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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 이름에 이름을 붙이면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 : (도에) 이름 없음(無名)이 천지의 시작(始)이고,
有名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 : (도에) 이름 있음(有名)이 만물의 어미(母)가 되리라,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 고로 늘 (도에) 무욕(無欲)함으로써 그 오묘한 모습(妙)을 볼 것이고,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관기요) : 늘 (도를) 희구함(有欲)으로써 그 드러난 모습(徼)을 볼 것이다.
此兩者同 (차량자동) : 이 둘은 동일한(同) 것이려니,
出而異名 (출이이명) : 나오면서 이름(名)을 달리 할 뿐이다.
同謂之玄 (동위지현) : 이 동일함(同)을 그윽하다 할 것이니,
玄之又玄 (현지우현) : 그윽하고 또 그윽해서,
衆妙之門 (중묘지문) : 온갖 오묘한 모습(衆妙)으로 가는 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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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에 이름을 붙이면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도에) 이름 없음(無名)이 천지의 시작(始)이고,
(도에) 이름 있음(有名)이 만물의 어미(母)가 되리라.
고로 늘 (도에) 무욕(無欲)함으로써 그 오묘한 모습(妙)을 볼 것이고,
늘 (도를) 희구함(有欲)으로써 그 드러난 모습(徼)을 볼 것이다.
이 둘은 동일한(同) 것이려니,
나오면서 이름(名)을 달리할 뿐이다.
이 동일함(同)을 그윽하다 할 것이니,
그윽하고 또 그윽해서,
온갖 오묘한 모습(衆妙)으로 가는 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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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역>
- 도란 무엇인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in English)
The Tao that can be spoken of is not the eternal Tao;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ternal name.
The unnamable is the beginning of heaven and earth;
The namable is the mother of all.
Therefore, get rid of your desire, and you will see its mystery.
Caught in desire, you will see only its menisfestations.
Both of them are from the same source.
They are only called by different names.
Both of them are a mystery.
A mystery upon a mystery; the gate of all subtleties.
<노바당 역>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도>가 영원한 <도>는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을 수 있지만 그 <이름>이 영원한 <이름>은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는 만물의 모태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으며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현상>만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다
이를 일러 신비롭다고 말한다
신비롭고 또 신비로우니
모든 신비의 문이다
<임채우 역>
1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하지 않으니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니,
천지의 시원에는 이름이 없고, *****
만물이 생겨나서야 이름이 있게 되었다. ****
그러므로 이름이 없을 적엔
무욕(無欲)으로 그 신묘함을 바라보고,
이름이 생겨난 뒤엔
유욕(有欲)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를 뿐
같이 현묘하다고 일컬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신묘함이 나오는 문이 된다.
<James Legge 역>
1. The Tao that can be trodden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Tao.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name.
2. (Conceived of as) having no name, it is the Originator of heaven and earth; (conceived of as) having a name, it is the Mother of all things.
3. Always without desire we must be found, If its deep mystery we would sound; But if desire always within us be, Its outer fringe is all that we shall see.
4. Under these two aspects, it is really the same; but as development takes place, it receives the different names. Together we call them the Mystery. Where the Mystery is the deepest is the gate of all that is subtle and wonderful.
<Lin Derek 역>
The Tao that can be spoken is not the eternal Tao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ternal name
The nameless is the origin of Heaven and Earth
The named is the mother of myriad things
Thus, constantly without desire, one observes its essence
Constantly with desire, one observes its manifestations
These two emerge together but differ in name
The unity is said to be the mystery
Mystery of mysteries, the door to all wonders
<The Tao of Emerson>
Under these two aspects
it is really the same;
But as development takes place
it receives the different names.
Together we call them the Mystery.
Where the Mystery is the deepest
is the gate of all that is subtle and wonderful.
That great nature in which we rest,
that Unity, that Over-Soul,
Is an Immensity not possessed,
and that cannot be possessed.
The animal eye sees, with wonderful
accuracy,
sharp outlines and colored surfaces.
To a more earnest vision,
outlines and surfaces
become transparent;
Causes and spirits
are seen through them.
The wise silence,
the universal beauty,
To which every part and particle
is equally related,
Is the tide of being which floats us
into the secret of nature;
And we stand before
the secret of the world.
<장 도연 역>
제1장 道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
道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으며
말로 설명된 道는 그 진실을 잃는다.
이름 역시 문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문자로 명명命名한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은 천지만물의 시작이고 천지 창시의 근원이다.
천지가 생긴 후 有名은 그것을 낳고 자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道의 오묘함妙을 볼 수 있고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道의 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인 요徼밖에 볼 수 없다.
무명무형과 유명유형은 모두 道에서 나온
부동한 형태이면서 같은 진리이다.
그 근원을 玄이라고 하는데
온갖 오묘함이 이 門을 통해서 나온다.
<왕필 노자주, 임채우 역>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니,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구체적인) 일이나 형체를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可道之道, 可名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주석>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굴된 백서본(帛書本) 『노자』에는 ‘천지지시’(天地之始)가 ‘만물지시’(萬物之始)로 되어 있다.
무릇 유(有)는 모두 무(無)에서 시작하므로,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 된다. 형체가 드러나고 이름이 있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자라게 하고, 길러주고, 형체를 드러나게 해주고, 완성시켜 주니 (有名은) 그 어미가 된다. 도가 무형과 무명으로 만물을 시작시키고 이루어주면, 만물은 그것에 의해 시작하고 이루어지되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는 것이다.
凡有皆始於無, 故未形無名之時, 則爲萬物之始. 及其有形有名之時, 則長之育之亭之毒之, 爲其母也. 言道以無形無名始成萬物, [萬物]以始以成而不知其所以[然], 玄之又玄也.
<주석>
[ ]안의 글자는 판본에 따라 없음을 표시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주석>
뒤의 『노자』 51장에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亭之毒之養之覆之”라고 했고, 같은 곳의 왕필(王弼) 주(注)에서 “亭謂品其形, 毒謂成其質, 各得其庇蔭, 不傷其體矣”라고 했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으로 그 미묘함을 바라보고,
故常無欲, 以觀其妙;
묘(妙)는 미세함의 극치다. 만물은 미묘한 데서 비롯한 후에 이루어지며, 무(無)에서 시작한 뒤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하고 공허함으로 그 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을 관조한다.
妙者, 微之極也. 萬物始於微而後成, 始於無而後生. 故常無欲空虛, 可以觀其始物之妙.
항상 유욕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常有欲, 以觀其徼.
<주석>
장석창(蔣錫昌)은 요(徼)를 요구(要求)의 뜻으로 보아서, 욕심이 생긴 뒤에 사물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요구를 잘 살펴서 무욕의 도의 세계로 돌이키라는 뜻으로 보았다.(『노자교고』(老子校詁), 9쪽 참조)
요(徼)는 돌아가 마침이다. 무릇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반드시 무(無)를 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욕망의 뿌리가 되는 바는 도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그러므로 항상 욕망이 있을 때에는 그로써 만물이 끝나서 돌아가 마침을 관조하는 것이다.
徼, 歸終也. 凡有之爲利, 必以無爲用; 欲之所本, 適道而後濟. 故常有欲, 可以觀其終物之徼也.
<주석>
이 구절은 『주역』 「계사상전」의 “앎은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는 천하를 구제한다(知周乎萬物 道濟天下)”를 인용한 것이다.
<주석>
『노자』 11장 참조.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뭇 신묘함의 문이 된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두 가지란 시(始)와 모(母)이다. 같이 나왔다는 것은 현묘한 데서 똑같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적용되는 곳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머리에서는 ‘시’라고 이르고, 끝에서는 ‘모’라고 한다. ‘현’이란 어둡고 고요히 텅 빈 것이다. ‘시’는 ‘모’가 나오는 곳이다. 이름 붙일 수 없으므로 같이 ‘현’(玄)이라고 할 수도 없으나, ‘같이 현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어떠어떠하다고 이를 수 없으므로 하나의 ‘현’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다. 만일 하나의 ‘현’이라고 단정한다면 그 이름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고 하였다. 뭇 신묘함이 모두 ‘현’을 좇아 나오므로 ‘뭇 신묘함의 문이다’라고 하였다.
兩者, 始與母也. 同出者, 同出於玄也. 異名, 所施不可同也. 在首則謂之始, 在終則謂之母. 玄者, 冥默無有也, 始, 母之所出也. 不可得而名, 故不可言同名曰玄. 而言[同]謂之玄者, 取於不可得而謂之然也. [不可得而]謂之然, 則不可以定乎一玄而已. [若定乎一玄], 則是名則失之遠矣. 故曰玄之又玄也. 衆妙皆從[玄]而出, 故曰衆妙之門也.
<주석>
뒤의 『노자』 25장에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이라 했고 왕필은 “吾所以字之曰道者, 取其可言之稱最大也. 責其字定之所由, 則繫於大. 夫有繫則必有分, 有分則失其極矣”라고 했다.
<주석>
루우열(樓宇烈)은 ‘所施不可同也’를 ‘적용되는 곳이 같지 않다(所施不同也)’라고 해석했다.
<John Minford 역>
The Tao that can be Told
Is not the True Tao;
Names that can be Named
Are not True Names.
The Origin of Heaven and Earth
Has no Name.
The Mother of the Myriad Things
Has a Name.
Free from Desire,
Contemplate the Inner Marvel;
With Desire,
Observe the Outer Radiance.
These issue from One Source,
But have different Names.
They are both a Mystery.
Mystery of Mysteries,
Gateway to All Marvels.
<Stefan Stenudd 역>
The Way that can be walked is not the eternal Way.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ternal name.
The nameless is the beginning of Heaven and Earth.
The named is the mother of all things.
Therefore:
Free from desire you see the mystery.
Full of desire you see the manifestations.
These two have the same origin but differ in name.
That is the secret,
The secret of secrets,
The gate to all mysteries.
It’s All Real
Lao Tzu begins his writing about Tao , the Way, by stating that the written word cannot fully encompass the real thing. The workings of the Way are hidden behind what we can observe. It was present at the dawn of time and the birth of the universe, but it’s visible only through what has been created out of it, in accordance with it: the whole world and all its creatures. Tao is the Way the universe works.
But that also means it can be understood by observing what can be observed: the manifestations. When we indulge in the world as we perceive it, we might be blinded by the splendor and magnitude of it all, but we do witness the workings of the Way, which is the principle behind it. We don’t see the interior, but the surface. Still, its shape reveals a lot about what it covers.
If we want to see beneath the surface, into what really makes up the world, we have to detach ourselves from the attraction of that surface. When we distance ourselves from the world as if we are not at all part of it, then we can see through it. The mystery of its true nature becomes evident.
This is like an echo of Buddhism, although preceding it. Truth is revealed to the one who detaches himself from the world, not tempted by anything in it and not distracted by any of its phenomena.
Because we allow ourselves to be consumed by the world, we can’t see it clearly. If we cease to look at the world for what we hope or fear that it will be to us, then we can see what it really is – its true nature, which is the Way.
But we don’t have to see through the world to manage living in it. The manifestation is an expression of the Way, so it’s as real and essential as the Way itself. Like the two sides of a coin. The world can be understood from its surface as well as from its interior. The descriptive words will differ, but the world and its workings remain the same.
The surface is just as real as what lies beneath it. They reveal one another. None exists without the other, so none is superior or inferior.
Opposites
We tend to think in opposites – light or dark, high or low, hot or cold, and so on. That’s fine as a method of getting acquainted with the world and beginning to understand how it works. But when we make judgments, calling one opposite good and the other bad, we are mistaken. They complement and depend on each other. Even when one of them seems obviously superior, neglecting the other is unwise.
Many belief systems praise the spirit and condemn the body, but the latter is the vessel of the former. They depend on each other. A spirit without a body cannot act, nor can a body without spirit. The Taoist treats each according to its nature. Both of them need concern and nourishment. Whichever one is neglected, both will suffer.
The unity of surface and interior also tells us that we should not make them contradict. If you pretend to be something that you are not, then your outside and inside are in conflict. Somewhere along the way you will break. They don’t need to be exactly the same. They cannot, since they differ in nature. But they are companions on one and the same path. A human being is a whole, walking one way. If this whole is divided, for whatever reason, you will halt. You get nowhere.
When we accept that the mystery and the manifestations mirror each other, the secret is revealed. We can understand all.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but you have to truly see it for what it is.
The manifestations become clear when you observe them with delight. The mystery appears when you detach yourself from the world and empty your mind. You will discover their unity: something and nothing embrace, and become all.
<사봉 역>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진리의 도가 아닐지라도 도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진정한 이름이 아닐지라도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무(無)는 천지의 시작이고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유(有)는 만물의 시작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그러므로 항상 무(無)는 천지의 오묘함을 나타내고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항상 유(有)는 만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此兩者 同出而異名(차양자 동출이이명)
무(無)와 유(有)는 동시에 태어났으나 이름이 다르다
同謂之玄(동위지현)
무와 유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니 아리송하다
玄之又玄(현지우현)
아리송하고 또 아리송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이것이 바로 우주의 오묘한 문이구나
<김 홍경 역>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의 문이 된다.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故恒无欲也, 以觀其妙. 恒有欲也, 以觀其所皦. 兩者同出, 異名同謂, 玄之又玄, 衆妙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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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의 도입장.
道에 대한 깨닳음 그리고 천지근원에 대한 이해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나
인식체계상 여러 중간다리에 대한 모색과정을 통해
道 그리고 천지근원을 넘겨짚을 수 있다는 점을 에둘러서 얘기하는 듯
인식론, 본질론 등의 철학적 용어로 하면,
본질에 대한 우리네 인식체계의 한계와 그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무욕과 유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울러 담겨있는 듯
Robert Frost의 시 Birch에서 현실과 이상의 중간다리로서 자작나무를 노래하면서
인생의 타협점을 찾고 있는데
노자는 무욕과 유욕의 상관고리관계(결국은 같은 것이다하는 관계)를 노래하면서
도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Frost나 노자나 비슷하게 낙관적인 듯
한편, 불가에서의 法眼 智眼 佛眼이 이 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점때문에
노자를 공자나 맹자와 같은 단순 도덕철학자를 넘어 사상철학자로 간주하기도 하고
장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노자를 현실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또한 그러한 것이 작금에 이르러서도 도덕경이 동서양을 넘어 회자되는 이유가 아닐까
도덕경의 신비로움을 1장에서부터 맛보고 있는 듯
도덕경이 난해한 이유
1. 도덕철학, 사상철학이 심오하기 때문에?
2. 2500년 묵은 한문 고전이기 때문에?
3. 인식론, 본질론을 둘러싼 선문답의 1장때문에?
어쨋거나,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이 책을 이제서나마 접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다행스럽다
글자 하나 하나 귀절 하나 하나가 깊이 스며들어온다 할까
楞伽經之四(능가경 7권)
某夜成正覺 :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某夜般涅槃 :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於此二中間 : 49년 동안
我都無所說 : 내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으리니
自證本住法 :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故作是密語 : 밀어를 나눈 것이니
我及諸如來 : 나와 모든 여래
無有少差別 : 조금의 차별도 있을 수가 없을지라
(석가 왈, 49년 동안 내 한 마디로 설한 적이 없느니라)
無名 도덕경 비교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32장) 道常無名, 樸, 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無欲 도덕경 비교
(1장)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3장)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34장)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37장)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57장) 我無欲而民自樸
母(牝, 陰) 도덕경 비교
(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20장)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료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59장)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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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어떤 사람은 도덕경이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도 하겠다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도덕경을 풀이한 사람들 면면을 보다보면, 철학자, 한문학자와 같은 전문가는 물론이고 목사도 있고 신부도 있고 스님도 있고 기업주도 있고 사회활동가도 있다.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녹색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패미니스트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 색깔을 담아서 풀이하기 시작하면 같은 듯 다른 듯 온갖 도덕경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다. 각각의 얘기를 따로 들으면 하나같이 그럴 듯하다. 다만 한자리에서 모아서 보면 서로 부딪힌다든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풀이가 눈에 뜨인다. 자기 색깔을 과하게 넣다보니 아전인수가 되는 것일까? 이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남은 운문의 의미를 풀어 헤치다보니 복잡다단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실로 많은 시각을 아우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도덕경에 담겨져 있어서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해서 두 세 시간 후에 마치는 산행에 빠진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는 허허벌판인 듯싶다가 점차 어둠이 흩어지면서 새들이 일어나서 짜그락거리면서 산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해가 말갛게 떠오르면서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숲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아릴 정도가 되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세상이 성큼 다가온다.
이런 새벽 산행을 몇 년 하다 보니 사계절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의 모습에도 민감해지는 것 같다. 바로 지난주에 갔을 때는 생명의 기운이라곤 아예 없었는데 이번 주에 갔을 때에는 무언가 자그마한 순이 움터지는 것을 본 것도 같고 다음 주에 갔을 때에는 모든 나무가 폭발하듯이 새순을 내기 시작한다. 얼마 후에는 모든 산이 녹음으로 우거지고 또 얼마 지나면 단풍으로 가득차고 조금 더 지나면 아무 것도 없는 헐벗은 나무로 가득 차는 것이다. 해가 바뀌면, 그런 적이 전에는 아예 없었다는 듯이, 천연스럽게 다시 움을 내고 가지와 잎을 낸다. 올해의 움은 지난해의 바로 그 움은 아니었으리라.
결국 이른 새벽의 산행은 벌써 전에 도시인이 되어 버린 나 같은 사람마저 난데없이 고즈넉하게 하고 사념에 빠지게 하는 무어가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세상은 바로 거기에 늘 있었는데, 빛이 없기에 허허벌판으로 느끼다가 빛이 있기에 갑자기 세상을 느끼는 건 무엇 때문일까? 풀과 나무는 저리 의연하게 움을 내고 왕성하게 뻗어나가다가 단풍이 되고 아낌없이 스러지는데 또 해가 바뀌면 지난해에 하였던 것을 천연스럽게 반복하는데, 왜 나는 저들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들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내 눈에 그리 보일 뿐,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제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일까?
동물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은 그저 태평하고 스스로에게 만족스럽다.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들은 저희들 처지에 대해 부단히 땀 흘리지도 않고 낑낑대지도 않는다.
그들은 저희들 원죄를 두고 어둠 속에 깨어 있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신을 향한 저희들 의무를 따짐으로써 나를 고달프게 하지 않는다.
불만스러운 놈 하나 없고 소유욕에 미쳐 날뛰는 놈 하나 없다.
서로에게 무릎을 꿇는 놈 하나 없고 수천 년 전에 살았을 저희 동족에게도 무릎을 꿇는 놈 하나 없다.
서로에 비해 더 존경스러운 놈 하나 없고 삼라만상을 앞에 두고 불행해 하는 놈 하나 없다.
월트 휘트먼 - 나 자신의 노래 32
얘기가 잠깐 샜는데,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산행을 끝내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씻은 듯이 잊어버리는 그런 의문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의 품고 있을, 어쩌면 동서고금의 철학과 신앙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을지도 모를 주제들이 도덕경의 일장에서 한꺼번에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연하게 조선시대 유학자 정석주의 정노(訂老)라는 도덕경 풀이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 ‘요원하고 미묘한’ 일장을 통해서 도덕경 전체를 아우르고 나아가서는 동양철학을 요약하고 있었다. 일장이 지니고 있는 알 듯 말 듯싶은 가르침으로 인하여 도덕경이 ‘괴이하고 황당한’ 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까지 미리 경계하고 있었다. 오십 자가 조금 넘는 짧은 문장에서 그 어려운 질문과 화두가 망라되고 있다면, 풀이를 하는 사람의 다소간 입장에 따라 다른 듯싶은 혹은 실제 다른 풀이의 도덕경이 난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장을 둘러싼 온갖 풀이를 대할 때마다 도덕경이야말로 천의 얼굴을 가진 책이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경 제일장에 대해 내가 이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는 제대로 알 수 없고 특히 도를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도경이라 알려지는 도덕경의 앞부분을 보아도 도에 대한 은유와 비유가 계속될 뿐이지 속 시원하게 도는 이것이다 하는 게 없다. 도에 대해 안다고 하는 순간 아는 게 아는 것이 아니라는 대전제는 뒷부분에서도 계속된다. 석가가 49년 동안 가르침을 하고 열반에 들 때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리라. 노자가 모르겠다고 하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둘째, 내 생각에 따르자면, 동양 고전의 단골 사유 개념인 무와 유에 대한 성찰이 일장에서 시작되는데, 무는 천지의 시원이고 유는 만물의 모태이며, 무에 대해 항상 면밀하게 희구하다보면 도의 묘함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유에 대해 항상 면밀하게 희구하다보면 우리가 사는 삼라만상에서 그 드러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많이 헷갈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리 걱정할 일만은 아니었다. 도편이라고 알려진 도덕경 앞부분 전체가 유와 무가 무엇이고 항상 면밀하게 희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에 할애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한 마디로 도는 이것이다 하는 명쾌한 얘기는 없다. 이렇지 않겠느냐 저렇지 않겠느냐 하는 은유와 비유의 얘기가 이어질 뿐이다. 사실 내가 노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도에 대한 논의 혹은 무유 논의 때문이 아니고 솔직 담백한 노자 특유의 은유법에 매료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직접적인 언어적 사유로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럴 때 동서고금의 성인들이 주로 채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 우화이고 대화이고 사람 살아가는 실례였고 노자의 경우에는 은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건 그렇고, 도에 대한 이야기, 유무에 대한 이야기는 뒷부분에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있으니 여기 첫 도입부에서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한다.
셋째, 무를 항상 면밀하게 희구하면서 볼 수 있는 도의 묘함과 유를 항상 면밀하게 희구하면서 볼 수 있는 삼라만상에서 드러난 모습은 서로 같은 것이고 이 점이 온갖 묘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를 찬찬히 살펴봄으로써 그 숨겨진 의미를 직관할 수 있다면, 그를 통해서 알 수 없는 도의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요즘 말로 하면 도로 갈 수 있는 백도어(trapdoor)가 존재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성경에서 하늘나라는 너의 영속에도 있다거나 불교경전에서 깨달음은 너의 마음가짐 하나에 달렸다는 얘기와 맥락을 같이 하리라.
넷째, 무명(無名)이라는 글자 풀이에 있어, ‘무가 천지의 시원을 이른다’가 아니라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원이다‘라고 풀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상무욕(常無欲)이라는 글자 풀이에 있어서도, ‘무에 대해 항상 면밀하게 희구하면’이 아니라 ‘항상 무욕하면’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 역시 그렇게 풀이하면서 도덕경을 읽을 때가 혹간 있다. 무책임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시각에서 도덕경을 읽음으로써 그 울어나는 맛이 끊임없이 달라지는 것이 내가 도덕경을 즐기는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와 같이 풀이하는 순간, 무와 유에 대한 논의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전자의 경우 이름을 붙이느냐 붙이지 않느냐의 언어적 사유 관점 그리고 후자의 경우 유욕과 무욕이라는 관점에서 일장을 읽어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은 첫 번째 얘기에 심취하여 말의 태생적인 한계를 지적한 노자를 강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두 번째 얘기에 심취하여 무의 세계는 이렇고 유의 세계가 그렇다고 하는 노자를 강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세 번째 얘기에 심취하여 실질세계와 현상세계의 동질성 내지는 연관성을 지적하는 노자를 강변하기도 한다. 각각을 두고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데, 이 세 가지 주제가 한군데에 섞여 있다 보니 어떤 화두에 관심을 더 두느냐에 따라 도덕경 풀이의 첫 시작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네 번째 얘기에서처럼, 온갖 글자에 대한 각양각생의 풀이가 더해지면, 일장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이란 그야말로 점입가경의 수준으로 들어간다. 도덕경 일장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안심해도 좋은 것은, 총론에 해당하는 일장과 이장이 좀 난해하고 추상적일 뿐이지, 이어지는 각론의 장들은 상당히 단도직입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점이다. 우화나 대화 형태의 산문이 아니기에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그 의미 파악에 어려움이 따르는 건 있다. 그럼에도 노자의 운문은 대부분 매우 솔직 담백하고 반복적이라는 게 내 느낌이다. 따라서 어떤 풀이가 다소 낯설게 혹은 다소 복잡다단하게 펼쳐지면, 접어두고 읽어나가는 것도 좋으리라. 이해하지 못하는 공백이 있다고 해서 억지로 꿰어 맞추고자 한다면 명색이 여백의 미학을 노래한다는 도덕경을 읽는 사람으로의 기본자세가 아닐 수도 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남겨두고 읽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한다. 게다가 뒤에 알기 쉬운 은유와 비유의 표현이 계속 나오니까 말이다.
풀이에 있어 오리무중일 때 내가 도덕경을 읽는 비결 아닌 비결을 하나 얘기하자면, 그 글귀의 풀이가 그 운문 전체 차원에서 맥이 닿는지, 그 전후 운문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글귀가 도덕경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된 뜻과 합당한지를 보는 습관이 있다. 소위 도덕경으로 도덕경을 읽는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수천 년을 넘어 우리 손에 넘어오기까지는 좋든 나쁘든 첨삭과 윤색의 과정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특정 글귀에 메이지 않도록 하는 자세도 중요하리라.
일장 얘기로 돌아가면, 철학과 신앙의 가볍지 않은 이 모든 화두를 한 곳에 모아서 총론으로 갈무리하는 것을 보면 노자에게도 그리해야 할 이유가 달리 있었는지도 모른다. 원천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도이고 그를 표현하는 언어라는 그릇에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다. 또한 유무에 대한 철학적 논의 역시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상의 세계를 직관하여 무언가 볼 수 있게 됨으로써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본질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중요했을지 모른다. 즉,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다는 이유로 이 세계를 마냥 부인하고 경시할 것도 아니고 신기루 같이 다다를 수 없다는 이유로 저 본질의 세상을 외면할 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쉬운 말로 하면, 먼 데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 찾으라는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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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 김홍경 / 帛書校勘版 第四十五章 觀眇
통행본 1장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의 문이 된다.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故恒无欲也, 以觀其妙. 恒有欲也, 以觀其所皦. 兩者同出, 異名同謂, 玄之又玄, 衆妙之門.1)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두 번째의 '도(道)'는 동사로서 말한다는 뜻이다(『광아』 「석고 2」). 이 글자를 길을 걷는다는 뜻으로 보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오징) 현재는 모두 말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여기에서도 따른다.
이 문장을 보면 네 개의 '야(也)'자가 들어가 있다. 을본은 많이 지워져서 확실하지 않지만 마지막에 '야'자가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갑본과 같았던 것 같다. 반면 모든 통행본에는 '야'자가 없다.
이처럼 백서는 구절이 끝나는 곳에서 통행본보다 훨씬 많은 '야'자를 사용한다. 통계를 내보면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제외하고도 백서 갑본이 119회, 을본이 131회 이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고본을 표방한 부혁본은 51회이고, 현행 왕필·하상공본은 모두 단 13회만 이 글자를 사용한다. 곽점 초간문의 경우에는 『노자』와 관련된 2천자가 조금 넘는 문장에서 모두 55회에 걸쳐 '야'자를 쓴다. 현행본 『노자』는 판본마다 자수에 차이가 있지만 거의 모두 5천 자를 상회하므로(왕필본 5,281자, 하상공본 5,268자)2) 초간문도 백서와 비슷한 빈도로 '야'자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고본이라는 부혁본도 통행본보다 훨씬 많은 '야'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노자』 고본에는 확실히 '야'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안씨가훈』 「서증」은 "야(也)는 말을 멈추거나 구절을 짓는 데 도움을 주는 말인데 문적 중에 이 글자가 거의 들어 있다. 그렇지만 하북의 경전에서는 자못 이 글자를 생략한 것이 많고, 그 가운데에는 '야'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그 실례를 들고 있다. 동시에 「서증」은 "오늘날 속학이 있어서 경전 중에 '야'자가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대로 그것을 덧붙이지만 매번 적당하지 않아서 더욱 가소로운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백서가 통행본보다 '야'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속학이라서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본 『노자』는 원래 '야'자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것이 하북 곧 중원 지방으로 전해지면서 통행본처럼 '야'자가 파격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문장 해석을 둘러싸고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백서의 '야'자가 논쟁적이었던 해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는가 하는 실례를 보게 될 것이다.
백서와는 달리 오늘날 전해지는 도사 계통의 판본, 곧 『상이』라든가 돈황 사본 그리고 여러 도관에서 발견된 비본(碑本) 등은 거의 모든 '야'자를 생략한다. 사마천은 노자가 5천여 언의 저서를 남겼다고 하였고, 그에 맞춰 도사들은 『노자』를 5천 자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5천 자가 넘으면서도 함축적인 『노자』를 5천 자로 줄이려면 '야'자 같은 허사를 과감히 생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작업 끝에 『노자』를 5천 자로 재편집한 최초의 집단은 후한의 오두미교(五斗米敎), 곧 천사도 집단이었던 것 같다. 유대빈(劉大彬)의 『모산지(茅山志)』를 보면 "현사(玄師) 양진인(楊眞人: 楊羲)이 장진남(張鎭南: 張魯)의 고본을 베꼈는데, 이른바 『오천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모두 5천 자였다"는 기록이 있고(「도산책(道山冊)」), 또 돈황 필사본 중에서는 "오천언 상하 두 권" "계사(係師: 장노) 지음"이라는 말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에 따르면 『오천문』은 장노에 의해 편집된 것 같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두광정본에서는 장도릉(張道陵)이 『오천문』을 주해했다고 하였으며, 당의 승려 법림(法琳)은 「변정론(辨正論)」에서 "도사 장도릉이 『황서(黃書)』를 분별하여 『오천문』을 주해하였다"고 하였다(『광홍명집』). 그러므로 장도릉인지 장노인지는 불분명하고, 단지 천사도 집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요종이는 이 『오천문』이 바로 『상이』라고 주장했다(이상 요종이 참조).
통행본의 '상(常)'이 백서에서 거의 대부분 '항(恒)'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고형은 이 문장을 설명하면서 『노자』의 '상'에는 네 가지 뜻이 있고 여기에서는 '자연'의 뜻으로 쓰였다고 하였다. 백서를 보면 '상'은 거의 '항'이고 대개는 개념어가 아니라 부사나 형용사다. 『한비자』 「해로」는 "무릇 사물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죽었다가 살아나며 처음에는 번성했다가 나중에는 쇠약해지는 것 등은 상(常)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천지가 쪼개져 생겨날 때 같이 생겨났다가 천지가 사라진 뒤에도 죽거나 쇠약해지지 않는 것이 상(常)이다"라고 하여 '상'이라는 개념을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백서라면 이런 설명이 나올 수 없다. 후대에 바뀐 글자를 가지고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해로」는 백서 이후의 글이다.
이제 이 문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말하는 도가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이 문장은 통행본 『노자』의 첫머리에 있으므로 종래 주해들은 한결같이 개종명의의 의미를 두고 있다. 백서에서는 덕편이 앞에 나오기 때문에 개종명의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만은 틀림없다.
『노자』의 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노자』가 알려진 뒤로 최근까지 그 도가 무엇인지 이러쿵저러쿵 합의되지 않은 논의들이 많았다. 최근의 어떤 글을 보면 이제까지의 『노자』의 도를 규정하려는 논의는 대체로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본체나 원리로 보는 견해이고(정신적 실체냐 물질적 실체냐 하는 논의도 포함해서), 둘째는 실체로 인정하면서도 가치 규범의 근거로 파악하는 견해이며, 셋째는 주관 경계로 파악하는 견해이고, 넷째는 이른바 관통 해석의 경향을 띠는 견해이다(유소감, 1999).
당연히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단지 참고할 뿐이다. 사실 이런 분류를 참고하더라도 『노자』의 도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강단적 논의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논의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정의가 잘 되지 않는 것을 정의하려는 부단한 노력 자체가 학문이다. 그런 노력을 많이 하면 자기 스스로 세계와 인생을 사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노자』로 돌아오자.
지금 『노자』는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위와 같은 분류에 속하는 어떤 견해이든 도를 정확히 알려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형이상학적 실체라고 말하면 그것도 『노자』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무슨 가치 규범의 근거라든가 주관 경계라고 하는 것도 『노자』가 마음에 들어할 리 없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비주의나 불가지론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 자체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 것보다는 왜 『노자』가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는지 그 배경을 생각해보면 어떤 복잡한 논의보다 도의 본래 면목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에 『노자』의 도는 위에서 분류된 수많은 견해를 다 포괄하며, 앞으로 나올 어떤 도에 대한 규정도 포괄한다. 세상의 모든 말해진 진리를 뛰어넘어 규정되지 않는 자기 진리의 보편성을 선언하는 것이 『노자』의 도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전국 말기에서 진대에 걸친 시기의 작품이다. 비록 그 안에서 훨씬 이전의 사유가 발견되고, 너무나 중국적인 것으로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사유가 관찰된다고 하더라도 정체로서의 『노자』는 전국 말기에서 진대에 걸쳐 탄생했다. 그때는 이미 유가와 묵가가 세상의 현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그외에도 많은 군소 학파, 사상가가 저마다의 진리를 내세우며 유세를 하였다. 늦게 태어난 것은 때로는 불행이지만 때로는 행운이다. 『노자』는 다른 유세가의 '진리'를 알고 있었고, 그보다 더 뛰어난 진리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간파했다. 다른 유세가가 '무엇'을 주장했다면 그 모든 '무엇'을 다 포용하는 '무엇'이 자기에게 있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그 '무엇'이 『노자』의 도다.
내 경우 책을 읽다보면, 특히 어려운 책이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얼른 들어오지 않을 때면 해당 내용이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방법인데, 때로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미약한 존재여서 때로는 이런 황당한 이분법적 경직성에 구원을 청할 때가 있다. 혹시 『노자』의 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이런 방법을 한 번 동원해보는 것은 어떨까. 곧 『노자』의 도는 좋은 것이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것이고, 모든 좋은 것을 다 모아놓은 것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 중에 비슷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과 도를 유비할 수도 있다. 가령 도는 하느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부처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논의가 항상 부족하게 여겨지듯이 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도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부족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유비는 자칫 모든 사람을 화나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 도가 그런 정도의 스케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도와 유비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도와 그것이 완전히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도는 이전 전통에서의 하늘(천)을 대신하는 개념이다. 하늘(천)은 은나라의 최고신이었던 상제가 은말의 천자에 의해 모욕당하는―주왕(紂王)의 이름은 제신(帝辛)이었다―수모를 받은 뒤 그를 대신해서 등장했고, 주 왕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줄곧 세상과 천상의 중심에 있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아도 8백 년이었는데, 이 8백 년은 그냥 8백 년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 문물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의 8백 년이었다. 그래서 하늘(천)은 중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막강한 중심은 이미 유가·묵가 같은 현학이 점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편제된 문화 역시 그랬다. 그러므로 새로운 책 『노자』가 여전히 하늘(천)을 세계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면 현학에 도전한다는 그 야심찬 계획은 처음부터 흠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노자』는 기존 세계의 중심인 하늘(천)을 새로운 관념으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지 못하나 마치 상제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다(4).
왕과 같이 되면 하늘과 짝하고, 하늘과 짝하면 도와 하나가 되고, 도와 하나가 되면 장구하게 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16).
어떤 물건이 있어 혼돈스럽게 이루어졌으니 천지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25).
이렇게 이야기하면 유가·묵가 전통에서의 하늘(천)과 『노자』의 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말하려는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만약 세계와 인생 전체를 상대로 한다면 그 안에는 그 사상을 떠받치는 어떤 신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런 신적인 요소는 어떤 사상 체계에서든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들다. 도라서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도가 형이상학이라면 하늘(천)도 형이상학이고, 도가 종교라면 하늘도 종교이다. 도가 자연이라면 하늘도 자연이고, 도가 인생이라면 하늘도 인생이다. 사상을 읽고 인생을 체험하는 것은 사상과 인생 속에 깃든 어떤 신적인 것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므로 우선은 그런 정도로 생각해놓고 도가 정말 무엇인가는 스스로 천천히 탐구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일단 이렇게 마감해두어도 『노자』를 읽는 데 지장이 없다.
전목(1923)은 사상사적 맥락에서 볼 때 『노자』의 도는 『장자』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장자』는 하늘(천)이라는 전통적 근원 관념을 계승하면서도 선왕지도(先王之道)나 인도(人道)가 아닌 새로운 도의 관념을 만들어내는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주고, 『노자』는 그것을 완성시켰다. 『장자』의 다음 글을 보자.
무릇 큰 도는 일컬어질 수 없고, 큰 웅변은 말해질 수 없다. 큰 사랑은 사랑을 내세우지 않고, 큰 청렴함은 깍듯하지 않고, 큰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밝게 드러나면 도가 아니고, 말에 분변하는 것이 있으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제물론」).
이 글이 말하려는 것은 지금 『노자』가 말하려는 것과 같다. 모두 도가 말로든 무엇으로든 밝게 드러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런 생각은 다음 문장에서도 볼 수 있다.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들었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볼 수 없으니 봤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말할 수 없으니 말로 이야기되었다면 도가 아니다(「지북유」).
「지북유」가 내편보다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글을 또 읽어볼 수 있다.
대저 도는 실정〔情〕이 있고 믿음〔信〕이 있지만 무위하고 무형하다. 전할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얻을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대종사」).
무위하고 무형하며, 따라서 쉽게 포착되지 않고, 드러난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는 이런 정도의 주장만으로도 『장자』는 『노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게다가 『장자』에는 "태초에 무(無)가 있었다. 유(有)는 없고 이름〔名〕도 없었다(「천지」)"는 사유도 있다. 전목은 이런 개념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노·장이 아니라 장·노라고 결론지었다. 『노자』는 『장자』 내편보다 나중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나처럼 『노자』를 전국 말기∼진대의 책으로 본다면 장·노는 당연한 이야기다.
도의 형성을 『장자』와 연결시킬 수 있다면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명제 자체는 명가와 연결된다. 특히 공손룡의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주장이다. 명가에는 공손룡 외에도 등석이나 혜시가 있고, 공손룡에게는 견백동이론(堅白同異論)이나 지물론(指物論) 같은 다른 논의도 있지만 이들 변자의 이론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마비마론이었다. 즉 백마비마론은 명가의 대표 이론이다. 『공손룡자』의 앞에 붙은 짤막한 소개글〔跡府〕에 따르면 공자의 후손 공천(孔穿)이 공손룡에게 제자가 될 것을 청하면서 "흰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주장만큼은 철회하기를 요구했을 때 공손룡이 했던 대답은 "내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백마의 논의 때문일 따름인데 이제 나보고 그것을 철회하라고 하라면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백마비마론은 나중에는 명실(名實) 문제를 어지럽힌 대표적인 궤변으로 꼽히게 되었지만 이 논의의 본래 목적은 실상 명실을 바로잡아 천하를 교화하려는 데 있었다. 사마담의 '논육가요지'도 명가를 평가하여 "사람들에게 꼼꼼히 따지도록 하여〔儉〕 자주 참됨을 잃기는 했지만 명실을 바로잡은 것은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흰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다른 말로 풀어보면 "흰말이라고 해서 다 말은 아니다" 또는 "말이라고 해서 다 흰말은 아니다"가 된다. 곧 공손룡은 흰말이라는 이름(명)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희다'라는 실질(실)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말에 다 그런 실질이 있는 게 아니므로 말과 흰말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손룡은 당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희다'라는 속성이 없으면서도 모두 다 흰말 행세를 하는 사태 또는 '희다'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정말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태에 있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하여 명실이 일치되는 질서 잡힌 사회를 구축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정말 사람이라는 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사람(명)의 실질을 그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다움이라는 데 두면 그렇게 된다.
공손룡의 명제는 『노자』의 지금 문장과도 형식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노자』도 지금 도라고 해서 모두 영원한 도는 아니고, 이름이라고 해서 모두 영원한 이름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백마비마론에서는 흰말(명)의 실질이 '희다'라는 색이었다면 『노자』에서 도(명)의 실질은 '말로 할 수 없다'는 부정성이다. 이것은 적지 않은 차이여서 공손룡이 말이라는 구체적 사물과 '희다'라는 구체적 속성을 동원하여 명실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주장(명)이 구체적 현실(실)의 반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반면 『노자』는 도라는 추상적 개념과 '말로 할 수 없다'는 부정성을 결합시켜 진리(명)의 참된 내용(실)을 거론했기 때문에 반발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추상성이나 부정성은 모두 탄력적으로 적용되는 성질이다.
이처럼 『노자』의 지금 명제는 일종의 명실론이며, 공자 이래 명실론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명실론은 대단히 비중이 큰 주제다. 공자가 정명론으로 그 물꼬를 튼 이후 "이름(명)은 실질의 손님일 뿐(「소요유」)"이라는 『장자』의 생각과 "이름에는 정해진 실질이라는 것이 없으니 약속으로써 실질을 명할 뿐(「정명」)"이라는 『순자』의 대립이 있었고, 『장자』 「천하」에 소개된 혜시의 열 가지 명제가 결국 '명(名)'이란 상황에 따라 달리 규정되므로 고정된 '명'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면 후기 묵가의 삼표법(三表法)은 구체적인 '명'은 변화할지 몰라도 그것을 낳는 입론의 근거는 변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혜시의 생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법가의 경우는 관리의 직위(명)와 그가 해야 할 일(실)의 부합 여부를 따져 상벌을 가한다는 형명론(刑名論)이 이 명실론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벌써 사마담이 거론한 여섯 개의 주요 학파 중에 다섯 학파가 명실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노자』의 문장을 명실론의 관점에서 보면 일단 『장자』의 견해와 유사하다. 『장자』는 "이름은 실질의 손님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노자』도 사회적으로 약속된 도에 대한 규정에 도전하고 도를 도답게 하는 실질이 있어야 참된 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름은 실질의 손님일 뿐"이라는 말은 『열자』 「양주」에서 『장자』가 아니라 『노자』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자는 혜시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노자』의 명실론이 『장자』와 연결된다면 혜시의 생각도 『노자』와 연결지을 수 있다. 가령 "하늘과 땅은 모두 낮고, 산과 못은 모두 평평하다. 해는 막 중천에 떴지만 또 막 저물고 있고, 사물은 바야흐로 태어났지만 또 바야흐로 죽어간다(『장자』 「천하」)"는 혜시의 명제는 높은 것(실)이 하늘(명)이라는 고정 관념을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비판하는 것이므로 이를 수 있는 것(실)이 이름(명)이라는 고정 관념을 비판하는 지금 『노자』 문장과 통한다. 하지만 혜시가 상대주의를 동원하는 데 비해 『노자』는 참된(영원한) 도와 참된(영원한) 이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서로 좀 다르기도 하다. 혜시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도란 없다. 이것은 『장자』와 『노자』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 『노자』와 가장 유사한 것은 역시 공손룡의 백마비마론이다. 공손룡은 혜시와 달리 상대주의적 관점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노자』처럼 사태의 엄밀한 파악을 통해 고정 관념과 상식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새롭게 질서를 재편하려고 한다. 말을 두고 말이 아니라고 하는 도발은 이를 수 있는 것은 참된 이름이 아니라는 도발과 같다. 사실 맹자가 사람을 두고 사람이 아니라 금수라고 했을 때도 그 도발적 성격은 유사했을 것이다. 단지 맹자의 도발은 상식이 되었고, 공손룡의 도발은 상식에 반해 거부되었으며, 『노자』의 도발은 그 추상성 때문에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주요한 두 개념, 도와 '명'의 관계는 보통 체용론으로 많이 설명한다. 도는 본체이고, 명은 그 드러난 작용 또는 기능이다. 체용론은 개념적으로는 둘을 분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분리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이렇게 도·명을 이해하려면 마왕퇴 백서에 포함된 『칭』의 다음 문장이 크게 참고될 것이다.
도에는 시작이 없다. 하지만 그에 부응하는 것은 있다. 그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나타났을 때 만물은 자기 모습을 갖춘다. 무릇 사물이 장차 나타나려고 할 때는 그 모습이 먼저 나타난다. 모습이 만물을 빚고, 그 이름〔名〕으로 만물을 이른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도의 형이상학을 보여준다. 도의 형이상학에 익숙한 사람은 이것이 지금 『노자』의 문장을 잘 해설해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자』를 『노자』 그대로 읽으면 아직 도체(道體)·명용(名用)의 체용론은 없고, 상식적 이름에 대한 도전만 있다.
이 문장은 오늘날 『노자』의 등록 상표가 되었지만 적어도 『노자』 이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곧 당시로 보면 참신한 말이다. 도에 대한 사유가 다 그렇다. 서문에서 서술한 것처럼 곽점 초간문에는 도의 형이상학을 담은 많은 『노자』의 글 중 단지 하나의 글(25)만 기록되어 있다. 『노자』보다 앞선 시대의 문건에는 당연히 이 말이 없고, 그 뒤 한대의 문건에서도 이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회남자』와 『문자』밖에 없다. 이 두 책은 이 문장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인용한다. 『회남자』는 적어도 세 곳, 「본경훈」 「도응훈」 「범론훈」에서 이 말을 인용하고, 『문자』는 적어도 다섯 곳에서 이 문장을 인용한다. 인용 빈도수로 볼 때 『회남자』·『문자』처럼 도가적 취향이 강한 책에서는 이 문장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도응훈」은 이 문장을 『장자』 「천도」에 나오는 바퀴 깎는 사람〔輪扁〕의 고사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이 무지렁이 장인은 자신이 바퀴를 깎고 있었을 때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임금의 독서를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난하면서 바퀴를 깎는 하찮은 일도 자기 자식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데 문자로 쓰여진 책이 어떻게 성인의 심회를 전할 수 있겠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
앞에서 나는 『노자』와 『장자』를 결합시킨 최초의 시도는 『장자』 외·잡편이며, 이후 『회남자』 특히 「도응훈」이 또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게 구체적인 예가 된다.
여기에서 그리고 또 다른 몇 개의 글에서 『노자』가 말로는 도를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노자』가 말을 부정한다는 인상을 갖는다. 하지만 『노자』는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책이다. 정말로 『노자』처럼 말 잘하는 책은 쉽지 않다. 『논어』를 읽을 때는 말 자체에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노자』는 그렇지 않다. 그 말 자체에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공자가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논어』 「양화」)"라고 하고, 맹자가 "내가 어찌 논변함을 좋아하겠는가(『맹자』 「등문공하」)"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말을 혐오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노자』도 유세하는 책이다. 말로 제왕을 달래는 것이 유세다. 유세하는 사람이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어떻게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정말로 말을 철저히 부정한다면 "내 말은 무척 알기 쉽고 무척 행하기 쉽다(70)"거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장사를 할 수 있다(62)"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노자』의 말은 상식적 안목으로 볼 때 비딱해 보일 뿐이다. "올바른 말은 마치 비딱한 듯하다(78)."
만약 『노자』가 공자처럼 말의 올바른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다. 하지만 언어를 뛰어넘고 의식을 뛰어넘어 도의 길을 닦으려고 한다면 그런 시도는 『노자』에서 멀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통행본에는 '만물의 처음'이 '천지의 처음'으로 되어 있다.
이 문장은 적어도 송대 이전까지 언제나 이렇게 독해하였다. 하지만 왕안석·사마광이 이 문장을 "무는 만물의 처음을 이름한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한 뒤에는 그것이 크게 유행했다. 왕응린에 따르면 왕안석이 이런 독법을 처음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이런 독법은 유무론을 통해 『노자』를 이해하는 데, 곧 『노자』를 형이상학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읽는 것이 올바른 독법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사기』 「일자열전」에 나오는 "이것이 노자의 이른바 이름이 없는 것은〔無名者〕 만물의 처음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에 주목하자.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무명(无名)' 다음에 '자(者)'자를 붙여 어디에서 단구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려주고, 둘째는 통행본처럼 '천지의 처음'이 아니라 백서처럼 '만물의 처음'으로 되어 있어서 백서가 과연 고본을 반영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왕필주도 증거가 된다. 왕필본의 경우 '천지의 처음'으로 되어 있는 본문과 달리 주에서는 "그러므로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고 이름이 없을 때가 만물의 처음이 된다"고 하였다.
독법과 관련해서는 백서도 참고할 수 있다. 왕안석·사마광처럼 읽는 경우는 아래 문장도 예외없이 '무'와 '유'에서 단구하게 되는데, 백서는 '무욕'과 '유욕' 뒤에 '야(也)'자를 붙여 그렇게 단구할 수 없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아래 해설 참조).
백서 발굴 이후 일반적으로 왕안석·사마광 독법의 잘못이 지적되어왔다. 이때는 항상 장석창의 탁월함이 같이 거론된다. 대부분의 학자가 유무론적 독법을 지지할 때도 그는 다른 곳의 문장(32·37·41)을 들어 무명·유명이 『노자』의 고유한 개념어로 쓰였음을 지적하고, 전통적 독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석창의 견해는 사실 정역동(丁易東)의 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초굉본 참조). 중국의 관습 때문에 적시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마서륜·장석창·고형·주겸지 같은 일류급 연구자의 견해 중에도 고주에서 온 것이 상당히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쟁쟁한 연구가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고주에는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있다.
『설문』에 따르면 '시(始)'는 "여자가 초경하는 것"인데, 이것은 또 '태(胎)'의 다른 글자라고 한다(마서륜). 실제로 『이아』는 '태'를 '시'와 같은 의미로 보았고, 그 주에 "배태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가 사물의 처음이 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시(처음)'는 사물이 잉태되어 있으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곧 태아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때는 당연히 이름이 없는 상태다. 곧 무명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모든 것(만물)이 이름이 없다.
한편 "모(母)란 기르는 것이다. 계집녀(글자의 테두리)자를 써서 아이를 가진 형상을 상징한다. 일설에서는 아이를 먹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설문』)." 이 글자에서 점 두 개는 젖꼭지를 상징한다(『광운』). 곧 '모(어머니)'란 이미 만물이 태어난 이후 그것을 기르는 것이다. 만물은 이미 태어났고 양육되고 있으므로 그때는 당연히 이름이 있다. 유명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길러지는 것은 모두 이름이 있다.
그런데 『노자』는 지금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이름이 있는 것은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이름 없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모든 사상가가 거론했던 그 세상이기도 하다. 『노자』는 지금 그 옆에 이름이 없는 세상을 하나 덧붙이고 있다.
이런 '새로운' 세상은 이름 없었던 사물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관찰 추상한 것이지만 그 발견은 예지적이고 탁월했다. 물론 "처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아직 처음부터 처음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도 있고, 아직 처음부터 처음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도 있다. 유도 있고, 무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와 무가 없었던 것도 있고, 처음부터 유와 무가 없었던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도 있다(「제물론」)"라는 말을 보면 이런 사유는 이미 『장자』에도 있었다. 「소요유」에서도 우리는 "성인은 이름이 없다"는 말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노자』는 도에 대한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세계에 관해서도 『장자』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장자』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름이 없다'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도와 마찬가지로 무명을 완성시킨 것은 『장자』가 아니라 『노자』다.
이름을 가진 것은 원래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없었던 때가 이름을 가지게 된 때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 그렇지만 이름이 있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이름을 잃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름이 없는 때는 이름이 있는 때보다 시간적으로 뒤처진다. 단지 『노자』는 이것을 시간적으로 뒤처진다고 하지 않고 복귀한다고 한다. "무물로 돌아간다(14)."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간다(16)."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무극으로 돌아간다. ……통나무로 돌아간다(28)." 이 세상 모든 사물은 이름이 없었던 상태에서 태어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이름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런 생각에서는 이름이 없는 상태에 더 큰 비중을 둘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명이 도를 가리키고, 유명은 해설마다 다르지만 천지라든가(하상공) 음양이라든가(고환) 도의 작용이라든가(육희성)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지만 이름이 없던 것이 태어나서 이름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이름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 전체, 그 자연스러운 변화의 흐름 자체가 강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명·유명이 모두 도다.
나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아래에서 『노자』가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왔다"고 말한 사실에 주목하자. 이 두 가지가 무엇인지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거기에 무명·유명이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 글(1)의 구조로 볼 때 『노자』는 적어도 무명·유명에서 시작되는 두 계열을 균형 있게 취급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무명을 이야기하고 유명을 이야기하고, 무욕을 이야기하고 유욕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둘을 같이 평가하는 것이 이 글의 구조다.
그렇지만 『노자』가 결국은 무명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다. 무명과 유명을 균형 있게 다룬다는 것 자체가 무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자』의 짤막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당시까지 누구도 무명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추종하는 유명의 세계 옆에 무명의 세계를 올려놓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유명이 아니라 무명의 세계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지금 문장을 읽는 사람 대부분이 그런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도는 무명인가, 아니면 유명·무명을 합한 것인가? 『노자』에서 도는 때로는 무명이지만 때로는 무명·유명을 합한 것이다.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노자』의 원래 생각이다. 『노자』 스스로 도를 가리켜서 "이것을 형상이 없는 형상이라고 하고, 사물이 없는 상이라고 하니 이것을 일러 황홀하다고 한다(14)"고 표현하였다. "형상이 없는 형상"이란 형상(유명)의 세계와 형상이 없는(무명) 세계를 함께 껴안으려는 말이다.
이쯤해서 그럼 도대체 무명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노자』의 형이상학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도를 규정하려는 노력과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 『노자』가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름이 없는 것, 개념화되지 않는 것은 오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느낌을 공유할 수는 없다. 적어도 글로는 그렇다. 글은 언어이고 이름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탐구가 헛수고는 아니지만 『노자』를 밝혀주지는 않는다. 『노자』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무명은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통치술(처세술)이다. 앞에서 나는 '무'라는 개념이 실체가 아니라 허무·인순을 강조하는 통치(삶)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다음 참조). 무명도 마찬가지다. 『노자』는 언제나 이름을 날리는 것의 위험함을 경고하고 앞에 나서기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에 있기를 권고한다. 유명과 무명이 사회적 상태라면 『노자』는 당연히 무명의 통치(처세)를 택한다. 무명이라야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적 격동,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다. 변화란 이름이 바뀌는 것이고, 이름 없는 것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사기』 「일자열전」은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다"라는 말을 이런 문맥으로 독해한다. 여기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점쟁이(일자) 사마계주(司馬季主)이고, 다른 둘은 가의(賈誼)와 송충(宋忠)이다. 이미 대단한 학문과 좋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가의와 송충은 어느 날 좀더 새로운 소식을 찾아 점쟁이 사마계주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세상의 공명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전해듣는다. 그 일이 있은 후 송충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서 가의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가 높으면 더욱 안전하고, 위세가 높아지면 더욱 위태롭다. 대단한 위세를 가지고 있다면 몸은 벌써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이다. 대저 점치는 사람은 만약 점괘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복채만 못 받게 된다. 하지만 임금을 위해서 계책을 내는 사람이 잘못하면 몸을 둘 곳이 없다. 이 둘의 상태는 전혀 달라서 마치 하늘은 관(冠) 같고, 땅은 신발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라는 뜻이다.
송충은 『노자』의 말을 위세를 버리고 은거함으로써, 곧 이름을 버림으로써 안전함을 확보할 수 있는 좌우명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무명은 처세술이다.
무명은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유명의 세계에서 무명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명의 세계 자체에 있지만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이 무명이다. 『노자』적 삶의 배후에는 윤곽을 그릴 수 없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 그것은 힘이 강할 때는 칼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故恒无欲也, 以觀其妙. 恒有欲也, 以觀其所皦
이 문장의 두 개의 '야'자는 통행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거론한 왕안석·사마광의 독법에서 '무'와 '유' 다음에서 단구할 수 있었다. 백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백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안석·사마광처럼 읽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노자』를 형이상학으로 독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욕(欲)'은 욕심이라는 말로 옮겼지만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의욕이라는 말이 나을지도 모른다. 곧 탐욕스럽다는 뜻의 욕심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에서의 욕심이다. 구태여 이런 용례를 찾고자 한다면 "욕심낼 만한 것이 선(善)이다(「진심하」)"라는 맹자의 말이나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고요하니 하늘의 본성이며, 외물에 느껴서 움직이는 것은 본성의 욕심〔性之欲〕이다(「악기」)"라는 『예기』의 말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묘(妙)'의 원래 글자는 '묘(眇)'이다. 이 글자는 지금 애꾸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눈으로 보기에 아주 작은 무늬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묘하다'라는 말에는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묘는 미미함의 극한이다(왕필)."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 무명의 세계는 아주 작디작은 무늬 같아서 눈을 크게 뜨고 악착같이 보려고 하기보다는 꼭 봐야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차분하게 우주와 인생의 전 과정을 성찰할 때 느껴진다는 게 이 글자와 관련된 문장의 의미다.
반면 '교(皦)'는 백서에 '교(噭)'로 되어 있다. 이 글자는 대부분 '요(徼)'이고, 돈황갑본과 경룡비본만 백서와 유사하게 '교(曒)'자를 사용한다. 백서의 글자는 아마도 이 글자와 통할 것이다. 이 글자는 '교(皦)'와 같은 글자로 흰 옥돌이 밝게 빛나는 모습을 가리키며, 밝다는 뜻이다. 무욕과 유욕이 대비되는 것처럼 이 글자는 '묘'와 대비된다(주겸지). '묘'는 눈으로 보기에 아주 작은 무늬이고, '교'는 아주 환하게 빛나는 모양이다. 무명의 세계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유명의 세계는 밝게 보인다. 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면 숨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지만 밝게 보이는 세계를 보려면 보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문장에서 유욕의 의미다. 그러므로 소철이 말하는 대로 유욕으로만 보면 세계는 "조잡하면서도 신통하지 않고", 무욕으로만 보면 세계는 "정밀하기는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간혹 무욕으로 보는 세계와 유욕으로 보는 세계를 차별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자』의 본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兩者同出, 異名同謂
이 문장은 통행본과 문장 구조가 많이 다르지만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두 가지'가 결국에는 같은데 이름만 다르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독해에서 관건은 '두 가지'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왕필은 '처음'과 '어머니'를 가리킨다고 보았고, 하상공은 무욕·유욕을 가리킨다고 했고, 유무론으로 독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유명·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유무론적인 해석은 글을 옳게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를 수 없지만 그 나머지 견해는 모두 취할 만하다. 곧 여기에서의 두 가지란 딱히 어느 하나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처음-무욕-오묘함과 유명-어머니-유욕-드러난 모습의 계열 모두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이 고리는 적어도 이 문장에서는 분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분해 불가능한 두 계열의 의미가 한곳에서 나왔으므로 아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이다.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이 나오는 문이 된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玄)'은 검다는 뜻이지만 "아득해서 그 다하는 바가 없는 것은 그 색이 반드시 검으므로(소철)" 현묘하다는 뜻도 지니게 된다. 하늘이 검다는 것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상공은 『노자』에 나오는 '현'자를 거의 모두 하늘(천)로 해석하는데 그러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는 말은 "하늘 안에 또 하늘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할 수 있겠다.
후대의 일부 도사 집단은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는 말을 대단히 중시했다. 그들은 이 말에 의거하여 중현(重玄) 사상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중현이란 '현'을 거듭한다는 의미다. 두광정에 따르면 이 중현 사상은 혜강(嵇康)·완적(阮籍)과 친교가 있었던 도사 손등(孫登)의 창안이다. "손등은 중현을 중심으로 삼았다. 종지들 가운데 손씨의 설이 가장 묘하다(『광성의』 권5)." 하지만 손등의 중현 사상은 전해지는 바 없고, 그와 관련된 사실 관계도 명료하지 않다.3) 그러므로 많이 알려진 것처럼 성현영이 이 사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성현영은 '중현'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욕한 사람은 유(有)에 막히고, 무욕한 사람은 또 무(無)에 막힌다. 그러므로 하나의 '현(玄)'을 말하여 두 집착을 없애도록 하였고, 또 수행하는 자가 이 '현'에 막힐까 두려워하여 이제 '우현(又玄)'이라고 말함으로써 나중의 병을 쫓아버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막히는 것에 막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막히지 않는 것에 막히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곧 버리고 또 버린다는 것이다.
성현영에 따르면 『노자』가 여기에서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라고 말한 데에는 이런 깊은 뜻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은 『노자』보다는 불교 반야학과 관련이 더 깊다. 유욕한 사람이 유에 막힌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존재한다고 믿는 세속의 망집(妄執)을 가리키고, 무욕한 사람이 무에 막힌다는 것은 모든 것은 무상하고 따라서 언젠가는 사멸한다는 또 다른 진리에의 정견(定見)을 가리키며, 하나의 '현'을 통해 두 집착을 없앤다는 것은 유무·생멸의 모든 집착을 떨치려는 공관(空觀)을 가리키고, 또 하나의 '현'을 말해 '현'에 집착하는 병마저도 쫓아버렸다는 것은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모두 함께 긍정하고 모두 함께 부정하는 중도제(中道諦)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노자』가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고 한 실제 이유는 단지 그 현묘함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설혜). 성현영류의 해석을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변질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노자』의 본뜻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을 통해 『노자』가 자꾸 신비화되면 정작 『노자』의 생명력, 삶을 향한 치열한 생존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진다.
도가 밝게 드러나면 도가 아니고
말에 분변하는 것이 있으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道可道也, 非恒道也]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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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ko.art.
'노자'는 귀(歸)의 사상이다(고전강독 6 - 노자, 신영복)
1) 노자와 '노자'
(1)
중국사상은 지배계층의 사상인 유가(儒家)사상과 민초(民草)들의 사상인 노장(老莊)사상이 2개의 축(軸)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이 일정하게 대치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의
대치는 중국 사상사의 유구한 심층구조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그 2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확인되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동양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논어'는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進)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人文主義), 인간주의(人間主義),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노자'는 귀(歸)의 사상
입니다.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은 '노자'를 한 편으로 하고 여타의 모든 학파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2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들의 사상은 물론 여러 층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정책적 대응을 본령으로 합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는 다른 학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합니다. 인위적 제도나 규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혼란과 불의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제도(制度)와 문화(文化)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생성(生成)과 변화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言語)와 인식(認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합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自然)에 대한 종래의 통념(通念)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25장)”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체계에 있어서 자연의 생성변화가 곧 도(道)입니다.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굿간에 묶어 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災殃)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chaos)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노자'의 세계는 반문화적(反文化的) 세계입니다. 건축의지(建築意志)에 대한 거부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解體)하여야 한다는
해체론(解體論)입니다.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결국 법가(法家)사상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 사상계의 통일도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도 그러한 사상통일의 일환입니다. 유묵논쟁(儒墨論爭)이나, 유법논쟁(儒法論爭)은 일단락
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역인 법가(法家)사상은 난세(亂世)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하였지만
치세(治世)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단기전에 있어서는 그 역량을 결집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가동하는 데에는
법가적 정책이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진정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自生力)을 길러내고 꽃피워냄으로써 이루어
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 당시의 현학(顯學)이었던 묵가(墨家) 역시 진한(秦漢)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성립되고
그 체제가 정비되면서 묵자사상의 핵심인 평등(平等)이념이 그 사회적 지반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사상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한(漢) 이후 유교가 관학(官學)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제 유가(儒家)사상에 흡수되는 과정
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이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유가(儒家)사상은 법가(法家)에 비하여 비폭력적 지배방식을 취하고 피지배층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매우
유화적(宥和的)인 정치과정을 정착시켜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본질에 있어서 폭력적 지배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진한(秦漢) 이후의 제도폭력(制度暴力)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하고,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反文化)사상이 지배사상에 대한 비판담론으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비판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담론과 대안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중국사상은 지배계층의 관학으로서의 유가(儒家)와 피지배계층인 민초의 도가(道家)사상이 서로
길항력(拮抗力)으로 대치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의 전체구조를 생동(生動)하게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무엇보다 우리는 '노자'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노자'를 읽는 독법(讀法), 다시 말하자면 노자를 재조명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노자의 현대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축적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모순이 누적되는 체제입니다.
현대자본주의는 누적된 모순이 하부구조(下部構造)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패권국가들의 집단적 개입과 폭력적 억압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입니다.
억제된 상태는 해소된 상태와는 다른 것이지요. 내면적으로 그 불안정성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화라는 개방압력과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수탈적 공세가 사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곧 그것의 현실적
표현형태입니다.
이러한 하부구조에 있어서의 누적된 모순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상부구조에 있어서 극단적인 인위
(人爲)와 허구(虛構)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부구조의 자본축적논리와 상부구조의 상품시장논리가 공동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낭비와 허구의 체계는
현대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도의 기호조작(記號操作)체계를 내장하고 있는 상품미학은 이제 이성(理性)의 포섭이 아니라 감성(感性)의
포섭기제(包攝機制)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의 가공할 위력을 장악하고 이러한 기제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공략하는
단계에 도달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대자본주의는 인위적(人爲的) 규제(規制)와 허구(虛構)의 어떤 절정(絶頂)을 보여
주고 있는 동시에 그것의 재생산구조를 완성해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노자'의 현대적 의미가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화석화된 사상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현실성을 띠고 생환되어야 할 당대사상으로서의 '노자'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노자'가 이러한 모순구조를 조명해 내고 나아가서 '노자'의 언어들이 물질과 욕망의 총체적 낭비(浪費)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누구인가
(2)
노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사마천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자는 성명이 이이(李耳),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諡號)는 담(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曲仁里)사람으로 주왕실의 창고를 관리하는 수장리(守臟吏)를 지냈
으며, 공자가 찾아와 예(禮)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다. 양고심장약허(良賈沈藏若虛) 교기(驕氣) 다욕(多欲)
태색(態色) 음지(淫志)를 버리라고 충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존연대는 대략 BC 580-500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노자의 생존연대는 '사기(史記)'에서조차도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를 다른 사람, 예를 들면 노래자(老萊子), 태사담(太史儋)과 혼동하고 있을 정도라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의 생존연대는 맹자(孟子) 뒤, 한비자(韓非子) 앞이라고 주장됩니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노자' 제1장이 바로 유교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며 그것도 유교가 소위 명교
(名敎)를 분명히 하고 난 이후의 유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맹자 이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비자 이전이라는 것은 '한비자'에 '유로(喩老)' '해로(解老)' 두 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는 맹자 이후의 사상이 혼재되어 있으며 특히 궤변적(詭辯的) 서술 등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명가
학설(名家學說)이 상당히 발전된 이후에 씌어진 글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81년 동안 있다가 백발(白髮)로 출생하였다 하여 노자(老子)라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학자들이 자기 성(姓)에 자(子)를 붙이고 있습
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 순자(荀子) 한비자 묵자(墨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유독 노자만 성씨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老)자와 이(李)자가 두운(頭韻)이 같기 때문에 병용
(竝用)하였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음통(音通) 운통(韻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이 같거나 운이 같은 경우 서로 넘나들며 사용합니다. 한문을 읽다보면 자주 직면하는 문제이지요.
순자(荀子)를 손자(孫子)라고 쓴 것도 순(荀)과 손(孫)의 두운이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노자'는 '李子'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덧붙여 놓습니다. 노자의 자(字)와 시호
(諡號)가 바뀌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개 자(字)는 이름과 관련이 있고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태어난
아이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거나 그 장소와 관련해서 짓는 것이 상례입니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라는 것은 공자의 머리가 우정(頂) 즉 머리 윗부분이 평평하였기 때문에 구(丘)라고 붙이고,
자(字)도 구니산(丘尼山)에서 글자를 따서 중니(仲尼)라고 붙인 것과 같지요.
그래서 담(聃)은 귓바퀴 없을 담입니다. 당연히 이름인 이(耳)와 관련지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담(聃)이 자(字)
라는 것이지요.
공자가 노자를 찾아와 예(禮)에 관해서 물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아마 이 이야기도 도가(道家)
측에서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노자의 충고는 공자의 인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장삿군은 값비싼 물건은 겉으로 내놓지 않는 법이라는 충고는 공자에게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지요. 충고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며, 그리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입니다. 사마천이 이러한 기록을 남겨 둔 이유가 자못
궁금할 정도입니다.
말하는 자 알지 못하고 아는 자 말하지 않는다”
(3)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81장 5천2백여자에 이릅니다.
상편(上篇)은 도(道)로 시작되고, 하편(下篇)은 덕(德)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周)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 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
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 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설파한 노자가 언(言)을 책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백낙천(白樂天)의 시 '노자'가 그런 내용입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
이 말을 나는 노군(老君)에게 들었노라.
만약 노군이 지자(知者)라면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5천자를 지었나."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운자(韻字)를 붙인 구(句)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서 동일인의 필체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주요부분은 동일인이 정리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금본(今本) '老子'는 왕필(王弼)이 주석한 왕본(王本)을 지칭합니다. 1973년 호남성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
3호에서 나온 백서노자(帛書老子)에는 상편(上篇)과 하편(下篇)이 바뀌어 있는데, 이 백본(帛本)의 하장(下葬)
연대는 BC 168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93년 호북성 곽점촌(郭店村)에서 나온 죽간본(竹簡本)은 하장(下葬)시기의 하한선(下限線)이 BC 300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죽간본에는 금본(今本) '노자'의 5분의 2정도의 분량밖에 없습니다.
'노자'라는 서물(書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몇 종류의 노자 서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도가(道家)의 사상적 연원(淵源)은 '논어'에도 언급되고 있는 은자(隱者)의 언행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자'는 여러 갈래의 전승과 여러 종류의 서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의 통설에 따르면 '노자'는 BC 350-BC 200년경의 집단창작이라는 설이 가장 일반적인 것입니다.
'노자’ 읽을 때는 최대한의 상상력 발휘하길”
(4)
노자는 송(宋)나라 패(沛)지방에 살았으며 장자(莊子)도 역시 송나라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송나라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송나라 특유의 사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전해집
니다. 패배(敗北)의 미학이며, 은둔자(隱遁者)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노장(老莊)의 반문화(反文化)사상도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봅니다. 원죄의식(原罪意識)을 갖지 않은
동양 특유의 체관(諦觀)과 달관(達觀)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인도(印度) 특히 불교적인 사상내용 때문에 서방(西方) 전래(傳來)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근거는 없습니다.
'노자' 주석은 3천여 가(家)가 주(註)를 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만 1천여 개나
되며, 현재 3백46종의 주석(註釋)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주석 중 최고(最古)의 것이 하상공(河上公)의 주와 왕필(王弼)의 주입니다.
하상공은 한대(漢代) 사람으로 노자를 주로 도교적(道敎的) 관점에서 주하였으며,
왕필은 위진(魏晋)시기의 주로서 현학(玄學)의 일환으로 씌어진 것입니다.
왕필(AD.226-AD.249)의 나이 16-18세에 씌어졌다고 알려진 노자주(老子註)는 글자의 수가 1만1천8백90자로서
누가 누구를 주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지요.
왕필은 노자를 주(注)한 목적이 숭본식말(崇本息末)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본(本)을 높이고 말(末)을
종식시키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왕필이 말하는 본(本)이란 자연을 의미하며 말(末)이란 유법(儒法)의
인위적(人爲的) 규제(規制)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왕필은 지난번 주역강의에서 이야기하였듯이 23세 때 주역
(周易)을 주(注)하여 노역(老易)을 회통(會通)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주역'과 그 형식에 있어서는 극히 대조적입니다. '주역'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효(爻)와
괘(卦)라는 부호(符號)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상(物象)의 세계입니다. 물(水), 불(火), 산(山), 하늘(天), 땅(地) 등 매우 구체적(具體的)인 세계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지요. 추상적인 부호로써 구체적인 물상의 세계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주역'입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老子)'는 정 반대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언어(言語)를 기본으로 합니다. 이 언어는
그것이 산문이든 운문이든 '주역'의 부호에 비하여 매우 구체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로 서술하고 있는 세계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현학(玄學)의 세계입니다.
무(無)와 유(有), 위(爲)와 무위(無爲) 등 추상적(抽象的) 담론입니다. 소위 담현(談玄)입니다.
나는 '주역'과 '노자'를 대비하면서 그림과 글씨의 차이를 연상합니다.
그림이란 예를 들어 산수화 한 폭을 예를 들어봅시다.
그 형식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나무와 산과 바위, 물, 새, 사람 등 매우 구체적인 물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이야기하는 서술의 세계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아예 서술구조가 없거나 사의(寫意)가 막연한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서예(書藝)는 그 형식이 매우 추상적입니다. 비록 한자(漢字)가 상형문자(象形文字)라 하더라도
거의 기호화(記號化)되어 있습니다. 한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완벽한 발음기호의 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의 경우 서술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하지만 그 형식은 추상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주역'과 '노자'를 읽을 때에는 바로 이러한 점에 유의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철학적 추상력을 발휘하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 '노자'의 독법에는 구체적인 단어가 문장으로 조합되면서
만들어내는 그 추상적 진술(陳述)에 구체성을 입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이른바 현재성을 조명해내는 노력도 함께 해야 되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주(老子註)가 지금까지 노자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주역'을 회통(會通)하고
있는데 왕필의 시대적 상황이 노자의 그것과 닮았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왕필이 노자주를 달았던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시대입니다. 조조(曹操) 유비(劉備)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역사무대를 누비던 시기입니다.
한말(漢末) 북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왕필 일가는 동문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를 찾아가 의탁하게
됩니다. 형주는 유표 사후에 조조(曹操)에게 귀속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조조가 군림하다가 조조 사후에 사마의(司馬懿)의 정변으로 위(魏)가 멸망하고 다시 진(晋)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변화가 바로 이 형주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당시는 대제국인 한(漢)의 피폐와 붕괴 그리고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삼국지 시대입
니다.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下剋上)과 혼란(混亂)의 시대였습니다.
한대(漢代)의 명교적(名敎的) 질서가 무너지고, 영원불변한 강상적(綱常的) 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천도(天道)가 부정되는 시기입니다. 천도와 대일통(大一統)의 관념이 부정되고, 개방적
이고 능동적인 사고로 변화하는 격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대(漢代)의 명교체제(名敎體制)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던 것
이지요. 바로 이러한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왕필은 당시의 현학(顯學)이던 법(法) 명(名) 유(留) 묵(墨) 잡가
(雜家) 등은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는, 그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취하는 '기모용자(棄母用子)'의
사상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의 입장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근본적 사유(思惟) 즉 철학적 문제의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왕필은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체제와 번망(繁妄)한 한대경학(漢代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함
으로써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는 참된 도(道)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것이 곧 무(無)를 근본으로 하는 이무위본(以無爲本)의 철학체계입니다. 이것이 왕필의 기본적 철학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숭본말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한다(以簡御繁)는 것입니다.
무(無)를 본(本)으로 삼고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貴無論)이 노자독법(老子讀法)의 기본이 되고 있습
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를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왕필의 이러한 근본적 관점은 '주역'의 해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이른바 주효론(主爻論)과 득의
망상론(得意忘象論)입니다. 이 문제는 '주역' 편에서 언급했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왕필의 시대와 왕필의
철학적 입장이 노자에 대한 가장 핍진(逼眞)한 독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가 금본(今本) '노자'이며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를 주(註)하였다기보다는 '노자'를 편집하였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 오던 '노자'
텍스트를 자기의 입장, 주석(註釋)적 입장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자기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리하고 편집
하여 금본 '노자'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물론 왕필본의 '노자'가 사실은 백본(帛本) '노자'나 죽간본(竹簡本) '노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승된 노자
텍스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老子)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예제를 읽으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노자'는 무위(無爲)와 관조(觀照)라는 동양적 사유(思惟)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서구에 소개된 이후 현재
약 60여종의 번역본이 있으며 현대 서구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노자 강의를 통하여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여러분들이 얻게 되기 바랍니다.
" 제1장의 중심개념은 無와 有"
노자 예제(例題)-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1장)
常(상) : 참다운. 변함 없는. 항상.
欲(욕) : 하고자 하다. (will, must)
徼(교, 요) : 변두리(邊), 광대 무변함. 샛길, 實相界. (교)로 보아 밝다, 명백하다.
노자 제1장입니다. 널리 알려진 만큼 해석상의 논란도 적지 않은 장입니다. 몇 가지 번역을 같이 소개해서 서로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
을 이름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無欲)으로 그 신묘함을 바라보고, 항상 유욕(有欲)
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신묘함의 문(門)이 된다.”
2)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3)
“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
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이후)
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1)과 2)의 번역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3)번역이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에 나오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常) 욕(欲) 묘(妙) 교(徼) 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한 다음 전체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장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장의
중심 개념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러 번 읽으면 가능합니다. 道? 名?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와 명은 중심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든 것입니다. 핵심적인 개념은 무(無)와 유(有)입니다.
노자의 철학을 ‘무(無)의 철학(哲學)’이라고도 합니다.
이 점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에 대한 3)의 번역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무와 유의 설명과 동떨어지게 되지요.
이 장은 핵심은 무와 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제1장의 핵심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그 서술구조는 “무(無)는 ······(을 이름하는 것)이며,
유(有)는 ······(을 이름하는 것)이다”라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로 띄어 쓰기를 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無는 天地之始를 이름함이며
有는 萬物之母를 이름함이다”가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의 번역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2)의 경우는 無名 有名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경우와 이름이 있는 경우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3)도 다르지 않습니다.
3)은 자신의 번역이 2)와 다름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무명을 ‘이름을 붙이기 전’으로 해석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유명(有名)을 ‘이름을 붙인 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이름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2)와 3)은 다같이 첫 글자인 道와 名에 집착하여 無를 名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격하시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무(無)란 없음 즉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
(無)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해방된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를 의미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1) 2) 3)
의 번역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
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명과 유명은 번역1)과 같이 떼어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명 무명으로 붙여서 읽는다면
제1장 마지막 구절인 此兩者同出而異名에서 兩者란 ‘無名’과 ‘有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
이 양자가 서로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똑 같은 문제가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무욕이관기묘 유욕이관기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도 무와 유를 중심개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는 항상(常: always)
···을 하여야(欲: will) 하고, 유는 항상 ···을 하여야 한다”라는 구조입니다.
1)에서는 無欲 有欲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무욕으로서는 묘를 보고, 유욕으로서는 교를 본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욕(欲)을 의지(意志)나 입장(立場)의 의미로 읽는다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묘를 보기도
하고 교를 보기도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현학이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무욕을 가치판단이 없거나 입장이 없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치판단이나 입장이 배제된 그러한 관점(觀點)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러한
관점이 있다면 무욕과 유욕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2)에서는 無欲을 無慾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근본적 사유를 논하는 이 장(章)의 의미를 無慾과
有慾이라는 윤리적 문제로 격하시킬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묘와 교에 관한 사유가 이 장의
본령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강상(綱常)의 도(道)로 격하시키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3)에서는 無를 無名으로 그리고 有를 有名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묘함을 보아야 하고, 이름을
붙인 후에는 요(徼) 즉 실상계(實相界)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無로서 보는 것’과 ‘이름 붙이기
전에(無名) 보는 것’은 그 사유의 내용에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3)의 번역에서 괄호를 쳐서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묘함이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無名은 인식의 주체가 아닌 인식 대상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관(觀)의 주어가 되기
어렵습니다. 무와 무명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심정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구(字句)의 해석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전체의 의미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해석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번역을 시비하지 않았나 마음에 걸립니다, 더구나 ‘노자’에 대한 관점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장절(章節)에 대한 해석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有와 無는 이름이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노자 예제(例題)-2
우리가 ‘노자’ 제1장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묘(妙)와 교(徼), 시(始)와 모(母), 그리고
무(無)와 유(有)를 대치시키고 있는 노자의 서술방식은 결코 그것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취한 서술방식입니다.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결론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지요. 제1장은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범주로 대별
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도입니다.
도(道)---무(無)---천지지시(天地之始)---묘(妙)---현(玄)
명(名)---유(有)---만물지모(萬物之母)---교(徼)---현(玄)
그리고 이 2가지 범주는 같은 것이며 다같이 현(玄)한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 2), 3)의 번역이 전체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조점이 놓이는 곳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자동 출이이명)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띄어쓰기를 달리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此兩者 同 出而異 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다르게(異) 보이는(出) 것은 그 이름뿐이다”라는 의미가
되고, 此兩者同 出而 異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사람의 앎으로) 나와(出), 이름만 달리(異名)했을
뿐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것을 취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도 마찬가지입니다.
1) “(도 이전과 이후는)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다.”
2) “그 같은 것(同)을 일컬어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든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이 경우 현(玄)은 묘(妙)보다는 더 근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로하시(諸橋)는 현(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입을 빌려서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
다만 도(道)의 본체를 무(無)라고 설명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유에 대한 무로구나!”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도의 본체는 유에 대한 대립하는 상대적인 무(無)가 아니라
절대적인 ‘무(無)’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현(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이란 ‘검을 현’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과 붉은 색을 혼합한 색
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무와 유를 합한 근원적인 무(無)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글자라는 것입니다.
검은 색은 무를, 그리고 붉은 색은 유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玄)에는 현묘불가식(玄妙不可識)의 의미
즉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道를 설명하는 말로서 가장 적합한 글자라는 것이지요.
번역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너무 번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제1장의 의미를 풀어서 이야기해보지요.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法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윤리적인 강상(綱常)의
도(道)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道)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名)의 경우도 도(道)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約束)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붙인 표지(標識)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記號)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言語)
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의 풀이도 이와 같습니다. 도(道)를 도(道)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寫眞)이라는 것이지요. 참도(眞道)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1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도(道)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思惟),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可視的)
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同體)이며 통일체(統一體)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자의 제1장은 무(無)와 유(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接近路)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無)는 ‘제로(0)’가 아닙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대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無)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無)라는 것이지요.
도(道)는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인 일체의 생성(生成)과 변화(變化)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도(道)가 작용(作用)하여 만물이 생성(生成)되고 변화 발전합니다. 그것이 유(有)입니다. 형이상학적
(形而上學的) 본체(本體)는 무(無)이지만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작용(作用)은 유(有)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道無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無形)인 도체(道體)가
유형(有形)인 도용(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道)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比喩)로써 도(道)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無)의 세계든 유(有)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玄妙)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
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와 노자(老子)를 소개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또 제1장을 설명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번역상의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만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美를 아름답다고 하나 사실은 추한 것”
노자 예제(例題)-3
다음 제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장도 널리 읽히는 장이며 또 번역상 논란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원문을 보지요.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제2장)
爲美(위미) : 美라고 한다(謂). 또는 僞美 즉 거짓 아름다움.
惡(악, 오) : 나쁘다. 추하다. 증오하다.
爲善(위선) : 이 경우의 爲 역시 謂 또는 僞로 읽을 수 있다.
無爲之事(무위지사) : 함이 없음. 또는 꾸밈없음(無僞)
作(작) : 자라다. 만들다.
辭(사) : 말하다. 거들다. 자랑하다.
生而不有(생이불유) :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는다. 없는 듯이 살다.
恃(시) : 기대다. 의존하다.
不去(불거) : 사라지지 않다.
‘爲而不志也’(帛書 甲本)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반되는 주를 달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 장은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선언이며, 이 장의 기본 코드는 무위(無爲)입니다.
상대주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무위가 핵심이 됩니다. 따라서 위(爲)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제2장에 대해서도 다른 번역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차이들에 관해서는 설명하면서 소개하기
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美)를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善)을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의 번역은 주에서 달아놓았듯이 爲를 僞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아름다움(僞美)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또 위선(爲善)을 위선(僞善)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의 해석에 앞서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적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無爲)의 사상과 상대주의(相對主義)사상입니다.
무위란 거짓없음(無僞)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작위(作爲)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自然)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과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
니다. 작위(作爲)가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장 유(有)와 무(無)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美)와 선(善)의 개념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미와 선에 이어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등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대립적인 것, 고정 불변한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만물은 변화 발전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따라서 위(爲)를, 여기서는 물론이며, ‘노자’ 텍스트에서는 대부분 인위(人爲), 작위(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介入)이란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儒家)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예악(禮樂) 명분(名分) 문물(文物)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2장을 읽을 때에도 먼저 노자의 이러한 기본적 관점에서 읽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위(爲)를 거짓, 허식(虛飾)등의 의미로 읽는 것은 노자의 철학을 도리어 유가(儒家)의 윤리적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며, 좁은 틀 속에 가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美)와 선(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그것이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도리어 그것은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미(美)와 인위적인 선(善)에 길들여진 우리의 기존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위적인 개념과 가치로 길들여진
의식을 반성하고 마찬가지로 실천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
입니다. ‘위(僞)’는 인(人) + 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人爲)’입니다. 인간의 개입입
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
를 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법칙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人爲)
와 작위(作爲)가 바로 거짓(僞)인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구절에서는 유무(有無) 난이(難易)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수월함,
김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의 개념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구분이며 불필요한 ‘차이(差異)’의 생산
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가치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성인(聖人) 이하의 구절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성인(聖人)은 마땅히 무위(無爲)하고 무언
(無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성인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
니다만 노자는 유가(儒家)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하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하였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우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功)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똑 같은 문장이 제10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生之畜之는 낳고 기른다는 뜻이며, 그 다음의 生而不有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爲而不恃는 長而不宰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다)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 즉 성인이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이러한 작풍이 곧 현덕(玄德)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덕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주인공 유현덕을 연상할 수 있지요? 현덕의 이미지가 이와 유사합니다.
조조(曹操)처럼 철저히 자기가 주도하는 방식과는 다르지요.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玄) 일하는(德) 스타일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해석상의 이론(理論)때문에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노자’ 제2장은 인식론(認識論)이며 실천론(實踐論)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善惡)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OX식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장단(高低長短)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
(自然)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倫理的)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美意識)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전환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갇힌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
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지 않으면 다툼이 없다”
노자 예제(例題)-4
‘노자’ 제1장과 제2장을 설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해석상의 논란이나 자구
(字句)중심의 독해보다는 우리가 ‘노자’로부터 읽어내야 하는 현대적 과제를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읽어야 할 제3장은 마침 정치론(政治論)이기도 합니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제3장)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 얻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貨(화) : 穀, 또는 商品.
可欲(가욕) : 욕심낼 만한 것.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爲無爲(위무위) : 無爲의 방식으로 행하다.
먼저 전체적인 의미부터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여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
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하여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다스려지지 못할 것이 없다.”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전체의 뜻은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노자 정치론입니다.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賢)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賢)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도 좋고 지식이라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 마디로 자연(自然)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
(乖離)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夫唯嗇 是以早服 59장)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화(貨)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가 만들 수 있는 농산물(農産物)이 아니라 공산품(工産品)이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공산품은 직접적 생산품이 아니고, 또 일차적인 필수품도 아니었다고 해야 합니다.
화(貨)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商品)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貨)
입니다. 현(賢)이 2차적인 재구성이듯이 화(貨)도 자연산이거나 농산물이 아니라 2차 생산품인 공산품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구하기 어려운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하여 공산품
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高價)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없었습니다. 외국환율제도와 함께 시장가격 역시
고도의 수탈시스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가 물론 오늘날의 외환제도나 가격시스템을 전제로 이야기한 것일 리는 없지만 화(貨)의 가격이 등귀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언급되는 심(心)과 복(腹), 지(志)와 골(骨)의 대비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腹)과 골(骨)을 강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심(心)과 지(志)는 버리고 복과 골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대비시키고 있는 심지(心志)와 복골(腹骨)이라는 두 그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골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심지(心志)가 타율신경계(他律神經系)인 데 비하여 복골(腹骨
)은 자율신경계(自律神經系)라는 것이지요. 不見可欲의 욕(欲)도 심지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부구조(上部構造)보다는 하부구조(下部構造)를 튼튼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입니다.
IMF사태 때 우리 사회의 허약한 토대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경제학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IMF사태는 한마디로 자립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겪은 환란이었지요.
일제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해방과 건국과정에서도 그대로 온존되고 그 후 3공 시절의 소위 산업화
과정에서 그 허약성과 종속성이 급속하게 강화되고 구조화됩니다. IMF는 이처럼 허약한 체질에 그 원인이 있었
지요. 복과 골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IMF극복 방식이 복과
골의 강화를 외면하고 임시 미봉책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IMF 이후에 자주 듣고 있는 구조개혁이나 구조조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개혁이나 구조조정이
아니지요. 토대의 개혁이 아니지요. 같은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무엇보다 욕망(慾望) 그 자체를 양산(量産)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貨)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내 경우에도 무엇을
사지 않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CF나 쇼우 윈도우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결의를 다져야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생산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지식사회라고 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으로 선전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식도 상품의 형태로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언어도 상품이 아니었음
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언어가 가장 마진이 높은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지식도 정보도
상품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의 삶입니다.
무지할 수도 없고 무욕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조를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지자(智者)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난득지화(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
롭게 하는 등 작위적(作爲的)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智者)들이지요.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作爲)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대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옷처럼 덮어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衣養萬物而不爲主 34장)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
니다.(爲無爲 則無不治) 나아가서 천하는 무사(無事)로서 얻을 수 있으며(以無事取天下 57장),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67장)고 합니다.
이 장의 성인(聖人)이나 지자(智者)는 적절한 비유는 못됩니다만 오늘날 정치인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非老子的)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향(靜香) 선생님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하신 적이 없다고 실토하신 적이 있습니다. 투표하시지
않은 이유가 매우 특이합니다. 이유인즉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찍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를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스스로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휘익 한바퀴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60장)는 것이지요. 작은 생선을 구울
때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지요.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근거로 하여 노자사상은 우민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지(無知) 무욕(無欲) 그리고 무위(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위(無爲)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과 피세(避世)
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일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면 있을 따름입니다.
"물이 최고의 선(善)인 세 가지 이유”
노자 예제(例題)-5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8장)
上善(상선) : 최고의 선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다.
幾於道(기어도) : 幾는 近. 도에 가깝다. (道無水有 故曰幾也--왕필주)
居善地 心善淵. . . . : 善은 형용사, 부사, 동사로 각각 해석할 수 있다.
與(여) : 더불어 사귀다, 施, 予(帛書)
仁(인) : 人 또는 天(帛書)
노자 철학을 한 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의 성질과 운동을 통하여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8장을 여러분과 같이 읽으려고 하는
것은 연대(連帶)의 논리입니다. 연대는 우리의 당면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논의는 우선 본문을 해독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이 비록 현덕(玄德)이 아니고 도(道) 그
자체가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현상형태라는 것이지요.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3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친구 중에서도 물 같은 친구를 가장 좋아하지 않나요? 필요한 경우 언제나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 바로 물 같은 친구지요.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逃避主義)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순조롭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목표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실천방법에 무리가 있는 경우를 쟁(爭) 즉 ‘다툰다’고 합니다. 주체적 역량이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
(未成熟)한 상태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입니다. 작위(作爲)이지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되는 것을 노자는 쟁(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
파국차지’(全國爲上 破國次之)라 하였지요.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은 최선이 못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지요.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作爲)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 “天地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물리적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억압받는 곳, 피지배 계급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을 노자의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읽습니다. 물론 노자사상이 민초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
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명시적 진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은 근본에 있어서
민초들의 정치학입니다.
그러나 ‘노자’는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가의 무리는 대개 사관(史官)에서 나왔으며 이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술수(術數)를 기술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위 ‘무위(無爲)의 통치’는 군주의 비밀정치론이라는 것이지요.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후왕이 만약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될 것이다.”(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제37장)는 것을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이 경우의 무위(無爲)는 핵심적 권력의 장악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핵심적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다’(無不爲)는 것이지요.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한다는 것은 곧 우민화이며,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한다는 것은 동물처럼 배만 부르게 하고 머리는 비게 한다는 것이지요.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은 비판의식을 제거하고 힘든 노동에 견딜 수 있도록 육체만 튼튼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군주는 핵심적 권력만을 장악하는 것(抱一)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그 하나(一)가 설령 도(道)라고 하더라도
‘대도(大道)’는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서 군주의 통치권(統治權 : 행정권이 아닌)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노자사상은 전제군주의 비밀정치를 옹호하는 사상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노자사상의 소위
공평무사(公平無私)는 물론 법가(法家)가 계승하게 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극대화하고 권력의
소재를 은폐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지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도 노자를 계승한 것이며 비판적 의견을 봉쇄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요.
노자사상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는 노자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는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철학적 담론임에 틀림없습니다.백보를 양보하여 ‘노자’를 정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학은 철저하게 민초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 치닫는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
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作爲)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철학적 내용 때문에 또 ‘노자’를 고답적인 피세(避世)의 철학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자’를 피세의 철학으로 단정하거나, 제왕학(帝王學)이라고 성격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
니다. 전쟁과 하극상으로 점철된 살벌한 상황 속에서 패권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편승한 지식인들을 질타한
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결단이 요구되는 실천적 행위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희생자인 민초들을 위하여 반전(反戰) 중명(重命)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그들의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서도 노자의 입장이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천하대란을 당하여 모든 억압과 착취가 최종적으로는 가장 약한 민초들의 부담으로 전가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잃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고통은 결국
민초들의 몫입니다.
이러한 민초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노자’의 곳곳에 피력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제75장) 그러나 우리가 ‘노자’에 주목하는 것은
민초의 전략과 전술을 ‘노자’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것이며,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民草)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는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以其無以易(변함없음)입니다. 이 구절 이외에는 모두 선언적인 것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된다거나, 천하의 왕이 된다는 메시지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내어야 하는 것은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가장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강자의 지배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보다는 피지배자가 그 수에
있어서 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지배하여 휘하에 부리는 경우에 비로소 그 힘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강자의 능력은 그 개인
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2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노자가 밝히고 있는 유일한 이유인 以其無以易之가 그런
의미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落水)
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
하여야 합니다.
둘째 다수(多數)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등은 철거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하여 다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도언론의 막강권력에 의하여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多數)는 반드시 낮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山)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이 많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양은 적어
집니다. 정상은 품이 작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이야기하였듯이 산정(山頂)은 산록(山麓)이 받쳐주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강자의 능력과 힘이란 다름 아닌 다수의 약자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이 도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노자의 정치학이라고 하였지요. 민초들의 전략전술이라고 하였습니다.
낮은 곳에 약한 사람들이 살고 또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정리하여야 할 것인가?
현 상황에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노자’의 이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은 무엇일까”
노자 예제(例題)-6
이야기를 바꾸어서 질문을 하나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무엇입니까? 얼른 대답을 못하지요?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61장)
대국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천하가 만나는 곳이 되며, 모든 가능성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곧 우리의
당면한 문제의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변혁운동의 문제점은 전체 역량이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열, 분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당면한 과제는 단연 연대(連帶)문제라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사회교육원 노동대학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만 나는 연대(連帶)의 이유를 ‘노자’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노자’의 정치론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는 의미에서 그 강의안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강독
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노자’의 생환(生還)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변혁운동에 있어서 연대문제가 당면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혁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체 변혁 역량이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중심 역량인 노동운동 역량 역시 취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량의 강약을 평가
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입니다. 양적(量的) 기준과 질적(質的) 기준이 그것입니다.
양적 역량이란 것은 수량적 개념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질적 역량입니다.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組織性)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조직 역량은 비록 그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엄청난 증폭(增幅)의 핵(核)이 됩니다. 따라서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의 단결과 결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질적 문제를 조직 내부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지요.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두는 경우에는 2가지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하나는 조직이 경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 자체가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존재론적 패러
다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기본 구조에 있어서 자본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에 내거는 기치에 관계없이 이러한 방식은 근대사회의 틀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조직을 최우선 단위로
하는 존재론적 논리는 필연적으로 좌우편향을 낳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량주의적 경향으로 후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모험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존재론적 논리는 결국 강철(鋼鐵)에 대항하여 또 하나의 강철을 만들어 내는 모순입니다. ‘노자’의 전략전술과는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둘 경우에 나타나는 두 번째의 문제는 그러한 질적 역량은 양적 증폭의 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경우에는 연대문제가 성급한 견인론(牽引論)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한 집단이기주의가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며 더러는 선진성(先進性)이 대중성(大衆性)을
밀어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 경향입니다. 개량주의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우편향(右偏向)
입니다.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적이라는 모순을 안게 됩니다. 역량이 취약하고 조건이 미성숙한 단계에서
숱하게 경험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당면 과제인 연대문제가 내부의 조직문제로 후퇴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현 단계 우리 사회의 역량이 그 양적 측면에서나 질적 측면에서 매우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상황에 있어서도 수세적 국면으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실천적 과제가 바로 연대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연대는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실천적으로는 약한 자의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방법론과 철학이 바로 ‘노자’이지요. 노자(老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설파합니다. 노자에 있어서 최선은 최강(最强)의 의미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노자사상은 기본적으로 민초(民草)들의 전략전술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귀중한 담론을 노자
에서 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방법론이 노자사상입니다.
약한 물이 강고한 것을 이기는 힘을 노자는 무엇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물의 특성에서 찾습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특성 때문에 물은 반드시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고 그리고
수많은 물들이 모이기 때문에 결국 바다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물의 철학은 한마디로 하방지향(下方指向)의 연대성에 있습니다. 모든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바다’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뜻이지요.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하방
지향의 연대는 그 아픔에 다가가서 그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그야말로 열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도 많지만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기준의 하나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오만하다거나 강자에게 비굴하면서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연대의 원칙은 낮은 곳, 약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처럼. 강한 것,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연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과 타협입니다. 결국 흡수되거나 복속(服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연대해야 할 방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안으로는 대기업 노동현장보다는 중소의
열악한 현장과 연대하고,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밖으로는 역량이 취약한 부문과 연대해야 합니다. 비조직 사회운동부문, 농민, 실업자, 빈민, 소시민 등과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물처럼 하방지향적 연대에 충실해야 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글은 연대문제에 관한 강의안의 일부입니다. 연대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방금 살펴본 ‘노자의
물’ 외에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목표와 과정’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가치
실현의 문제’ ‘화동(和同)과 공존(共存)’에 관한 논의들을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경제학 강좌’에서
다루는 게 옳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문법적으로 선(善)을 형용사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부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地) 연(淵) 인(仁) 신(信) 치(治) 능(能) 시(時)를 동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문법 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 독법의 요체는 일관성입니다. 전체의 의미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시도하고 있듯이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민초들의 연대론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전위조직의
과학적 실천방법에 관한 강령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에 합의하는 현실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
로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나 과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與善仁의 與와 仁은 인간관계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하든 그 인간관계를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言善信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正善治의 正은 政입니다. 바로 잡는 것 즉 개혁,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治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은 웅덩이(科)를 만나면 건너뛰는 법이 없고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나아가는 것이지요(盈科後進).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방식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科學的) 방법(方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唯不爭 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노자’를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이유와 그것의 현대적 의미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무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남대문 시장에 갔었어요. 거기 좌판에 피켓을 꽂아 두었는데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싸다고 물로 보지마!”라고 썼습니다. 파는 것이 ‘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T셔츠였지요.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노자 예제(例題)-7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利 無之以爲用(11장)
輻(복): 바퀴 살.
轂(곡): 바퀴 살이 모이는 통.
埏埴(선식, 연치) : 찰흙을 이기다.
鑿戶(착호) : 門을 뚫다.
牖(유) : 窓門.
이 장도 널리 알려진 장입니다. 먼저 대강의 뜻을 풀어서 이야기하지요.
서른 개의 바퀴 살이 모이는 바퀴 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하여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약간의 해석상의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轂)은 바퀴 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을 끼웁니다. 곡에 축(軸)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자명한 사실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이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무엇을 보고 고르지요?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 등을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有)를 보고 고르는
셈이지요.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저변을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商品)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소모(消耗)와 비효용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자'의 이 장을 읽으면서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았던
'환희의 동상'을 떠올립니다. 최초로 금광(金鑛)을 발견한 조지 헤리슨이 금광석을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동상입니다.
남아프리카가 캐낸 것이 전 세계의 금과 다이아몬드의 70%라는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그 환희의 크기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상을 지나 바로 골드리프시티 광산의 지하갱도에서 그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고는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렵기 짝이 없는 지하 3천3백m, 숨막힐 듯한 갱도에서
섭씨 60도의 고열 속에서 금광석을 캐고 있는 흑인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하갱도의 흑인 소년과 '환희의 동상'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상이 '노자'를 매우 천박하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모르지 않습니다.
현학(玄學)을 사회학(社會學)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바로 소유(所有)와 소비(消費)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리고 이 유(有)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치열한 실천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으로부터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예찬은 자칫 사회의
억압구조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종단의 거대한
소유(所有)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無所有)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유(所有)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無),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話頭)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人間像)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 분이 참석했는지 참석
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뜨이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
하기 바랍니다.
"최고의 지도자는 간섭하지 않는다”
노자 예제(例題)-8
太上 下知有上 其次 親之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故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 (17장)
太上(태상) : 최고의 정치. 無治, 德治(王道),
悠(유) : 유유하다. 그윽하다.
猶(帛本, 簡本) 오히려. 머뭇거리다. 조심하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일이 성취되다.
自然(자연) : 스스로 그러함.
이 장 역시 노자의 정치론입니다. 특히 지도자론(指導者論)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군주(君主)에 관한 설명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太上)의 정치는 백성들이 다만
위에 임금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력하유어아재(帝力何有於我哉)
임금의 권력에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할 정도로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임금입니다.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물론 임금이 백성들을 자상히 보살피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겠지만 이러한 임금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임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는 패권정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지요.
이를테면 임금을 풍자하는 바보시리즈가 유행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故信不足焉 有不信焉입니다. 언(焉)으로 강조하여 매우 단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백성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불신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일입니다.
백성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상(太常)의 정치이며, 이를테면 무치(無治)입니다. 무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임금은 백성을 신뢰하고
백성은 임금을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인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
입니다.
명심해야 하는 것(悠兮)은 첫째 귀언(貴言)입니다. 즉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2장의 행불언지교(行不言
之敎)와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불언(不言)은 말없음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간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간섭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카메라만 잡아도 요구가 많습니다. 더구나 정치권력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자면 불가피하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정치권력은 처음부터 간섭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자가 불간섭을 요구한다는 것은 권력의 사당적(私黨的) 성격
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공(功)을 세우고 일을 성취하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功成而弗居 제2장)은 물론입니다.
공명(功名)을 이루었더라도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成名遂 身退 天之道 제9장)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百姓皆曰 我自然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간섭하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다름아닌 민주주의 사상입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노자의 이상적 정치와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이와 같습니다.
좌전(左傳)의 “太上 有立德 其次 有立功 其次 有立言”이 이 장(章)을 부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80장에서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신뢰의 문제입니다.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
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백성들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CF광고는 물론이며 문화와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勸力)을 생각한다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 매몰되고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있는
백성들이 과연 독자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이기까지 하지요? 나 역시 여러분만큼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믿어야 합니다.
신뢰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과 한번쯤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전강독은 1, 2학년에게는 수강
신청이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1학년 2학년의 정서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겪은 시절이지요. 1,2학년은 고3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직후의 짧은 반동기(反動期)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에 깊숙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특히 의상과 헤어스타일과 음악에서
찬란한 자기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3, 4학년이 되면 어떻습니까?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점찍어 놓고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여러분도 인정하지요? 그런데 변화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현실에 부딪치고 그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실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들이 걸어가는 한 개의 골목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삶의 결론으로서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게 되는 작은 계기로서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 장에서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자연(自然)은 ‘Nature’가 아닙니다.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野蠻)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물이나 목재를 얻는 자원(資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으로서의
존재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外部)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
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
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는 한강을 생각해봅시다. 한강의 그러한 모양은 수많은 세월을
겪어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북한산의 모양 역시 수천만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친 가장 안정된 형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연의 질서는 가장 안정된(stable)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는가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이즈만 하더라도 원래 에이즈 바이러스(virus)는 침팬지에게 안정적(stable)으로 서식하던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옮겨오면서 결정적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에이즈뿐만 아니라 지구 도처에서 나타나는 소위 바이러스 브레이크(virus break)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미생물의 세계뿐만이 아니지요. 생태계의 질서가 엄청난 규모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간섭인 것이지요.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
지요.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패배와 환희로 점철된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 온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
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道)이고 노자의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최고의 형식”
노자 예제(例題)-9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아주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잘 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이상이 대강의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왕필본에는 躁勝寒 靜勝熱로 되어 있지만
교재에서는 진고응(陳鼓應)의 설을 취한 것입니다. 노자사상이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대(大)'입니다.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교(大巧) 대변(大辯)에서 알 수 있듯이
대(大)는 최고 수준, 최고 형태를 의미합니다.
성(成) 영(盈) 직(直) 교(巧) 변(辯)의 최고형태는 그것의 반대물(反對物)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곧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이 그것입니다.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질적 전환에 대한 담론입니다. 노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를 통하여 사물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위적(人爲的)이고 상투적인 형식을 부정합니다. 획일주의를 반대하며(反劃一主義),
형식주의를 반대합니다(反形式主義).
이것은 인위(人爲)를 배격하고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자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대(大)의 기준, 즉 최고(最高)의 기준은 '자연(自然)'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대성약결(大成若缺)과 대영약충(大盈若沖)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허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의상(衣裳)의 경우에 대성(大成)의 경지, 즉 최고의 완성도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정장차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유롭고 헐렁한 코디네이션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서는 확신이 없지만 이를테면 앙드레 킴의 패션은 헐렁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장자(莊子)'
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어도 다하지 않는다(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는 것은 어떤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닳거나(弊) 다함(窮)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節槪)와 지조(志操)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도(書道)에 있어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拙)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의 글씨는 그 서툴고 어리석은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없이 버립니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은,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言)은 항상 부족한 그릇이지요. 말로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지요. 名可名 非常名이지요.
언이 부족한 표현수단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눌변(訥辯)이 대변(大辯)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예를 들어 '맷돌'
이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맷돌이란 단어에서 무엇을 연상합니까? 아니 어디에 있는 맷돌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습니까?
생활사 박물관이나 청진동 빈대떡 집에 있는 맷돌을 연상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밖에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외갓집 장독대 옆에 있었던 맷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멧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세계의
소통이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시간적으로 지체되게 됩니다.
더듬는 말처럼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라이브 콘서트는 노래 중간중간에 가수가 엮어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그 때 느낀 것입니다만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었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리 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감각
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마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들을 지배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긴다는 것. 그리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역시 노자사상의 당연한 진술입니다.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作爲)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수레는 탈 일이 없고 무기는 쓸 필요가 없다”
노자 예제(例題)-10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80장)
什伯之器(십백지기) : 많은 기계. 또는 열 사람 백 사람의 몫을 하는 기계.
重死(중사) : 畏死, 생명을 아끼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다.
復結繩(복결승) : 결승문자로 되돌아가다. 문명비판으로 읽는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입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 soft-technology, 반전평화. 삶의 단순화 등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결승(復結繩)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쓰여졌습니다만 반드시 복고적 주장
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Progress is Simplification)"라고 했지요.
노자의 예제 강독을 마치겠습니다. 예제의 양이 부족하기도 하고 또 내용이 매우 어렵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노자'가 더 어려워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에는 인간 노자에 대한 묘사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노자 강의를 끝내면서 만약 여러분이 인간 노자의 풍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의 친구 중에서 노자 비슷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노자에 대한 최고의 이해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노자사상은 수학에서 '0'의 발견과 같은 것"
3) 노자의 사상
(1) 노자사상의 핵심은 무(無)와 무위(無爲)입니다. 무(無)는 인식론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위(無爲)는 실천론으로서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有)보다는 무(無)를 우위에 두고 만물의 본체는 무(無)이며 무에서 유(有)가 나오는 체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유(有) 그 자체의 의미를 왜소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용지용(無用之用)에서 볼 수
있듯이 무(無)와 유(有)를 통일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자의 체계는 통일적 체계입니다.
노자의 체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동태적 체계입니다. 고정 불변하거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며(企者不立), 강풍은 아침 내내 불 수 없고 폭우는 하루 종일 내릴 수
없습니다.(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23장)
이러한 통일적 관점과 동태적 체계는 당연히 가치판단에 있어서 상대주의(相對主義)로 나타납니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교(長短相較) 등에서부터 미추(美醜), 선악(善惡), 화복(禍福)
에 이르기까지 노자의 개념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리만큼 상대주의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는(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58장)체계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로 나타납니다. 반어적(反語的)이고 역설적
(逆說的)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 것, 버린 것, 돌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
함으로써 반문화적(反文化的) 가치를 조명해 내고 있습니다.
(2)
노자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을 더 신뢰합니다. 노자철학은 약자(弱者)의 편에 선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유능제강(柔能制剛)에서 분명하게 피력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실천론은 약자의 실천론이며 민초(民草)들의 정치학입니다.
그러한 실천론의 핵심이 바로 위무위(爲無爲)입니다. 위무위의 실천론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이 꾸준히 몸을
낮추어 이윽고 바다에 이르는 유장한 호흡을 의미합니다.
'노자'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한 가닥 위로는 강자는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爲者敗之
執者失之(29장)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약한 것이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비단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을 더 신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자'는 動보다는 靜을, 滿보다는 虛를,
進보다는 歸를, 巧보다는 拙을, 雄보다는 雌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체계입니다.
(3)
노자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사상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합니다.
노자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儒家)
측에서도 도가를 계속 읽고 해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노자사상의 탁월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가사상의 관대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노자사상은 중국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노자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法家)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상선약수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습니다만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노자'는 도교(道敎)의 기본교리로 경전화되기도 하고, 불교사상의 정착과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본체론
(本體論)과 인식론(認識論)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외에도 문학(文學), 회화(繪畵), 예도(藝道), 무도(舞蹈) 그리고 무위(無爲)의 관조적(觀照的)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서 깊이와 다채(多彩)를 더하였다고 평가됩니다.
한비자(韓非子)의 통어술(統御術), 병가(兵家)의 허실전법(虛實戰法)도 노자의 영향 하에서 발전하였음은
물론입니다.
(4)
노자의 철학은 근본을 높이고 말단을 줄이는(崇本息末) 철학입니다.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
이며 자연(自然)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듯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가 노자의 세계입니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25장).
자연을 궁극적 가치로 하여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자연이 대상세계(對象世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자연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self-so)'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최고의 독립성(獨立性)과 최대의 안정성(安定性)을 갖춘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노자'의 사상영역은 최대의 포괄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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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o, New Way of Thinking - Chung-yuan Chang
Chapter 1 The Tao that can be spoken of is not the Tao itself.
Commentary
This chapter both introduces and summarizes the entire Tao Tê Ching.The “five thousand words” of the text are all based on this chapter. It contains a number of basic ideas which help to reveal the essence of Tao. Tao is conceived of as the source of the universe and the originator of all things. Tao cannot be determined: it is nameless and inexpressible. Further, its wonder and its manifestations, its reality and its appearance are identified. The approach to this identity is through non-intention, or “non-willing.”1
As mentioned in the introduction, Tao has been identified in the past as reason or nature, eternal or absolute. These names are all one-sided and misleading. Therefore, in this translation Tao is called “the Tao itself.” This means that it is the real Tao whose hidden meaning is revealed through non-discrimination. The real Tao is also used in the commentary by the great Buddhist Te-ching (1546–1623). As he says:
In Heidegger’s work we read:
“The mystery of mysteries” might be seen through the eyes of Buddhism: that is, the Dharma Eye, which sees differentiation; the Wisdom Eye, which sees non-differentiation; and the Buddha Eye, which sees both differentiation and non-differentiation. Through the Dharma Eye one sees the manifestations of Tao in ten thousand things. Through the Wisdom Eye one sees the wonder of Tao. Through the Buddha Eye one sees the identity of the manifestations and the wonder of Tao. Thus, the three eyes lead one through the gate of all the wonders of Tao. Hence, in the line “oftentimes without intention I see the wonder of Tao,” the word “see,” or “kuan,” is the key to the treasure of Tao. However, kuan is not the ordinary seeing of either the nameable or the unnameable, being or non-being. This seeing is one-sided: that is, when one sees the nameable, one neglects the unnameable; when one sees the unnameable, one neglects the nameable. The real action of kuan is seeing that the unnameable and the nameable are identified. Thus, when one sees nothing, one does not simply see nothing. One sees that within nothing, ten thousand things are simultaneously concealed and unconcealed. When one sees being, one is not limited to the form of being. One sees that being is simultaneously the formlessness of being and the wonder of non-being. Therefore, Lao Tzu says:
The action of kuan is the mental function of contemplation. Through this contemplation, one immediately grasps the complete identity of the nameable and the unnameable, or being and nothing. What is seen in this chapter cannot be conceptualized. Originally, yu and wu were read together with yü, as yu yü, or intention, and wu yü, or non-intention. Then, in the eleventh century, the Chinese commentator Su Ch’ê used being and non-being as objects of kuan. He read yu and wu separately from yü, as being and non-being; he read yü as the verb “to wish.” The ideas of intention, or yu yü, and non-intention, or wu yü, were discarded. Su Ch’ê did not understand that through wu yü, or without intention or non-willing, one is freed from conceptualization and released to the total identity of the seer and the seen, which is the highest stage of the mystery of Tao. Without this inner experience of identity, everything that has been said here would merely be the “rubbish” of conceptualization. It would be the manifestation and not the wonder of Tao. One must simultaneously be free from both the wonder of Tao as an object of study and from the idea of the mystery as subjective feeling. Then one will achieve what Taoists call “wu o chü wang” or “both things and myself are forgotten.” Once one is free from both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one can enter the gate ofTao. With this understanding, one might better be able to grasp the meaning of the following chapters.
Notes to Chapter 1
*The meaning of this chapter varies a great deal with the different punctuations adopted by commentators. This translation follows the traditional punctuation, which is most natural to the authentic, Chinese literary style. However, in the most important sentence in this chapter, a full stop is used after the word tung, or identity. With this punctuation, the sentence reads, “its wonder and its manifestations are one and the same.” The sentence thus carries the meaning of the middle way philosophy, according to which reality and appearance are identified.
1.Heidegger, Discourse on Thinking, p. 59.
2. Explanations of the Tao Tê Ching, Commentary on the First Chapter, p. 1a
3.Heidegger, On the Way to Language, p. 92.
<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1
도덕경과 그리스도교 영성
1장. 도(道)와 하나님
<도를 도라고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부르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이 말은 역설(逆說) 가운데 역설(力說)이다. 도를 가리키면서도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도를 둘러싼 온갖 형용사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역설(逆說)이다. 이 말은 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과도 같다. 도에 이름을 붙여 설명하려는 시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제 이름이 아니라(名可名非常名)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도 그 자체의 직접적 의미는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언어는 이미 상징일 뿐이고 본래적 개념을 전적으로 충실히 반영해 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物自體)와 같은 개념으로서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도를 말할 수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도에 비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대하는 시각은 여전히 각양각색이다. 그렇지만 비유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도는 동양사상에서 최고의 존재론적 가치에 부여하는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한 시대에 이미 동양에서는 기원전부터 도를 숭상해 왔다. 다만 노자 도덕경에서 도는 언어로 포착되거나 형용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을 그리스도인들은 겸허하게 경철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대하는 경솔한 태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하나님을 타인에게까지 억지로 이해시키려는 태도는 사뭇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 태도가 상대의 인격까지도 무시하는 듯이 공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고 떠드는 만큼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 이해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개념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성서요 하나는 자연이다. 여기서 이해는 해석학의 문제에 부딪친다. 현대의 해석학은 언어적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석학자 리꾀르가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논리적 언어보다는 상징, 은유, 이야기 형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성서를 대할 때도 문자적 언어의 측면보다 언어 이면의 진리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 할 때 비유를 즐겨 들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 할 것인가? 언어를 넘어선 마음 세계로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때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완전한 이해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 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감지 할 뿐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의 개념이 보아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므로 희(希)라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다하여 미(微)라고 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감지하는 하나님의 세계는 어떤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지만, 신묘(神妙) 막측(莫測)한 천지를 창조한 분 아닌가? 하나님은 천지를 어떻게 창조했던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지 않는가? 도(道)의 창조 원리 또한 마찬가지다.
< 무(無)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덕경> 1장에서 시작되고 있는 이 말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과정을 말해주는 도교의 우주론적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무(無)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무가 천지의 시작이 된다. 다시 말해서 무가 유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뜻이다.
무가 유보다 앞선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창조 원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고, 흑암 중에 빛을 창조하였으며, 무에서 천지를 창조했다. 도가(道家)에서의 도나 그리스도교에서의 하나님은 모두 우주의 궁극적 진리이자 우주의 근원이다.
이름도 형태도 붙일 수 없던 무명(無名), 무형(無形)의 도(道)가 천지의 시작이 되고 만물의 어미가 된 것이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진행 과정이 그리스도교의 창조순서와 같다. 도덕경에서 주목될만한 점은 유(有)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상이다. 어머니는 여성적 개념이다. 음양사상으로 말하자면 음(陰)에 속한다. 어머니에게서 젖이 나오고 그 젖에서 자식이 생육되듯이 만물은 어머니와 같은 대지(大地)의 품에서 자라난다.
<도덕경>에서도 그러했듯이 우리가 천지(天地)라고 말할 때, 천(天)을 지(地)보다 앞세워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지천(地天)이라 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서 하늘이 땅보다 개념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은 유사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하늘도 유(有)보다는 알 수 없는 무(無)에서 시작되었고, 도의 작용으로 인해 점차 유의 세계로 전개되어 나간 것이다.
< 그러므로 항상 무욕(無欲)으로 그 묘(妙)함을 꿰뚫어 보라>
故常無欲, 以觀其妙
욕망으로 마음이 가려져 있는 한 신묘(神妙)하고 오묘(奧妙)한 진리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도(道)와 하나님의 세계는 말해 무엇 하랴. 무욕의 실천으로 늘 텅 빈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도와 하나님의 길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 순수해 질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왕필(王弼)의 설명에 의하면, 묘(妙)는 미세함의 극치다.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지를 진동하게 하는 요란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마음속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왔다. 오묘한 진리일수록 세미하게 들려온다. 세미한 음성은 양심의 소리요 하늘의 소리다. 하늘의 뜻을 알려거든 마땅히 먼저 욕망을 버리고 텅 빈 마음의 귀로 세미한 음성을 듣고 또 텅 빈 마음의 눈으로 그 오묘한 뜻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 항상 욕망함(有欲)으로 그 돌아감(徼)을 본다.>
常有欲, 以觀其徼
욕망의 세계는 어떠한가? 욕망은 나쁘기만 한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무욕의 세계가 텅 빈 마음의 세계로 도와 하늘의 뜻을 관찰하는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유욕의 세계는 물질적 순환의 세계를 이룬다. 순환의 세계라 함은 시작과 마침을 거듭하는 것을 뜻한다. 영혼의 세계를 일러 영원의 세계라 한다면, 육체의 세계는 마침이 있는 세계다. 그러나 이 땅의 생존 세계에서는 육체 없는 영혼이 없듯이 육체와 영혼이 하나 되어 한 인격체를 이룬다. 이 때 한 인격체가 고양되고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이 필요한 법이다.
욕망 없이는 살 수없다. 욕망은 존재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하는 존재는 반드시 그 돌아가는(돌아갈 요徼) 마침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심판의식이다. 결국은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거룩한 욕망을 따를 일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와 인류를 구원하는 부활의 열망이다.
< 이 둘(無欲과 有欲)이 같이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다. 한가지로 일컬어 현(玄)이라고 하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현묘함의 문이 된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불교에서도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진여(眞如) 곧 진리의 세계는 한마음(一心)의 세계에 두 가지 문(二門)이 있음을 말한다. 진여 그 자체의 마음세계(심진여, 心眞如)와 생멸하는 마음세계(심생멸, 心生滅)의 문이 그것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도덕경>에서도 같은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무욕과 유욕의 세계가 하나의 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세계와 형이하학의 세계가 같은 문에서 나온다.
왕필은 이 두 가지(무욕과 유욕)를 시(始)와 모(母)로 해석한다. 이는 천지지시(天地之始)와 만물지모(萬物之母)를 말할 때의 그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순 상으로 볼 때는 무욕과 유욕으로 보아도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도덕경>이 말하는 논리적 구조로 볼 때, 천지와 만물을 무욕과 유욕으로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천지를 무(無)에, 만물을 유(有)에 배치시키는 구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무욕과 유욕, 천지와 만물이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그 작용(作用)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작용이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본체(體)는 같지만 그 쓰임새(用)가 다르다는 측면이다. 하나의 마음에서 두개의 생각이 나올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서 선한 생각이 나올 수 있고, 또 악한 생각이 나올 수 있다. 여기서의 무욕과 유욕은 선악(善惡)의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천지와 만물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보면, 선악도 그 뿌리에서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마음뿌리에서 선한 마음을 배양하기에 힘써야 한다.
무(無)는 버림, 포기, 떠남, 비움에 가깝다면, 유(有)는 집착, 소유, 채움에 가까운 개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아직 판단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판단 미정의 가치중립적 상태일 수 있다. 본체가 같으나 쓰임새가 다르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쓰임새, 즉 용(用)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용(用)의 성격은 다분히 목적 지향적이다. 목적 지향적인 만큼 개인의 삿된 생각이 들어 설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도덕경>에서 배워야 할 바가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필요한 자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체(體)는 같으나 용(用)이 달라지는 자리, 목적에 따라 천 갈래 만 갈래로 용이 달라지는 자리, 바로 그 자리를 위해 영성(靈性)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천지와 만물, 무욕과 유욕 이 둘을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신묘함의 문(門)이 된다함은 무엇인가? 현(玄)은 문자적으로 어둡고, 고요하고 텅 빈 것이다. 어둡고 텅 빈 고요한 곳에서 사물을 제대로 분간 할 수 없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감각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 무욕과 유욕이 아직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선악미정, 가치미정의 상태다. 왜냐하면 이 상태야 말로 모든 사물과 현상세계가 시작되는 원초적인 뿌리이자 근원이요, 출발점인 도(道) 즉, 로고스의 시작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지의 문은 열렸다. 이는 빛이 세상에 임했으나, 아직 세상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그 빛은 천지와 만물을 조명하고 인간의 선악 간 모든 행위도 비추게 될 것이다. 천지가 열리고 만물이 열렸으니 천하 만물의 상태는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가? <도덕경> 2장에서 이를 살펴보자.
<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6
<예수, 노자를 만나다> 머리말
흔히 동양의 사상을 말할 때 우리는 불가(佛家)와 유가(儒家) 그리고 도가(道家)의 철학을 먼저 떠 올리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하면 인도의 사상인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종교 혹은 철학적 배경이 동양정신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불가의 공(空) 사상과 유가의 인(仁), 그리고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서양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해 왔다. 그 가운데서 불가는 특히 인도의 베단타 사상이 보여주듯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의 사상적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 사상이 중국에 오면서 무리 없이 토착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노자의 사상이 이미 훌륭한 토대가 되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을 근원적으로 탐색했다는 점에서 중국철학의 참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노자철학은 동양정신의 진수를 대변해 주는 훌륭한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은 이제 중국의 문화권을 넘어 동아시아와 세계인의 가슴에 점차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서양으로 수출되는 동양정신의 대표적인 사상은 선불교와 함께 노자의 사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이 기원전 100년경에 <사기>에서 밝히듯이,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주나라의 수장실사(장서실 관리인)로 있다가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를 결심한 후에 서쪽으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를 떠나 서쪽으로 가면 당시에 진(秦)나라가 나오지만, 그 때 그가 서쪽으로 떠난 곳이 어딘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 서방세계로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불과 할 수 있지만 사마천에 따르면, 늙은 노자에게 공자가 찾아와 예(禮)에 관해 물었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에 대해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인위적 사상을 질책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자는 <도덕경> 본문 18장에서 ‘대도폐(大道廢 有仁義)’라고 하여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생겨남’을 한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자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정치를 인위적으로 실현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무위(無爲)의 관점에서 통치를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가 말하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지 않음이 없는’ 경지의 통치가 이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도(道)의 원리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도의 원리에 관해 설명한 것이 <도덕경> 81장 가운데 상편에 해당하는 37편까지의 <도경>이다. 38장에서 마지막 81장은 도에 입각한 덕(德)의 참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덕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위자연’에 입각한 노자의 도 사상을 예수의 하나님 사상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신학을 전공으로 출발했지만 일찍이 동양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학부시절에 연세대 이강수 교수님의 ‘동양철학의 이해’와 ‘노자철학’을 수강하면서 <도덕경>의 맛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 인연일수도 있다. 대학원 시절에는 인도철학을 전공했지만, 감리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 김흥호 교수님으로부터 ‘노장사상과’, ‘선불교’, 그리고 ‘양명학’을 번갈아 수강하면서 노자의 정신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자에 대해 보다 더 결정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 시절 김승혜 교수님의 수업에서 ‘노자철학’을 원문중심으로 해석하면서 부터였다. 서강대학교의 종교학적 분위기가 비교종교학적 전통이 강하다는 점도 필자에겐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러한 훌륭한 스승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조그마한 생각을 엮을 수 있었음을 감사할 따름이다.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상편에 해당하는 37편까지의 글을 원문중심으로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예수의 정신과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다. 물론 <노자>에 대한 해석서는 다양하다. 왕필의 주석 외에도 하상공의 주해나, 상이 주 등이 있지만 주로 왕필의 해석을 따랐다. 각 장마다 번뜩이는 노자의 지혜는 필자를 감복시키다 못해 탄복하게 했으나, 재주가 부족한지라 그 뜻을 쉽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지만, 구구절절 숨 쉬고 있는 노자의 말없는 교훈을 한자라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새 노자는 한쪽에서 살며시 미소를 짓는 듯 했고, 예수는 그보다 500여년을 앞서 살다간 이에게 다가와서 ‘진리’라는 이름으로 말을 건넨다. 진리는 진리를 만나기 때문이다. <도덕경>과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만나는 자리인 셈이다.
그동안 필자는 지난 1년 반 동안 월간 <영성의 샘>이라는 잡지에 영성철학으로서의 <도덕경>과 그리스도교 영성을 기고해 왔다. 그 하나의 결실을 부끄럽지만 세상에 내어 놓기로 결심했다. <예수, 노자를 만나다>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노자가 이미 예수에 앞서서 동양정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고, 예수로 대변되는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각도에서 도의 면모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모습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면, 만날 수 있는 부분과 만날 수 없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난다. 언어가 주는 상징의 세계가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 일 수도 있다. 상대적인 진리라도 만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반가움이 있고, 만날 수 없는 거리감에서는 그만큼 반성적 사유의 깊이를 더하게 해 준다.
전쟁과 문명의 충돌로 세상인심이 흉흉해지는 오늘날,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요즈음, 본서가 종교간의 대화를 더욱 넓혀주는데 일말의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어주길 바랄뿐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연재해준 <영성의 샘>편집인과 종교간의 대화가 척박한 한국 땅에 필자와 함께 호흡을 같이하며 정기 세미나를 열어가는 코리안아쉬람 가족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흔쾌히 출판을 허락해준 코나투스 대표 김용기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2006, 4, 10.
이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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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李文烈), 이름(글월 문, 매울 열)부터 문학적으로 압도한다. 문필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대학 시절, 그의 책들을 읽으며 사유의 폭을 키웠다. 위로를 받았고, 글이 주는 기쁨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젊은 날의 초상’은 젊은 날의 방황을 어루만졌고, ‘사람의 아들’은 인문학의 깊이를 더했다. ‘시인’은 최고의 문장과 완벽한 구성으로 독서의 참맛을 알게 했다. ‘이문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서 윤색됐다. 대학 졸업 후 20여년이 흐른 지난 15일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을 찾았다. 고희를 훌쩍 넘긴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교정을 많이 해요. 내 평생에 다시 교정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마지막 교정이라 생각하고 신경 써서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에 비춰 봐도 쓴 글을 다시 고치는 게 쉽진 않던데요.
“최근 ‘사람의 아들’ 서문을 다시 썼는데, 쓰는 데 20일 걸렸어요. ‘초한지’ 재판 서문은 원고지 10매 분량의 짧은 글인데도 한 일주일 시달린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예순여덟에 신장암 수술을 하고 3~4년 앓고 헤맸고, 요즘 치매 경고도 받고….”
-충격적인데요. 작가님과 치매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기억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특히 명사가 심각해요. 별것도 아닌 명사들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게 막히면 글도 못쓰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참고서든 기계든 용어에서 개념으로 가는 건 많은데, 개념에서 용어로 가는 건 없어요. 인터넷에 우울을 치면 우울의 뜻이 바로 나옵니다. 그런데 해는 지려하고 날씨도 그렇고 서글프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우울을 알려주는 기계가 없어요. 그 단어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죠. 개념화하고 부풀려가는 사고 과정도 전만 같지 않아요. 예전엔 자연적으로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기억하고 있던 인용들도 마음대로 인용하지 못하고. 집사람은 사람들에게 치매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해요. 들키면 사람들한테 치매 취급당한다고. 들키나 안 들키나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단어가 막힐 땐 어떻게 하세요.
“그 말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요. 주로 딸에게 전화하는데, 그 말을 알게 되기까지 빨라야 5분 걸려요. 글을 쓸 때면 보통 1시간에 그런 일이 4~5번 반복되는데, 30분 정도가 그냥 날아갑니다. 그때그때 즉각 떠오르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글을 쓰시는군요.
“읽고 쓰는 게 업이나 보니…. 몇 살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세상사 비춰보니 한 10년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80년대엔 매달 평균 원고지 300매 정도를 발표했습니다. 1년에 3000매 정도 되죠. 두툼한 소설 두 권 분량인데, 그렇게 지금까지 60권의 책을 냈습니다. 근데 최근 6년 완고 목표로 연재물을 시작했을 때 한 달에 150매로 계약했습니다. 과거 300매에서 절반으로 확 줄였는데도 1년 반 만에 접었습니다. 중도하차 때까지 매달 150매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최대로 쓴 게 147매였고, 72매를 겨우 쓴 적도 있죠. 능력이 예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젠 원고 집필 시간도 배로 계산해야 하는데, 그것도 지금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내년이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이런 변화가 사람을 자꾸 억누르니까 아주 울적합니다.”
치매 얘기로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진 듯했다. 그의 작품으로 화제를 돌렸다. 대학 때 ‘시인’을 읽고, 사람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시인’을 좋다고 한 독자는 정말 드물게 만났다”며 좋아했다. “‘시인’은 자부심을 갖고 쓴 글인데, 생각보단 국내에서 호응을 받지 못했어요. 판매도 보잘 것 없고, 평론도 정식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근데, 외국 번역판은 ‘시인’이 굉장히 많아요.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17개국에서 번역돼 나왔습니다.”
-다른 안타까운 작품들도 있나요.
“내가 다시는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냈던 작품들 중 빛을 못 본 게 ‘시인’과 ‘아가’, ‘호모 엑세쿠탄스’예요. ‘아가’도 상당히 자부심 갖고 냈는데, 평론조차 하나 없습니다. ‘호모 엑세쿠탄스’도 어떤 작품보다 중요한 작품이 될 수 있고, 그런 걸 상상하고 구상해서 쓰는 사람을 못 봤는데…. 근간 인용문 중 원고지 300매 분량을 덜어내고 새로 내려 합니다.”
-작가님과 같은 글을 쓰려면 어느 정도 각오로 노력해야 할까요.
“어떤 것들은 노력해서 되는 게 있는 것 같고, 어떤 것들은 학습이나 단련과 무관하게 종합적인 계기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내 감흥과 내 기억과 내 정서가 맞아떨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글이 쭉 이어져 나온다고 할까요.”
-예를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시인’을 쓸 때 시경이나 한시, 중국시론 같은 걸 엮어 놨는데, 그건 내가 공부한 게 아닙니다. 예전 어디선가 읽었는데, 그게 박혀 있다가 글을 쓰는 순간 튀어나와 줄줄이 연결됐습니다. 죽은 김현 선생이 아주 좋아한 ‘황제를 위하여’나 ‘금시조’에 담긴 시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그 시들을 외웠는지 모르겠는데, 필요할 때마다 인용해서 쓸 수 있게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글의 인연이나 기억의 인연인지도 모르겠는데, 어떤 것들은 지나쳐 들었는데도 굉장히 강하게 박혀 있다가 필요할 때 탁탁 튀어나왔습니다. 반면, ‘사람의 아들’은 노력의 산물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최초 단편에서 자라나는 책입니다. 시간을 갖고 되풀이해서 만지고, 보완도 여러 번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가서 참고가 될 만한 책도 사오고 했습니다.”
-작가님께선 어떠한 삶이 노년의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그걸 모르겠어요. 다 잘 아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노년의 행복한 삶을 물으니 묵직하게 다가오는데, 나도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으니…. 다만 학문적인 감상 중에 ‘비추’(悲秋)라는 게 있어요. 요즘은 그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아요. 이 가을하고, 내 인생의 가을하고 연관되면서. 근래 3, 4년은 생의 마감을 생각했어요. 인생 칠십, 고래희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매양 죽음은 나와 관계없다, 나는 안 죽을 사람처럼 말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부터 어떤 인연으로 죽든지 간에 불행한 사고로 죽진 않을 거고, 억울한 마음도 없을 거라고 나를 다스리며 죽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작가 외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은 없나요.
“작가는 가장 행복한 삶은 분명히 아닙니다. 쓸쓸한 삶, 외로운 삶과 관계있고, 이건 좋았다, 이만하면 됐다, 이런 삶도 아니고. 무엇보다 삶이 전부 다 나를 향해 있고, 남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나한테 완전한 자유가 있었다면 바꿨을 가능성도 있었을 법한데…. 40대 중반까지 가끔씩 세상을 바꾸는 걸 진지하게 상상하곤 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새로 시작해 볼까, 그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다 망상이 돼 버렸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중천의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원으로 나왔다. 이 작가는 인근 산을 가리키며 “매일 저 산을 오르며 만보를 걷는다”고 했다. 먼 산 주위로 노을이 짙어져 갔다. 그는 비추의 감상에 젖은 듯했다. “내게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분한 기대 같아요. 말의 효과가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 시대는 말이 이상하게 망해 버렸습니다. 평생 말을 다루고 말의 효용과 활용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이런 시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논리도 뒤집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움이 못돼 미안할 뿐입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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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Wisdom of Laotse - Lin Yu Tang
BOOK I. THE CHARACTER OF TAG
1. ON THE ABSOLUTE TAO
The Tao that can be told of
Is not the Absolute Tao;
The Names that can be given
Are not Absolute Names.
The Nameless is the origin of Heaven and Earth;
The Named is the Mother of All Things.
Therefore
Oftentimes, one strips oneself of passion
In order to see the Secret of Life;
Oftentimes, one regards life with passion,
In order to see its manifest forms.
These two (the Secret and its manifestations)
Are (in their nature) the same;
They are given different names
When they become manifest.
They may both be called the Cosmic Mystery :
Reaching from the Mystery into the Deeper Mystery
Is the Gate to the Secret of All Life.
The numbered sections, 1.1, 1.2, 1.3, 1.4, etc., are
translations of selections from Chiiangtse which hear on
the chapter. The niimhers in parentheses at the end of
each selection indicate the volume and page nutnher of
the Sweeping Leaves Lodge Chinese edition of Chiiangtse:
"6:4" means volume 6 page 4. Chapter numbers are
not indicated because the chapters are usually very long
and they are not suitable for quick reference. Students
who wish to obtain the chapter mtmbers from the volume
and page references may consult the Conversion Table at
the back.
1.1. THE TAO THAT CANNOT BE NAMED, TOLD OR DISCUSSED.
Therefore Ether asked Infinite, "Do you know Tao?"
"I don't know," replied Infinite.
He asked No-action the same question and No-action
replied, "I know Tao."
"So you know Tao. Can you specify?"
"Certainly."
"I know that Tao can be high, can be low, can be
centered and can be dispersed. These are some of the specifications
that I know."
Ether told No-beginning of No-action's words and
asked, "Thus Infinite says he does not know and No-action
says he knows. VVho is right?"
"The one who thinks he does not know is profound,
- Miao may also be translated as "Essence"; it means "the
wonderful," the "ultimate," the "logically unknowable," the
"quintessence," or "esoteric truth."
and the one who thinks' he knows is shallow. The former
deals with the inner reality, the latter with appearance."
Ether raised his head and sighed : "Then one who does
not know really knows, and one who knows really does
not know. Who knows this knowledge without knowing?"
"Tao cannot be heard," said No-beginning, "that which
is heard is not Tao. Tao cannot be seen; that which is
seen is not Tao. Tao cannot be told; that which can be
told is not Tao. Do you realize that which is invisible in
all the visible things? Tao should not be named."
And No-beginning said, "If someone answers in reply
to a question about Tao, he does not know Tao. Even the
one who asks about Tao has not heard Tao. Tao cannot
be asked about, and to the question there is no answer.
To ask about that which should not be asked is to land in
extremities. To answer a question which should not be
answered is to fail to recognize the inner reality. If then
those who do not' recognize the inner reality try to
answer questioners who land in extremities, such people
have neither obsered the workings of the universe, nor
do they realize the Ultimate Source. Therefore they
cannot surmount the Kunlun Mountains and travel in
the realm of the Great Void." (6:4)
On the impossihility of naming or describing Tao
see also Ch. 25.
1.2, THE CONDITIONED AND THE UNCONDITIONED.
The knowledge of the men of old reached the ultimate height.
What was the ultimate height of knowledge? They
recognized that nothing but nothing existed. That indeed
was the limit further than which one could not go. Then
there were those who believed that matter existed, but
only matter unconditioned (undefined). Next came those
who believed in conditioned (defined) matter, but did
not recognize the distinctions of true and false. When
the distinctions of true and false appeared, then Tao lost
its wholeness. And when Tao lost its wholeness, individual
bias began. (1:7)
1.3. ALL THINGS ARE ONE. THE EYE OF THE SENSES AND
THE EYE OF THE SPIRIT. In the State of Lu there was a
man, named Wang T'ai, who had had one of his legs cut
off. His disciples were as numerous as those of Confucius.
Chang Chi asked Confucius, saying, "This Wang
T'ai has been mutilated, yet he has as many followers in
the Lu State as you. He neither stands up to preach nor
sits down to give discourse; yet those who go to him
empty, depart full. Is he the kind of person who can
teach without words and influence people's minds without
material means? What manner of man is this?"
"He is a sage," replied Confucius. "I wanted to go to
him, but am merely behind the others. Even I will go
and make him my teacher—why not those who are
lesser than I? And I will lead, not only the State of Lu,
but the whole world to follow him."
"The man has been mutilated," said Ch'ang Chi, "and
yet people call him 'Master.' He must be very different
from the ordinary men. If so, how does he train his
mind?"
"Life and Death are indeed changes of great moment,"
answered Confucius, "but they cannot affect his mind.
... It can control the transformation of things, while preserving
its source intact."
"How so?" asked Ch'ang Chi.
"From the point of view of differentiation of things,"
replied Confucius, "we distinguish between the liver
and the gall, between the Ch'u State and the Yiieh State.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ir sameness, all things are
One. He who regards things in this light does not trouble
about what reaches him through the senses of hearing
and sight, but lets his mind wander in the moral harmony
of things. He beholds the unity in things, and does not
notice the loss of particular objects. And thus the loss of
his leg is to him as would.be the loss of so much dirt."
(2:1)
Therefore what he (the pure man) cared for was One,
and what he did not care for was also (parts, manifestations
of) One. What he saw as One was One, and what
he saw as not One was also One. In that he saw the
unity, he was of God; in that he saw the distinctions,
he was of man. Not to allow the human and the divine to
be confused, therein was what distinguished the pure man.
Life and Death are a part of Destiny. Their sequence,
like day and night, is of God, beyond the interference
of man. These all lie in the inevitable nature of things.
He simply looks upon God as his father; if he loves him
with what is bom of the body, shall he not love him also
with that which is greater than the body? A man looks
upon a ruler of men as one superior to himself; if he is
willing to sacrifice his body (for his ruler), shall he not
then offer his pure (spirit) also?
When the pond dries up and fish are left upon the dry
ground, rather than leave them to moisten one another
with their spittle, it would be better to let them lose themselves
in their native rivers and lakes. Rather than praise
Yao and blame Chieh, it would be better to forget both
(the good and the bad) and lose oneself in Tao.
The Great (universe) gives me this form, this toil in
manhood, this repose in old age, this rest in death. Surely
that which is such a kind arbiter of my life is the best
arbiter of my death. (2:5)
1.4. THE GATE TO THE SECRET OF ALL LIFE. When (Tao)
appears, one cannot see its root; when (Tao) disappears,
one cannot see its concrete forms. It has substance, but is
not confined in space; it has length, but its source cannot
be traced. Since it can manifest itself and yet disappear
without concrete forms, it must have substance. Having
substance and yet being not confined—that is space.
Having length and yet being without source—that is time.
And so there is life and death, and appearance and
disappearance. To appear and disappear without showing
its form—that is the Gate of Heaven. The Gate of Heaven
signifies non-being. All things come from non-being. (6:8)
From The Wisdom of Laotse - Lin Yu T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