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의 말씀(15-1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사실은 다윗을 비롯한 여러 시편 기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었지만, 유다 백성들은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보기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인 애굽에 가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도 세상 어딘가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믿음이 안전하게 잘 살 수 있는 지름길임을 신뢰합니다.
15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16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17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1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15-18)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인 요하난의 일행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먼저 애굽에 내려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여호와의 뜻대로 하겠다고 먼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⑴ 말씀에 순종하라(15)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좋지 않는 말씀도 순종하겠다고 다짐했지만(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은 거부하겠다는 내면적인 마음을 아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문맥에 따라 두 단어를 나눠 옮겼지만, 15절의 원문은 ‘이제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제’는 자주 무엇인가 결정적 인 것을 언급할 때 서두에 놓이고(참조. 2:18; 7:13 등등), 그러므로는 때대로 심판의 말씀을 이끄는 연결사로 사용됩니다(참조, 2:9; 6:18 등등). 권면과 고발의 말씀이 나란히 주어지지만, 후자에 무게가 주어짐을 보여줍니다. 문맥에 따라 읽자면, ‘그러므로’에 의해 권면의 말씀(10-12)에 고발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곧, 요하난 일행이 권면의 말씀을 거절했기에 경고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겠다고 굳게 맹세한 자들(5-6)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경고의 말씀은 14절의 조건문에 연결됩니다. 그들은 거의 일 년 반 동안 계속된 바벨론의 공격으로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의 고통을 뼛속까지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전쟁과 나팔소리와 굶주림이 없는 곳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애굽’이 이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곳이냐 입니다. 애굽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최종 목표였습니다. 바벨론의 애굽 침략은 사실상 시간 문제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눈에는 유다의 모습은 폐허와 혼란만 보였겠지만, 가나안은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버려야 할 곳이 아니라 남아서 재건해야 할 곳이었습니다. 또 이들에게는 파국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지휘관’에게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비극적 운명이었습니다.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이스마엘과 그다랴를 죽인 사건들로 인해서 바벨론을 두려워하고 했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에 내려가서 살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아무리 선지자를 동원하여 기도하고 큰 말로 맹세를 한다 해도 살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에레미야 42장 전체에서 ‘애굽’이란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면 바벨론이 오해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유다가 잘못한 것이 아닌 결백하다면, 그들이 애굽으로 도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은 다시 바벨론 군에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라도 애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유다의 미래 앞날에 관계된 아주 심각한 일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애굽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에 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출애굽 이후 성경에서는 지속적으로 애굽 행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적인 허락이 없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불신이고 불순종이었습니다. 애굽은 탈출하는 곳이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다의 남은 자’의 입장에서는 애굽을 피난처로 여깁니다(14).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청탁했지만, 그가 선포했던 말씀에서 새로운 출발의 토대가 될 신학적 교훈을 끌어내지는 않았습니다. 땅의 전통과 멸망의 근본 원인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부재가 이들로 하여금 떠나야 할 애굽(출애굽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⑵ 불순종의 결과(16-17)
예레미야에게 찾아왔던 ‘유다의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말씀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떠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17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16-17)고 소개합니다.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그 땅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이 기어이 애굽까지 ‘뒤쫓아서’ ‘따라잡아’ 애굽의 보호 아래 살아남겠다던 자들을 삼킬 것입니다. 결국 애굽이 무덤이 될 곳이라고 경고합니다. 요하난 일행을 지칭하는 ‘유다의 남은 자’는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요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의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과 더불어, 내려갈 경우 참혹한 결과의 불순종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의 멸망을 막겠다고 나선 요하난이 유다의 남은 자들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경고의 말씀에 앞서 다시 한 번 조건문이 등장합니다. 내용상 14절의 반복으로, 요하난 일행이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에 머물기로 결정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전쟁과 나팔소리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애굽은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16절). 칼이 두려워 안전한 애굽으로 도망하지만 거기에서 칼에 따라잡히고, 굶주림이 두려워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거기에서 굶주림과 함께 살게 됩니다. 유다 땅에 머문다면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11), 칼과 기근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거기서 칼과 기근에 죽게 됩니다.
17절은 내용상 16절의 반복입니다. 후자가 ‘두려워하는 것의 피할 수 없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두려워하는 것에 의한 완전한 멸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심판의 철저성, 특히 전쟁에 의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전쟁 중에는 칼에 맞아 죽고, 전쟁에서 살아날지라도 양식이 없어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습니다. 이 재난을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벗어나서 남을 자’가 없다. ‘유다의 남은 자’가 이미 혹독하게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비교해서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이들이 애굽으로 들어간다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당신의 ‘노여움과 분’을 부으셨던 것처럼, 당신의 ‘분’을 이들에게 부어 ‘가증함과 놀람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29:18(참조 24:9, 44:12)에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는 그분 정의의 부정적 표현으로, 악한 자들에게 부어집니다.
요하난 일행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여호와의 분노의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해서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파국적 운명이 이들의 운명이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는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유배민들(참조, 29:10, 14)과 달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여호와의 권면과 경고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이기에 귀향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⑶ 결론(18)
실감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18)라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애굽 행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안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몇 달 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한 장면을 본 큰 상처들이 아직 아물지도 않았습니다. 바벨론 군의 공격 앞에서 유다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판자처럼 누어서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큰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잊기 어려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면 초토화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기는 애굽에 쏟아져서 그들은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 없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 신념만 강화하고 내 욕심만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종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이 세상 어느 곳도 결코 안전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경고(19-22)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가졌던 행운을 자신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운을 얻은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한 다른 불행을 보면서 그 사실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율배반적인 본질입니다.
19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20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21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22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줄 분명히 알찌니라(19-22)
‘유다의 남은 자’들은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 행을 고집합니다. 그곳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애굽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을 자신들도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이들의 불순종을 되돌려보려는 마지막 시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쪽으로 굳어진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깨보려고 예레미야는 그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용하는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13-18절의 요약입니다.
⑴ 너희는 분명히 알라(19)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이렇게 결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42장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뒤이어 예레미야의 경고가 나옵니다. 이 네 절은 유다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전제하며 이들의 자기기만적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애굽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여호와의 의지입니다. 이들의 불순종을 이미 알았던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19) 애굽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17)을 알고도 내려간 자들입니다.
⑵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20)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이들이 자기에게 한 약속 앞에 세워 이들의 자기기만적 행태를 고발합니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였다’(20절). 2-3절과 5-6절의 요약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거나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순종을 확약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진하여 예레미야에게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5) 맹세했고,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고(6) 거듭 약속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할 것을 자발적으로 약속한 자들이었기에 이들의 불순종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했습니다.
사람의 반듯한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요하난 일행의 ‘좋든 좋지 않든’ 순종하겠다는 말은 신앙 깊은 이의 믿음의 고백처럼 보였지만, 오만하고 고집스런 이의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이 마음을 속이는 말에 속으실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도 주신 것입니다. 무심코 던지는 습관적인 말들을 점검해봅시다. 마음을 담지 않은 그럴듯한 신앙 언어들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방해하고,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⑶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21-22)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이 삶과 죽음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신 심판의 말씀은 정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면 심판의 말씀은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고했습니다. 애굽에 대한 환상에 젖어 말씀을 듣는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결과를 예견하고 그들이 맞게 될 비참한 결말을 선언합니다.
이미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의 말씀조차 멋대로 이용하려했던 이들을 향해 예레미야가 내린 꾸지람은 추상같은 처방이었습니다.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는 ‘너희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여호와까지도 기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알려달라’해서 ‘오늘’ 알려주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모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1). 이들은 들어가서 머물고 싶어 했던 바로 그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입니다(22). 예레미야의 심판 예고는 내용상 17절의 요약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너희는 분명히 알라’로 시작해서 ‘분명히 알지니라’로 끝납니다. 그런데도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기로 내려가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은 백성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순종의 맹세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순종할 자들이 아니라 자기 계획을 뒷받침 해주는 말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지 못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대다수의 백성들처럼, 그들에게도 칼과 전염병의 재난이 꼭 임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근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자, 완악한 시대를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순종의 다짐이나 고백으로 순종의 행동을 대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그의 말을 따라 순종해 나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