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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2-3절
영생,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잘 되는 쪽으로 기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만 아들의 영광을 위한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광이라고 할 때 궁극적으로는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심판주로서의 재림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시점에서는 그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의 죽음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지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이르렀다고 말하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두시고 기도하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던 겁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시고 기도하시되 십자가의 죽음이 모든 택자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이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시는데, 이것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죽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반드시 내가 잘 되어야지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줄만한 그런 모습을 갖추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거기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으로도 설명했지만,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를 섬긴다는 것 때문에, 주의 진리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한 마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죽음과 함께 부활, 승천, 재림의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하신 후,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것을 1절 말씀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십자가를 지는 일이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실패나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바로 승리를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부활로, 승천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심판주로서 재림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절을 다시금 보시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것은 그리스도를 왕과 머리로 임명하셨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힘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신성을 따라서는 예수님께 뭔가 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본래부터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기서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인성을 따라서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신 성자 예수님께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왜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받느냐?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철저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만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받지만, 그런 권세를 받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 권세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 때문에 성부로부터 받은 권세를 가지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해서만 그 권세를 사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할 때 아들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철저히 아버지의 영광을 목적으로 한 것처럼, 여기서도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권세는 분명 모든 만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로 있지만, 그런 점에서 온 세상이 자기 손에 주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권세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그 권세를 사용하고자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택하여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 외에는 결코 듣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복음의 소리는 많은 사람에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들려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복음 자체를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때 복음 자체를 듣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의 멸망에 대하여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사람의 안과 밖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바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려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집니다. 이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 한해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택자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복음을 깨닫고 주의 은혜를 따라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을 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0장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에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는 말씀으로 알리기도 하셨던 겁니다.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란 질문 앞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히 택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만 봐도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게 되면 마치 모든 자를 위해 오신 것처럼, 모든 자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두’는 인류 전체,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모두입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도, 부귀에 속한 자만이 아니라 빈천한 속한 자들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누구도 제외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직 택자에 제한된 모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그리고 그 후에도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다 내 제자요,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너희 모두가 택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 하나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 다니면서 함께 사역한 제자들인데, 그들 가운데서도 유기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이 내용은 개혁주의의 보편성을 넘어 개혁주의의 독특성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들을 위해 오셨고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는데 모두가 아닌 일부만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실패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실패할 수 있는가? 만약 실패할 수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좀 더 완화해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모든 자를 위해 왔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 편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들 스스로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마치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 실패란 없습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그 일도 사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있는 것이지, 결코 우연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불완전한 사람에게 맡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은혜를 따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오늘 날 예수님께서 택자를 위해 오셨다고 말하면 전도가 되지 않고, 선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셨는데도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이 전도를 막고, 선교를 막는다고 하여 진리를 왜곡시켜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큰 피해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지만 여전히 거기에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여 하나님의 것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깎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와의 첫 범죄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부분을 왜곡시킨 데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이었지만,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고 바꾼 거기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가 인류의 보편 죄로 전가되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을 배우되 전 성경으로부터 오직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혹 “이것을 아는 게 뭐가 중요한가? 예수 믿으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믿는 자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것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던 겁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단지 생명을 주시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의 풍성함을 목적으로 가지신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3절은 선택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느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인간이 생명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지식으로 깨우칠 때 생명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거기에 시작되고, 그 시작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을 얻는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욱 풍성히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면, 그 풍성함 역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알아가는 데 있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3절 말씀을 보시면, 여기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단순히 성부만을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일하다’는 말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라고 말씀하기도 하시고,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4:35)고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한 다른 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4:39)라는 말씀도 하시며, 나아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5:7)는 말씀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상은 인간의 헛된 욕망과 망상으로 만들어 진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찾고 구하고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실 뿐만 아니라 참되십니다. ‘참되다’는 말은 하나님께 거짓이라고는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만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결함도, 불완전함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중보자 없이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은 하나님 먼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생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여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멀어졌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단순히 순서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중보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자들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영생’과 ‘아는 것’에 대한 관계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앎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멀리서 바라보듯 그가 무슨 옷을 입었고 어떤 스타일의 머리 모양이고 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앎을 말합니다. 가까이에서 아는 것이며,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 속에서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안다는 표현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표현은 누가복음 1장에 있는 천사와 마리아와의 대화 중 나타난 마리아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천사가 나타나 마리에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하니까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사내를 아는 정도의 깊은 관계. 이것이 바로 안다는 말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뜻입니다.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만남과 교제를 통한 앎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이라고 했을 때 그 뜻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인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제하게 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에서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과 계속되는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겠다고 해!”라고 해서 믿는 그런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급하면 간략하게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생은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이요,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만남과 교제는 단회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도 한번 만나서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인생이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요10:10). 생명과 그 생명의 더 풍성함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섬김으로 생명을 받습니다. 이것이 영생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이 풍성함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인격적인 만남이 계속해서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계속되는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아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럼 왜 이 내용이 중요한가?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것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을 보시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사는 자로 있습니다. 14절 이하 19절도 보시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부분도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는데, 세상 가운데 사는 제자들의 세상 반응은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딪히게 됩니다.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이요, 진리로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의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 없이는 그를 만날 수도 없고, 그와 교제할 수도 없고, 그런 교제 가운데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그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그런 교제 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아는 것,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알아가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는 삶이 아니라, 세상과 동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알고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으로 이 땅에서 시작된 영생은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지식은 세상의 원리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요, 죄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이 되며,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중심이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세상의 원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 되기보다는 분란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에 하나가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분란이 됩니다. 무엇만이 이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까 여기에 집중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좀 더 교회는 현대화에 따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어떤 교회가 성장하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찾고 연구하고 배우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 찬송과 기도가 중심이 될 때도 많습니다. 물론 주의 말씀에 합당한 찬송, 주의 말씀에 합당한 기도는 공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주의 규례입니다. 특히 찬양에 있어 개혁교회가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그것이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왔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조차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다면 찬송도 그분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든 의식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졌다고 할 때 구약 율법에 속하는 내용과 함께 ‘다윗의 규례’(대하8:14)까지도 폐해졌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 연속성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식법 안에서 폐지된 것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규례가 신약에서 확인되는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 지파의 일부를 찬양대로 세워 섬기도록 하는 것, 또한 악기를 사용하거나 손뼉을 치고 춤추며 찬양하도록 하는 것,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만 확인됩니까? 에베소서 5장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도 동일하게 언급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동일한 것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시로 노래하라는 것, 그것이 찬송이 되고, 그것이 신령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대한 이해는 알려도 교회가 받지 않습니다. 성도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보다 사람이 좋은 대로 찬송을 합니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지만, 교회가 나서서 내 뜻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수능을 위한 30일 작정 기도, 이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한데 가정은 어떻겠습니까? 말씀보다, 교리 교육보다 영어, 수학이 우선입니다. 고3만 되면 한동안 주일에 빠져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직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7장 17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할 때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할 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거짓된 신앙이란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가게 됩니다. 거짓된 신앙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있고, 아는 자로 있기 때문에 영생을 시작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시작만 했을 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하는데, 그 일에 있어서는 무지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영생의 시작에 있어서는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지식을 위해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성경의 원리가 다른데도 다른 것을 모르니 세상의 원리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거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십니다. 이때 영생은 결코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도록 할 것을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시점에서부터 영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영생이 더욱 풍성하도록 하기 위해, 요한복음 17장 17절로 말하자면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6장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5-23)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이전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죄의 종일 때는 부정과 불법, 다시 말해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22절을 다시 보시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이 영생이라는 것은 시작도 있고 과정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결과만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과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하나님을 아는 싸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알아 그분을 닮아가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하심을 따라 우리도 거룩해 가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이 싸움에 대하여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는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9) 지금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궁극적으로 완성된 나라에서 말하는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위해 소개하는 것이 뭐냐 하면 손과 발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면 빼어 내버리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하는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아는 것이 곧 믿음이고, 믿음은 영생이고, 영생은 천국이라는 단회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안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분과 만나고 교제함으로 성화되어 가야 할 과정이 있음을 포함하는 내용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았다는 것으로 이 땅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있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등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처절한 싸움이 있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은 우리와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세상 원리와도 싸워야 합니다. 즉 안으로 밖으로 싸워야 할 싸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 속에서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죄로부터 분리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알고 배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기에 참된 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고, 그 권세로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자들에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만민을 다스릴 권세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들을 보존해 달라고 하시지만, 그 사실과 함께 우리는 이런 기도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고 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지식이 없어 망한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지 않도록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여기에 영벌이 아닌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며 영생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