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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잘 살았는데
춘천에서 소양강 다리를 건너서 화천으로 가는 길을 따라 500m쯤 올라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이 가라메기마을로 옛날에 개울가에 아름드리 가래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마을이래야 거의 김씨네 대소가 30여호가 모여 사는 마을로 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댁이 김 승삼씨라는 분이었다,
처음부터 김 승삼씨네가 잘 산 것이 아니고 원래 김 승삼씨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이 화천 거래리에 살았는데 하도 못살다 보니 사는 자리를 옮긴다고 한 것이 이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도 설었지만 이웃사람들이 모두 잘 대해 주어서 이들에게 휩쓸려서 땅을 얻어서 농사도 짓고 노동 품팔이를 하다 보니 화천 그 좁은 지역에 살 때보다는 한결 돈도 좀 벌게 된 것이니 매일같이 나무를 해서 읍내에 가서 팔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덕으로 승삼이는 잘 자라 나이가 열여섯 살이고 동생인 승필이는 열세 살 때의 날씨가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날도 승삼이 아버지는 대새비 이십리 길로 나무를 하러 가시기에 큰 아들은 날이 추우니 오늘은 쉬시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날마다 다녔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다른 날 같으면 돌아오실 시간인데 오시지를 않아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녁 늦게야 금산사람 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가 나무를 지고 내려오시다가 언덕에서 굴러서 지금 금산리 친구네 집에 모셨는데 생명이 위독하다고 하여 급하게 금산리를 가서보니 아버지는 머리를 다치시고 출혈이 심하여 그날 밤을 넘기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는 아버지의 장례를 모시고 나서 철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나무를 하러 가신다고 하였을 때에 극구말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그래도 돈을 벌어 오시는 바람에 형제는 초등학교나마 다녔는데 이제는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두 형제가 벌어서 먹어야 할 판이었다.
승삼이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하시는 농사일을 거들기를 하여 어렴풋이나마 농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떻게 살아갈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웃집 아저씨가 우전장엘 가신다면서 자기가 기르는 소 세 마리 중에서 한 마리만 끌고 가달라고 하시어서 소를 끌고 생전 처음으로 우전장엘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우전마당엘 가서 보니 소들이 말뚝마다 매여 있는데 일백 마리는 실히 될 것 같았다.
승삼이는 이날 장에서 처음 느낀 것은 장마당에 나온 소의 값이 꽤 비싸다는 것을 느끼고앞으로 소장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잘 살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과 같이 김 승삼이 일어나 보려 하지만 손바닥에 돈이 있어야지 돈 한 푼 없이 일어선다는 것은 나무 등걸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 밖에 되지않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우선은 노동품팔이를 하더라도 덜 먹고 덜 쓰자는 목표를 세우고 돈을 벌게 되면 소를 살 생각을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두 형제는 하루에 한번 하던 나무를 두 번 이상을 하여 팔고 열심히 일을 하여 드디어 승삼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송아지 한 마리를 겨우 사서 먹이다 보니 송아지는 3년 만에 큰 황소가 되어 이를 팔아가지고 송아지 세 마리를 사서 두 마리는 형이 기르고 한 마리는 동생을 주어서 키우게 하였다.
해마다 세월은 잘도 흘러 어느 듯 승삼이 설흔 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자가 되어 있었고 그의 동생 또한 소장사로 돈을 벌어서 형님 댁과는 좀 떨어진 곳에다가 형님 댁만은 못하지만 대문간 옆으로 사랑 두 채를 짓고 안채로는 다섯 간 들이 집을 지으니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을 몹시 부러워하였다.
승삼씨는 자녀를 삼 형제를 두었는데 위로 딸 둘에 외아들을 두었으며 그의 동생 승필씨는 육남매를 두었는데 큰 딸 밑으로 딸 되살이( 홍역을 하다가 죽었다가 살아났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호식 호준 완수 봉오 로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가라메기 마을은 일본 정치 때에는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공출로 거의 다 빼앗아가고 배금으로 콩 깨묵을 주었는데 반은 썩은 것으로 먹을 것이 주렵던 시절이라 그것으로 밥을 해서 먹었다. 그것을 먹으면 냄새도 좋지 않고 먹고 나면 속이 좋지 않았지만 워낙 사람들이 일본정치에 주늑이 들다 보니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하고 살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일제 36년은 우리겨레에게 너무도 많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제 총칼아래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였던가.
그런데 일정시대도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승필씨가 조반을 자시고 대문을 막 나서려는데 일본 주임과 조선형사와 맞닥뜨렸는데 일본 주임은 이날 호식이를 징용에 끌고 가려고 왔는데 호식이가 없자 아버지 승필씨라도 주자소엘 가야 된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자 승필씨는 오늘 장엘 가야되기 때문에 갔다 오다가 주자소엘 들리겠으니 잘 좀 봐달라고 하자 그러라 하고는 그냥 돌아갔다.
그런데 이날 승필씨는 장엘 갔다가 사소한 일로 중개인과 말다툼을 하다 중개인이 술이 취한 상태에서 승필씨를 머리로 들이받아 앞이 두 개가 빠지는 바람에 주자소엘 가질 못했던 것이다.
주임은 그전에도 한 번 승필씨를 불러서는 일본의 전쟁비용을 위해 돈을 내라고 하였지만 자기는 1년 농사지어서 반은 공출로 빼앗아가기 때문에 별도로 돈을 낼 형편이 못된다고 딱 잡아떼자 주임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돌아가더니 다음 날 조선형사가 와서는 승필씨를 수갑을 채워서 끌고가는 바람에 할 수없이 돈을 물고 말았는데 이번이야말로 앞 이가 빠져서 못갔는데 이유없이 사흘 동안이나 유치장에 가두고는 벼 열가마니를 내놓으면 호식이 징용도 끌어가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하고는 풀려났다.
승필씨 뿐 아니라 그의 형님인 승삼씨도 그렇게 협박을 받고는 벼 스무 가마니를 빼앗겼는데 이토록 일본 순사들의 행패는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조선에 해방의 종이 울리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본인들에게 수많은 고통과 압제를 당하던 조선민족은 일시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유엔의 감시 하에 남한만의 5.10 선거를 통하여 정부대통령을 뽑아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를 하였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비록 일본에게 수많은 수탈을 당하였으나 광복이 되고 자유롭게 살 수가 있게 되자 만백성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서울이고 지방이고 간에 상인들은 장사를 하는데 보람을 느끼고 농민들은 비록 소작농을 하지만 노력한 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민주주의 하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 당시에 가라메기 마을에는 서북청년들의 조직이 되어 있었는데 이분네들은 북한출신으로 해방이 되자마자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인민을 위한다면서 지주들이 가지고 있던 농토를 빼앗는 정책을 쓰게 되니 이에 환멸을 느낀 이북사람들은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38선을 넘어 남한 땅으로 넘어와서 공산주의 타도의 슬로건을 내걸고 반공활동의 선봉으로 나선 단체가 되었던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항간에는 공산주의 사상은 누구나 공평하게 살게 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여기에 동조를 해야 앞으로 잘 살 수가 있다는 선전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제에 쪼들려 너무도 못살던 사람들이 모두가 공평하게 산다고 하니 이제야말로 좋은 세상이 온 모양이라면서 처음에는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북청년단이며 38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그들이 노동자농민이 함께 잘 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로 오죽하면 공산주의가 싫어서 38선을 넘어왔겠느냐며 이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 돌자 돌아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남노당의 뿌리가 되어 여수순천반란사건과 재주 4.3사건을 일으킨 무리로 발전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가 마을마다 조성이 되자 부락청년들은 반공대열에 서게 되고 사농동의 마을에도 청년들이 공산주의를 타도한다는 각오 하에 반공단 조직을 하였는데 사농동의 청년단장은 김 승필씨의 큰 아들인 김 호식이 맡게 되었다.
김 호식은 신장도 180m가 넘을 정도로 신체 건강한 청년으로 축구를 즐겨 중학교 때부터 선수로 활약을 하여 같은 또래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호식이가 청년단장을 맡게 되니 날마다 서북청년단장과도 가까워져서 호식이 집안에서 타작이라도 하게 되면 단원들이 와서 온종일 타작을 한 뒤에는 막걸리를 나누며 단합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사북청년단장은 언제부턴가 호식이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자기 나름의 걱정거리를 해결해 보자는 생각에서 그를 유심히 살폈다.
서북청년단장은 북에서 넘어 올 때에 연로하신 부모님은 모셔오지 못하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데리고 넘어왔다.
동생은 북한에서 넘어 올 때만 해도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북에서 넘어 온지 어느 듯 3년이 지나다 보니 어엿한 숙녀로 자라게 되고 마땅한 자리가 있으면 시집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을청년과 서북 청년들간에 축구시합이 열리게 되어 춘농고 운동장에서 한창 경기를 한 다음에 점심을 호식이네가 준비를 하여 모두가 즐겁게 먹고는 헤어질 때에 서북청년단장은 뒤로 빠져서 호식이와 같이 다시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이날 서북청년단장은 막걸리를 나누면서 이제는 장가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넌지시 호식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호식이는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말을 하였다.
“ 형님이 중신을 해주신다면 한번 생각을 해볼게요.”
“ 그래. 그게 정말이란 말이야.”
“ 그럼요. 남아일언이면 중천금(重千金)이란 말도 있지 않아요.”
“ 하하. 그래. 그. 말이 맞는 말이지.”
일이 이리 되자 그날 저녁에 서북청년단장은 동생인 영옥이를 불러서 조용히 말을 하였다.
“ 영옥아. 네 나이 벌써 열여덟 살이 되었지. 나는 네가 나이를 한살 먹을 때마다 걱정이 생겨서 잠이 잘 오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이 마을에 부자 댁의 아들인 청년단장 김 호식이 내 마음에 들어서 그를 매부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네 의향을 물어보고자 한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을 해서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을 하고 오빠에게 알려주면 좋겠다.”
그러자 영옥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빠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으니 오빠가 오히려 어리벙벙하게 되었다.
“ 오빠가 그런 생각을 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사실은 오빠에게 미리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하였어요.”
“ 뭐야.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다구.”
“ 오빠에게 죄송한 말씀인데요. 사실은 호식이 오빠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 그랬다구. 나는 네가 행동이 좀 느린 편이라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역시 여자라서 남자하구는 다른 모양이구나.
“죄송해요. 오빠. 아무튼 그 문제는 제 의견일 뿐이고 오빠가 일 처리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 하하하. 네 의견을 들으려다가 너에게 내가 당하였구나. 하하하.”
그러기 전에 호식이는 서북청년단장의 댁을 두어 번 방문했다가 그의 동생인 영옥이와 눈이 맞아서 암암리에 몇 번 만나게 되고 정이 들어 장래를 염두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다가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것으로 믿은 서북청년단장은 안심을 하고 느긋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전에 승필씨는 아들 장가를 일찍 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으니 친구 중에 벌써 손자를 안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승필씨는 어느 날 부터 색시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주인애비로부터 윗샘밭의 문정리 이씨 댁의 둘째딸이 잘 자란다는 소릴 듣고는 그 아이를 며느리로 삼고자 어른끼리 만나 서로가 좋다는 말이 떨어지자 승필씨는 이를 부인에게 알렸다.
호식이 어머니는 이를 아들인 호식이게 귀띔을 해주자 어머니의 뜻밖에 말씀을 듣고는 낯빛이 변하였으니 그에게는 한창 연애 중에 있는 영옥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둘은 이미 헤어질 수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호식이는 바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큰일 났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머니 저에게는 영옥이라는 애를 벌써부터 알게 되어 장차 결혼까지 약속을 한 처지이니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윗샘밭의 아가씨와는 결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주셔요.”
그렇지만 이 집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란 밥하고 집안 일하는 것밖에 없으며 모든 일은 아버지가 결정을 하셨다.
“ 그러니 어떻가니.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 댁 어른들과 약조를 하고 내일 모래는 사주를 보낼 참인데.”
호식이는 일이 이렇게 꼬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를 못했는데 이리 되었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영옥이와는 영영 인연을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부터 각오를 해야 했으니 엄하신 아버지의 뜻을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호식이는 이날 밤에 술을 잔뜩 먹고는 서북청년단장 집으로 달려가서 그 말을 하려 하였는데 단장은 안계시고 영옥이만 있어서 그를 데리고 늘 다니던 강가로 나갔다.
" 오빠 이 밤중에 웬 일이래요.“
영옥이는 늘 대하듯이 예쁜 모습으로 다가섰지만 호식은 할 말이 없어서인지 그냥 영옥이 얼굴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 오빠 왜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지만 호식이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를 않은 체 영옥이를 끌어안고 놓지를 않았는데 얼굴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 왜 그래 오빠. 응 말 좀 해보란 말이야.”
“ 영옥아. 너와 나는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아버지가 나를 장가를 보내려고 내일 모래 사주를 보내신단다.”
그 말을 들은 영옥이의 낯빛이 순간 흙빛으로 변하며 눈물을 보이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흑흑 느껴 울기 시작을 하였다.
“ 오빠 나 어떻게 해야 돼. 응 .”
영옥이는 호식이 품에서 떨어지지를 않았으나 호식이는 얼마 후에 영옥이를 뿌리치고는 비척비척 홀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호식이는 축구를 좋아해서 일요일이면 춘농고 운동장에서 축구연습을 하였다.
관내 중학교간 축구대회는 4월말 춘고 운동장에서 열리는데 이날은 각 급 학교에서 응원을나온다고 하였는데 웬일인지 여학교 적십자부원들도 여기에 동원된다고 하였다.
적십자단원인 영옥이는 호식이 오빠가 축구대회에 출전을 한다고 해서 식전부터 마음이 들뜬 상태였으니 그날이 호식 오빠와는 세 번째의 만남이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이번 축구대회에 나간다면서요.”
“그런데 그 소리를 언제 들었는데.‘
“ 오빠에 대해서 소식을 곧바로 전해주는 전령이 있어요.”
“ 희햔한 일이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 오빠 이번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 내가 선물 하나 해도 돼요.”
“ 뭔 선물. 난 그런 것 바래지 않아. 단지.”
“ 단지라니요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아요.”
“ 그 답은 네가 알고 있을 걸.”
“ 오빠도 참 내가 어떻게 오빠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 이리 와봐. 이래도 내속에 안 들어갔단 말이 나와.”
“ 몰라요. 오빠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어요.”
축구대회에는 응원단들이 양쪽 스탠드에 가득 모여 앉았는데 적십자 대원들은 본부석 한쪽에 마련된 천막 속에서 대기를 하였다.
시합은 곧 시작이 되고 춘천중학교와 춘농 양 팀이 서로 자웅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서로가 골문 앞에서 각축을 벌리고 있을 때였는데 느닷없이, 춘 중 선수가 공을 찬다는 것이 헛발질을 하여 춘농 팀의 호식이의 정강이를 걷어 내차는 바람에 호식이 그 큰 덩치가 공중잡이로 땅으로 떨어졌는데 고만 일어나지를 못해서 적십자회원들이 들것을 들고 뛰어가서는 환자를 들것에 싣고는 천막 안에다가 눕혔는데 왼쪽 무릎이 굉장히 아프다고 하였다.
그때 영옥이는 요도액을 무릎에다가 바르려고 하자 상옥이라는 애가 너는 한쪽으로 비키라며 영옥이가 들고 있던 약을 제가 바른다고 하면서 눈을 감고 있는 호식이 오빠를 깨우는 것이었다,.
“ 오빠 눈 뜨셔요 예.”
그러자 호식이 오빠는 번히 눈을 뜨더니 영옥이를 보고는 물을 떠다 달라고 하자 상옥이가 “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떠 올테니까” 하였다.
가만히 보니 상옥이는 호식오빠에 대해서 추파를 던지는데 호식은 상옥이에게는 눈짓도 하지를 않으니 싱옥이는 나중에는 영옥이의 질끈 동인 머리를 뒤로 잡아다니는 바람에 영옥이의 몸이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그때 다른 적십자 회원들이 상옥이에게 일제히 눈총을 주면서 너 때문에 우리가 지금 다른응원단원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면서 너는 우리 팀에서 빠지라고 하자 상옥이는 나중에는 할 수가 없는지 슬금슬금 천막에서 빠져나갔다.
“ 쟤가 언제부터 호식 오빠를 좋아했냐.”
“ 호식오빠가 쟤의 어디를 보고 좋아하겠냐.”
“ 야. 호식 오빠는 상옥이를 본체도 하지 않는데 저 혼자 짝사랑을 하는 거야.”
“ 어쨌거나 영옥이는 주의를 단단히 해야 하겠다. 까딱하면 상옥이 한 테 호식오빠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호호호.”
영옥이는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으니 자기는 호식 오빠에 대해서 한마디도 이렇다 저렇다 말한 바가 없는데 어느 결에 소문이 친구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영옥이는 영문도 모르고 호식 오빠를 졸지에 잃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호식 오빠가 곧 잔치를 한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영옥이는 그 소리를 듣고는 며칠간이나 혼자 울고 지났지만 좀처럼 분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나마 오빠에게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마음 뿐 그의 몸은 이불 속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드디어 호식이의 잔치 날이 오자 호식이네 집에서는 앞마당에 재일을 치고 부엌에서는 국수틀을 가마솥에 안치고는 국수를 누르기 시작을 하였는데 마당에서는 국수를 먹겠다는 하객들이 자꾸만 밀려들고 있었다.
호식이 잔치는 호화롭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하루 종일 국수틀은 놀 수가 없었다, 앞마당에 잴을 치긴 하였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바깥마당까지 상을 차리고 대접을 하게 되자 왜 우리상은 바깥마당에다 차리느냐면서 상을 둘러메치는 젊은이도 있었지만 이날이야말로 동네 사람들에게는 마음껏 먹고 마시는 날이었다,
호식이는 장가를 갔으면서도 영옥이 생각으로 인해서 신부와 별반 말을 하지 않자 신부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지만 일체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며느리는 시집을 오던 날부터 남편에게도 잘 하였지만 시부모님을 얼마나 정성스레 모시는지 시부모님은 날마다 며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그런데 호식이는 장가를 든지 한 달 만에 부모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국방경비대로 입교를 한 것이니 마음에 없는 장가를 갔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호식의 어머니는 아들이 군에 입대하는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눈물부터 흘리셨으니 큰 아들이지만 항상 어린애로 취급을 할 정도로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호식이가 군에 입대를 할 때만 해도 좌익분자들이 설치는 바람에 우리 사회는 안정이 되지를 않았다.
한편으로는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국방군을 조직하게 되자 너도 나도 입대하려는 청년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여들어 쉽사리 국방경비대에 입교하기도 쉽지 않았다.
호식이 처인 며느리는 시집을 온지 돌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 아이가 승필씨의 맏손자가 된 것이다.
며느리는 집에서 뿐 아니라 대소가 댁에서 농사일이 바쁠 때에는 그 댁에 가서 김도 매주기도 하고 점심밥을 해서는 밭머리까지 이고 가서 땀 흘리는 일꾼들에게 일일이 수건을 적셔주며 땀을 닦고 점심을 자시라고 하니 일꾼들은 이 댁의 며느리가 참 잘도 한다는 소문이 이웃마을까지 퍼져나갔지만 군에 간 호식은 일 년에 잘 해야 두어 번 아내를 찾을 뿐이었다,
신랑인 호식은 아내가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도 그에 대해서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를 대하는 아내의 입장은 무엇이란 말인가.
호식의 아내는 그렇다고 한 번도 신랑에 대해서 원망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속으로야 얼마나 원망을 하고 싶었을 것이며 밤저녁에 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잘 때 과부도 아니면서 독수공방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었으랴!
1948년 5얼 10일 마침내 우리나라는 유엔의 감시 하에 5.10 총선거를 실시하고 동년 8월15일 역사적인 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으니 이날을 기해서 대한민국이 새롭게 탄생을 하였다.
지난날을 회고해 볼 때에 우리나라는 36년간의 긴 세월동안을 일제탄압을 받으면서 살다가 1945년 8월15일을 기해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가까스로 자유를 찾게 되고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수시로 38선을 월경하여 이 나라의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지서의 순경을 살해하는 등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끊이지를 않았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한국은 바로 국방경비대를 조직하였다.
김 호식은 국방경비대 모집에 1차로 합격을 하여 입대하였는데 체구가 커서 그런지 그의 모습은 당시로서는 멋진 군인이었다.
몇 년 사이에 그는 하사까지 오른 용감한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7연대의 보급 반에서 근무를 하다가 그해 5월 달에 새롭게 수색대원으로 발탁되어 전방의 적진 침투의 루트에 대해서 방어를 하는 훈련을 수시로 받았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그날 새벽을 기해서 남침을 감행하였으니 새벽 잠결의 포소리를 들은 38선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날이 새면서 울린 포소리는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의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 밤새도록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새벽부터 포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모두가 불길한 감을 가졌는데 아침에서야 국군의 노상방송을 통해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남침을강행하였다는 말에 행길엘 나가보니 사북면의 고탄 사람을 위시해서 신동이며 옥산포 사람들이 비를 쫄쫄 마지면서 행길 가득 피란을 내려오는 것을 본 사농동사람들도 입은 옷 그대로 소양강다리를 건너서 피란길에 올랐는데 승필씨네 식구도 우선은 시내에 딸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봉의산에 포탄이 떨어져 먼지가 풀썩 나는 것을 보고는 조반을 먹다가 말고는 집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가 떼걸이로 가는데 광판리 쪽으로 가야 산다면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승필씨는 소장사를 오래 해서 여러 군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우선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피난을 하기로 하고 팔미리를 지나 덕만이고개를 넘기 전에 솔골이라는 곳으로 들어가니 지형이 아늑하여 우선은 피란을 해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승필씨가 소를 사기 위해서 두어 번 왔다간 곳으로 아는 중개인 엄씨네 집을 찾아가니 엄씨는 반색을 하면서 어찌 오셨느냐고 하였다.
지금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우리나라를 침략을 하였는데 그것도 모르느냐 하니까 여기는 외부소식을 잘 모른다면서 어차피 여기를 오셨으니 함께 지나시자면서 사랑방 하나를 내주셨다.
그 집에서 일주일동안을 살다 보니 염체가 없기도 하지만 양식 때문에 이제는 춘천으로 죽으나 사나 들어가야겠다고 하자 엄씨는 더 있다가 가시라고 하였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그 집을 나서니 피난갔던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중이었다.
집에 가면 먹을 것이 있는데 굶어서 살수는 없으니까 전부 들어가는 것이다
.춘천 시내는 곳곳마다 인공기가 휘날리고 중간에 인민군을 만나게 되니 무섭기도 하고 섬뜩하였다.
그동안 전국에 걸쳐서 남로당 출신들은 양민을 수도 없이 학살하였으니 제주 4.3사건이며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이 모두 그들의 만행이었다.
승필씨네가 오후 늦게 집으로 들어가니 울타리 옆은 모두 구덩이를 파놓았는데 인민군이 파놓은 방어용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호식이어머니는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면서 때가 되어도 식사를 하지 않고 날마다 근심걱정으로 날을 새우는 때가 많았다.
그 당시야말로 아들이 군인으로 갔다는 말도 못하는 처지에 어느 누구에게도 군에 간 아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으니 날만 새면 인민군이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옥살이를 하던 중에 마침내 석 달 만에 아군이 갑자기 춘천에 입성을 하였으니 시민들은 모두가 행길로 나가서 입성하는 국군을 향하여 만세를 불렀다.
6.25가 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던 때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도 모자라 아래로 아래로 후퇴를 하다가 낙동강 전선에 교두모를 칠 때에 유엔 16개국이 참전을 하고 특히 미군의 폭격기는 하루도 수백회 이상 인민군의 진지를 향해서 폭격을 가하니 대낮에도 인민군은 꼼짝을 하지 못하고 독안에 든 쥐 모양이 되니 그 전쟁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진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진격을 거듭하다가 뜻하지 않게 중공군이 피리소리를 앞세워 유엔군을 기습 하였으니 수많은 유엔군이 동사를 하는 끔찍한 참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중공군에게 밀려 서울을 다시 빼앗기었다가 찾아야 하는. 악전고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우리의 희망과는 관계없이 휴전조인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야말로 우리의 통일은 더 멀어지는 결과가 되고 있다.
승필씨네가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고 아군이 북진을 계속하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 호식 어머니는 아침을 자시고는 김장밭에다가 파씨 파종을 하려고 나가시는 중인데
우체부가 편지봉투를 하나 들고 나서는 호식 어머니를 보고 여기가 승필씨네 댁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우체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호식어머니를 보고 말을 하였다.
“ 김 호식 중사를 어머니가 맞으시지요. 피란을 잘하고 오셨는지요. 그런데 어머니 놀라지 마셔요. 방금 제가 전해드리는 서류는 사실은 이 댁의 아드님이 전사하셨다는 통지서입니다.”
어머니는 우체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들으신 듯 우체부의 입만 바라보고 계셨다.
“ 어머니 놀라지 마셔요. 김 호식 중사가 전쟁 중 적의 총탄에 맞아서 순직을 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정확하게 들으신 어머니는 순간 감짝 놀라시더니 금시에 울음보를 터트리시었다.
“ 우리 아들 호식이가 죽었다구요. 그게 정말이란 말이유. ”
하시던 어머니는 금방 눈을 허옇게 하시고는 쓸어지였으니 충격의 말을 듣자마자 까무리치신 것이다. 그 소리를 안에서 들으신 승필씨가 마당으로 급히 나오시다가 아내가 쓰러지는 것을 보시고는 일으키시면서 우리아들이 죽다니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냐 하시면서 엉엉 우시었다.
그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모여들고 어떻게 어떻게 하면서 호식어머니를 껴안아서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자 번히 눈을 뜨시던 호식어머니는 우리아들이 죽었다니 이럴 수는 없어 하면서 방바닥에서 몸부림을 치시었다.
승필씨야 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아버지도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셨다.
이날 동네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지를 않고 밤늦도록 두 분을 위로하여 드렸으나 호식 어머
니는 울음을 그치지를 않으셨다. 두 분이 호식이를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일정 때 아주
못 살 때에 아들을 낳고 보니 어미가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젖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서
아이는 삼대처럼 빼빼 말라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엄마는 만날 눈물을 흘리면서 키웠다,
나중에 아버지가 소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서 잘 살게 되긴 하였지만 엄마는 큰 아들을
볼 때마다 어렸을 때가 떠올라 늘 걔 앞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늘 가슴을 옥죄었다.
그 아들이 장성해서 늠름한 군인이 되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영영 이 세상에서는 보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이런 슬픈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호식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를 않자 호식이가 날마다
즐겨 찾는 강가로 나가셔서는 “호식아” 하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6. 25가 나자 친정으로 갔던 며느리는 부모님이 피란길에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바
로 시집으로 와서 보니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목매에도 잊지 못할 낭군이 전사를 한 사실
을 알게 되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이불을 뒤 집어 쓰고 통곡을 하였다,
“ 당신이 가시다니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아들은 이제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 소리를 배
우는 중인데 아빠가 돌아가셨다니 진정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대답 좀 해보라구요"
이때 큰 시누이가 와서 올케의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를 하자 며느리는 형님을 붙들더니 “
형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해요“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생각하면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우리의 군인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이 되었으며 민간인이나 유엔군 또한 헤아릴 수없이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 하셨으니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를 철저히 응징하는 것밖에는 이분들의 슬픔을 달랠 길이 없다.
그리고 3년이란 세월이 훅닥 지나가던 어느 날 호식이 부인은 아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는 앞으로 찾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호식 어머니는 그 며느리를 붙잡지 않고 눈물만 흘리셨다,
그후 부터 손자를 아들 보듯이 키우시던 호식 어머니는 아들이 간지 5년 만에 한 많은 세상을 등지시고 말았으니 만약에 아들이 살았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여섯 살배기 손자는 멍하니 할머니의 상여가 떠나가자 상여 앞으로 뛰어가더니 “할머니 나도 데리고 가” 하면서 우는 바람에 상여꾼들이 앞으로 나가지를 못한 채 모두가 상여소리를 내다가 울음들이 복받쳐 상여를 세우고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들을 하였다.
상여소리가 얼마나 구슬펐던지 해님마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빗방울을 뿌려대니 진흙밭을 밟듯이 상여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김 두 수 22 4.29 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