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生의 作品은
내가 아직 현직에서 물러나기 훨씬 전의 일이니까 어언 20년도 넘는 일일 듯싶다.
어느 날 나는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한 통은 직장으로 그리고 다른 한 통은 집주소로 온 것인데 두 통이 다 수필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직장에서 받은 것은 수필 원고의 마감이 박두한 지각청탁서였다. 학년 말의 성적처리 등 몇 가지 밀린 일들이 산적해있어서 시간에 쫓기는 때에 일이 한 가지 더 덮친 셈이다.이처럼 시간에 쫓기면서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모처럼의 청탁을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치르는 곤혹이었다.
쓰느냐? 마느냐?
팽팽한 저울대처럼 쉽게 결정을 못 내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편지 한 통이 또 책상 위에서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1년간 지도를 맡았던 한 여학생이 보낸 것이었다. 방학 동안의 안부를 물은 다음 전 해 가을에 열렸던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의 '문학의 밤' 행사에서 나의 강연을 듣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었다. 그 강연에서 내가 문학의 바탕을 과수원의 토양에 비유한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이 없었는데 석 달이나 지나서야 편지로 적어 보낸 것이 우습기도 하다.
그 학생이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것도 처음 안 일이다. 안부편지를 쓰는 동안에 문득 생각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먼 지방에서 온 학생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소를 보니 번지만 조금 다른 같은 동이다. 몇 집 간격이 아닌데 방을 얻어서 동생과 자취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 행사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고장에서 열린 '백제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것이었다. 나는 그날 프로그램에 올라있는 정식으로 초빙된 연사가 아니었다. 청중의 자격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가 즉석에서 떠밀린 억지춘향이 연사인 셈이었다.
연단에 오르라느니 못 오른다느니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떠밀리는 쪽이 지고 만 것이다. 하나의 조그마한 해프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아무 준비도 없이 많은 청중 앞에 나서는 것은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나는 그때 수필로 문단의 말석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사회자가 제시한 것도 '나의 수필'이라는 무난한 연제였다. 이 지방에서는 아직 수필로 등단한 사람이 나 밖에는 아무도 없는 터였다. 그리하여 희소가치 때문에 청중들은 아마 그럴듯한 강연을 기대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 내가 직접 가꿔온 과수원 얘기를 화두로 삼았다. 나의 과수원의 주 종목은 사과였다. 그 당시 참고서적을 들쳐보니 재배의 기본은 열매를 따려고 서둘지 말고 먼저 토양을 기름지게 하라는 것이었다. 과일을 소담스럽게 가꾸려면 먼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전정, 적과 농약 처리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것은 과수원에 매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열매를 거두는데 조급한 듯싶다.수필을 포함해서 모든 장르의 문학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라고 나는 주장했던 것이다. 문학의 토양인 사상을 기름지게 하는 것은 사색과 독서와 대화이며, 문학도 결국은 인간의 사상의 결실이 아니겠느냐고.
20분짜리 미니 수필 경연은 이렇게 끝난 것인데 행여 문학 강연이 엉뚱하게 원예 강연으로 빗나가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비유가 재미있었다고 하니 다행한일이다. 어쩌면 수필보다는 과일에 더 매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부터 나는 종종 문학과 과수를 결부해서 생각하는데 그 연유가 될 만한 몇 가지 사연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전에 이 지방에 '과수원(果樹園)' 이라는 시 동인지가 나온 일이 있는데 과수원이나 과일을 시의 소재로 삼은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제자 시인도 그 무렵 이곳 문화원 전시실에서 시화전을 연 일이 있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 액자 하나를 들고 와서 내 방에다 걸어주고 갔다.
과일을 좋아하는,
사과를 좋아하는
누이의 얼굴은 과일이다.
짧은 시에 큰 사과 하나가 소담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지난날 고등학교 교사시절 동료이었던 K형도 ‘과수원’이라는 릴케의 시집을 끼고 다니며 구절마다 감탄하여 마지않던 기억이 난다. 6·25동란 직후니까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나의 과수론(?)은 은연중 이런 추억들에 연유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나도 글짓기에 조금 관심을 갖던 터여서 이것저것 적어서 K형에게 넘겨주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K형도 시상이 떠오르면 몇줄 적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K형은 이내《현대문학(現代文學)》을 통해서 화려하게 등단을 했다.
K형의 시에는 다분히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사색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존주의' 니 '부조리' 니 하는 낱말들이 처음으로 나돌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당시 6·25 동란이라는 동족상잔의 냉혹한 전쟁을 치른 직후여서 문학의 물결도 더욱 그런 방향으로 흘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K형은 나의 글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손으로 쓰는 문학보다 머리로 쓰는 문학이 더 깊이가 있다는 말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원래 체질적으로 사변적(思辨的) 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활 속에서 체험한 테두리 안에서 겪은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의 글이 '사건중심' 의 글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분은 소설 같은 수필이라고 평해 주었다.
두 분의 말이 다 나의 글이 내면속으로 파고드는 깊이가 없다는 고언(苦言)일 듯싶다. 비유해서 말하면 인삼, 녹용 같은 자양분이 없고 기껏 기호식품인 과일 정도라는 말일 것이다.
한평생 범속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어쭙잖은 글을 화제로 삼아준 것만 해도 과분한 일이다.
여학생의 편지는 끝부분에서 삶에 대한 어떤 고뇌 같은 것을 비치고 있었다. 이것이 아마 한 걸음씩 인간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일는지도 모른다. 다정다감한 젊은 시절에는 한두 번쯤은 다 겪는 일이 아닐까. 이 여학생은 말미에 회신을 당부하는 구절에 힘을 주고 있다. 이런 계제에 나에게 어떤 깊이 있는 조언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긴장이 되었다.
지각 청탁의 원고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여전히 팽팽한 저울대 같은 마음속에서 학생에게 적어 보낼 회신을 궁리해 본다. '과일은 조물주의 작품이고 문학은 사람의 작품이다. 그리고 고독은 젊은이의 작품이다……. 라고 말이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몇 마디 중얼거려 보았다.
20년도 훨씬 넘는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애면글면 글 같은 글 한번 써 본다고 다짐해 왔다. 그러면서도 버젓한 수필 한 편 못 남긴 채 많은 세월을 방황만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소생의 작품은 '방황'인 셈일까 싶어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2003)