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다. 회심과 중생은 구원의 출발이지만, 성화와 영화를 통해 완성된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감정을 뜨겁게 하고, 어떤 종교적 엑스타시를 경험하는 것에 성화의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 성화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읽는 것이다. 특정 주제에 사로 잡혀서 더 큰 그림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구원사역을 펴나가시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서로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그 판단근거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사상은 폐쇄적 예정론 안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고정불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역동적이다. 칼뱅주의 예정론이 조심해야 할 덫은 그것이 가진 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삶과 행동을 근거로 하나님의 택자 여부를 가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언제나 가진 자의 편에 서서 빼앗긴 자들을 택함 받지 못한 자로 치부하는 논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런 관점은 성공주의나 번영신학과 손을 잡게 된다는 점에서 복음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신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키고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접근될 문제가 아니다. 한 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견인의 교리가 논리적으로 배교가능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결국 결과적으로 율법폐기론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견인과 배교의 관계는 논리적 확실성보다는 목회적 차원에서 책임과 신뢰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것이 좋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