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세주묘엄품’ 다시보기
보리도량의 모든 장엄 펼치는 부처님이 바로 나의 미래부처님
‘세주묘엄’은 삼세간주의 장엄 또는 청법대중 40중의 해탈장엄
화엄성중은 ‘화엄경’의 성스런 대중…삼보 옹호 39류 신중 지칭
‘사바가 곧 정토’ 알게 되면 자신이 세주묘엄 동참함을 알게 돼
일본 동대사 집금강신.
세주묘엄,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시성정각으로 보리도량이 빛나고 있으니, 정각도 장엄이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출현한 영상들도 장엄입니다. 삼종세간이 그대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주들이 미묘하게 장엄한다’는 ‘세주묘엄’은 부처님의 정각에 의한 보리도량 장엄으로서 삼세간주(三世間主)의 해탈장엄임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시성정각하셔서 깨달음의 위덕이 온 법계에 충만합니다. 과거세 비로자나부처님에게서 선근을 닦아 선근바다에서 함께 태어난 동생중의 보살들과 각기 다른 세계에서 다른 업으로 해탈한 이생중의 화엄성중들도 자신이 성취한 해탈문의 경계만큼 불세계를 찬탄하는 게찬을 올립니다.
그리고 땅이나 나무 등과 같이 주변의 환경으로 간주되는 의보도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펼쳐진 것입니다. 사자좌 장엄구에서 광명 따라 출현한 보살들이 변화하여 사자좌를 만들고 각각 그 위에 앉아서, 사자좌를 비롯한 의보의 장엄상을 묘사하고, 또 그 모든 것이 사자좌에 앉으신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한 신통임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사자새끼도 사자인 것처럼 보살자리도 사자좌라 이름 합니다. 사자좌 장엄구의 광명 따라 출현한 보살들이 스스로 변화하여 사자좌를 만들고 그 위에 스스로 앉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지혜가 드러나 다시 스스로 편안하게 자리하기 때문입니다.(청량소)
이처럼 모든 장엄상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한 신통 경계이니, 다양하면서도 하나인 삼세간의 정각도량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처음 보는 이는 대개 이 보리도량 장엄에서부터 놀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경책을 덮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내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의상 스님은 제자들에게 ‘화엄경’의 문문구구가 다 부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총수록, 고기) 문구 하나하나가 다 부처님이므로 경을 보는 것이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고, 부처님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인 자기 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부처님을 보는 마음과 일체 부처님을 보는 마음이 각기 다른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문구구가 일체를 다 거두며 품품이 일체를 다 포섭하니(일승법계도), 한 품 한 문구에서도 화엄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보리도량의 장엄을 보고 듣는 ‘나’는 누구인가? 부분을 보든 전체를 보든, 보는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나는 구제받을 중생인가, 구제받은 중생인가? 나는 세주와 어떤 관계인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놀랍게도 보리도량의 모든 장엄을 펼치시는 부처님이 바로 나의 미래불이고, 나의 몸과 마음 자체가 법성신이라, 내가 바로 삼세간이 원융한 세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장엄한 ‘세주묘엄품’의 교설을 다시 요약해보겠습니다. 80권 ‘화엄경’은 7처에서 9회에 걸쳐 설해진 39품의 원만교입니다.(청량소, 화엄경약찬게) 이 가운데 ‘세주묘엄품’은 처음 법보리도량에서 이루어지는 초회 6품 중 첫째 품이고 5권 분량으로서 경 전체의 서분이기도 합니다.
최근 미황사 천왕문에 모셔진 천왕. 미황사 제공
세주란 글자 그대로 세간의 주인입니다. 세주의 묘엄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삼세간주의 장엄입니다. 세간은 삼세간이니 불보살 세계인 지정각세간과 중생세간과 기세간의 세 가지 세간입니다. 모든 존재가 이 삼세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주묘엄은 삼세간주의 장엄입니다. 화엄법계는 ‘불화엄경’이라는 경의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분명 불보살 세계입니다. 그런데 불보살의 세계이기 때문에 또한 불보살의 교화대상인 중생세계이기도 하고, 불보살과 중생들에 의해 펼쳐지고 의지하는 정토와 예토의 기세간이기도 합니다. 화엄법계는 이 삼세간이 원융하여 본래 다르지 아니하니 삼세간주는 융삼세간불입니다. 이중에서도 보살들과 화엄성중들의 해탈문과 게찬, 그리고 사자좌 장엄구에서 출현한 보살들의 게찬을 통한 불세계 장엄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청법대중인 40중 또는 41중의 장엄입니다. 보살대중(동명중과 이명중)과 39류의 화엄성중이 세주라는 것입니다. 화엄성중이란 넓은 의미로는 ‘화엄경’의 모든 성스러운 대중이겠습니다. 이럴 경우 성중이 세주이고 묘엄은 화엄이니 세주묘엄은 화엄성중이라 바꾸어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중신앙에서는 대체적으로 화엄성중은 삼보를 옹호하는 39류의 신중들을 일컫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세주묘엄은 보살들과 화엄성중들의 해탈문과 게찬을 통한 해탈장엄으로 간주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보현보살을 위시한 동생중인 보살대중들과 이생중인 대자재천왕 내지 집금강신 등 39류 화엄성중들의 해탈문과 게찬, 그리고 사자좌등 의보장엄에서 출현한 보살들의 게찬 내용에서 묘엄의 장엄상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주묘엄품’에서 소개되고 있는 세주들의 해탈문은 총 436개이고 게찬은 총537게입니다. 해탈문과 게찬이 이처럼 개수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자좌장엄구에서 출현한 보살들은 게찬만 하고 그들의 해탈문 명목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자좌장엄구에서 출현한 보살들이 의보보살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점은 무정설법(無情說法)과 무정성불 등의 논란이 있는 점과 연관되므로 추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상의 해탈문과 게찬에 세주들의 해탈경계와 불공덕이 한량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교화되었고 교화될 중생들의 미혹번뇌와 고통도 보이고, 그에 따른 교화방편이자 수행법도 수없이 보입니다.
화엄성중을 포함한 보살들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을 얻게 해주는 수행방편으로 스스로도 해탈하고, 해탈한 보살들의 할 일 또한 중생들을 번뇌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케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보살들의 해탈공덕을 펼침과 동시에 이미 제도해서 지금은 소멸된 중생들의 고통과 그 구제 방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통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고 싶을까. 모든 고통은 생로병사 4고(四苦)에 다 거두어지지만, 개인마다 체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통의 문제는 두 번째 화살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화살이란 스스로 불러들이는 정신적 합병증을 뜻합니다. 예로 몸에 병이 들었는데 병고에 따라 불안·원망 등 갖가지 번뇌 망상으로 그 고통을 키운다면, 스스로 두 번째 화살을 맞아서 회복이 어렵게 됩니다. 생사의 문제만 해도 생사 그 자체보다 생사에 대한 두려움이 생사고통을 초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생사해탈 또한 생사고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생사고통도 생사고통을 받는 이도 실은 자성이 없어서 공한 줄 분명히 알면 곧 생사에서 해탈하게 됩니다. 해탈의 세계는 적정하고 청정하며 평등합니다. 본래 움직인 일이 없어 생사거래의 고통이 없고 복되며 안온한 부처님 세계입니다. 본래 밝은 세계이니 감고 있는 눈을 뜨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꿈속에서 갖가지 고통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다른 처방은 필요 없고 꿈을 깨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고통이 본래 없었던 것임은 꿈을 깨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꿈 깨는 노력의 수행과 꿈을 깨워주는 불보살의 교화방편이 필요하고, 그 일을 도와주는 화엄성중들의 외호가 있는 것입니다.
화엄성중들의 행상과 위(位)에 대해서 ‘통현론’에서는 탁사현법생해(託事現法生解)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다만 중생을 이롭게 해주기 위해서 현상[事]에 의탁해 법(法)을 나타내어 알기 쉽게 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성중 부류인 신(神)과 왕(王)과 천(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정각을 바라보면 그 지혜가 형상도 없고 함도 없되 능히 만유를 아는 것이 곧 신(神)이다. 또 이러한 신성(神性)으로써 행을 따라 중생을 도우므로 행이 헛되지 않으니, 지혜로 항상 삼계에 거처하되 염정을 따르지 아니하여 자재하므로 위를 왕(王)에 의탁한 것이다. 그리고 신통변화가 방소가 없어서 복이 군품에 뛰어나기 때문에 위를 천(天)과 같음에 의탁한 것이다. 곧 행을 따라 두루 남에 행이 헛되지 않으니, 같고 다름이 다 옳고 겉과 내실이 방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신중청’에 보면 집금강신이 실귀신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현신[釋迦化現金剛神]이라고 예경하고 있습니다. 집금강신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고 삼보를 외호하는 신중들이 다 보살들이고 해탈한 분들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해탈장엄의 신통묘용은 무량겁이 찰나인 바로 지금, 온 법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세주묘엄의 장엄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중생들은 이미 제도된 융삼세간불이며 법성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곧 부처님과 함께 머물고 있는 정토임을 보게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이 보리도량을 장엄하는 세주묘엄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초품인 ‘세주묘엄품’에 나오는 주요용어나 법수 등은 대부분 경에서 반복적으로 교설되고 있습니다. 불·해탈·보살·화엄뿐 아니라, 선서·대원·십력·십바라밀·십지 등, 여기서 다 설명 드리지 못한 내용은 이후 거듭 강조되는 해당품에서 차례로 더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주묘엄품’에 이어 제2품인 ‘여래현상품’이 ‘화엄경’ 제6권부터 시작됩니다. ‘여래현상품’은 부처님의 보리도량에 모여든 세주들이 다함께 마음속으로 부처님과 보살경계에 대해 질문을 드리자,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설법을 해주시는 품입니다. 이 교설에 대해서는 지면을 달리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