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과 아버지
(정정이 불안한 명나라, 태종 등극을 승인하다)
국내에서는 왕이 갈리고 태종이 등극했지만 명나라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주청사를 명나라에 보내어 국내 사정을 설명한 결과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왔다.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과 문연각대조(文淵閣待詔) 단목예가 벽란도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선의문 밖에 나가 영접했다.
"조선 권지국사(權知國事) 이휘를 조선 국왕으로 삼고 금인(金印)을 주어 동쪽 땅의 군장(君長)을 명한다. 백성은 덕(德)이 있는 사람을 생각하나니 너는 덕(德)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백성에게는 어질고 은혜롭게 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받고 후손이 밝게 법 받도록 하여 길이 중국을 도우라." -<태종실록>
사신 일행을 무일전(無逸殿)으로 안내한 태종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고명(誥命)을 받았다. 정권교체를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춘 태종이 종친과 대신 그리고 문무백관과 유생을 이끌고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사은례(謝恩禮)를 행하였다.
명나라는 북경에 똬리를 틀고 있는 연왕의 거병으로 내전 상태에 있었다. 정정(政情)이 불안한 명나라는 조선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고명을 보내 온 것이다. 이에 감복한 태종 이방원은 사신에게 연거푸 연회를 베풀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껄끄러운 명나라 고개를 하늘이 도와준 것이다.
애증이 서려있는 정몽주를 신원하다
여세를 몰아 권근의 청을 받아들여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증직(贈職)하고 신원했다.
이방원의 가슴에는 '하여가'로 회유하자 '단심가'로 응수하던 정몽주의 모습이 항상 살아 있었다. 이는 고려 유민들의 저항이 사라지지 않은 시대 상황에서 또 하나의 대(對) 백성 유화책이자 국정 운영의 자신감의 발로였다.
정몽주 신원문제를 일단락 짓자 대학연의 경연이 끝나고 권근과 주과(酒果)를 나누며 정도전을 치던 일을 술회했다.
"불똥이 팔뚝에 튀어 박히면 어느 누가 빨리 버리려고 하지 않겠는가? 무인년에 부왕의 병환이 위독할 때에 여러 간신들이 용사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화기(禍機)가 찰나에 있었으니 그 형세가 어찌 불똥이 팔뚝에 튀어 박힌 것같이 급할 뿐이었겠는가? 지금 안으로는 부왕의 책망을 받고 밖으로는 군의(群議)가 흉흉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할 뿐이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정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호출이 떨어졌다. 방간을 개경으로 데려 오라는 것이다. 당시 방간은 안산에서 익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회안군(懷安君)의 경진년 일은 그 본심이 아니고 다만 박포에게 현혹된 것이었다. 이제 황제께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주시어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무엇을 혐의할 것이 있는가? 사람을 보내어 소환하라."
너의 형을 불러 올려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승지에게 명을 내리자 조정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영삼사사(領三司事) 하륜을 필두로 좌정승(左政丞) 김사형, 우정승(右政丞) 이서 등 20여 인이 상소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방간은 죄가 진실로 가볍지 않으나 태상(太上)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 나도 역시 항상 동기의 생각이 있어 친친(親親)의 어짐(仁)을 온전히 하고자 한다. 경등의 아뢰는 바가 옳으나 따를 수 없다."
태종이 의정부 대신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조준이 상소를 올렸고 대사헌(大司憲) 유관이 글(章)을 올렸다.
"방간이 종사에 득죄하여 베임(誅)을 용서할 수 없는 중죄인인데 전하의 은혜를 입어 머리를 보전하고 바깥 고을(外郡)에 안치돼 있으니 다행입니다. 지금 또 불러서 서울 안에 두면 방간은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더라도 그 도당의 불궤(不軌)가 염려되오니 명을 거두어 주소서."
결국 태종은 벌떼같은 대신들의 상소 공세에 물러서고 말았다. 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태조 이성계가 방원을 불렀다. 태종은 잔뜩 긴장하고 태상전을 찾았다. 아버지는 편안하게 아들을 맞이했다. 노기어린 질책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
태조 이성계는 방간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잠저(潛邸) 때의 일과 위화도에서 회군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무골 집안에서 태어나 전장을 전전하던 일과 가장으로서 가정을 위태로움에 처하게 하고 나라를 세우던 일을 담담히 술회했다.
"보름동안 심사숙고 끝에 말머리를 남(南)으로 돌릴 때에는 전화(戰禍)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쓰러져 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느니라. 왕명을 어겼다고 죽이면 죽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헌데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더구나. 내 목을 날릴 수 있는 최영 장군이 역설적이게도 날 살렸고 장군이 내 목숨을 이어주더구나.
회군한 나를 편안하게 왕궁으로 초치한 다음 내 몸을 결박해 버렸으면 내 목은 저잣거리에 걸렸을 거야. 헌데 그게 아니었어, 장군이 날 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맞받아쳤지. 그것은 살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하고는 경우가 다른 승패를 결하고 싶은 무장의 본능이다. 옥좌(玉座)를 넘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개경에서 일전을 치르고 나니 내 신세가 호랑이 잔등에 매달린 형국이었다. 내리면 호랑이에 잡혀 먹히거나 범 사냥을 나선 사람들에게 붙잡히는 꼴 말이야.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지.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정신이 없었고 바람에 휘둘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아비에게 과오가 있었다면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다. 실수까지도 말이다.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중심을 잡기 바란다. 이 아비에게 후회라면 바람에 휘둘린 것이다. 하지만 여한이 없다. 이제부터 이 아비에게 욕을 먹이는 것은 네 할 탓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숙연한 공기가 흘렀다. 딱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만도 아니었다. 군왕의 도리와 아들의 도리가 뒤섞인 묘한 분위기였다.
방원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당시 방원은 아버지의 지근거리에 있지 않았다. 전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밀서를 받은 방원은 어머니를 모시고 동북면으로 피난 갔을 뿐이다. 부자지간이지만 이렇게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그동안 없었다.
소요산으로 들어가 버린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는 유지와도 같은 건국과정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상세히 들려주고 홀연히 개경을 떠났다. 개경인들에게 부끄러워 동이 트기 전 새벽을 택했다.
태조 이성계가 소요산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정용수와 승녕부윤(承寧府尹) 유창을 소요산에 보내어 돌아올 것을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경들은 돌아가라. 내가 치재(致齋)하겠다. 장차 나의 후사를 닦으려는 것이다. 경의 주상(主上)은 설 뒤에 와서 보는 것이 좋다."
태종 이방원을 '경의 주상'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갈등의 골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소요산에 별전 공사를 시작한 태조 이성계는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백성들을 징발하여 공사에 투입했다. 동지섣달 추운 날씨에 동원된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예문관(藝文館)에서 상언을 올렸다.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행재소(行在所)를 지으시는데 역사를 하는 자는 백성이 아닙니까? 또 지존으로서 오랫동안 밖에 계시어 전하의 어질고 효성스런 마음씨를 조석으로 펼 수 없게 하니 천심에 어긋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행재소에 납시어 지성으로 돌아오시기를 청하되 만일 윤허하시지 않으면 전하께서도 행재소에 머무르시어 문무백관이 모두 달려가 엎드려 청하게 하소서."
태종 이방원은 여러 종친과 성석린을 대동하고 소요산으로 아버지 이성계를 찾아가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극력 청했다.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개경으로 돌아가 주시옵소서."
"그대들의 뜻을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남녘 하늘을 바라보던 태조 이성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