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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4: 4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 고후 4: 6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고후 4: 4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는 자들은 사탄과 악령들의 방해를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 신’은 사탄을 의미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불렀다.
* 요 12: 31 -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불렀다.
* 엡 2: 2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방해한다. 오늘날도 사탄의 방해가 클 것이다.
1]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오노스'(*)는 '세대'의 의미이다(age, NIV).
* 고전 1: 20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갈 1: 4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따라서 '이 세상 신'보다는 '이 시대의 신'이라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이름은 사탄에 대한 별칭이다(Harris).
이외에도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이나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요 악한 영'으로 불린다.
* 요 12: 31 -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 엡 6: 12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 천사였으나 지고하신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고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 사 14: 12-15 –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 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 눅 4: 1-12 –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사탄이 계속해서 성도를 타락시키려고 애쓰며, 믿음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활동을 펴는 것은, 하나님께 종말까지 사탄의 활동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혼미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튀플로센'(*)은 '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이다(has bilnded, NIV).
따라서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이다.
사탄은 사람들의 영안(靈眼)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 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든다.
* 요 3: 19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벧전 5: 8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3]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비난한 것처럼 바울의 복음이 신비적이며 애매모호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혼잡하지 않고 순수하여서(2절)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듣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에게 미혹된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Bruce).
본 절의 '형상'(*, 에이콘)은 원형(archetype)을 그대로 그린 초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초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과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해준다.
* 빌 2: 6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함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시(顯示)인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고후 4: 5 오직 그리스도 예수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1]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 고전 3: 7 -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하다.
2]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이시며 사람이 그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참된 믿음은 그에게 절대적 순종을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는 그에게 절대 순종해야 할 종의 위치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지위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는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울은 몸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직분을 다하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랐다.
* 빌 2: 7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본문의 '주'(*, 퀴리온)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진술은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오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자 신앙 고백이다.
3]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디아 예순)[예수님 때문에] 교인들의 종이 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교인들을 섬기는 종으로 자처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지만, 교회와 교인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을 섬기는 종이 되려 하였다.
바울이 자신을 자랑한다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은혜로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과(1절), 그 직분의 사명이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사도직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져다주는 것이 죽음인(3: 7) 반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3: 17).
그런데 지금 바울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자유로 옮기어진 것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종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 롬 1: 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빌 1: 1 -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도 종이 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것이다.
* 고후 12: 15 -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본 절에서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고 있다. 이는 사 40-48 장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듯이 비록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쁘게 여기는 것과 같다(Martin).
고후 4: 6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구원받음과 사도직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신 하나님의 첫번째 빛의 창조(창 1: 3)와 인간의 영적 무지을 몰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춘 두번째 빛의 창조를 병행(竝行)시키고 있다.
* 창 1: 3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흑암 중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첫 번째 창조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은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였다.
* 행 9: 3, 8 –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다 메섹으로 들어가서
* 행 22: 6, 9, 11 –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 행 26: 13 -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이 지식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 된 복음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이다(Harris).
3]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고 죄인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 죄인들에게 구원이 된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인생의 불행의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이다.
사람은 구주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얻는다.
4] 그리스도의 빛
(1) 사도권 변론
신약성서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 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사도권을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물론 이렇게 단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에서만 본다는 이런 구분은 틀리지 않다.
오늘 우리에게 바울은 추호도 의심 없는 위대한 사도지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바울이 반기독교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중간에 돌아섰다는 사실, 그의 신학이 극단적이라는 사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과도기였다는 사실 등,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고후 3장 1-2절은 당시의 상황을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이 말이 또 자화자찬처럼 들립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소개장을 가지고서야 여러분을 찾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데로 갈 때에도 여러분의 소개장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
이런 설명을 따른다면 소개장을 들고 고린도 교회에 와서 바울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소개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바울의 입장에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나왔든지 고린도 교회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비중 있는 사람이나 교회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찌하든 권위 있는 소개장을 들고 고린도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과 바울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다투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양쪽이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르고, 타종교에 대한 시각, 성적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 요즘은 기독교 교리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라고 해봐야 지엽적인 데 머물고 말지만, 바울 당시에는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4장 1-2절 말씀은 그 당시에 기독교가 변질될 위험성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곧 비뚤어지게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비뚤어지게 전하는 사람은 당연히 권위 있는 소개서를 갖고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권위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헐뜯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였다.
빛의 창조자
원시 기독교에서 바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아주 각별하다. 그는 복음 일원론에 가까울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 일관되게 전했다. 이 말은 곧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그렇게 명백한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미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예수를 통한 구원 말고 다른 걸 전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 말씀을 읽어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기독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 특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디아스포라인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들에게 모세와 율법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진리 기준이었는가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울과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복음과 율법 문제는 단지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고방식에만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철학 문제와 관련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영지주의적 용어를 통해서 설명한다. 복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4절에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했다. 바울은 어둠과 빛을 대칭적으로 표현했다. 영지주의는 세상을 선악 이원론으로, 빛과 어둠으로 해석했다.
이 영지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다거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은총의 빛이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면 결국 복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바울의 언급은 그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는 빛과 어둠의 문제는 영지주의를 넘어서 구약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간다. 6a절 말씀을 보면,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빛과 어둠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두 존재론적 세력이지만 바울에게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빛을 창조한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쳐주셨다. 그것이 복음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인식론은 창조론에 그 뿌리를 둔다.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내면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라 빛을 창조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성화, 그 전체 과정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런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시고 비추어주시는 그 빛이 아니면 복음과 진리를 결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베테랑이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빛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인식론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지금 그런 빛이 자기 마음속을 비추고 있기에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변호한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하나님의 영광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까다로운 부분을 만났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외치기만 하면 충분하지 무엇 때문에 영지주의, 인식론, 창조론 같은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려는 것이다. 6b절을 보면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어쩌면 이 문장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빛이 아니면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얼굴 이야기는 앞서 3장 12절 이하에 진술되어 있는 모세의 얼굴 이야기와 연결된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 후광이 빛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후광을 보고 두려워하자 모세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출애굽기 34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바울이 이 사건을 말함은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후광은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말은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세의 후광은 지나갔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후광이 빛나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얼굴은 실제적인 육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 부활, 그의 전체 운명을 의미한다. 빛난다는 것은 밝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에서 밝히 드러났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밝히 드러난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보았다.
이 영광은 무엇일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본 그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명실상부하게 주(主)가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주가 된다는 말은 그가 창조자로서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며, 나아가서 그의 구원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의 창조자이신 그분의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다. 본문의 배경을 따라서 설명한다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바울은 예수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종말에 완성하신다는 교리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가 끝난 후에 증명될 수 있는 영적인 인식과 믿음의 문제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 믿은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한 사도의 전통과 우리의 마음속에 빛을 비쳐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는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