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 지독함!
가을만 오면 나는 어김없이 쓸쓸한 공기를 밀고 들어오는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린다. 몸은 사정없이 아파오고 끊임없는 가슴앓이가 계속된다. 생채기처럼 날카롭고 쓰라리지는 않으나 신기 들린 무속인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하다. 전에는 그냥 가을이 주는 서늘함에 혼자 절절하였는데 요즈음은 마냥 씁쓸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요즈음 이러다가 죽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매일을 무겁게 시작하는데 이럴 때 떠나는 여행은 치명적일 것이다. 모든 보이는 것들 때문에, 그것이 살았던 죽었던 간에 그로 인해 숨막혀하며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쓰러질 것이다.
바깥으로 나오니 묵은 시간들의 퇴적물이 소리 없이 공기를 누르고 있었다.
학교진입로 공사를 알아보기 위해 학교를 나섰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길이 좁고 불편하여 학교 뒷산 쪽으로 새로운 길을 내기위해 현장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반시간 정도 걸려 학교뒤편에 다다르니 야산과 주위의 농가들이 스산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을초입의 시골 밭에는 제법 속이 꽉 찬 작물들이 이리저리 서있거나 뒹굴고 있다. 그동안 푸르게 어우러지던 몸뚱아리들이 지나간 영화를 놓치기 싫어하듯 열매들을 움켜쥐고 있으나 반쯤은 발가벗은 몸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이들도 곧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가을햇살이 아직까지는 한줌의 희망이다.
작은 농로를 오르니 이제 갓 출산한 늙은 산부의 쉬고 있는 모습으로 커다란 조선호박들이 쉬엄쉬엄 나를 맞이한다. 풀벌레소리 하나 없어 사방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한데 쑥부쟁이 향기 따라 폐농가의 기둥을 오르는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만 슬픈 적요를 만들어간다.
포도과수원에는 바짝 마른 포도나무가지들이 앙상하게 가을하늘을 지그재그로 그리고 있었는데 소출을 다 떨어뜨린 가지는 몇 개의 페트병들을 달고 있었다. 왠 병이냐는 물음에 포도를 공격하는 말벌들을 퇴치하기 위한 거란다. 학교에서 양봉을 조금해 본 나로서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인즉 빈병에 막걸리를 채우고 거기에다 복숭아 넥타를 으깨어 넣어두면 말벌들이 먹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병 안에도 순간의 배고픔과 유혹에 못이긴 말벌들이 말라 비틀어져, 혹은 술과 함께 범벅이 되어 죽어있으리라.
주위 둔덕에는 무게를 지탱 못해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 아까의 그 커다란 호박들이 펑퍼짐하게 누워있다. 이왕 업진 것이니 편하게 오는 가을이나 맞이하자는 듯 태평한 모습인데 이들은 머지않아 닥쳐올 몸보신용 중탕의 뜨거운 신세를 모르는 듯 하다.
구색이 무슨 상관인가? 바쁜 농사철에 힘쓸만한 젊은 일손도 없으니 대강 비바람만 가려도 좋다는 식으로 지은 슬라브 집과 간단한 조립식 건물에 행정기관은 그들의 영향력을 사정없이 과시한다. 문패대신 번지를 쉽게 찾아주겠다고 생색낸 ‘건물이름 찾아주기 표’가 댕그라니 걸려있다.
진입도로를 위한 길을 매입할 경우 보상이다 뭐다해서 복잡한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밀짚모자를 쓴 노년기의 한 농부가 부근의 마른 개울에서 모래를 퍼 담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정년퇴임하신 반인식 교장선생님이다. 인사를 드리니 많이 반가워하신다. 근처에 집이 있는데 지금은 양봉을 한 100여통 하신다고 한다. 올해는 진드기 병으로 크게 재미를 보지 못 보았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아까 포도밭에 메 달린 병에 대한 설명도 교장선생님이 해주신 것이다. 가을빛 아래 아직은 정정함이 엿보이는데 전보다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시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새로운 진입로가 어디로 나야 좋을까를 예상하면서 교장선생님과 함께 걸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상을 할 경우 누구누구는 어떠할 것이다 라는 이야기부터 지역주민들이 반대하여 철도가 우회하여 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반대한 주민의 수만큼 당시의 국회의원이 아슬아슬하게 낙선한 후일담 등을 듣자니 가을이 조금씩 비켜나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보니 저 높이 구름이 있었다. 그리고 가을은 더욱더 멀리, 그리고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구나! 모두들 서둘러 채비하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이 가을에 소매 잡는 이가 있다면 마냥 떠나야겠다. (2003년 제천에서)
첫댓글 아름다운 가을 풍경 묘사가 재미있어서
한숨에 읽었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20년전의 그때가 조금은 순수했던것 같습니다. 나이먹어도 갈수록 성정은 사납고 급하여 세상보는 눈이 여유가 없으니 아직 많이 부족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