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 함안군 * 전설과 야사 * '함안차사' 를 아시나요?
우리가 대부분이 알고 있는 함흥차사 야사의 경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울분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번 사신을 보냈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가면 깜깜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차사라는 한자를 살펴 보면 差 어긋날 차 使 부릴 사 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함흥차사라는 단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함안차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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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때 절세 미인이 함안(현재의 함안군 함안면에 있는 함안읍성)에 살고 있었는데 이름이 노아였습니다.
이 노아의 아비가, 그만 죽을 죄를 지을 정도로, 아주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묻기위해, 중앙에서 판관이 임명이 되어 내려 오게 되었는데
절세 미인인 노아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자 기생으로 입적을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에서 판관이 내려 오기전에, 기생을 관리하는 형방에게 돈을 주어서 자신이
판관을 모시기로 하고 하룻밤 동침을 하게 되었읍니다. 중앙에서 온 판관은 노아에게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중앙의 판관이나 수령 등이 기생과 동침 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알게 모르게 진행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춘양전을 보면 변사또가 부임을 하면서, 기생들을 찾는데 그때 기생들을 부르면서 소개하는 이가 형방입니다.
이렇게 되자 중앙에서 다시 중앙 판관을 내려보냈지만 노아의 품속에서 떠날줄을 몰랐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 나자 중앙에서는 다시 최판관을 내려 보냅니다. 새 판관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노아는
함안읍성에서 40리나 떨어진 칠원읍성이 있는 칠원 영포역으로 떠나게 됩니다.
당시 관리들은 역을 통해 말을 바꾸고 밥을 먹었기 때문에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곳이죠.
그곳에서 노아는 역장의 딸로 위장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판관이 영포역으로 내려왔지만 영포역 역장의 딸인 노아가 마음에 들어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의 최판관은 다음날 역장의 아내에게 노아가 누군지 물어보니 자신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하룻밤 동침을 하게 됩니다.
최판관은 너무 아쉬어 했고 노아도 아쉬어 하면서, 노아는 실에 먹을 묻혀 판관의 이름을 자기 팔뚝에 새기게 했다고 합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하루 빨리 함안으로 가야하는 최판관은 눈물을 머금고
함안읍성에 도착하여 죄인의 딸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러자 잡혀온 노아는 최판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면서 시 한편을 지어올렸는데 ... 바로?
蘆兒玉臂是誰名 刻入肌膚字字明
寧見洛東江水盡 妾心終不負初盟
노아의 옥 같은 흰 팔에 새겨진 이름은 누구인고
살갗에 깊이 새겨진 글씨가 뚜렷하구나
차라리 낙동강 물이 마르는 것을 볼지라도
이 마음은 끝끝내 첫 맹세에 어긋남이 없소이다
이 내용을 들은 최판관은 판결을 내릴 수 없었고 나중에는 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판관을 그만 두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함안차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함안읍지에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 사진은 함안차사의 배경지였던 함안읍성지로, 현재 읍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함안읍성이 있었던 곳은 함안면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들어오면서 함안읍성이 있었던 곳이 아닌 가야읍에
함안군청 등을 옮겨가면서 함안면으로 강등이 된 곳입니다.
▼ 현재 함안읍성지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고 일부 읍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아래에 보면 아주 큰 돌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곳 몇군데를 제외하면 없는 형편입니다.
함흥차사의 경우 이성계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면
함안차상의 경우 판관들이 사랑에 빠진것이 다르다면 다르죠.
▼ 함안박물관에 있는 함안차사에 관한 미니어처가 있습니다.
▼ 함안차사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현재의 가야읍이 아니라 함안면입니다.
첫댓글 함안차사. 노아의 효심이 대단하지만 안타깝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