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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생각
이제 의식과 생각의 차이를 이야기해 봅시다.
의식은 자각이고, 의식을 의식하게 되는 상태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맨 처음에 오는 것이 느낌이죠.
느낌은 첫 번째 자각입니다.
반면 생각은 평가하고 측정하는 것이죠.
생각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머지않아 의식과 생각이 얼마나 놀라운 팀으로 협력하고 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어떤 지점에 이르면 생각과 의식의 명확한 구분도 없어질 겁니다.
자유로이 오가게 될 테니까요.
의식은 나선형처럼 돌아 나왔다가 돌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아래로, 안팎으로 흐를 수 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확장합니다.
사실 의식이 확장하는 데는 방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확장하는 거죠.
마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잠깐이면 직접 느껴볼 수 있습니다.
영혼은 자신의 측면을 통해 경험한 모든 것을 정제해
그 정수인 지혜를 되가져간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보세요.
이 지혜로 의식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의식을 설명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각'이라는 단어 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의식을 달리 무어라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냥 자각이죠.
생각은 설명이 훨씬 수월합니다.
생각은 확장한다기보다 선형적이죠.
사람의 생각은 역사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움직여갑니다.
매우 선형적이죠.
사람의 마음으로 하는 생각은
절대 의식처럼 확장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란 항상 어느 정도는 선형적이니까요.
생각에는 세부 사항이라든가 내용에 대한 선호가 있습니다.
반면 의식은 그 어느 것도 필요가 없죠.
의식의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이건 정말 설명이 몹시 어려운데 어떤 지점에서 그냥 느낌으로 알게 되실 겁니다.
자각을 자각하게 되실 거예요.
아름다움.
잠시 그것을 느껴보세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울림이 있습니다.
"아이보리색 꽃잎에 녹색 줄기, 우아한 모양의 아름다운 꽃을 느껴보세요."라고 한다면
그건 생각, 정의, 계산입니다.
의식의 낌새는 있었을지 몰라도 '녹색,아이보리,꽃잎'같은 정의는 기본적으로 생각이죠.
"나는 이게 좋아." 혹은 "나는 저게 싫어." 라는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각이나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생각이라는 바탕에서 나오는 거죠.
제가 별다른 설명없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썻다 해도 그것은 의식이라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생각은 구조적입니다.
말하자면 생각에는 구조와 세부항목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은 구조적이고 계획이며 정의라서
밖에 있는 나무를 두고 '아름다운 초록 잎사귀'라고 말하면 거기엔 수많은 정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자연'아라고 하면 거기엔 좀 더 많은 울림이 있죠.
생각은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생각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마음으로 내적인 결말을 지어둡니다.
반면에 의식은 그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의식은 영원한 삶입니다.
생각은 타고난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생각으로 바뀌거나 대체되거나
수없이 다른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생각은 죽음을 압니다.
그러나 의식은 삶을 알죠.
생각은 파멸을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파멸이 내재돼 있기에 생각은 파멸을 기대하다시피 합니다.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생각은 붕괴되고 맙니다.
자연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하죠.
"자연은 무너져 내리지. 결국엔 모든 게 떨어져 내리고 죽어가. 언제나 파멸이 존재해.
그러니 네가 지은 것들도 결국엔 파멸하고 말 거야."
마음은 이렇게 파멸이라는 바탕위에서 작용합니다.
짓고 창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자신이 지은 모든 게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그 허망함과 한계가 느껴지시나요?
의식은 이런 것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의식에는 파멸이라는 게 없죠.
의식은 꾸준한 창조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느낌이 다가오고, 생각이 뒤따릅니다.
사랑, 거기엔 의식이, 자각이 있습니다.
사랑은 측정하거나 분석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경험만 가능하죠.
그러나 지금껏 당신은 수없이 합리적인 생각을 낳는 사랑을 경험해왔습니다.
부모의 사랑, 또는 뒤틀리고 상처가 되었던 사랑이죠.
그런 사랑에도 최초의 의식이나 자각은 존재하지만
머잖아 생각의 홍수가 밀려들어 옵니다.
이제 생각의 한계나 파멸, 죽음 같은 것 말고 의식으로 '사랑'을 느껴 보세요.
사랑이라는 의식을 느껴보세요.
거기엔 울림이 있습니다.
의식은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말 그대로 몸에서 어떤 느낌을 창조해내고 마음에서도 일시적인 희열을 맛볼 수 있죠.
의식은 통합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분리되어 있거나 해체되어 있죠.
영화의 필름을 예로 들어 봅시다.
생각은 영화의 프레임을 낱낱으로 쪼개어 벽에다 걸어둔 채 클립 하나하나를 넘겨보면서
"아! 그 영화야." 하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의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진행되는 게 보이니까요.
생각은 한 번에 한 프레임에 초점을 맞추고는
"두 사람이 키스를 하고 있고 배경에는 새가 날고 있네. 폭풍이 다가오고 있으니 저들은 금세 비에 젖어 처량해질 거야."하고 단정합니다.
생각은 그렇게 인생을 한 번에 한 프레임씩 봅니다.
무척이나 분리되어 있죠.
생각은 그 모두를 모으려 기를 씁니다.
"이봐, 우리는 이 낱낱들의 생각이라는 프레임을 전부 가지고 있어.
이게 바로 영화아니야? 그게 의식 아니야?"
아뇨, 절대 아니죠.
최근에 본 영화 한 편을 떠올려보세요.
그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이나 특정한 부분을 그리 많이 기억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거기엔 어떤 의식이 있죠.
깊이 호흡하면서 그 영화의 의식을 한 번 느껴보세요.
낱낱의 프레임이나 각각의 순간으로 나누지 말고
전체 영화를, 전체 경험의 본질을 느껴보세요.
그게 의식입니다.
생각은 분리돼 있습니다.
의식은 언제나 전체이고 완전하죠.
언제나.
의식은 불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확장하고 성장하기도 하지만 결코 불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의식은 온전히 충만합니다.
생각은 거의 언제나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고,
더 많이 필요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빼았아 와야합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이제껏 당신이 해온 모든 생각과 질문 들이 답을 찾아 어딘가를 떠돌고 있습니다.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우주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암흑물질의 일부를 구성하죠.
당신의 응답받지 못한 그 모든 지적인 생각과 질문 들이 저 바깥에서 답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의식에는 답이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저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지치게 하거나 에너지를 바닥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의식은 아무것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의식은 완전합니다.
생각은 변조되어 있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의 90퍼센트 이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밖에서 온 것이지만 스스로 자기 생각이라 허용하고 받아들인 겁니다.
생각은 대중의식이나 대중최면을 통해,
그리고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접하는 과정에서도 변조됩니다.
당신은 열려있으며 유례없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전부 당연히 제 것이라 여기고 있죠.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 온 겁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선택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당신 것이 아납니다.
그러나 의식은 오로지 당신의 것입나다.
변조되거나 다른 누군가의 의식이 스며들 수 없습니다.
뒤섞일 수도 없습니다.
절대 누군가에게 넘겨줄 수도, 침범당할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오로지 당신 것이죠.
의식은 단일합니다.
너무나 광대하고 크고 넓고 깊지만 단일합니다.
어떠한 분리도 필요치 않아요.
자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신조차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자신의 반복되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의식은 그저 의식입니다.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누군가 반복되는 질문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의식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닙니다.
강렬한 생각을 경험하고 있는 거죠.
당신이 찾고 있는 답은 전부 자신의 의식에,
진정한 자기 안에, "아이 엠"에 있습니다.
그것이 앎이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저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의식의 작용입니다.
영적인 안내자니 천사니 신이니 유령 같은 걸 숭배하지 마세요.
당신의 의식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의식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말하는 것도
사실은 좀 정신적인 표현입니다.
의식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열 번째 전생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어떤 나라에 살았는지 의식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건 기억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의식은 상관하지 않아요.
단지 경험했고, 그건 놀라왔죠.
의식은 그 경험을 정제한 뒤 그 모든 것과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생각에 기초한 겁니다.
시공간은 당신이 원치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지만 당신은 그 안에 자신을 가둡니다.
그리고 시공간을 이해하려 애쓰며 물리학, 양자역학, 온갖 것을 공부합니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이 오면
시간과 공간 속에 더 심하게 갇혀버리죠.
지금껏 생각으로 그것을 이해하려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깊이 호흡하며 설명도 생각도 구조도 필요없는 '의식'을 선택한다면
시간과 공간은 문득 사라져버릴 겁니다.
의식은 존재하고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의식이냐 생각이냐.
의식은 새롭습니다.생각은 낡았죠.
생각은 미래까지 포함한 역사입니다.
생각이란 아주 선형적이니까요.
영혼은 역사를 모릅니다. 역사란게 없죠.
영혼은 역사의 세부사항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정제해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걸러낸 뒤
지혜로 들이 마십니다.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죠.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은 남용되어 왔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게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뜻만은 한결 같습니다.
어제든 내일이든 문제되지 않아요.
일어났다고 여겼던 일은 사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야.' 그게 전부죠.
신념 또한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한계이며 단지 신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한
더 이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신념을 맹종하게 되면 그때 문제가 되죠.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신념, 도구, 장난감, 연기, 새로운 의식의 무대에서 써보려 고른
모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자유로워집니다.
모자는 언제든 원하면 바꿔 쓸 수 있으니까요.
의식은 앎입니다.
신념도, 앎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지 않죠.
의식은 자각입니다.
빛이고 아이엠입니다.
의식에 머물러 보세요.
아무말도 하지말고,
아이엠 외엔 무엇도 기억하려 애쓰지 말고
다만 자각해보세요.
생각은 복잡한 걸 좋아합니다.
의식은 언제나 단순함으로 매번 또 다시 반복해 돌아옵니다.
의식은 단순함으로 확장하다가 언제나
'나는 존재한다'라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귀한합니다.
아직 잠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는 일이나 가족이나 건강이나 무언가로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잠시 멈춰보세요.
'나는 존재한다'를 생각이 아닌 의식으로 느껴보세요.
"나는 내 존재를 자각하고 있어, 나는 존재해,"
그러면 필요한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되고
모든 것이 거기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토록 단순합니다.
생각은 일종의 기만입니다.
생각은, 또 당신은 그 생각이 진짜인 척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생각은 자신이 변화하고 점차 죽어갈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자신이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태생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풍요를 '생각'하면 거기엔 스스로에 대한 잠재적 의심이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효과가 없죠.
생각에는 진짜 에너지가 없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자신잉 거짓말쟁이라 느껴지고
그 뒤론 자신의 연기가 더이상 탐탁치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의식은 단순히 존재합니다.
생각이 아니라 진실한 의식이 담긴 연기를 하면 애쓰지 않아도
그 연기를 지원해줄 에너지가 끌려올 겁니다.
생각에는 온갖 드라마와 판단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도 들어 있습니다.
의식에는 감정이 없죠.
전혀 없습니다.
이게 제가 사람들에게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도 못하니까요.
사람들은 전사가 검을 다루듯 감정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감정을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다들 감정의 대가가 되고 싶어 하는데 의식에는 감정이 없다고 하면 너무 지루할거라 생각하죠.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죽어있다고 느낍니다.
오직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요.
드라만와 감정은 최소한 몇 분이라 해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줍니다.
때로 영적인 길 위에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조차
사실은 마법같은 감정을 추구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에는 감정이 없지만, 깊고 열정적이며 감각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의식을 느껴보세요.
'나는 존재한다.' 외에 아무런 정의도 내리지 말아 보세요.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자각을 깊이 호흡해보세요.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 자신이다.
생각을 완전히 없애자는 게 아닙니다.
그건 소용도 없고 필요도 없는 일이죠.
생각과 의식의 차이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생각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의식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아마 둘 다일 겁니다.
만일 둘 다라면 당신은 언제나 의식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의식이 존재해왔다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생각에 더 가까웠다면 이런 사실을 자각해본 적도 없었을 겁니다.
자각이 아니라면 대체 의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겠습니까?
자각을 깨닫게 되면 의식과 생각이 춤추기 시작할 겁니다.
몸을 입은 의식적인 마스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둘을 다 활용하게 될 테니까요.
생각은 여전히 놀랍고 아름다운 도구입니다.
원한다면 생긱이 제시하는 구조와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신은 의식에도 머무를 수 있습니다.
무언가로 인해 선입견, 생각, 두려움과 한계가 생각나면 머지않아 그것이 곧 죽어 없어질 생각인지
아니면 영원하고 진정한 아이엠인지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죠. 여전히 생각은 떠오를 테고 한동안 짖어댈 겁니다.
바로 그때가 깊이 호흡하면서,
"이 생각은 곧 죽을 거야, 하지만 나는 존재해."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면 더는 생각과 이런 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만 자각의 문제일 뿐이죠.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매사를 이해하고 납득하려 해왔다면 귀기울여 주세요.
당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해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자각할 수는 있습니다.
느낄 수도 있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를 내릴 수도 있지만 더는 마음과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럴게 자각해보세요.
"아이 엠,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식적이야, 자, 이제부터 어떻게 연기하면 될까?"
- 아마무스 세인트 저메인
첫댓글 지금까지 " 존재 " 가 화두였는데 ,
스스로 물러나 확연히 " 나는 존재해 "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