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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공원>에서 22년이 지나 다시금 쥬라기공원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원작소설 두 편과, 영화화된 세 편을 망라하여 쥬라기공원 시리즈를 일관적으로 관통해온 주제라고 하면 바로, 삶과 생명의 통제불가능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제는 본작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는 동시에, 이 통제불가능성을 넘어 우리가 정말로 조우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탐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원이라는 말 자체에서 우리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경계(boundary)입니다. 특히 오래 전에 멸종한 고생물들을 복원시켜 공원의 내부를 구성하는 주요한 컨텐츠로 설정한 까닭에, 쥬라기공원에서 이 공원 안과 밖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경계라는 개념은 곧 인간의 통제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경계가 명확하면 할수록, 이에 대한 인간의 통제욕도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죠.
쥬라기공원의 원작소설과 영화에서도 주요하게 묘사되듯이, 이 공원이라는 경계를 설정한 경계 밖의 이들은, 경계 안의 생명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죠. 심지어는 경계 안에 존재하는 생명은 경계를 설정한 경계 밖의 자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조차도 서슴없이 드러내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제에의 당위적인 인식이 모조리 다 착각이었음을, 쥬라기공원을 소재로 한 모든 작품들 속에서는 핵심적인 결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곤 합니다.
이는 '나'라고 하는 심리적 주체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착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인 경계는 바로 이 '나'라고 하는 인식입니다. 때문에 우리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과 같은 사고, 정서, 감각과 같은 것들을 우리는 쉽게 우리의 소유물처럼 이해하게 됩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경험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우리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기획을 품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경계 안에 있는 것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소망이 바로 독재에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독재에의 소망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니 이 지구 위의 생명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완전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독재는 반드시 붕괴됩니다. 독재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꿈입니다. 생명은 단일화된 원리가 독점적인 지배원리로 구성되는 현실을 결코 스스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의 다양성이야말로 생명이 성공적으로 스스로의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주요한 원동력입니다. 이른 바, 자의적인 단일성의 원리를 통한 통합을 꿈꾸는 독재는 생명의 현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파멸의 원리인 것입니다.
독재는 파멸되어야 할 것이기에 파멸됩니다. 쥬라기공원의 모든 시리즈의 결말이 이 통제에의 의지가 철저하게 붕괴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쥬라기공원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칭해지기까지 하는 티라노사우르스의 성난 포효를 들으며 많은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경계가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이 우렁찬 선언이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너무나도 통쾌한 까닭입니다. 경계는 곧 감옥과도 같습니다. 티라노사우르스의 포효는 통제받는 감옥의 역사가 끝나고, 그 무엇으로도 통제될 수 없는 감옥 밖의 자유의 현실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대한 서사시의 첫 감탄사입니다.
이를 다시 '나'라는 경계의 문제로 표현해보면, 언제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 자신입니다. 즉, 당연하게 통제될 것이라고 가정된 '나'라는 경계 안의 것들이, 그 기획대로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통제에의 의도 자체가 우리의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 통제에의 의도가 우리 자신을 감옥으로 만들며, 그 안에서 우리는 늘 숨막히며, 답답하고, 스스로를 모자란 죄인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무언가 긍정적이고 좋은 것들을 더 열심히 해야, 우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아 비로소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곤 하죠. 이 시대의 모든 자기소진을 야기하는 신경증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감옥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넌 아직도 부족하다."라고 선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독재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나'라고 하는 경계를 설정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설정한 그 경계라는 감옥 속에서 스스로 고통받고 있을 뿐입니다.
경계 안의 것들이 경계 밖으로 나와야, 이 통제와 독재의 현실은 붕괴됩니다. 티라노사우르스가 공원의 담장 밖으로 나와 그 웅장한 생명력을 아낌없이 드러내듯이, 우리의 마음은 '나'라고 하는 경계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티라노사우르스를 공원이라는 경계 안에 가두어 이를 통제하려고 한 기획이 모조리 다 실패하듯이,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경계의 안쪽에 마음을 놓아둔 채, 끊임없이 마음을 통제하고자 하는 소망 또한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소망입니다.
마음은 '나'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나'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되고, 스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당당하게 서있는 티라노사우르스를 보며 그 존엄함에 경탄의 눈길을 보내듯이, 스스로 부족함없이 이루는 마음 또한 우리에게 가장 존귀한 실재를 목격하게 해줍니다.
티라노사우르스는 무엇보다 자유로우며,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 또한 무엇보다 자유롭습니다.
경계 안의 것들은 경계 밖으로 나오는 순간, 스스로가 이미 무엇보다 존귀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이 그 즉시 확인됩니다.
쥬라기월드는 이와 같은 자유로운 생명의 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증언입니다.
원작소설에서 혼돈과학의 이론가로 나오는 아이언 말콤이라는 인물은, 생명을 임의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쥬라기공원의 기획의 필연적인 파멸을 예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진화의 역사는 생명이 모든 장벽을 뚫고 탈출해 나가는 역사입니다. 생명은 장벽을 부수고 자유를 찾아 나갑니다. 생명은 새로운 영토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고통스럽게, 또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지만 생명은 반드시 길을 찾아냅니다(Life will find a way)."
몇 만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바로 그 생명입니다. 우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가 바로 생명입니다.
심리적 주체인 '나'보다 더욱 장대하고, 더욱 존귀하며, 더욱 자유로운 생명이 바로 우리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 2014)>에서도 유사하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이죠. 네. 인간은 반드시 길을 찾아냅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한 '나'라고 하는 주체가 신처럼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생명인 까닭입니다.
생명의 속성은 흐르는 것입니다. 이 속성에 따라 흐르고 만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생명의 결과입니다.
생명은 그래서 곧 만남(encounter)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바로 우리의 모든 역사를 돌이켜보세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척박한 사막을 지나, 광대한 바다를 횡단해,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만나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반드시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길은 곧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그 모든 경계를 넘어 그렇게 우리는 기적과도 같이 만나왔습니다.
경계 안의 것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 경계 밖에서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것이 길(the way)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경계 밖을 향해야 합니다. 경계 밖에 자유와 창조가 이루어지는 온전한 현실이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경계 안을 통제의 의도로 바라볼 때,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경계 안의 것들을 부족하다고 재단하고, 한계를 만들며, 심판하게 됩니다. 경계 안의 것들에 대해 우리가 마치 다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됨으로써, 그 자리에서는 알음알이와 기지(旣知)로 인한 당위적인 뻔함의 감각만이 우리의 삶에 만연하게 되죠. 그 당위적인 뻔함은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당위적인 의무와 과업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이미 주어진 당위적 전제를 수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 답답한 단순반복적 행위와 같은 권태로운 삶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유전자를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고, 운명을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고, 혈통을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고, 신분을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고, 권위를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고, 역할을 당위적으로 따라야 하는 등, 그러한 삶 속에서는 오직 당위적인 수행목록 투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확하게 그 안에서 질식해 죽게 됩니다.
경계 안에서의 당위적인 목록들로 구성된 삶 속에 분명 미지(未知)는 없습니다. 그렇게 미지가 실종된 까닭에, 그러한 삶은 생명력을 잃어 지루하게 화석화됩니다.
반면, 만남은 언제나 미지입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연인을 만나게 된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미지를 향해 정확하게 정향된 증거는 바로 그 두근거림입니다. 이 두근거림은 곧 생명의 심장박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근거림은 생명의 증명 그 자체입니다.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어떤 대사활동이 있든 간에, 생명(life)이 아닙니다. 즉, 삶(life)이 아닙니다.
본 작품의 주인공인 오웬은 랩터들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통제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의 존재를 상호존중하고 있는 섬세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오웬과 랩터가 서로 눈맞추는 장면 속에서 알려지는 것이, 바로 이들이 진정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랩터와 만날 수 없으며, 또한 같은 랩터의 피가 흐르는 까닭에 인간보다는 인도미누스 렉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전제 및 행위가, 이 만남 속에서는 모조리 다 붕괴됩니다. 인간이라는 경계도, 랩터라는 경계도, 그 어떤 경계라 하더라도 진정한 만남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 영화에서는 근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만남은 존재에 대한 모든 당위를 해체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계를 넘어, 모든 존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의 두근거림을 따라, 경계 밖으로 관심의 시선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당위가 해체된 자유롭고 온전한 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게 깨달음이 아니라, 이 온전한 현실의 발견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우며, 스스로 온전하다는 이 발견이, 그대로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의 발견이 됩니다.
경계 안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컨트롤타워는 너무나도 작고 보잘 것 없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초라한 컨트롤타워를 당당하게 두 발로 밟고 서서, 온전한 대지를 향해 크게 울부짖는 티라노사우르스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는 그 우렁찬 선언을 한번 들어보세요. 당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그 존귀한 울림을 결코 지울 수 없이 깊게 가슴에 새기고 집으로 향하게 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첫댓글 와. .쩐다
티렉스 짱, 우리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