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살이를 끝내고자 한다면 받드시 정결식을 갖고, 즉 회개를 하므로 하나님을 만날 채비를 해야 한다. 신약에서 왕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악한 자나 선한 자는 모두 예복을 입어야 했다(마 22:1~14).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복을 입을 때 왕의 은혜로 참여하게 된다.
예언자들은 통상적으로 ‘회개하다’는 용어를 회복,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히브리어 ‘슈브’(shub)와 헬라어 ‘에피스트레페인’(epistrephein)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데, 특히 예레미야에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이 전심을 다하여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이 남편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요,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막는 결정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외침을 따라 ‘회개’, 즉 ‘돌아오는’ 것은 종말론적 회개에 속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 하나님이 오실 때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의식이 ‘정결식’ 즉 회개였다. 회개는 단지 개인이 지난날 지은 도덕적인 죄, 개인의 불경건에 대한 참회의 차원이 아니라 종말론과 필연적으로 결부된다.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의 종살이, 즉 마귀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야 언약을 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목욕식이다. 이 또한 종들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성결하여 옷을 빠는 행위는 마치 명절을 맞기 위해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과 같다. 개중에는 연중행사로 목욕을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은 도덕적, 윤리적 회개를 외친 것이 아니라 종말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기에, 즉 하나님이 오시기에 먼저 포로와 종과 같은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정결식을 행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구약의 성결하여 옷을 빠는 정결식이 세례식으로 바뀐 것이다. 세례식은 종말의 부르심이다. 종말의 씻음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 역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을 때 무리들에게 단순히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지난날에 죄에 대한 뉘우침과 회개가 아니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에서 어느 고을보다 주님이 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말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마 11:20~24; 눅 10:13~15).
종말론적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종말론적 행위로서 정결식으로 회개를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를 비방할 때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을 때 ‘회개’는 개인이 지난날의 지은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유대적 회개 의식을 행하는 경우 같은 그때그때의 통상적인 회개가 아니었다. 회개로 부르심은 도덕적인 회개의 의미도 다소 포함하고 있겠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하길 원하시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기존의 생활방식 전체를 버리고 다른 생활방식을 위해서 자신을 믿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오심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출 19:11)
시내산에 하나님이 백성을 직접 만나 언약의 내용을 말씀하시기 위해 몇 가지 경호에 대해 거듭 주의 사항을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는 모세가 중재자로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반응을 전달하였다. 24절에서 한 번 아론과 함께 올라오게 하되 제사장과 백성들은 경계를 일체 넘어 오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모세와 함께 등정한 뒤에 내려와서 이 사실을 알린 뒤에(25절) 곧장 20장에 있는 십계명이 반포된다.
중재자 모세를 통해 말씀을 전달하였던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을 대면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요, 왕으로서 현현하심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직접 자신을 나타내시고자 한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언약을 동의하고 수용한 이스라엘 족속 앞에 왕으로 내려오시고, 그 족속을 거룩한 백성으로 대접하시고자 한다.
4. 하나님의 통치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돌판을 든 모세의 그림은 익숙할 것이다. 십계명, 즉 언약의 내용이 기록된 출 20장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하신 말씀인가? 시내산 정상에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뒤덮고 있는 가운데 불 가운데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런 하나님의 현현 앞에 벌벌 떨며 멀리서서 모세에게 부탁한다(출 10:18).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고 이전처럼 모세가 중재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20장의 십계명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인지 아니면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셨는지 분명하지 않다. 십계명 뒤에 나오는 백성들의 반응을 볼 때 시내산 정상에 불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언약의 직접 체결하신 것이다. 중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왕이되시고 이스라엘 족속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제사장의 나라, 보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모세를 대표로 위로 올라오게 한 뒤 십계명의 해설서와 같은 규례를 21장에서 23장까지 자세히 말씀하였고, 모세는 이 규례들을 24:3에 백성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다. 구두로 전달한 뒤 들은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5. 언약 잔치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모세와 73명이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는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알현(謁見)한 74인은 먹고 마시는 언약의 잔치를 베풀고 있다. 시내산에서 신정국가 창건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 것이다. 백성을 대표한 이스라엘 대표자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뵙고 잔치에 참석하였다. 모세와 함께 한 이스라엘 리더들이 준비한 잔치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이 백성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손을 대지 않고 먹고 마시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그들도 하나님이 나라에서 누릴 잔치를 시연(試演, 혹 선취(先取))하고 있다(눅 13:18~29). 예수님 또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기념하는 잔치가 성찬이다(눅 22:16, 18).
제 2 절 다윗의 잔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에게 베푸실 잔치를 리얼하게 노래하고 있다.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풍성한 잔치로 끝난다. 다윗이 받을 잔치상은 일회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누릴 잔치이다(6절).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를 잔치로 그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목자이셨고, 자신은 양으로서 목자와 동행하며 인도를 받았을 뿐인데 이제 저 세상,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집에 거하면서 혀 끝에 물 한 방울 적시지 못해 죽음이 없는 지옥에서 울부짓던 부자처럼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원수인 마귀와 마귀의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가운데 잔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자신의 머리에 부어 주셨기에 자신의 잔이 넘친다는 승리와 환희의 개가를 들어보라. 여기서 한 가지 놀랍고 가슴 벅찬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에게 서비스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자세히 묵상해 보라. 예쁜 천사가(?) 거한 상을 차려 주고, 눈이 부신 선녀같은 천사가 다가와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면서 잔에 포도주를 부어주는가? 천사가 아니다. “주께서”이다. 다윗이 구약에서 성령으로 ‘주’라고 고백한 그 주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가?(마 22:43, 48)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바로 그 주님께서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를 섬기는 분이라는 사실이 믿어 지는가?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 자신이 직접하신 적이 있는가? 제자들이 아버지의 집에 오면 자신이 또다시 제자들을 serving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재림, 파루시아 때에 주인이 올 때 깨어 있는 종은 복을 받을 것이다. 눅 12:3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 들리라”.
제 3 절 이사야의 잔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 25:6)
개역개정판을 읽으면 ‘연회’라는 한자를 사용하므로 친숙한 한글 표현인 ‘잔치’를 찾아내기 쉽지 않다. 새번역에서 정말 쉽게 번역하므로 이해를 도와준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두 번이나 ‘잔치’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 요한계시록 버전으로 말하면 공중연회에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곳에 이미 도착하여 마지막 날에 있을 잔치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준비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도 포함될 것이다(눅 13:29). 천국 비유 가운데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사거리에서 초대를 받은 자들이 한결같이 더럽고 추한 평상복을 벗고 혼인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입어야 했던 것처럼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 역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고 없애주신다(사 25:7~8). 스스로 수의를 벗는 것이 아니다. 수의란 죽은 자들이 입는 호주머니가 없는 옷이다. 그 수의를 주님께서 찢어서 벗기시고 없애주신다. 사 25:8에서는 이것을 가르쳐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라고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는 요 3:16에서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죽음이여 안녕! 그리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시고,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시온의 잔치에 초대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그야말로 잔치로 시작하여 잔치로 마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덴동산이야 말로 잔치집이다. 아담이 눈을 뜨기 전에 엿새 동안 잔치상을 베푸셨다. 생명과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나무와 실과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풍성함과 완전한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곳이 성경 첫 장을 열면 초대 받는 곳이다. 비록 범죄하여 실낙원 당했지만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의 마지막 장에 소개하는 천국의 잔치에 영원히 참여하게 된다.
제 2 장 잔치: 예수님
제 1 절 하나님 나라의 잔치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눅 13:28, 29)
예수님은 각 성과 각 마을로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한 번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다. “주님,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눅 13:23) 주님의 대답은 많다, 적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을 하신다. 덧붙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많을 것을 말씀하신다. 인간의 지혜와 선행과 노력으로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자력구원에 일침을 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무서운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 문이 닫혀 있는데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는 자가 다름 아닌 예수님과 친분이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눅 13:26에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제자들이었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친분이 돈독한 제자들이었는데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행악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쫓아내신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동서남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아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실 것인데 그곳에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선지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것은 ‘잔치’이다. 앞서 주인이신 예수님과 식탁을 나누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던 주인과 친분이 많았던 자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먼저 된 자들’이었지만 나중이 되고 말았다(눅 13:30).
제 2 절 예수님의 식탁교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고려 시대에는 쇠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살생을 죄악시하는 불교문화에 더해, 소는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주는 동물이라 '먹는 대상'으로는 보지 않는 분위기였다. 육식 문화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 사이에 되살아났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유례없는 쇠고기 열풍이 불었다. 정조 5년(1781) 겨울, 정조가 밤늦게 일하는 규장각·승정원·홍문관의 유생들을 불러 난로회를 열었다고 전한다(그림 참조).
세례요한은 금욕주의자며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였다. 불교의 영향으로 고려시대 쇠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유교가 정치이념인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어울려 ‘난로회’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탐식가들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잘 먹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가지 별명이 따라다녔다.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도 신경을 끄고 사셨다. ‘탐식자’,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세 가지 별명이 주님의 식탁 습관과 관련이 있다. 마 9:9~13에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뒤에 그의 집에서 이별파티를 하신 것으로 추측을 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부정한 자와 접촉하므로 부정하게 되는 행위로 간주하였고, 무엇보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주님께서 왕왕 세리 마태와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서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을 인하여 세 가지 별명이 붙게 된 것을 주님은 잘 알고 말씀하셨다.
1. 결혼 청첩장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마 22:9)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이라는(사 54:5; 호 2:16)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결혼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종에서 구출하여 언약을 체결하므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왕과 신랑이 되는 언약식을 혼인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이라는 전통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가 예표하는 사탄의 죄악과 고난과 죽음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초청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풍성함에 참여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생명의 통치이다. 전에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통치를 받았던 이스라엘 조상처럼 사탄의 통치 아래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혼인 잔치, 즉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을 받을 때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다. 먼저 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오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고,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베푸는 잔치 자리에 세리와 죄인들이 있다는 핑계로 앉기를 거부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잔치를 위해 초대받지 않았던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들이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제공할 때 받아 입기만 하면, 즉 그리스도의 옷으로 환복을 하기만 하면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 만일 예복을 입지 않고 이전의 평상복으로 앉아 있다가는 추방을 당한다(마 22:12, 13).
2. 죄인과 병든 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예수님이 자신과 식탁을 나누는 자에 대한 비방에 대해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목적을 설명하고자 한다. 의사에겐 환자가 찾아오고 필요하고 그들을 치유하는 것처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도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함이다. 죄인과 병든 자는 같은 의미이다. 비록 환자이지만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음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죄인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뒤에 아론과 70인 장로들을 데리고 올라가 언약 체결을 기념하는 식탁을 나누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세리와 죄인들과 천국에서 누릴 식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눅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 혼인집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 가운데 두 번째는 금식의 문제였다. 바리새인과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였다(눅 18:12, 마 9: 14,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세 개의 분파의(사두개인, 바리새인, 그리고 장로들) 하나로서(행 15:5) 소극적 경건주의자들이었다. 바리새 운동은 중산층 평신도들의 경건운동이다. 모세 율법, 특히 제사장들의 거룩성을 확보하기 위해 레위기의 거룩과 정결의 법들을 철저히 지켰다. 바리새운동의 모토가 되는 말씀은 출 19:5이다.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즉 국가가 되어야 하는 데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난 자들이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나 많은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언약사상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됨과 하나님의 통치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선교적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기껏해야 자신의 몸을 세리와 접촉을 멀리하므로 부정에서 더럽히지 않고(마 9:11-13), 손을 씻는 행위와 같은 몸을 깨끗하게 하고(마 15:1-3;막 7:1-15), 음식이나 가리며, 불결한 창녀에 해당하는 죄인들로부터 ‘분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뜻은 ‘분리주의자’(separate ones)이다. 이들이 볼 때 예수님은 일주일에 한 번은커녕 마냥 먹기만을 즐기는 자로 각인이 되었기에 비방을 하였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초림부터 종말이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므로 혼인집, 결혼식장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하신다. 결혼식 날자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일주일에 두 번 행하는 금식일과 겹치면 금식을 멈추고 결혼식 무드로 바뀌어진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결혼집이요, 결혼기간으로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를 결혼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혼식의 풍경을 떠 올려 보라. 흥겨움, 기쁨, 행복, 풍성함, 만족, 이런 단어들이 넘쳐나는 잔치가 아닌가?
4. 신랑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할 때 예수님 자신은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소개한다. 요 3:29에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들(신랑의 들러리, guests)이 크게 기뻐한다. 예수님이 신랑이면 그의 제자들은 신랑의 친구들이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의 결혼을 축하하며 기뻐할 시간에 금식은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해명을 하면서 메시야적- 종말론적(messianic- eschatological) 용어를 사용하신다. 구약에서 신랑이라는 메타포는 자주 하나님께 적용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신랑이라는 용어를 가끔 메시야의 오심(Messiah's coming)과 연관된 혼인이나 메시야적 잔치(사 25:6, 33:20, messianic banquet)와 관련된 결혼에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게 기독론적이다. 주님 자신이 메시야적 신랑이시고, 그리고 메시야 시대는 도래했다.
제 3 절 잔치 무드와 천국의 잔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눅 15:11~32은 일명 ‘탕자의 비유’로 알려 져 있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이다. 비록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참담한 지경인 돼지치기로 전락하였고, 쥐엄열매를 주는 이가 없어 ‘죽게 되었으니’(영적으로 죽었던) 그가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과거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예상치 않는 이벤트를 준비하신다. 잔치(banquet)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 잔치를 리허설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잔치 풍경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잔치 분위기가 어떤가? 살진 송아지이 세 번 언급되고 있다(23, 27, 30절). ‘즐기다’는 감정언어가 세 번 언급되어 있다(23, 24, 32절). 음악 소리와 춤추며 노는 소리(NIV, music and dancing)가 있다. 바짝 마른 어린 소가 아니라 살진 송아지라는 말은 맛은 물론이거니와 풍성함을 의미한다. 물론 양으로 따지만 어미 소의 고기가 많겠지만 살진 송아지라는 말은 풍성하다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이 있다. 잔치는 즐겁다. 즐겁지 않는 잔치를 상상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죽었다고 살아 돌아온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이다. 집 밖의 탕자를 조건없이 용서하고 받아줄 뿐만 아니라 동생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대인에 해당하는 큰 아들까지 끝내 품고 잔치집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넓은 사랑과 포용력이 압권이다.
잔치의 반대는 결핍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잠시는 착각 속에 행복하다도 느겼을지 모르지만 얼마 못 가지 결핍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재정적인 결핍, 흉년으로 인한 결핍, 직장의 결핍, 먹거리의 결핍, 생명의 결핍까지 골고루 다 겪게 되면서 결핍의 절정에서 절규하게 된다.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꺾어지고 꽃가지가 잘린 것같이 아버지의 집,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다스림을 거부하였을 때 인간이 제한된 자원으로 살려고 할수록 더욱 깊은 결핍의 나락으로 빠지게되는 것을 보게 한다. 불만, 슬픔, 아픔, 고통, 한숨, 염려, 경쟁, 착취와 다툼이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세상이 공중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통치하는 진풍경이다.
제 4 절 가난한 자의 잔치
1.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1)
누가판 팔복은 ‘가난한 자’(눅 6:20)이지만 마태판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구약적 배경을 생각할 때 의미가 분명해 진다. 전자는 히브리어 ‘아니’와 일치하고 후자는 ‘아나우’의 뜻에 가깝다. 두 가지 표현은 다같이 일종의 외부적인 고통이나 압박을 암시한다. 전자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포함하다(시 72:2, 74:19). 특히 후자는 ‘부자와 나사로 스토리’에(눅 16:19~310) 나오는 거지 나사로처럼 고통 중에 있는 자의 겸손을 가르킨다. 고통 중에서 부자에게 외면당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위로를 받는 상태이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위로의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 베푸시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오는 세대’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즉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당당히 자신을 외면한 부자 앞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그 뜻은 ‘온유하다’(meek)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마 5:5의 ‘온유하다’라는 말과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동의어이다(마 5:5, 11:5). 그리고 누가의 가난하다라는(눅 4:18, 6:20, 7:22) 말과 마태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 역시 동의어이다.
2. 구약: 가난하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형통하고 악한 꾀를 이루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 볼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시편 37편은 선의의 피해를 보고, 의인이 손해를 보고, 사회가 악한 자들에 의해 놀아날 때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치면서 불평과 시기(1절)이 나올 법하다. ‘모범 시민’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처럼 공권력이 악한 자의 편에 서고 억울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때 자신의 손으로 악한 자를 심판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정의와 심판을 맡기고 온유한 자, 가난한 자가 궁극적으로 땅을 차지하는 승리자가 될 것을 노래한다. 온유한 자, 즉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3절) 다윗처럼 악한 자들인 사울왕과 그 일당, 아니면 압살롬과 따르는 패밀리로부터 압박을 받고 생활에 많은 고생과 고난을 당하게 된다. 다윗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악의 무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때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맡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우리의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하실 것을 믿었다(6절). 이런 심정을 가르쳐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구약은 설명한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통치가 악에 대해서는 심판을,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요(눅 2:35, 6:24, 16:25; 마 5:4), 온유한 자로서 땅을 차지할 것이다. 즉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3. 가난한 자의 하늘 왕국 잔치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앞서 언급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눅 16:19~31). 화자와 청자가 잘 아는 실화일 가능성이 높으며, 예수님이 직접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 즉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개역과 개역개정판에서는 ‘천국에 앉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앉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싶다. 한국사람들이 워낙 자리에 한이 맺혀 있는 지라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원한을 풀고 싶은 심정을 감출 수 없기에 대리만족으로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지 모른다. 하지만 공동번역, 표준번역, 현대역에서 그리고 몇몇 영어성경을 보면 이런 입맛이 싹 가신다. 공동과 표준 그리고 현대역에서는 ‘천국’라는 단어 대신 ‘잔치’라고 되어 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잔치라는 것이다. NASV에서는 하늘 왕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NIV에서는 더 분명하게 그림을 그려 주고 있다. “(Many) will take places at the feast with Abraham…in the kingdom of heaven”. 그냥 우두커니 천국, 즉 하늘 왕국에 앉아 있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상에 앉아 다윗의 고백처럼 잔이 넘치고, 탕자에게 베푼 살진 송아지를 잡았듯이 먹을 것이 풍성하고, 영원한 기쁨과 부요가 넘치는 잔치집이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 대기하는 듯한 이미지와 잔치집에서 즐기는 것은 엄청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이 이처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포함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잔치상을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NLT에서는 ‘at the feast in 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 분명하게 하늘 나라에 잔치에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들의 좌석에 앉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잔치집을 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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