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서 '金日成と亡命パイロット(김일성과 망명 파일럿)'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에서 직감적으로 노금석이 떠올랐는데,
이웅평이 아닌 노금석을 떠올렸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노금석이 김포공항으로 귀순했을 때 필자는 미취학인 여섯 살이었다.
지금처럼 TV가 '생필품'이던 시대도, 정보가 범람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필자가 노금석을 인지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훨씬 후의 일이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웅평이 아닌 노금석을 떠올린 것은
그 사건의 센세이셔널함이나 충격파가 그 후에 발생한
북한 파일럿의 귀순 사건과는 격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 정부가 오랫동안 노금석을 '귀순용사'로 홍보한
영향일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필자 또래의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노금석을 '잘 안다'.
잘 안다고 해봤자 '미그를 몰고 최초로 귀순했다'라는 것과
조금 더 기억력이 좋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은
'미국 정부로부터 얼만가의 보상금을 받았다' 정도일 것이다.
필자가 아는 것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던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이 쓴
'THE GREAT LEADER AND THE FIGHTER PILOT'의 일역 판이다.
이 책은 김일성과 노금석의 이야기를 교차해 가며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김일성의 이야기를 쓴 다음, 같은 시기의 노금석을 다룬 방식이다.
예를 들어 노금석이 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김포비행장에 착륙하던
시간에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전날 스탈린 사후 처음 만난 소련의 새 지도부로부터 다대한 전후 복구원조 약속과
지지를 받은 김일성은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취침했다.
'김일성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파일럿의 망명을 보고받고..'
라는 식으로 노금석과 연계하여 김일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김일성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알고 있거나 들어본 내용이지만
노금석의 이야기는 대부분 처음 접하는 내용이다.
아래는 노금석의 이야기만 발췌하여 요약 번역해 본 것이다.
X X X
노금석은 1932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닛사츠 콘체른(日窒コンチルン)이라고 하는
일본 재벌회사의 간부사원이었다.
당시의 기준으론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셈이다.
부친은 직장야구팀에서 투수로 활약할 정도였고,
집에서 미국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볼 정도로 상당한 인텔리였다.
노금석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부터 미국을 동경했고,
그것이 그 후 미그를 몰고 망명한 여러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안락했던 노금석의 가정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공산화된 북한에서 노금석의 부친은 졸지에 친일파로 몰려 몰락하고,
설상가상으로 1949년 1월 암으로 사망한다.
그 해 8월 노금석은 보병으로의 징집을 피할 목적으로 해군에 입대한다.
해군병학교에서 교육받고 있을 때 조종사 선발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만주에서 소련군의 비행교육을 받고 우수한 성적을 인정받아 미그기 조종사로 뽑힌다.
단기속성으로 제트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은 뒤
'미그 알레이(Mig- alley)'에서의 미군과의 공중전에 참가한다.
1953년 휴전과 동시에 노금석이 소속한 부대가 만주에서 의주로 이동했고,
다시 2개월 후인 9월에는 새로 건설된 순안비행장으로 이동한다.
순안비행장으로의 이동은 탈북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금석에겐 더없는 호재였다.
결국 순안비행장에서의 첫 비행 때 탈북을 감행하여
어렸을 적부터 동경하던'아메리칸드림'의 첫 발을 디디게 된다.
X X X
1949년 8월 북한 해군에 입대하여 1953년 9월 김포로 탈북할 때까지
4년여에 걸친 노금석의 여정을 관찰해 보면 영리함과 적시운(適時運)이
겹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관문인 해군의 입대도 그가 영리하지 못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첫 시험에서 낙방한 결정적인 이유는 부친의 '친일'이었다.
불합격 후 그 사실을 알게 된 노금석은 두 번째 응시 땐
부친의 경력을 철저하게 '세탁'하여 합격한다.
당시 북한은 전투기 파일럿을 단기간에 양성하기 위하여 대상자들을 선발하고 있었다.
노금석이 교육받고 있던 해군병 학교에도 대상자를 뽑기 위해 군의관들이 방문했다.
당초 노금석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조종사 선발이라는 것을 알고
응시하여 합격한다.
그가 파일럿에 응시한 것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교육을 받다 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몰고 탈북할 생각은 파일럿이 된 이후의 일이다.
당시 소련 공군은 정규교육의 1/4 시간에 불과한 초단기 훈련으로
북한의 파일럿을 속성으로 양성했다.
교육을 마치고 실전부대에 배치된 노금석은 철저하게 골수 공산당원으로 행세한다.
체제나 이념에 조그마한 결격사유도 허용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자구책 차원이었다.
1953년 9월 순안비행장으로의 부대 이동은 비행기를 몰고
탈북할 생각에 빠져있던 노금석에겐 일종의 행운이었다.
순안비행장에서 김포비행장까지는 150km에 불과했다.
노금석의 부대에 배치된 미그기는 최신형인 'MIG-15 bis'였다.
그동안 관행상 새 비행기의 첫 비행은 소련군 파일럿의 몫이었지만,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부터는 부대 내에서 가장 우수한
북한 공군의 파일럿으로 대체되었다.
노금석은 부대 내에서 가장 우수한 파일럿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53년 9월 20일 아침 '전군전투즉응체제'가 발령되고,
다음 날인 9월 21일의 첫 비행 임무가 노금석과
그의 동료인 최명재 중위에게 하달되었다.
노금석은 이때 '탈북'을 결심한 상태였다.
9월 21일 9시 5분 노금석 다음으로 두 번째
이륙할 최명재 중위가 옆에 앉아 있었다.
노금석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노: 오늘은 조금 더 비행해 볼까...
최: 그래? 나는 남조선 근처까지 한 번 날아가 볼까..
노: -묵묵부답 -
최: 저쪽에 착륙해도 좋지 않아?
최명재의 말은 농담이지만 노금석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금석은 이때 슬그머니 첫 이륙의 명예를 최명재에게 양보한다.
"순안비행장에서 최초로 이륙한 비행사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
노금석의 불순한(?) 의도를 알리 없는 최명재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노금석은 속으로 웅얼거렸다.
'너무 빨리 착륙하지 말아줘... 네가 착륙하면 나도 착륙하라고 관제사가 재촉할테니까..'
최명재에 이어 두 번째로 이륙한 노금석은 곧장 중국 쪽으로 날았다.
그리고 얼마 후 서해 쪽으로 좌선회하여 남하하다가
다시 좌선회하여 조선반도 쪽으로 비행했다.
고도 5,800미터 상공, 그는 취소 불가능한 결단을 한다.
좌선회하면 북조선이고, 우선회하면 남조선인 분기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과거를 되돌아봤다.
사실 북한 정권은 그에게 잘해줬다.
제트기 조종 훈련을 받게 해 보병으로 전사할 일도 없애줬고,
훈장도 주고, 잘 먹여주고, 급료도 좋았다.
장차에는 북조선의 엘리트가 될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북조선은 그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친이 남조선으로 내려갔고, -그의 모친은 흥남철수 때 월남하였다.-
어렸을 적 꿈이던 '아메리칸드림'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 순간 좌선회 대신 우선회를 했다.
대기(對氣) 속도 -항공기와 대기와의 상대속도- 는 998km/h.
가슴은 격렬하게 고동치고, 휴전선이 가까워도 대공포의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 전체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명재 중위가 지상관제에 착륙허가를 요구하는 무선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얼마 후 지상관제에서 노금석을 호출했다.
"어디있나 87?"
87은 노금석의 코드 번호다.
노금석이 김포비행장 상공에 도달한 것은 순안비행장 이륙으로부터 17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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